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奇襲(기습)
두타공파 일행은 달포가 조금 못되어 계정 근처에 도착하였다. 제대로 쉬지도 먹지도 않고 달려온 길이라 모두 지쳐 있었다.
“이곳에서 하루 쉬었다 가자꾸나.”
형진은 피곤함에 찌든 사형제들을 돌아보며 마침 근처에 있는 허름한 객잔을 가리켰다. 고개 하나만 넘으면 목적지이니 곧장 갈 수도 있었으나 이대로 움직이기에는 일행의 몰골이 처참하였다. 두타공파의 체면도 있으므로, 말끔하게 정비하고 가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그의 제안에 누구 하나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물며 주운조차도 다행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괜찮으냐?”
주운은 추운 날씨에도 땀을 비 오듯 흘리는 운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사실 주운이 이 여정을 따라온 이유는 운선의 건강 때문이었다.
근 한 달 전부터 운선의 병세는 크게 악화하였다. 태을신교의 내공은 화기가 혈맥에 침투하는 것을 막아주기는 했으나 이미 손상된 장기를 치유해 주지는 못했다. 또한, 의백이 가끔 불어넣어 주는 진기는 발작과 통증을 막아줄 뿐, 근본적인 치료가 아니었다. 그나마도 최근에는 만날 기회가 없어 고통이 더 심해진 터였다.
“마을이 지척이니 이대로 산을 넘어 의원을 찾아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 정도는 아닙니다. 견딜 만합니다.”
고통은 익숙해진다고 해서 덜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허나 무리에서 자신의 사정만 봐달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형제들 모두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예민한 상태였다. 그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알았다.”
주운은 운선의 고집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먼저 약을 구해 오는 것이 낫겠다 생각했다.
“나는 일이 있어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주운!”
운선은 주운의 의도를 눈치채고 말리려 했으나 그녀의 고집 역시 만만치 않았다. 형진도 그녀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흔쾌히 승낙하였다.
“사저, 내일 오시(午時)에 용문파 현문 앞에서 뵙겠습니다.”
주운은 운선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길을 떠났다. 운선은 마음 같아서는 그녀와 함께 움직이고 싶었으나 지금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기 힘들 만큼 고통이 심했다.
‘아무래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나.’
운선은 아무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무공에는 진척이 없고 몸은 하루가 다르게 망가져 갔다. 복수해 주마 약속했던 의백은 무림 맹주의 책임이 있으니 자신을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긍정적인 성격의 운선이었지만, 도저히 희망을 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객잔으로 들어선 두타공파의 제자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초라한 내부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곳곳에 널린 거미줄을 보니 청소를 안 한 지, 한참은 되어 보였다.
“이보시오!”
도평이 앞장서서 주인을 불렀다. 몇 번의 호명 후에야 부엌 쪽에서 웬 노인이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왔다.
“웬 손님이람?”
그는 백발이 성성하였으나 나이답지 않게 풍채가 좋은 편이었다. 다만 꽤 신경질적이었는데 형진은 묘하게 그의 언행이 거슬렸다.
“주인장, 여기 만두와 국수 좀 주시오.”
형진은 지친 사형제들을 위해 저녁은 양껏 먹이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나 작은 객잔이었으므로 가장 기본적인 요리만 시키기로 하였다.
“만두는 없고 국수만 있소. 그나마도 준비가 안 되어있으니 기다려야겠소.”
노인은 별로 손님을 받고 싶지 않았는지 영 표정이 좋지 않았다. 형진은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하여 이곳에 머물 생각이 없어졌다.
“혹, 이 근방에 다른 객잔이 있습니까?”
그는 최대한 웃는 낯으로 물었으나 이미 말투에는 불쾌함이 잔뜩 묻어나왔다. 그 어감을 눈치챘는지 노인은 아까보다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있겠소?”
형진은 사형제들 쪽을 바라보며 세상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 같아서는 손님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따져 묻고 싶었으나 상대가 노인이니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먹을 거요?”
“아, 네. 일단 주시지요.”
형진은 썩 내키지 않았으나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미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었으므로 이곳을 떠나면 노숙을 해야 할 판이었다.
노인은 두타공파 제자들의 떨떠름한 얼굴을 쓱 둘러보더니 어슬렁어슬렁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손에는 검은 때가 잔뜩 묻어있었는데 씻지도 않고 바로 채소를 한 움큼 쥐어 들었다.
“이보시오! 손은 좀 씻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참다못한 도평이 노인에게 소리를 꽥 질렀다. 그는 객잔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 허름한 외관 때문에 짜증이 잔뜩 난 터였다. 그나마도 대사형의 체면을 봐서 참고 있었건만 노인의 위생 상태에 비위가 상해 더는 가만있을 수 없던 것이다.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다 똑같지 뭘.”
그러나 노인은 조금도 움찔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심지어 대충 주변에 있는 것들을 냄비에 때려 넣고 있었는데 사람이 먹을 만한 음식 상태가 아니었다. 그 꼴을 보는 두타공파 제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화가 치솟았다.
“대사형, 이 더러운 객잔에서 먹고 자느니 차라리 노숙하겠습니다.”
“네, 대사형. 여기 더 있다가는 저 영감탱이를 죽도록 때리고 싶어질 것 같아요.”
사제들의 불평이 쏟아지자 형진은 난감해졌다. 그 역시 당장이라도 객잔 밖으로 나가고 싶었으나 이미 하루 묵겠다고 약조한 일을 무르기가 민망한 참이었다.
“사형 체면이 있으니 제가 대신 전하겠습니다.”
형진의 마음을 눈치챈 도평은 호기롭게 노인 앞으로 다가갔다. 노인은 장작불을 피우느라 그가 가까이 오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주인장, 우리는 다른 객잔을 찾아볼 테니 그만두시오.”
“뭐요?”
노인은 고개만 들어 도평의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심드렁한 표정에서 상대에 대한 불만이 가득 느껴졌다.
“아니, 이미 불을 지피고 국수를 삶고 있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요?”
도평은 보는 눈이 있어 고개를 한껏 숙이고 노인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빌어먹을, 그 쓰레기는 당신이나 처먹으시오.”
“에라, 이 썩을 놈들!”
노인은 급작스럽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있던 도평은 피할 새도 없이 그의 머리에 코를 세게 부딪쳤다.
“악!”
도평은 눈앞이 핑 도는 것이 정신이 아득해졌다. 곧 코를 잡은 손가락 사이로 진득진득한 피가 새어 나왔다.
“이 영감탱이가 돌았나? 우리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도평은 코피가 난 것이 분해 결국 허리에 차고 있던 검집을 풀어 그대로 노인을 때리려고 하였다. 아무리 노인이라 하더라도 본때를 보여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곽사제!”
형진은 재빠르게 뛰어와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그가 저지하지 않았으면 노인이 크게 다칠 뻔하였다.
“허허, 말세구먼, 말세야. 새카맣게 어린놈들이 늙은이를 패네.”
노인은 갑자기 자리에 주저앉더니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것이었다. 형진은 너무 당황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낭패로구나.’
곽도평은 대사형이 참견만 하지 않는다면 당장에라도 이 구렁이 같은 영감탱이를 때려죽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보아하니 꽤 귀한 집 자제분들인 것 같은데 예의범절은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 같네요.”
그들의 머리 위쪽에서 앳되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허름한 옷을 입고 머리에 두건을 쓴 점소이가 내려왔다.
얼핏 보면 소년 같았으나 운선이 세세히 살펴보니 열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삐쩍 마른 소녀였다. 아마도 주인장 노인의 손녀쯤 되는 것 같았다. 유달리 하얀 얼굴에 큰 눈 때문에 어딘지 모르게 많이 병약해 보였다.
“설아, 나 혼자도 충분하니 너는 들어가 있어라.”
노인은 손사래를 치며 소녀를 다시 올려보내려고 했으나 소녀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는 듯했다.
“가시려거든 이 음식값과 하루 숙박비까지 치르고 가세요.”
“아니!”
도평이 식식거리며 또다시 달려들자 형진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녀 쪽을 돌아보았다.
“저희가 이미 주문한 음식값은 내겠습니다. 허나, 숙박한 것은 아니니 그 이상은 어렵겠습니다.”
소녀는 손님들의 얼굴을 한 명씩 천천히 확인했다. 다들 기회만 되면 두 사람을 죽일 것처럼 분노에 찬 표정이었다. 소녀는 허리를 앞으로 꺾으며 간드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명문정파의 제자들이 가난한 늙은이와 어린애를 죽이기라도 할 것입니까? 값을 치르지 못하겠거든 그냥 여기서 묵으세요.”
“뭐라고?”
앞에 서 있는 형진이 아니었다면 도평은 이미 뛰쳐나가 소녀의 면상을 후려갈겼을 것이었다. 그는 분을 참다못해 숨까지 헐떡였다.
“음식값입니다.”
형진은 소녀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노인이 들고 있는 주걱 위에 적당한 개수의 동전을 올렸다. 그리고는 사형제들에게 서둘러 짐을 다시 챙기라 이른 후 노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더는 의미 없는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
“값을 다 못 치르겠거든 물건이라도 놓고 가세요.”
소녀는 한껏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이죽거리더니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운선 앞에 섰다.
“이 사람은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데 두고 가지요.”
운선은 뜻밖의 상황에 어리둥절하였다. 자신의 낯 색이 안 좋아 아픈 것을 눈치챌 수는 있겠으나 왜 하필 자신을 콕 찍어 붙잡는 것일까?
“오라버니, 오늘 밤 제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내일 해를 보지 못할 거예요.”
소녀는 아까와는 다르게 사뭇 친절하고 은근한 태도로 운선에게 말을 붙였다.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연민의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제 됐습니까?”
형진은 소녀의 막무가내의 태도에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그대로 그들 쪽으로 걸어오더니 소녀의 손에 동전을 곱절이나 더 쥐여주고는 운선의 손을 잡아챘다. 그가 객잔 밖으로 바람처럼 사라지자 뒤를 이어 두타공파의 제자들이 줄줄이 따라 움직였다.
“아까운 목숨 하나 버리겠구나.”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소녀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저 미친년은 뭡니까?”
한 식경이 넘도록 걸었는데도 곽도평은 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어쩐지 사기를 크게 당한 기분이었다. 대사형은 다 좋은데 사람이 너무 무른 것이 흠이었다. 지금이라도 되돌아가 두 연놈을 흠씬 두들겨 패주고 싶었다.
“됐다. 그만하여라. 운이 없었을 뿐이다.”
형진은 도평을 달래는 한편 아까부터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는 운선을 걱정스럽게 돌아보았다. 다른 건 모르겠으나 소녀의 마지막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거라니……. 시골 어린애가 뭘 알겠냐마는 자신이 보아도 운선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이기는 하였다.
“운선아, 견딜 수 있겠느냐? 이 고개만 넘으면 계정이니 의원을 찾아가자.”
“네, 사형. 괜찮습니다.”
운선은 그 자리에 딱 뻗고 싶었으나 사형제들에게 폐가 되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고 버텼다. 어쩌면 곧 주운이 약을 구해 올지도 모르니 조금만 견뎌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때,
휘이익!
맑고 청량한 휘파람 소리가 산속의 정적을 깨웠다. 그리고는 우스꽝스러운 탈을 쓴 흑의인들 수십 명이 그들을 포위하는 것이었다.
“태을신교!”
두타공파의 제자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우왕좌왕하여 서로 등을 맞대고 가운데로 몰려섰다. 밤에 보는 태을신교의 가면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 기습(奇襲):
적을 갑자기 들이쳐 공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