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終而復始(종이부시)
스산한 겨울바람이 불어와 온몸이 꽁꽁 얼어붙는 것 같았다. 문천에서 가장 규모가 큰 송림표국은 엊그제 맡은 물건 때문에 한밤중에도 마치 대낮처럼 불을 밝히고 있었다.
“과연 계정까지 아무 일도 없을까요?”
금표두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총표두인 황우림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계정이 어딘가? 용문파의 관할 아닌가? 여차하면 그들이 우리를 지켜주기로 하였으니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게.”
“허나 몇 해 전 연반표국 일도 그렇고, 지난달에는 광명상단도 당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흐음.”
사실 황표두도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광명 상단의 일가족 여든두 명이 하룻밤 사이에 모두 비명횡사한 일은 이미 강호 일대에 소문이 자자했다. 대문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雨(우) 자를 본 이들 중 태을신교를 떠올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또한, 우리 나름대로 대책을 마련해 두지 않았나?”
황우림은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며 금표두를 달랬다. 사실 너무 걱정할 일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는 일을 맡은 직후 큰돈을 들여 십여 명의 표사들을 데려왔다. 표국에 소속된 표사들도 이미 차고 넘쳤으나 좀 더 무공이 고강한 이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계정까지만 어떻게든 도착한다면 일단은 안심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금표두는 영 마음이 찝찝하였다. 그에게는 몇 달 전에 태어난 아기가 있었다. 꼬물꼬물한 녀석을 두고 한 달 반이 넘는 거리를 떠나는 것도 내키지 않는데 하필 엄한 물건을 배달해야 한다니 겁부터 덜컥 났다. 집안에 가장이 없으면 아이의 팔자가 어찌 될지 안 봐도 뻔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시지요.”
“그만두어도 죽네.”
황표두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우리가 싫다고 해서 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어차피 모 아니면 도였다. 목숨을 내놓을 만큼 위험한 일이기도 하였으나 잘 해내기만 한다면 그 이후의 미래는 창창하였다.
그는 송림표국을 키우기까지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바닥이 워낙에 신뢰를 중시하는지라 유달리 텃세가 심했다. 황우림에게 내세울 것은 오직 넉살 좋은 성격과 사흘 밤낮을 새워도 멀쩡한 체력밖에 없었기에 더 험난한 길이었다. 그렇기에 모처럼 얻은 이 좋은 기회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도 자네가 끝까지 도와주었으면 좋겠네.”
황우림의 간절한 부탁에 금표두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한숨만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반복했다. 황우림과는 송림표국이 처음 세워질 때부터 함께 한 사이였다. 그는 고작 개인의 안위를 위해서 오랜 우정을 버릴 정도로 모질지 못했다.
“총표두님,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만두면 되지, 뭘.”
무심코 황우림 쪽을 돌아본 금표두는 곰처럼 커다란 사내의 태연자약한 얼굴에 놀라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그 역시 제 몸 하나 지킬만한 무공을 갖추고 있었으나 낯선 이의 기척을 전연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누…누…누구냐?”
황우림은 급한 대로 허리에 차고 있던 단도를 꺼내 들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가지는 위압감에 몸을 가누기조차 어려웠으나 표국의 식구들은 살려야 했다.
“설마 이 장난감으로 날 찌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커다란 덩치의 사내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목젖이 보일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그제야 그의 등 위로 솟아올라온 거대한 칼의 손잡이가 보였다.
“서…서…설마…….”
바닥에 엎어져 눈만 굴리던 금표두가 손가락을 덜덜 떨며 그를 가리키자, 사내는 사뭇 거만한 얼굴이 되어 팔짱을 꼈다.
“그래, 내가 바로 적우다.”
황우림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가 나타난 곳에는 언제나 붉은 피가 쏟아진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어린 나이라 바로 알아보지는 못했으나 저 크고 무거운 도를 보니 적우가 틀림없었다.
“내가 총표두이니, 나만 죽이면 될 것. 다른 식구들의 목숨은 살려 주시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금표두는 재빨리 일어나 친구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니다. 이 사람을 죽이려거든 나부터 죽여라!”
두려움에 아랫입술을 바르르 떨면서도 친구를 구하겠다고 객기를 부리는 금표두를 바라보고 있자니, 적우는 괜히 콧날이 시큰해졌다.
“참으로 대단한 우정이구나.”
그의 눈은 어느새 붉게 충혈되었는데 진심으로 감동을 한 얼굴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때 굵은 저음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더니 한줄기 광풍이 황우림의 눈앞에 불어닥쳤다. 마치 회오리가 치듯 바닥의 모래 먼지가 피어올라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착!
순간 얼굴에 뜨겁고 진득한 무언가가 황우림의 얼굴로 잔뜩 쏟아졌다. 머릿속에 끔찍한 생각이 스쳐 지나간 그는 감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설마설마했으나 그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금표두!”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던 금표두는 얼굴 없는 몸뚱이가 되어 피를 퐁퐁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뒤에는 금표두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들고 있는 한 사내가 보였다.
그는 적우가 아니었다. 새로 나타난 사내는 자신의 키보다 석 자는 더 긴 창을 들고 있었다. 검은 도포로 온몸을 두르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창을 든 모습은 흡사 저승에서 온 부동명왕(不動明王) 같았다.
“네 이놈!”
황우림은 이제 두려움 따위는 느끼지 못했다. 오직 불타오르는 분노와 복수심만이 그의 손발을 지배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자신의 단도를 높이 들어 사내의 왼쪽을 찔러 들어갔다. 다소 투박하였으나 기본기가 탄탄한 무공이었다.
“호오”
사내는 왼손에 들려있던 금표두의 머리를 바닥에 던지고 황우림의 단도를 그대로 받아내었다. 분명 온 힘을 다해 내지른 한방이었으나 단도가 박힌 사내의 왼손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투두둑.
단도의 칼날은 사내의 손바닥에 미처 박히지 못하고 박살이 나서 바닥에 떨어졌다. 황우림의 손에는 오로지 단도의 머리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아…….”
황우림은 자신의 무기력함을 깨닫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갈 만큼 이들은 무시무시한 악귀들이었다.
“적우야, 도대체 언제까지 어린애처럼 굴 테냐?”
“죄송합니다. 이사형.”
마진건은 평소와 달리 적우를 크게 꾸짖었다. 가끔 기분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그가 걱정되어 따라왔건만, 아니나 다를까 또 사고를 칠 뻔한 것이었다.
“당신이 황우림이오?”
진건의 물음에 황우림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이미 전의를 상실하여 어떤 반항도 할 생각이 없었다.
“물건은 어디 있소?”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한곳을 가리키던 황우림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는 네발로 기어가 진건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대협, 물건은 고이 전해 드릴 테니, 제발 우리 가족들은 살려 주십시오. 제발…….”
눈물범벅이 된 그의 얼굴은 처량 맞다 못해 처참하였다. 그를 바라보는 적우의 얼굴은 이내 울상이 되었건만, 진건은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인과응보라 생각하시오.”
진건은 오른손에 든 창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그대로 황우림의 등에 내리꽂았다. 꿰뚫린 그의 몸에서 쏟아진 피가 마당에 붉게 퍼져 나갔다.
수오당의 대청에는 이백여 명의 두타공파 제자들이 모두 소집되었다. 열두 명의 장로는 장문인 조양을 가운데 두고 연단에 빙 둘러앉아 있었는데 표정이 사뭇 침울하였다.
“오늘 이리 모인 이유는 계정으로 떠날 제자들을 추리기 위해서다.”
조양의 사제이자 열두 장로 중 넷째인 상당혈 정암이 드디어 운을 떼자 고요했던 장내가 곧 소란스러워졌다.
“계정이요?”
도평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자, 형진이 일어나 차분한 목소리로 그를 진정 시켰다.
“용문파에서 전서구를 보내왔다. 아무래도 문천에서 또 일이 터진 모양이구나.”
조양은 침통한 표정으로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태을신교와의 격전이 벌어진 지도 벌써 삼 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잠시 잠잠했던 그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때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아무리 약조를 맺었다 해도 그들의 만행은 점점 도를 넘고 있었다.
특히 고대산파가 크게 당하였던 탓인지 그들의 관할 아래 있는 수많은 소 문파가 갖은 피해를 보았다. 더는 지켜볼 수 없다는 생각에 거리상 중앙에 자리한 용문파에 각 문파의 정예 인원을 파견하기로 한 것이었다.
“나는 이레 뒤에 정암, 송암 장로와 함께 움직일 것이다. 형진이 너는 뛰어난 사형제들 일곱을 뽑아 먼저 가 있거라.”
“네, 사부님.”
형진은 결연한 표정으로 사형제들을 둘러보았다. 어쩌면 큰 격전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위험천만한 여정이었다. 되도록 뛰어난 이들을 데려가야겠으나 한편으로는 사문의 장래를 생각하여 적절히 실력을 섞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영, 덕원, 상정, 용훈, 청옥, 도평, 그리고 운선을 데려가겠습니다.”
운선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소스라치게 놀라 형진을 바라보았다. 결코, 자신이 낄 자리가 아니었기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형진이 그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는 먼저 나서지 말아라.”
정암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형진에게 당부했다. 그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자신이 유독 아끼는 제자 여럿이 선발대에 포함되어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네, 문주님이 오실 때까지 대기하겠습니다.”
형진은 두 손을 앞으로 들어 공손하게 읍을 한 후, 자신이 호명한 이들을 따로 불러 내당으로 향했다. 그는 이미 사부에게 들은 바가 있었기에 당장 출발해도 아쉬운 것이 없었다. 그러나 사형제들은 급작스럽게 차출된 것이므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리라 여겼다. 또한, 용문파로 가는 길은 무려 달포가 족히 걸리므로 행장을 꼼꼼히 꾸려야 했다.
“내가 너희를 뽑은 것은 평소 신뢰가 두터웠기 때문이다. 더욱이 태을신교와 전투가 벌어진다면 검진(劍陳)을 만들어야 하므로 실력이 출중한 제자들이 필요했다.”
형진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평소 사형제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형진에게서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 못내 자랑스러웠다.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
도평의 앙칼진 질문에 형진의 눈썹이 잔뜩 찌푸려졌다.
“강사제는 아직 활인검법도 전부 익히지 못했는데 어찌 실력으로 데려간단 말입니까?”
운선을 바라보는 도평의 얼굴에는 그에 대한 경멸의 감정이 한껏 드러나 있었다. 감히 이 영광스러운 선발대에 저 바보를 끼운 것이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운선이 지난번 대회에서 태을신교를 몰아낸 공이 있다는 사실을 잊었느냐?”
사형제들의 눈총에 고개를 들지 못하던 운선은 형진의 말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날의 일은 비록 의백을 위해 스스로 한 선택이었으나 결코 자신의 본심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적우의 원망 어린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쳇!”
도평은 더는 따지지 않았으나 여전히 수긍하지 못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다른 사형제들도 그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운선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오직 형진만이 운선에게로 다가와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었다.
“운선아, 네가 할 일은 따로 없다. 다만 그들을 몰아냈던 그 날의 기분을 모두에게 상기시켜 주자꾸나. 네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네……네.”
운선은 마음이 끔찍하고 떨떠름하였으나 차마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자신의 처지에서 부탁을 거절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도 가겠습니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들 앞으로 주운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눈썹이 한껏 치켜 올라간 것을 보니 심술이 잔뜩 난 모양이었다.
“사저, 안 그래도 의중을 여쭤볼 참이었습니다.”
당황한 기색을 숨기려고 형진이 부러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어색한지 왼쪽 입꼬리에서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흥! 내가 따라가는 게 별로 반갑지 않은 모양이네요.”
주운은 두타공파의 일곱 제자 주위를 한 바퀴 빙 돌더니 운선의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나는 어차피 두타공파의 정식 제자가 아니니 내 발로 어디를 가든 이러쿵저러쿵 참견하지 마십시오.”
그녀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형진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그대로 운선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떠났다. 주운은 저 가식이 뚝뚝 떨어지는 이들 가운데에 불쌍한 운선이를 세워두고 싶지 않았다.
*** 종이부시(終而復始):
(어떤 일을)한번 끝내어 마쳤다가 다시 시작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