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24화 (24/209)

#24화. 吳越同舟(오월동주)

***

“주화입마(走火入魔)란 무엇인가요?”

주운은 운선의 질문에 잠깐 당황한 듯 머뭇거렸으나 곧 심드렁하게 대답하였다.

“몸속에서 기(氣)가 뒤틀리면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이 바로 주화입마의 상태이지.”

“기가 뒤틀리면 호흡이 정상적으로 되지 않거나 단전이 답답해지기도 하나요?”

태을신공 1단계를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운선은 가슴이 답답하여 숨이 쉬어지지 않는 경우를 종종 겪었다. 그는 혹시 자신이 주화입마에 빠진 게 아닌지 걱정되었다.

“일반인이라면 몸에 이상이 있는 증조이지만 무공을 익힌 자라면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다. 내력은 천천히 증강하는 것이 아니라 돈오(頓悟) 하는 것이다. 어느 경지를 뛰어넘을 때 기가 역행하는 예도 있지.”

운선은 주운의 대답에 퍽 안심이 되었다. 그는 주화입마에 빠져 죽거나 폐인이 되는 경우의 수를 염려한 것이 아니었다. 내공의 기초를 익히는 데에만 꼬박 사 년 가까이 걸렸는데 그나마도 극복하지 못한다면 스승님의 복수는 영영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내공을 익히는 것을 그만두거나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태는 어찌 아나요?”

주운은 한참을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 몸이 갑자기 뜨거워지거나 차가워지는 일이 있었느냐?”

운선은 힘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낯 색이 급격히 변하거나 손발 끝이 저린 적은?”

운선이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자 그제야 주운은 다행이다 싶었는지 굳은 표정을 풀었다.

“만약 운기조식할 때, 이 같은 증상이 나타나거든 재빨리 연마를 그만두어야 한다. 그러지 않을 시에는…….”

“그러지 않을 시에는?”

운선이 마지막 말을 따라 하자 기분이 좀 상했는지 주운의 미간에 내 천(川)자의 주름이 깊게 잡혔다.

“최소 반신불수가 되거나 결국 목숨을 잃을 수 있다.”

***

운선은 우영을 만났던 그 날의 일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우영은 이미 반신불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가 그날 이후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그 때문이겠지.’

자신의 팔에 화기(火氣)를 주입하면서 그의 얼굴은 마치 타오르는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눈알의 실핏줄까지 몽땅 터져 흰자위가 시뻘겋게 변했던 그 끔찍한 모습은 분명 주화입마에 빠진 것이었다.

‘이 흑접영의 수장만 어찌어찌 해치우면 우영의 마수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 몸이 버틸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살 궁리를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두 사람은 동굴 앞에 다다랐다. 마치 아귀(餓鬼)의 소굴 같아 보이는 동굴의 모습에 운선은 극도의 공포심을 느꼈다.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부단장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는 운선을 칼끝으로 쿡 찌르며 위협했다. 운선이 어색하게 웃으며 앞으로 다시 걸어 나가자 부단장은 동굴 쪽을 향해 나지막하게 고했다.

“단주님, 찾으시는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

어떤 대답도 없었으나 누군가의 옅은 호흡이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것을 보니 안쪽에 사람이 있음이 분명했다.

“들어가라! 난, 이 앞에서 기다리겠다. 너 따위는 단주님이 앉아서도 해치울 수 있으니 엄한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부단장의 으름장에 한층 겁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운선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우영은 걷지 못한다.’

자신의 추측이 맞아떨어졌다면 분명 살아날 방도가 있을 것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그를 꼭 다시 만나야 했기에 오히려 위기가 기회가 된 셈이었다.

운선은 발을 헛디디지 않기 위해 최대한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방향을 가늠하려고 손으로 옆면을 짚자 축축한 물기가 잔뜩 묻었다. 몸 상태가 엉망일 우영에게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었다.

“누구냐?”

거칠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전면에서 들려왔다. 앞이 보이지 않아 정확한 거리는 모르겠으나 상대가 꽤 경계하고 있음은 바로 알 수 있었다.

“…….”

운선은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그의 악랄한 성정으로 볼 때 섣불리 다가갔다가 크게 낭패를 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더는 자신 쪽으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우영은 어쩔 수 없이 초에 불을 붙였다. 공간이 협소하여 초 하나에도 그의 주변이 완전히 환해졌다.

“누구냐?”

운선은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너무나 황망하여 하마터면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오른손에 단검을 든 남자는 오른쪽 눈이 동공이 없는 백안(白眼)이었다. 백발이 된 머리가 반쯤 벗겨졌으며 얼굴에 때가 덕지덕지 붙어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귀신처럼 새하얗던 피부가 벗겨지자 검버섯이 잔뜩 핀 초라한 중년 남자일 뿐이었다.

“도대체 이 꼴이…….”

운선은 맥이 딱 풀리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사 년을 매일 같이 복수의 칼을 갈던 그였다. 그때마다 머릿속에는 스승의 목을 잘라내던 흑접쌍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기괴한 웃음소리, 흉측하게 찢어진 입. 매일 밤 꿈에 나타나던 끔찍한 놈들이었다.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이 증오했으나 감히 대들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한 원수였다. 그런데,

“왜 벌써 이렇게 된 거냐? 이렇게…….”

운선은 자신도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가 폐인이 된 것은 인과응보이니 마음이 후련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슬픔이 왈칵 밀려왔다. 복수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로 허망했다.

“설마…….”

“그래, 나다! 기억하겠느냐?”

부들부들 떨며 자신을 노려보는 운선을 찬찬히 살펴보던 우영은 그의 오른팔에서 시선이 딱 멈췄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니 쿵덕쿵덕 뛰기 시작했다. 그토록 애타게 찾던 사람을 드디어 만났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발작하면서 언제 죽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그에게는 운선의 등장이야말로 하늘이 주신 선물과 같았다.

“아……. 이제 살았다. 이제……, 이제 살았다.”

그는 바닥을 주먹으로 쿵쿵 치며 울부짖었다. 하체를 움직이지 못해 상체만 움찔거리는 그의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눈물이 날 정도로 애잔했다.

“이리 오너라. 이리. 내 해치지 않으마. 암, 절대 해치지 않고말고.”

우영은 연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혹여 상대가 도망갈까 온갖 감언이설을 하는 그를 보며 운선은 욕지기가 났다.

“우리 스승님과 사형을 죽이고 나를 병신으로 만들더니, 이제 와 이렇게 반가워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아아, 네가 병신이 된 것을 내가 도와줄 성싶으냐?”

운선이 분노에 차서 소리를 내지르자 그의 목소리가 동굴 내벽에 부딪혀 윙윙 울렸다. 우영은 살짝 당황하는 것 같았으나 곧 미소를 지으며 운선을 달랬다.

“네 녀석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은 신공을 연마했기 때문 아니냐? 분명 너는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리해 준다면 너를 절대 해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네 복수도 도와주겠다.”

“뭐?”

운선은 우영의 뜻밖의 말에 크게 당황하였다.

“네놈이 내 원수인데 복수를 도와준다니? 내 앞에서 스스로 목숨이라도 끊겠다는 거냐?”

우영은 어쩔 줄 모르며 두 손을 들어 손사래를 쳤다.

“무슨, 나는 그저 사주를 받은 것이지. 우리 형제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검신을 감히. 그저 시키는 대로 하면 해심밀경소를 보여준다 약조하였다.”

“뭐?”

운선에게 자신의 말이 먹히는 것 같아 보이자, 신이 난 우영이 속사포처럼 말을 뱉었다.

“얘야, 생각해 보렴. 우리 둘이 한꺼번에 덤빈대도 검신의 머리카락 한 올이나 건드릴 수 있겠느냐? 검신은 이미 극독에 중독된 것도 모자라 일 장을 맞아 내장이 파열된 상태였다. 그러니 우리의 일격을 피하지 못했던 것이지.”

운선은 우영의 말에 너무 놀라 몸이 휘청하였다. 겨우 벽에 기대어, 간신이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 그래서…, 누가…, 누구에게 사주받았다는 거냐?”

운선의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갔다. 그의 몸에 또다시 발작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이 중요한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이를 꽉 물고 버텼다.

“뭐야 너, 1단계밖에 익히지 못했구나?”

우영은 갑자기 뭐가 우스운지 배를 잡고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운선은 정신이 어지러워 그의 입을 막고 싶었으나 지금 상태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구결을 외워라. 그럼 내가 발작을 진정시키는 방법을 알려주마.”

우영은 최대한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운선에게 간사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을신공의 1단계는 화기(火氣)를 다스리는 것이다. 나 역시 너와 상황이 같다. 다만 나는 속성으로 연마하는 바람에 화기(火氣)에 잠식되었지. 2단계, 2단계로 넘어가면 일단 발작을 멈출 수 있다. 나에게 2단계 신공의 구결을 불러주면 어떻게 기운을 가라앉히는지 알려주마.”

“너를 어떻게 믿고…….”

운선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자신을 가열하게 노려보고만 있자, 우영은 마음이 초조하고 답답하여 점점 언성을 높였다.

“이 병신 같은 놈아! 이렇게 지체하면 너도나도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해!”

운선이 1단계를 갈무리하였을 때, 더는 신공을 연마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운이 좋게 적우를 만났기에 구결을 풀 수 있었던 것이지 독학으로는 도저히 신공의 의미를 알아낼 수 없었다.

수없이 읽고 또 읽어봐도 구결의 내용은 그저 철학의 교리와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운에게도 몇 구절을 넌지시 물어보았으나 그녀 역시 동문서답만 할 뿐이었다.

‘구결을 알려주면 분명 저 녀석의 상태도 호전되겠지. 과연 내가 막을 수 있을까?’

운선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어차피 결론은 하나였다. 일단 고비를 넘겨야 그다음이 있다.

“내 너를 결코 믿어서가 아니다. 그래도 네가 사람이라면 약속은 지켜라.”

“오냐, 오냐!”

우영은 혹시나 운선이 마음을 바꿀까 싶어 황급히 대답했다.

이미 반신불수가 된 몸은 혈맥을 돌아다니는 화기(火氣)를 가라앉힌다고 해서 나아질 리 없었다. 게다가 이미 자신의 목적은 운선에게서 경전의 내용을 듣는 것이지 그를 죽이는 게 아니었으므로 약속을 지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우영의 간절한 눈에서 진심을 읽은 운선은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기운을 최대한 단전에 모은 후, 천천히 2단계의 구결을 읊기 시작했다.

“한 해는 습조(濕燥)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습조는 한열(寒熱)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한열은 사시(四時)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사시는 음양(陰陽)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우영의 얼굴이 일시에 밝아지더니 그 역시 두 손을 단전에 모아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서서히 몸을 헤집고 다녔던 뜨거운 기운이 단전에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중극과 곡골에 맺힌 기운을 느끼고 서서히 거궐과 중완으로 올린다. 절대로 기운을 억누르지 말며 서서히 호흡을 들이쉬어 기공(氣孔)을 연다. 이때 양발의 연곡혈에 힘을 주면 곤륜혈에 차가운 기운이 뭉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두 사람은 구결과 풀이를 주고받으며 서서히 발작을 가라앉혔다.

어느덧 둥근 달은 사라지고 수줍은 해가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 오월동주(吳越同舟):

서로 적의를 품은 사람들이 한자리에 있게 된 경우나 서로 협력하여야 하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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