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25화 (25/209)

#25화. 悟徹(오철)

“운선아! 도평아!”

형진은 목이 터져라, 두 사제의 이름을 불렀으나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뿐이었다.

‘아무래도 틀린 것 같다.’

태을신교가 기습을 했고 두 사람만 남았다면 결과는 뻔했다. 그래도 혹여 요행으로 도망치지 않았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도 조금씩 사라졌다.

주운은 운선을 혼자 둔 일에 대한 자책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비록 순수한 의도로 옆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를 지키겠다는 다짐만은 진심이었다. 평생 스승 외에는 누구에게도 애착이 없었던 주운은 처음 느끼는 끔찍한 슬픔을 감당하기 버거웠다.

“여기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기습을 당한 장소입니다.”

주운은 멀뚱히 서서 형진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최악의 상황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가지 않겠습니다.”

“네?”

주운은 단호한 표정으로 형진의 팔을 세차게 내려쳤다. 확인하지 않으면 운선이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만 같았다.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절망적인 현장을 직접 보고 싶지 않았다.

“사저, 확인해보기 전에는 모릅니다. 비록 무공이 높지는 않으나 영민한 아이들이니 필시 방도를 찾았을 것입니다.”

주운의 표정으로 의중을 짐작한 형진이 침착하게 그녀를 설득했다. 물론 그 역시 희망적인 전망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최악의 상황이라도 시체만은 찾아주고픈 마음이었다.

“대사형!”

형진은 반가운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도평아!”

다리를 심하게 절며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이는 곽도평이 틀림없었다. 형진은 너무나 감격하여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운선은? 운선은 어디 있느냐?”

잠시나마 기대를 했던 주운은 도평의 옆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다짜고짜 도평에게로 뛰어가 그의 어깨를, 있는 힘껏 잡았다.

“악!”

“도평아, 왜 그러느냐?”

사제의 외마디 비명에 형진이 주운을 억지로 떼어놓았다. 그녀가 꽉 잡았던 도평의 팔에서는 진득한 피가 잔뜩 배어 나오고 있었다.

“다친 것이냐?”

도평은 애처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운이 당장이라도 죽일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어 한껏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고는 더듬더듬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대부분 대사형 일행을 따라 움직였으나 우리의 무공이 약한 것을 눈치챈 마교 놈 몇이 달려들었습니다. 저는 필사적으로 운선을 엄호하였으나 도저히 그들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운선은 또 발작이 도져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형진은 차마 도평을 나무랄 수가 없었다. 그의 팔에 난 깊은 자상은 그가 얼마나 운선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는지 보여 주는 증거였다. 탓을 하려면 두 사람을 남겨두고 떠난 자신에게 해야 했다.

“죽……, 죽은 것을 보았느냐?”

주운의 눈은 어느새 새빨개졌다. 덜덜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형진은 지난 사 년간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를 보았지만, 이토록 감정이 얼굴에 드러난 모습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

“사저…….”

형진은 달래려는 마음에 그녀의 팔을 잡으려 했지만 주운은 손이 닿기도 전에 팔을 빼고 말았다.

“시신은 보지 못했습니다.”

도평은 주운이 자신에게 덤벼들까 봐 두 손으로 방어 자세를 취하며 대답했다.

“앞장서라!”

“네?”

주운이 당황해하는 도평의 어깨를 움켜쥐고 앞쪽으로 그를 집어 던졌다. 형진이 막을 새도 없이 그는 땅에 데굴데굴 굴렀다.

“운선이를 버리고 온 곳까지 앞장서.”

아까까지는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직접 눈으로 그의 시신을 확인할 때까지는 절대로 믿을 수 없었다.

‘그 아이라면, 명이 질긴 그 아이라면 이렇게 허망하게 가지는 않을 것이다.’

주운이 들고 있던 검까지 꺼내려 하자 도평은 어쩔 수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주운에게 잡혔던 팔이 너무 아파 머리가 빙빙 돌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상처를 깊게 내지 말걸.’

아까 대사형이 부르는 소리를 들은 도평은 문득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격전을 벌이다 어쩔 수 없이 도망친 것으로 지어내려면 어디 한 군데라도 상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서 있는 어귀를 돌아나가기 전, 도평은 눈을 딱 감고 왼팔에 스스로 자상을 낸 것이었다.

‘저 여자는 분명 나를 의심할 텐데, 어쩐다.’

두 사람을 이끌면서도 도평은 이 위기를 어떻게 빠져나갈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처참한 운선의 시체를 마주할 것을 생각하니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주운이 자신에게 책임을 물을까 봐 걱정되었다.

“어?”

도평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광경에 어리둥절해졌다. 분명 십여 구의 시체가 널려있어야 할 들판에 그 어떤 싸움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풀잎에 묻은 핏자국만이 그 장소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분명 이곳이 맞는데…….”

당황스럽기는 형진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쓰러뜨린 적만 해도 대여섯은 되었다. 운선은 용케 살았다 치더라도 그들의 시신은 다 어디 있단 말인가?

“아직 죽지 않았다…….”

주운은 손으로 가슴을 탕탕 치며 중얼거렸다. 아직 운선이 살아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병세가 위중했으므로 최대한 빨리 행방을 찾아야 했다.

“그들이 기습했다 했지요?”

주운은 멍하니 도평을 바라보고 있는 형진을 불러 물었다.

“네.”

“이상하지 않습니까?”

“네?”

“저도 같은 길목을 지났으나 어떤 공격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기습의 목적이 명확했다는 것, 분명 두타공파가 지날 것을 알고 매복한 것이 아닙니까?”

주운은 턱에 손을 괴고 골똘히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두타공파가 이곳을 지날 것을 알고 있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이리 정확한 경로와 시간을 맞춰 기습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도평은 소리가 날 정도로 무릎을 세게 치며 형진에게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그 객잔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이 산속에 객잔이 있는 것도 이상하고, 주인장도 점소이도 장사를 하고픈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형진은 그의 말이 일리가 있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주운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곳으로 다시 갑시다.”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객잔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2단계의 첫 장을 연마하자 거짓말처럼 통증이 가라앉았다. 곧 숨이 끊어질 것처럼 헐떡이던 운선은 차츰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우영 역시 한층 평온한 얼굴이 되어 앉은 자세가 훨씬 편안해 보였다.

“역시…….”

그러나 우영은 두 번째 장의 구결을 읊으려는 운선을 막았다.

“더 읽어봤자다.”

“뭐?”

방금까지도 구결을 읽어달라 사정사정하던 우영이 아니었던가?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운선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상은 나도 모른다.”

우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운선을 그토록 애타게 찾으면서도 계속 마음에 걸리던 것이 있었다. 그는 막상 책의 내용을 알게 되더라도 자신이 연마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 봐 늘 두려웠다.

“1단계는 누구의 도움으로 연공한 것이냐?”

우영은 새삼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찌 들으면 울먹이는 것도 같았다.

“태을신공은 절대로 독학할 수 있는 무공이 아니다. 심지어 너는 내공을 연마해 본 적도 없으니 더 그랬을 테지. 누가 알려 주었느냐?”

운선은 자신도 모르게 적우의 이름을 꺼낼 뻔하였지만, 다행히 정신줄을 잡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쨌든 같은 사문에 있던 이들이니 적우에게 해가 되면 되었지 전혀 이롭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누군들 무슨 상관이냐? 또한, 너는 태을신교의 제자이니 구결을 해석하는 방법도 알 텐데 뭘 망설이는 것이냐?”

운선의 질문에 우영은 예의 특이한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교주님은 일곱 제자 모두에게 신공을 가르치지 않았지. 서문과 적우, 그리고 내 형님만이 사사 받았다.”

우영은 형님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자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에게 좌영은 유일한 가족이자 세상 전부였다.

“그나마도 형님만이 2단계를 익힐 자질이 있었는데 교주님은 쉬이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분은 늘 신공의 위험성에 대해 당부하며 조금이라도 몸에 이상이 있을 시에는 연마하게 하지 않으셨지. 형님은 그것을 늘 못마땅해했다.”

좌영은 태을신공의 강력한 힘에 매료되고 말았다. 이것만 완전히 익힌다면 분명 스승과 대적할 수 있을 정도의 고수가 될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교주 성곤은 2단계의 초입에서 그 이상 가르치지 않았다.

좌영은 시간이 지날수록 애가 탔다. 어느 순간 못된 생각이 들었고, 결국 그는 신교의 내규를 위반하고 몰래 비급에 손을 댔다.

“사문에서 쫓겨나고 빈손이었던 우리는 거친 강호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지. 그렇게 만들어진 게 흑접영이다.”

좌영은 퍽 망설였지만, 자신의 동생에게도 태을신공을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흑접영은 살수 집단이었고 동생은 자신과 비교해 턱없이 무공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우영은 이른 시간 안에 일정한 경지에 다다랐다.

“형님, 그런데 자꾸 몸이 추웠다, 더웠다 하는 것이 영 괴롭습니다.”

“뭐라?”

좌영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것은 주화입마의 징조였다. 자신은 자질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교주에게 차근차근 배웠기에 별 탈 없이 단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럼에도 꼬박 오 년을 고생했던 연공이었다. 그런 것을 무려 일 년도 안 되어 떼었으니 탈이 날 만도 했다.

“해결할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교주님을 만나 다음 단계를 연공하는 것. 다른 하나는 비급을 찾는 것.”

우영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결국 눈물을 뚝 떨구었다.

“형님은 검신이 가진 해심밀경소가 사실 태을신공임을 알게 되자, 또 한 번 훔치기로 한 것이지. 모든 이유는 다 나 때문이었다.”

운선은 종연의 칼에 우영이 크게 당하자 실성한 것처럼 달려들던 좌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악랄한 악귀 놈이 그래도 자기 동생은 귀하게 여기나 싶어 분노가 치밀었기에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하여, 나는 형님이 풀어주신 앞부분밖에 해석하지 못한다. 네가 다음 구절을 읽으니 확실히 알겠구나. 우리는 그날 경전을 얻었다 한들, 아무것도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팔자인 것을 애꿎은 형님만 잃었구나.”

여기까지 말을 마친 우영은 크게 소리를 내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가슴을 쥐어뜯는 그의 모습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불쌍해 보였다.

“참으로 뻔뻔하구나.”

운선은 몸을 일으켜 우영의 앞에 다다랐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우영의 단검이 들려있었다. 검은 정확하게 상대의 목을 겨눴다.

“동생을 위해 목숨을 바친 형님의 이야기에 내가 눈물이라도 따라 흘릴 줄 알았더냐? 고작 그런 이유로 내 스승과 사형을, 아니 내 가족을 그리 처참하게 죽였더냐?”

운선의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그 이유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분노, 슬픔, 아니 어쩌면 허탈감에 가까웠다.

“어차피 우리가 아니었더라도 네 사부는 죽었을 것이다. 그 악랄한 놈이 먼저 검신을 반쯤 죽여 놓고는 우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 한 거였어. 그걸 너무 늦게 알았다. 형님은 내 목숨, 이 벌레보다 못한 목숨 살리려다 그놈에게 속은 거야!”

우영은 운선의 다리를 붙잡고 울부짖었다. 운선이 겨누고 있는 칼끝에 목이 찔려 피가 배어 나왔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이 억울한 사정을 누구에게라도 알리고 싶었다.

“그래, 그 대단한 악당이 누구냐? 누구냐고!”

퍽!

또르르.

어디선가 날라온 돌이 정확하게 운선의 풍부혈을 맞히고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그 탓에 운선이 우영의 몸뚱이 위로 무너져내렸다. 우영이 그를 힘겹게 눕혀 흔들어 보았으나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여기 있었구나.”

우영은 목소리만으로도 돌을 던진 이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지만, 또한 가장 두려운 사람. 그가 악몽처럼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교…, 교주님…….”

*** 오철(悟徹): 철저하게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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