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23화 (23/209)

#23화. 落伍(낙오)

“정신 똑바로 차려라!”

형진은 사제들의 주의를 집중시킨 다음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다행히 흑의인들만 있을 뿐, 칠원성군의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활인검 1초식!”

활인검은 기본동작인 첫 번째 초식부터 가장 응용된 동작인 108초식까지 순서대로 구사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상대에게 순서를 다 알려 주니 불리할 것 같지만 같은 초식이어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현저히 달라졌다. 웬만한 무공을 익힌 사람도 활인검법을 제대로 구사하는 이를 만나면 당해내기 어려웠다. 단순해 보이지만 시묵공의 내력을 바탕으로 하는 검법이기 때문이었다.

형진의 외침과 동시에 두타공파의 일곱 제자는 각각의 검법을 구사하였다. 같은 항렬에서도 무공이 뛰어난 이들 위주였으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흑의인들이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다만,

“운선아, 괜찮으냐?”

형진은 다른 사제들보다 더 많은 적을 상대하기도 하거니와 운선까지 엄호하느라 조금씩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저대로 두었다가는 운선의 생명이 위태로워 보였다. 운선은 제대로 초식을 사용하기는커녕 검을 들고 있는 오른팔을 몇 번 휘젓는 것이 전부였다.

‘큰일이구나.’

아무리 두타공파의 무공이 흑의인들을 압도한다고 해도 상대의 수가 너무 많았다. 게다가 분명 적을 쓰러뜨리고 있는데도 그들의 수가 줄지 않는 것이 영 불길했다. 아무래도 인원이 조금씩 불어나는 것 같았다. 좀 더 지체했다가는 운선은 물론이고 나머지 사형제들의 목숨도 보장하기 어려웠다.

“대사형!”

어느새 근처까지 온 도평은 형진의 등 뒤로 바짝 붙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동남쪽으로 길을 터 저들을 따돌립시다.”

“허나, 운선은…….”

형진도 그 방법이 유일하다고 생각했으나 경공을 사용하면서 운선까지 데려갈 수는 없었다.

“그럼 저 족보도 없는 놈 때문에 사형제들을 다 죽이시겠습니까?”

형진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에게는 겨우 서너 해를 함께 한 운선보다 어린 시절을 붙어 보낸 사형제들이 훨씬 중요하였다.

“그럼 내가 남아 운선을 최대한 엄호할 테니 네가 앞장서서 길을 터라.”

형진은 그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사형제들을 먼저 내보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대사형, 이 길 앞에 매복이 또 있을 줄 누가 압니까? 사형이 길을 뚫어야 다음이 있습니다. 운선은 원래부터 제 책임이었으니 끝까지 구하겠습니다.”

도평은 간절한 표정으로 형진을 바라보았다. 형진은 사제의 우애심에 마음이 뭉클하였다. 평생을 친동생처럼 아낀 도평을 두고 가는 마음이 편치 않았으나 그의 경공 만큼은 사형제 중 최고였으므로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하리라 생각했다.

“만약 어렵겠거든 네 목숨을 먼저 아껴라.”

형진은 마지막으로 도평에게 당부하며 앞으로 치고 나갔다. 운선을 신경 쓰지 않고 검기를 사용하니 앞을 가로막던 적들이 마치 종이 인형처럼 나자빠졌다. 그는 입바람을 불어 사형제들에게 신호를 한 다음 운지행의 보법(步法)을 사용하여 동남쪽으로 길을 트기 시작했다.

“으악!”

“악!”

대사형이 길을 터주니 남은 다섯의 제자들은 한층 수월하게 적을 상대할 수 있었다. 십수 명의 흑의인들이 피를 쏟아내며 좌우로 쓰러지자 한쪽으로 길게 길이 생겼다.

“강운선!”

곽도평은 대사형 일행 쪽으로 관심이 쏠린 사이에 운선의 곁으로 날아왔다. 마침 그는 두 명의 흑의인에게 둘러싸여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운선은 힘겹게 검을 휘두르고는 있었으나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캉! 캉!

몇 초식 만에 도평은 두 명의 적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다. 평소 그를 좋아하지 않는 운선이었으나 막상 위기의 상황에서 그가 구해 주자 퍽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어쨌든 동문수학하는 사형제이니 사적인 감정은 넣어둔 모양이었다.

“사제, 걸을 수 있겠어?”

그는 평소와 달리 다정하게 말을 걸며 운선을 부축하였다.

“곽사형……. 정말 감사합니다.”

긴장이 풀어지자 그의 몸은 무게 중심이 완전히 도평 쪽으로 넘어갔다. 이제까지 움직인 것도 기적이라 할 정도로 온몸에 기운이 없었다. 이 순간을 기다렸던 도평은 얼굴에 가득 미소를 지었다.

“오늘 네가 죽는 이유가 뭔 줄 아느냐?”

도평은 운선이 피할 새도 없이 빠른 동작으로 그의 명치를 세게 걷어찼다. 운선은 흡사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훌쩍 날아가 바닥에 쿵 소리가 나게 떨어졌다. 운선을 내려다보는 도평의 얼굴은 흑접쌍살의 살기 어린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감히 네 주제에 나를 사형이라고 부른 것! 그게 네 죄다.”

운선은 그제야 도평이 형진에게서 자신을 떼어 놓은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언제든 상황만 적절하게 주어진다면 운선을 해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첫 만남부터 이유 없이 미웠던 그가 동문이 되어 사부와 사형의 총애를 받다니. 지난 사 년간 도평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를 응징하리라 다짐했던 것이었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그의 모습을 잠깐 지켜보던 도평은 서둘러 사형제들이 간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곧 숨이 끊어지겠지만 이왕이면 운선이 태을신교의 망나니들에게 끔찍하게 고통받기를 바라면서.

“곽도평…….”

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던 운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기습할 것을 눈치챘기에, 맞는 순간 몸을 뒤로 빼 타격감을 최대한 줄였던 점이 주요했다. 호흡이 가빠지고 혈맥을 휘젓는 화기(火氣) 때문에 정신이 어질어질하였으나 도평에게 당할 정도로 무기력한 상태는 아니었다.

‘죽더라도 이놈들에게 죽을 수는 없지.’

형진 일행을 완전히 놓친 흑의인들은 뒤늦게 운선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하나, 둘, 셋…… 운선이 어림잡아 세어보니, 못해도 열다섯은 되는 것 같았다.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을 왼손으로 옮겨 잡았다.

“어디, 덤벼 보아라!”

땀과 흙에 절은 병약한 청년이 비틀거리며 달려들자 흑의인들은 다소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나 수적으로 우세했으므로 별로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맨 앞에 서 있던 두 명이 먼저 좌우로 운선을 찔러 들어갔다.

“수월심검!”

운선은 힘찬 기합 소리와 함께 왼손을 빠르게 돌리기 시작했다. 활인검법을 사용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몸놀림이었다. 그는 결코 다른 사형제들 앞에서는 수월심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사문의 무공이 아닌 것을 사용하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도 여태 검을 오른손으로 쥐고 있었던 것이었다.

주운에게서 배운 검법은 태을신공을 익히는 데 전혀 방해되지 않아서 훨씬 수월하게 연마할 수 있었다. 비록 오른팔로는 쾌검인 수월심검을 감당하지 못하기에 왼손에 검을 쥐어야 했지만 그렇기에 더 죽도록 연습하게 되었다. 이제 외공만으로는 제법 주운과도 비등하게 겨룰 수 있는 수준이었다.

“으악!”

좌측에서 덤비던 흑의인이 왼팔에 큰 자상을 입고 바닥에 쓰러졌다. 아까의 운선을 생각하고는 너무 쉽게 파고들었던 것이 패착이었다. 동료의 부상에 당황한 우측의 흑의인이 사정거리 밖으로 몸을 내뺐다. 아무래도 일대일로는 운선의 검망을 뚫을 자신이 없었다.

“비켜라!”

그때, 웬 키가 큰 흑의인이 앞을 가로막는 동료들을 젖히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는 무리 중에서 오직 혼자만이 탈을 쓰지 않았는데 얼굴이 유난히 창백하여 탈을 쓴 사람들보다도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는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짧은 검을 사용하기에 운선과의 거리를 최대한 좁혀 나갔다. 어찌나 위력적인지 움직일 때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

운선은 이대로 그와 겨루었다가는 자신에게 지극히 불리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제 승부수를 던져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너희들의 단주는 어디 있느냐?”

운선이 헉헉거리며 묻자 키 큰 흑의인은 마치 얼음이 된 것처럼 동작을 딱 멈췄다.

“뭐라?”

운선은 세상 당당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온몸이 덜덜 떨렸다. 과연 이 방법이 먹힐까 싶어 입안이 바싹 타들어 갔다.

“우영은 어디 있냐고 물었다.”

다른 사형제들이 흑의인들의 정체를 태을신교라고 짐작한 것은 무림대회 때 비슷한 가면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종류의 가면을 다 본 적이 있는 운선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들은 흑접영이었다.

“나는 너희 단주가 그토록 찾는 검신의 마지막 제자다.”

그제야 키 큰 흑의인은 운선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는 강가장이 쑥대밭이 되던 날 현장에 함께 있었다. 단장이 눈앞에서 처참하게 죽었을 때, 정신줄을 놓고 울부짖던 단주 우영을 데리고 도망친 이도 그였다. 태을신교를 나와 흑접영을 창단한 이래로 그는 계속 흑접쌍살을 최측근에서 모셨던 부단장이었다.

“너였구나.”

그는 어렴풋이 운선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년 동안 부쩍 자랐지만 형형하던 눈빛과 야무진 표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 팔이 붙어 있다니, 기적이구나.”

검게 변색 된 운선의 팔은 그가 그때의 소년이라는 가장 명확한 증거였다. 그는 잠시 턱을 괴고 생각하더니 이윽고 결심한 듯 수하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흑의인들은 정말 나비라도 된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한 명씩 도맡아 아직 숨이 붙은 동료들을 부축하더니 어둠 속으로 일시에 사라졌다.

“만약 단주님에게 허튼짓을 한다면 그 자리에서 목을 자를 것이다.”

흑접영의 부단장은 운선의 검을 뺏은 뒤, 그를 앞장세웠다. 그들이 가는 방향은 산에서 내려가는 쪽이 아니라 오히려 깊은 숲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머리 위에는 어느새 떠오른 보름달이 두 사람을 하얗게 비추고 있었다.

형진 일행이 무사히 산에서 내려왔을 때, 마침 그들 쪽으로 뛰어오는 하얀 인영이 보였다. 앞서 약을 구하러 떠났던 주운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그들의 몰골을 놀란 눈으로 휘둘러 보던 주운은 우려했던 일이 터졌음을 깨달았다. 대답도 듣기 전에 그녀는 다짜고짜 형진의 멱살부터 잡았다.

“운선은?”

“사저, 죄송합니다.”

형진은 기습을 당한 일은 어찌어찌 설명하였으나 차마 도평에게 운선을 부탁하고 빠져나온 사실은 말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자신이 일행의 수장인데 사제를 둘이나 버리고 온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주사저! 우리도 겨우 목숨만 구해 나온 길입니다. 또한, 형제 둘은 치명상을 입어 당장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그나마도 대사형이 없었다면 다 죽었을 것입니다. 어찌 운선 때문에 대사형을 모욕하십니까?”

주운은 뒤에서 불쑥 따지고 드는 사제의 얼굴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내가 왜 네놈들 목숨까지 걱정해야 하느냐? 그래서 운선은 어디 있느냐?”

사형제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방금 빠져나온 산 쪽을 가리켰다. 주운은 손에 들고 있던 약봉지를 아무렇게나 소매 속에 넣더니 어둠 속으로 빠르게 뛰쳐 들어갔다.

“너희는 먼저 계정으로 들어가거라. 나는 돌아가 도평과 운선을 구해 오겠다.”

형진은 그나마 상처가 덜한 사제를 붙들고 신신당부하였다.

“허나, 대사형!”

“명심해라. 이 두 형제의 목숨은 너에게 달렸다.”

형진은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는 사제들 쪽을 돌아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누구의 목숨도 그에게는 소중했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소맷자락을 잡으며 말리는 사제의 손을 애써 뿌리치고는 주운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턱 밑으로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쉴 새 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 낙오(落伍):

대오(隊伍)에서 처져 뒤떨어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