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目不識丁(목불식정)
“쯧쯧, 영 못 쓰게 되었구나.”
성곤은 오랜만에 만난 제자를 아주 못마땅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안 찾은 건지, 못 찾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퍽 긴 시간을 보지 못해서인지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좌영의 소식은 들었다. 아까운 재주였어.”
성곤이 천장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했다. 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 누구에게서 비롯되었을까 고민하는 것도 같았다.
“교주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목이 메어 갈라진 목소리로 우영이 용서를 빌었다. 하반신이 마비되어 무릎을 꿇지는 못했으나 허리를 완전히 숙여 바닥에 엎드렸다.
제자의 굽은 등을 무심히 바라보던 성곤은 이내 얼굴에 심술궂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럼 죽어야지.”
“네……”
우영은 교주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식구에게는 한없이 베풀고 품어주지만 일단 그 밖으로 나가면 먼지만큼의 잔정도 남기지 않았다. 교주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부터 우영은 지금, 이 순간이 자신의 마지막임을 알았다.
그는 운선이 떨어뜨린 단검을 다시 손에 들었다. 그나마 스스로 죽을 수 있는 선택을 준 것이 사무치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형이 죽은 이후로 그의 삶은 죽은 것만 못했다. 자신들을 속인 청의인에게 복수하고픈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불구가 된 몸으로는 어떤 희망도 꿈꿀 수 없었다.
“부디 만수무강 하십시오.”
우영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교주의 표정이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은 후, 민첩한 동작으로 단검을 목에 찔러 넣었다. 죽을 때만큼은 최대한 고통을 줄이고 싶었다.
“이곳이 맞지요?”
도평이 숨을 헐떡거리며 형진을 돌아보았다. 그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객잔의 외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어제는 그저 초라한 객잔인 줄 알았건만, 밝을 때 보니 그 기괴함이 한층 더 드러났다. 무너진 기둥과 온갖 벌레가 들끓는 꼴이 흡사 폐가와 같았다.
“역시, 수상한 곳이 맞습니다.”
“들어가 봅시다.”
도평의 말에 십분 동의하며 형진이 앞장을 섰다. 주운은 운선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무런 성과가 없을까 두려움이 앞섰다. 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뒤를 따라나섰다. 이미 월심이 검집에서 나와 그녀의 손에 들려있었다. 불시에 공격이 있더라도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세 사람 모두 얼굴에 긴장감이 역력했다.
끼이이익.
귀를 긁는 소리를 내며 객잔의 문이 열렸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풍경이었으나 다른 시선으로 보아 그런지 훨씬 더 음산한 느낌이었다.
“계십니까?”
형진이 부러 큰 소리를 내며 주인장을 불렀다. 객잔의 구석구석으로 소리가 퍼져 나갔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역시, 도망간 모양이지요?”
도평은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형진에게 속삭였다. 그는 뭔가 일이 쉽게 돌아간다는 생각에 한층 신이 났다. 객잔의 두 놈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그들의 수작으로 몰아가면 그뿐이었다. 아예 도망갔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어제 그분들 아닙니까?”
병약한 모습의 소녀가 졸린 눈을 비비며 2층에서 내려왔다. 귀찮아하는 표정으로 느릿느릿 걸어오는 그녀를 보는 세 사람은 맥이 딱 풀려 버렸다.
“아니, 그렇게 매몰차게 떠나 놓고는 왜 다시 오셨습니까?”
소녀는 아무 경계심 없이 그들 바로 앞까지 걸어와서는 크게 하품을 했다. 큰 착각을 한 것 같다는 생각에 형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일행을 잃어버려서 혹시 이곳으로 다시 오지 않았나 했습니다.”
도평은 당황하여 침을 꿀꺽 삼켰다. 어째 이들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아무래도 틀린 일인 것 같았다.
“혹시 어제 만난 병색이 완연한 청년을 보지 못했나?”
주운은 간절한 마음으로 소녀에게 물었다. 그녀 역시 객잔에 대한 의심은 거의 푼 상태였으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 질문이었다.
“어? 이 예쁜 언니는 어제 못 본 것 같은데…….”
소녀는 활짝 웃으며 주운의 모습을 이쪽저쪽 훑어보았다. 그녀의 미모에 대해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비실비실 웃었다.
“…….”
성질 같아서는 한 대 쥐어박고 싶었으나 주운은 애써 마음을 억눌렀다. 조금이라도 단서가 될 말을 해 준다면 더한 불편함도 참을 수 있었다.
주운의 표정을 살피던 소녀는 그녀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음……. 그 오라버니는 딱 봐도 밤을 넘기기 힘들었는데 지금쯤 픽 쓰러져 죽지 않았을까요?”
“뭐?”
주운은 더는 참지 못하고 소녀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어리다고 봐주려 했건만 여간 얄미운 것이 아니었다. 소녀는 주운보다 머리 하나 정도 키가 작았으므로 바닥에 겨우 발끝이 닿을 만큼 몸이 붕 떴다.
“사저!”
형진은 주운이 혹시라도 소녀를 다치게 할까 봐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두타공파의 제자가 약자를 괴롭힌다니 절대로 안 될 말이었다.
“어제 뵀던 주인장은 아니 계십니까?”
겨우 소녀의 옷깃에서 주운을 떼어낸 형진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이 소녀에게 더 말을 붙여봤자 별 소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빨리 용문파로 돌아가 수색 인원을 늘리는 방법이 나을 것이었다.
“주인장은 노인이라 아침잠이 없어요. 새벽에 산책하러 나가셨는데 아직 안 돌아오셨죠.”
“그렇다면 우리는 이만 가겠습니다.”
형진은 주운의 등을 토닥이며 손을 잡아끌었다. 주운은 소녀를 노려보며 주절주절 욕을 뱉고 있었는데 결국 형진의 힘에 못 이겨 문밖으로 질질 끌려갔다.
“아 참! 한 무리의 흑의인이 새벽에 이 앞을 우르르 지나가던데 그 얘길 하시는 건가?”
도평마저 찝찝한 기분으로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소녀가 손뼉을 ‘탁’ 치며 중얼거렸다. 주운은 소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되돌아와 그녀의 멱살을 다시 잡았다.
“그래서? 그들이 운선이를 데려갔느냐?”
“음……. 글쎄요. 그것까지는 잘……. 그런데 언니 참, 얼굴은 선녀 같은데 성격이 좀 과격하네요?”
“이…….”
주운은 눈웃음을 살살 치며 자신을 조롱하는 소녀가 짜증 났으나 차마 때리지는 못하고 주먹만 꽉 쥘 뿐이었다.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게.”
형진은 주운 대신 사과하며 재차 물었으나 소녀는 심드렁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다예요. 그러게 내가 묵고 가라고 했건만. 팔아주지 않을 거면 이제 가세요.”
주운은 뺨을 때려서라도 제대로 된 목격담을 듣고 싶었지만 형진이 말리는 통에 더는 채근할 수 없었다. 문을 나설 때까지 소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세 명의 모습이 객잔에서 완전히 멀어지자 소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주운이 너무 애타 하길래 하마터면 행방을 알려 줄 뻔한 것이었다. 살짝 실마리라도 줄까도 싶었지만 두타공파 놈들의 얼굴을 보자 곧 마음을 다잡을 수밖에 없었다.
‘언니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지.’
소녀는 한 번 더 문단속한 후, 총총걸음으로 다시 2층에 올라갔다. 그녀의 방에는 얼굴에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운선이 죽은 것처럼 누워있었다.
“설아, 그들은 갔느냐?”
“네, 할아버지. 어때요? 차도가 있나요?”
윤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침상 곁에 다가와 운선의 맥을 짚었다. 자신이 처방한 약으로는 연명하는 수준이지 근본적인 치료는 어려웠다.
“이런 몸으로 어찌 그리 긴 시간을 견뎠는지…….”
윤설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그의 기가 막힌 인생 역정에 절로 눈물이 났다.
“할아버지, 이 사람을 살릴 방법은 단 하나예요. 아시죠?”
윤설은 노인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할아버지가 절대로 쉬이 인정을 베풀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자신의 부탁이라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람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운선의 얼굴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정말 많이 닮았구나.”
“네?”
뚱딴지같은 노인의 말에 윤설이 되물었으나 그 대답을 듣기도 전에 운선의 손가락이 까딱까딱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보세요, 정신이 좀 들어요?”
천천히 눈을 뜬 운선은 예상치 못한 두 인물의 등장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마지막 기억은 자신을 향해 울부짖던 우영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왜 이 객잔에 돌아와 있는 것인가?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운선이 노인을 바라보며 더듬더듬 묻자 노인은 의자에 깊숙이 기대어 앉으며 대꾸했다.
“새벽녘에 흑의인, 한 무리가 지나다니길래 뭔 일인가 싶어 주변을 살폈지. 한참을 돌아다니다 보니 웬 동굴 앞에 자네가 쓰러져 있길래 업어왔을 뿐이네.”
“감사합니다. 어르신.”
운선은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일단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인 듯싶어 고개를 크게 조아리며 연신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런데 어르신, 혹 다른 이의 흔적은 없었습니까?”
자신이 동굴 밖에 나와 있었다면 우영은 못 보았을지라도 흑접영 부단장은 목격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노인은 그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며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오라버니, 비록 고비는 넘겼으나 병세가 심각하니 치료를 받는 것이 좋겠어요.”
윤설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운선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제가 꽤 괜찮은 의원을 아니 그곳에서 한동안 요양하면 십여 년은 거뜬히 버텨낼 수 있을 거예요. 저희와 함께 가요.”
운선은 어제부터 자신에게 조건 없는 호의를 보이는 소녀가 사뭇 이상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스승의 밑에서 자란 데다가 여인의 보살핌을 받은 적이 없던지라 윤설의 제안에 마냥 마음이 따뜻해졌다.
“감사합니다. 소저. 그러나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어 치료에 전념할 수가 없습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이만 돌아가야겠습니다.”
운선은 두 사람에게 여러 번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하고는 침상에서 내려왔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것이 곧 쓰러질 것 같았으나 빨리 동기들 곁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이보게, 내가 소싯적에 무공을 약간 배운 적이 있어 하는 말이네만…….”
묵묵히 운선을 지켜보고만 있던 노인이 드디어 입을 뗐다. 운선은 원래도 예의가 발랐으므로 노인이 말을 걸자 다시 침상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 내상은 일반적이지 않으니 당분간은 운기조식을 할 때 시시때때로 기공을 열어 호흡하고, 되도록 사지의 혈맥은 닫아 놓게. 만일 무리해서 기를 운용하면 단전에 울혈이 쌓여 목숨이 위험하니 주의하시게.”
운선은 그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더니 바닥에 무릎을 대고 큰절을 올렸다.
“어르신, 비록 사정이 있어 이렇게 떠나지만, 곧 다시 찾아와 이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해 주신 말씀은 꼭 명심하겠습니다.”
노인은 민망한지 재빨리 운선의 팔을 잡고 그의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무심한 그여도 잿빛이 되어버린 그의 오른팔을 보니 마음이 불편하였다. 노인의 양 눈썹이 구부러지더니 미간에 주름이 가득 잡혔다.
“이 환단을 가지고 가세요.”
윤설은 잰걸음으로 밖에 나갔다가 오더니 웬 붉은 주머니를 가지고 와서는 운선에게 주었다. 운선이 열어보니 손톱 크기만 한 검은색 환약이 다섯 알 들어있었다.
“발작이 일어나려는 징조가 보이거든 하나씩 드세요. 아마도 다음 겨울까지는 넉넉한 양일 것입니다. 인연이 닿는다면 그때 다시 만나요.”
운선은 마주 잡은 윤설의 손이 한없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 소녀를 따라나서면 혹시 살길이 열리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생기긴 했으나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다음 겨울까지면 충분하다. 배후를 밝혀 원수를 갚을 수만 있다면 이깟 하찮은 목숨에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한나절만 더 쉬어가라는 윤설의 부탁을 기어이 거절하고 운선은 객잔을 나섰다. 해가 제법 기운 것을 보니 이미 한낮이 지나도 한참 지난 것 같았다.
‘일단 우영의 흔적을 찾아보자.’
어제와는 달리 몸이 개운한 것이 마치 정상인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운선은 모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객잔에서 멀어졌다. 기억을 더듬으며 우영을 만났던 그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할아버지, 정말 도와주지 않을 거예요? 태을신공을 2단계까지만 익혀도 저 정도 화기쯤은 잡을 수 있잖아요.”
윤설이 뾰로통한 얼굴로 쏘아붙이자 성곤은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만약 저 녀석을 다시 만난다면 그때 생각해 보마.”
***
성곤은 왼쪽 어깨에 메고 나온 우영을 부단장의 무릎 위에 툭 하고 던져 주었다.
“화기(火氣)는 얼추 잡았으니 이제 발작은 없을 것이다. 불구의 몸은 고칠 수 없으니 네가 옆에서 잘 보필해야 할 것이다.”
부단장은 그의 단주를 꼭 끌어안은 채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교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는 교주에 대한 고마움과 죄책감으로 수없이 바닥에 머리를 찧었는데, 얼마나 세게 박았는지 이마가 터져 피가 묻어나왔다.
“네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 제자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한 내 죄인 것을……”
거기까지만 말하고 성곤은 소매를 크게 휘둘러 뒷짐을 지고는 다시 왔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오른쪽 어깨에는 의식이 없어 축 늘어진 운선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의 모습이 멀어져 점이 될 때까지 부단장은 바닥에 엎드린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
*** 목불식정(目不識丁):
아주 간단한 글자인 ‘丁’ 자를 보고도 그것이 ‘고무래’인 줄을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아주 까막눈임을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