#27화. 兎死狗烹(토사구팽)
동굴 안은 짐승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과연 검은 나비들은 난 자리를 귀신같이 지운다더니 그 말이 맞는구나.’
운선은 눈앞에서 원수를 알아낼 기회를 놓친 것이 여간 속상하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영이 앉아 있던 곳을 한참 들여다보았으나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우영은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었는데 등 뒤로 어떻게 암기를 날릴 수 있었을까?’
여전히 뒤통수에 볼록 나와 있는 혹을 만져보며 운선은 생각에 잠겼다. 감쪽같이 흔적을 지운 것을 보니 부단장이 우영을 데려간 것은 확실했다. 그럼 그가 암기를 던진 것일까?
운선은 금세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우영을 죽일까 봐 부단장이 쫓아온 거라면 기절만 시킬 것이 아니라 숨통을 끊어놨을 것이다.
그럼 또 다른 인물? 허나 제3의 인물이 있었다면 자신이 아닌 우영을 노린 것일 터. 굳이 동굴 앞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부단장을 살려둘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우영을 노리고 왔으나 죽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을 찾을 수 없자 운선은 명치 끝이 답답해 옴을 느꼈다.
‘일단 용문파로 가서 일행과 합류하자.’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돌아서려 할 때였다.
“어?”
운선이 왼손으로 짚고 있는 동굴 내벽의 요철이 왠지 글자처럼 느껴진 것이었다. 글자가 파인 깊이는 얕았으나 습한 동굴에서도 자획이 깨끗한 것으로 보아 새긴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목…불…….”
한 자 한 자 소리를 내며 읽다 보니 정확하지는 않았으나 대충 글자가 추측되었다.
“목불……, 목…불…식정?”
운선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자신의 키 높이에 쓴 글자이므로 설 수 없는 우영의 의도는 아닐 것이다. 그럼 누구인가?
‘나를 죽일 생각이 없는, 오히려 도와주려 했으며 내가 다시 이곳에 올 것을 알고 있던 사람……. 구해 준 사람?’
순간적으로 객잔의 두 사람이 떠올랐으나 영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아무리 우영이 불구라지만 부단장을 상대하려면 일류 고수여야 할 텐데 노인은 촌부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운선은 글자를 쓴 사람은 도저히 예측하기 어렵겠다 싶어 이번에는 왜 이런 말을 전했는가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목불식정……. 내가 뻔히 보면서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두 눈을 감고 한참을 생각하던 운선은 드디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악랄한 도평의 얼굴, 은근슬쩍 자신을 두고 떠난 형진. 지금 가장 의심할 수 있는 주변인은 그들이었다. 제발 자신의 기우(杞憂)이기를 바라면서 운선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동굴 밖을 나섰다.
‘내가 변을 당한 것으로 알 테니, 일단 몰래 잠입하여 동태를 살펴야겠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도였으나 어쩐지 마음이 우울해지는 운선이었다.
일부러 천천히 움직이다 보니 용문산의 어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주변이 어둑어둑해진 후였다. 초입부터 경계가 삼엄하여 쉬이 접근하지 못하다가 번뜩 도평이 오는 길에 했던 말이 생각났다.
“큼큼, 내가 계정 출신이라 용문파에 대해 빠삭하게 알지.”
곽도평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사형제들에게 주절주절 자랑질을 늘어놓았다.
“용문파에 일반인은 절대 들어갈 수 없다는데 어찌 잘 안답니까?”
사제 한 명이 눈을 말똥말똥 뜨며 물어보자 도평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경계가 삼엄하여 절대로 들어갈 수 없지. 심지어 계정의 유지인 우리 아버지도 용문파 장문의 허가서를 매번 받아야 했다니까? 하지만 내가 누구냐?”
도평은 바위에 한쪽 발을 올려놓고 가슴을 탕탕 쳤다.
“현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한 마장 못 되게 걸어가면 토끼 모양의 바위가 나오거든? 그 아래쪽에 용문파 제자들만 안다는 개구멍이 하나 있지.”
운선은 개구멍을 드나들었다는 말을 뭘 저렇게 자랑스럽게 말하나 싶어 속으로 비웃었지만, 지금에 와 생각하니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변변치 못한 줄로만 알았더니, 도움이 될 때가 있구나.’
운선은 문을 지키는 제자들에게 띄지 않도록 최대한 몸을 낮추고는 도평이 주절거리던 그 개구멍을 찾아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기암절벽 바로 위에 거대한 바위 토끼가 웅크리고 앉은 것이었다.
‘참으로 웅장하구나.’
밤이라 그 아름다움을 다 담지는 못하였으나 달빛에 어스름히 비친 절벽의 모습은 가히 절경이었다. 운선은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곧 바위 아래 틈을 더듬기 시작했다. 워낙에 수풀이 많이 우거져 육안으로는 절대로 찾기 어려웠기에 등을 잔뜩 구부려 직접 손으로 만져볼 수밖에 없었다.
‘어? 여기다!’
곽도평이 또 거짓말을 했나 싶어 실망할 때쯤, 운선은 손바닥이 아래로 툭 꺼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렇게나 얽히고설킨 수풀을 헤치고 나니 딱 운선의 몸뚱이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보였다.
그 안이 어두컴컴하고 음습하여 들어가기가 심히 꺼려졌으나 다른 대안이 없었다. 운선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조심스럽게 머리부터 구멍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코끝에 비릿한 흙냄새가 일시에 들어왔다. 목덜미로 스멀스멀 무언가 기어가는 느낌이 들어 간지러웠으나 망설이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어디로 연결된 걸까?’
도평이 말해준 것은 딱 구멍의 존재까지였으므로 통로의 끝이 어딘지 몰라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어야 할 텐데, 괜히 엄한 곳으로 튀어나와 용문파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가 모인다는 사실이 이미 들통난 모양입니다.”
그때, 운선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의백?’
엎드린 채로 기어 오던 운선의 머리 위쪽으로 미세한 진동이 울렸다. 용문파 대청 바로 밑인 것 같았다.
‘낭패로군.’
대청에 모인 이들은 각 문파의 장문들인 듯했다. 귀가 예민한 그들이었기에 섣불리 움직이다가는 정체가 탄로 날 것 같아 운선은 더 나아가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선운검파도 오는 길에 기습을 당하였습니다. 다행히 고수를 만나지는 않아 사상자는 많지 않으나 피해가 막심합니다.”
차분하고 은은한 목소리의 여인은 선운검파의 장문 소소정이었다. 사 년 전 급사한 언니를 대신하여 사문의 일을 맡아오다 최근에서야 장문에 올랐다.
“고대산파는 워낙에 다수가 움직여 피해가 없었습니다만 이렇게 마교 놈들에게 꼼짝없이 당하다니 참으로 통탄할 노릇입니다.”
은퇴한 매월선생의 뒤를 이어 장문이 된 고근동은 성급한 성격답게 앉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발을 쿵쿵 굴렀다.
“두타공파의 제자들이 가장 피해가 크지 않습니까? 앞서 도착한 제자 하나가 이미 죽었다 들었소만.”
고근동이 앞에 차려진 술상에서 술을 한잔 가득 부어 마신 후에 조양을 돌아보았다. 그의 질문에 조양은 한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린 제자들을 먼저 보낸 자신의 불찰이었다.
“그, 검신의 제자는 어찌 되었소?”
묵묵히 듣고만 있던 황석파의 장로 고유생이 입을 떼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조양에게로 쏠렸다. 사실 그것이 가장 궁금한 질문이었다.
“찾고 있으나 아직…….”
조양 대신 옆에 있던 형진이 대신 말을 받았는데 침울한 그의 표정에 모두 더는 묻지 못하고 침만 꿀꺽 삼켰다. 무림 맹주인 조양의 얼굴을 봐서 대놓고 티를 낼 수 없었으나 탐탁지 않아 하는 표정만은 숨길 수 없었다.
“분명 정보가 새어 나간 것 같습니다. 각 문파의 통신망을 점검하고 입단속을 철저히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간자(間者)가 있을 수 있으니 사문의 제자들을 잘 살피도록 합시다.”
“고대산파는 절대로 마교와 내통할 리 없소!”
조양의 의견에 화가 치밀어오른 고근동이 다시 한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 년 전에 그 처참한 일을 당해놓고도 마교와 내통하는 놈이 있다면 찢어 죽여도 모자랄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아우의 죽음만 생각하면 온몸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았다.
“그리 흥분하실 일이 아닙니다. 맹주님의 말씀이 매우 옳습니다. 우리 중에 내통한 이가 없다면 절대로 각 문파의 이동 경로를 알 수 없어요.”
소소정이 고근동을 쳐다보지도 않고 새침하게 말하자 그는 자신이 의심받는 것 같아 더욱 화가 치솟았다.
“아니 그럼, 고대산파만이 기습을 당하지 않았으니 우리가 범인이란 말이오?”
그가 또 발을 동동 구르자 대청의 지붕이 흔들릴 정도로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 따지면 용문파가 제일 의심 받을 만하지요.”
조양의 바로 옆에서 얼굴에 잔뜩 구름이 낀 이가 조용히 말을 받았다. 바로 용문파의 장문 조상원이었다. 그는 장문들의 언성이 높아질수록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문천에서의 일을 오대산검에 알린 것도 본인이요, 이 모임의 필요성을 역설한 이도 그였기 때문이었다.
“일단 진정들 하십시오.”
조양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조상원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무슨 죄가 있겠냐는 위로가 담긴 행동이었다. 그의 의도를 눈치챈 조상원이 가볍게 묵례를 하자 고근동도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자리에 다시 앉았다.
“일단 두타공파는 두 시진 전에 본교의 제자 강운선을 찾을 수색대를 보냈습니다. 각 문파에서는 이후 마교의 움직임을 살필 정찰대를 산 아래에 파견하고 우리는 이곳에서 그들의 침입에 어떻게 대응할지 의견을 나눠봅시다.”
조양의 말을 들은 운선은 몹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산을 넘어오는 길은 외길이었다. 만약 두 시진 전에 수색대를 보냈다면 자신과 마주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의백, 왜 거짓말을…….’
조양은 계속 말을 이었다.
“오늘 밤은 일단 정찰대 인원만 마무리하고 내일 아침 다시 만납시다. 그때는 본격적으로 각각의 임무를 나누고 대응책을 의논하겠습니다.”
고대산파를 제외하고는 각 사문에서 데리고 온 이들이 십수 명에 불과했기에 서너 명씩 차출하여 정찰대를 꾸리기로 했다. 다만 두타공파의 제자는 사망자 한 명에 중상자가 둘이었으므로 인원에서 제외하기로 하였다. 의논이 끝난 후에 누구도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 길을 달려와 여독이 풀리지 않았으므로 모두에게 휴식이 필요했다.
“맹주님, 이곳은 용문파의 본진이니 제가 아이들을 일러 철저히 방비하겠습니다. 두타공파에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대청에서 모든 문파의 이들이 떠나자 조상원이 조양에게 허리를 깊게 숙여 사과하였다.
“무슨 말씀을. 저희 아이들이 부족하여 크게 당한 것이니 조장문의 잘못이 아닙니다.”
조양은 자애로운 표정으로 그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게다가 편히 쉴 수 있도록 가장 안채에 거처를 주셨으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렇게 한참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다가 마침내 조상원이 자리를 떴다. 조양은 제자 형진과 의논할 것이 있다며 마지막까지 대청에 남았다.
‘더는 버티기 힘들 것 같은데…….’
운선의 다리가 서서히 저렸다. 같은 자세로 뻣뻣하게 있으려니 점점 임계점에 다다른 것이었다.
“그래, 운선은?”
조양은 혹여 누가 들을까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물었다.
“객잔 점소이의 말을 믿고 주운이 흑의인들의 흔적을 따라갔으나 어려울 듯싶습니다.”
아까까지만 해도 목이 메어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던 형진이 사뭇 경쾌하게 말을 이었다.
“도평이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네요.”
조양은 제자의 뻔뻔함에 혀를 내두르며 매서운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그 아이가 운선을 해칠 것을 알고 있지 않았느냐?”
“네.”
형진은 스승에게는 더는 숨길 수 없어 솔직히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사부님께서 적당한 때에 그 아이를 버리라 하셨으나 주운 때문에 여간 힘들지 않았습니다. 하여 도평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지요. 다행히 눈치가 영 없는 아이라 자기가 먼저 나서 일을 처리해주지 뭡니까?”
형진은 도평의 어리석음이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무공의 자질도 없는 아이를 가장 아꼈던 이유는 자신이 쉽게 수족으로 부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그 덕을 톡톡히 본 셈이었다.
“그런데 사부님, 이미 사 년 전에 경전을 얻으셨는데 왜 지금까지 그 아이를 보호해주신 겁니까? 사문에서 받아주지 않았다면 벌써 저세상으로 갔을 아이 아닙니까?”
무엇이 못마땅한지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스승에게 형진이 물었다. 그는 스승의 오지랖 때문에 그동안 운선을 챙기는 일이 퍽 불만이었다. 게다가 늘 도끼눈을 뜨고 자신을 감시하는 주운 때문에 더 짜증이 났다.
만약 조양이 운선을 거두지 않았다면 경전의 행방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운선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흑접쌍살은 그의 한쪽 팔만 병신을 만들었지만 다른 놈들은 사지를 다 잘라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참으로 어리석구나.”
조양은 혀를 끌끌 차며 제자를 고까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 아이를 진작에 내주었다면 내 명성은 뭐가 되느냐? 검신은 나의 의제가 아니더냐? 나를 믿고 온 이를 내친다면 누가 믿고 따르겠느냐?”
그뿐만 아니었다. 조양은 태을신교가 쳐들어온 그 날, 이서문과의 대화에서 눈치채고 말았다.
“또한 마교 놈들은 그날 이 녀석을 데려가려고 하더구나. 아무래도 같은 동족이 마음에 걸린 것이겠지. 서문이 멍청하게 흥분하지 않았다면 이 아이를 뺏길 뻔하였다. 하여 전면에 내세웠으니 그 보답으로 몇 년은 지켜줘야 하지 않겠느냐?”
무미건조한 말투로 조곤조곤 대답하는 조양의 목소리에 운선은 소름이 쪽 끼쳤다. 그토록 다정했던 의백이 사실은 그가 만났던 그 어떤 악당보다도 추악하고 악랄한 자인 것이었다.
‘목불식정…….’
운선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흙바닥으로 뚝뚝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누구냐?”
등 쪽에서 강한 충격이 가해지더니 순식간에 운선의 몸뚱어리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놀라서 동그래진 그의 눈앞에는 험악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조양의 얼굴이 있었다.
***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가 죽으면 토끼를 잡던 사냥개도 필요 없게 되어 주인에게 삶아 먹히게 된다는 뜻으로, 필요할 때는 쓰고 필요 없을 때는 야박하게 버리는 경우를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