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20화 (20/209)

#20화. 堂狗風月(당구풍월)

수오당에서의 일 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태을신교와의 일전에서 수많은 두타공파의 제자들이 죽거나 다쳤지만, 이 또한 치유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운선은 그전과 조금도 달라진 점이 없었다.

“당구풍월(堂狗風月)이라는 말도 있는데, 너는 개만도 못한 놈이로구나.”

곽도평은 여전히 활인 검법의 1초식 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운선이 한심스러워 혀를 끌끌 찼다. 재수 없게 이 멍청한 놈의 선진(先進)이 되어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된 것이 여간 짜증 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사형, 한 번만 다시 보여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 오른손이 병신이니 외공이야 그렇다 치고, 왜 내공도 늘지 않는 게냐?”

십여 차례의 본보기를 보여주었음에도 여전히 헤매는 모습에 도평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다른 사형제들이 듣든지 말든지 이 멍청한 놈을 혼내주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여기, 여기, 여기!”

도평은 막대기를 들어 운선의 단중혈, 신중혈, 옥당혈을 각각 짚었다. 두타공파의 내전 무공인 시묵공을 익히기 위해 뚫어야 하는 기본 혈 자리 세 곳이었다.

“으악!”

운선은 찌르는 듯한 고통에 숨을 쉴 수가 없어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주변에 서 있던 사형제들은 모두 도평보다 항렬이 높거나 같았기 때문에 운선이 골탕 먹는 모습에 대놓고 킥킥거렸다.

“도대체 이곳에 뭐하러 온 지 모르겠구나.”

분위기에 휩쓸려 도평은 한층 더 신이 올랐다. 이참에 이놈의 게으른 근성을 확 뜯어 고쳐주어야지 싶어 더 모진 말들을 쏟아냈다.

“검신은 이 무능한 놈을 어찌 제자로 받아들였는지……. 쯧쯧”

“알고 보면 매화선협인가 뭔가도 이 녀석처럼 한심하지 않았을까?”

도평이 다른 사형제들과 사문을 힐난하는 말을 주고받자 운선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사실 곽도평은 나이로 따지면 운선보다 두 살 아래의 동생이었다. 그동안은 자신이 두타공파에 은혜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깍듯이 사형으로 대접하였으며 모욕적인 언사에도 대들지 않았던 것이었다. 허나, 스승과 사형을 욕보이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곽사형, 제가 멍청한 것이니 스승님은 거론하지 마십시오.”

운선이 분노를 삼키려고 이를 꽉 물자 그의 입술에서 붉은 피가 살짝 배어 나왔다.

“어럽쇼? 꼴에 검신의 제자라 이거냐?”

도평의 뒤에서 팔짱을 끼며 구경하던 또 다른 사형제가 끼어들었다. 두타공파의 제자가 되기 위해 어려서부터 모진 교육을 받고 시험까지 치렀던 그들은 하루아침에 사형제가 된 그가 늘 못마땅하였다.

“이 녀석 본때를 보여 줍시다!”

누군가가 선동하자 모두 기다렸다는 듯, 넘어진 운선의 주위를 빙 둘러섰다.

“네놈이 주제를 모르고 날뛰는구나!”

도평의 발길질을 신호로 십여 명의 사형제들은 저마다 막대기를 들어 운선의 몸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그들 중에는 일부러 운선의 오른팔을 때리는 이도 있었다.

“이게 무슨 짓들이냐?”

“대……, 대사형!”

“대사형!”

형진의 우렁찬 호통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일방적인 매타작이 끝났다. 머리를 감싸고 바닥에 엎드려 있던 운선은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었다.

“우리 두타공파는 늘 의를 지키고 약한 이를 불쌍히 여기는 것을 내규로 삼았다. 그런데 어찌 이렇게 우둔하고 파렴치한 놈들이 본파의 제자라 할 수 있느냐?”

형진은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화를 참지 못하고 사형제들을 야단치기 시작했다.

“대사형 우리는 저 아이를 괴롭힌 것이 아닙니다. 이미 수일 전에 마쳐야 하는 과제를 수행하지 못한 것도 모자라 감히 형제들에게 눈을 부릅뜨고 대들었습니다. 본파의 내규에는 선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조항도 있사온데, 어째서 사형은 일방적으로 저놈 편만 드십니까?”

유난히 형진을 따르는 도평은 운선이 온 후로 그의 사랑이 옮겨간 것 같아 불만이 쌓여있던 터였다. 지금도 앞뒤 사정은 확인해보지도 않고 운선만 감싸고 있지 않은가?

“아직도 네 잘못을 깨닫지 못하였구나! 사제의 깨우침이 늦으면 끌어주고 타일러 도와주는 것이 선배의 자세이거늘, 참으로 한심하구나.”

“대사형!”

도평은 형진의 모진 말에 결국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너희 모두 당장 내당으로 가서 본파의 내규 108조를 필사하거라. 또한 도평은 곱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형진은 도평을 흘긋 흘겨보기만 했을 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엄한 처벌만 내리고는 운선을 데리고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네 저놈을 반드시 끝장내고 말겠다.’

멀어져가는 운선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도평은 있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대사형, 감사합니다. 허나, 곽사형은 죄가 없습니다. 제가 아둔하여 여러 번 가르쳐 준 초식을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운선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형진이 온화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아니다, 사람마다 재능이 다른 것이지 무공을 늦게 익히는 것이 어찌 잘못이란 말이냐? 도평에게 너를 맡긴 것은 무공을 익히게 하려는 의도도 있으나 무엇보다 너를 잘 이끌고 지키라는 뜻이었다. 아직 아이가 어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니 네가 이해하여라.”

운선은 새삼 형진의 배려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형제들은 모두 운선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의백과 대사형만이 그에게 마음을 다하였다. 그들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 노력해야 했다.

“그런데 사형, 지금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사부님께서 곧 폐관 수련에 들어가신다. 그전에 너에게 부탁할 일이 있다 하셨다.”

형진은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시국이 하 수상한 이 시기에 하필 사부님의 지병이 도진 것이 걱정이었다. 말이 폐관 수련이지 요양과 다르지 않았다.

“운선아, 몰골이 왜 그러느냐?”

개인 처소에서 쉬고 있던 조양은 운선의 얼굴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몸에 묻은 흙과 먼지는 털어내었으나 얼굴에 남은 피멍은 도저히 지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제자들을 잘못 가르쳤구나.”

조양이 안타까운 얼굴로 운선의 헝클어진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마치 그의 친할아버지와 같은 손길이었다.

“폐관 수련에 들어가신다 들었습니다.”

운선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조양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형진이 쓸데없는 소리를 한 모양이구나. 그저 연례행사일 뿐, 걱정할 일이 아니다.”

조양이 고개를 들어 형진을 바라보자 형진이 멋쩍은 듯 큼큼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는 약속한 대로 둘만 남겨두고 밖으로 사라졌다.

“운선아.”

“네?”

조양은 잠깐 망설여지는지 한참을 그의 눈만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책의 내용은 이것이 전부더냐?”

“네?”

조양은 최대한 운선이 오해하지 않도록 차근차근 설명하였다.

“너의 스승이자 내 의제는 항시 위기 상황이 올 것을 대비하자 하였다. 하여 경전 속에 비밀이 있음을 말해주었지.”

그는 인자한 얼굴로 운선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운선은 팔에 모처럼 시원한 기운이 쏟아지자 뼛속까지 시린 기분이 들었다.

“해심밀경은 원래 경국의 오래된 불교 경전이란다. 이를, 려국에서 해석한 것이 ‘해심밀경소’이지. 열 권의 해석본이 있었으니 그중 열 권째가 바로 율천이 가진 것이었다. 오직 그가 가진 것만이 경전이 아닌 무공의 정수(精髓)라 하였다.”

그는 문득 의제와의 추억이 생각나는지 한숨을 크게 푹 쉬었다.

“그럼 스승님이 가진 책은 경전 해석본이 아니란 말입니까?”

“나는 그리 들었다.”

조양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율천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거든 그 책에 숨겨진 뜻을 알아내어 세상에 남기라 하였다. 그것이 우리가 십여 년 전에 한 약속이었지.”

어느덧 맺힌 눈물로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약속이었음을 거듭 강조하며 조양은 덧붙였다.

“분명 네가 써 준 내용은 ‘해심밀경’의 내용이 맞다. 허나, 그뿐이더구나. 누락 된 내용이 없는지 다시 한번 기억을 해 보려무나.”

순간 운선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으나 곧 마음을 잡고 차분히 대답했다.

“사실, 앞뒤 내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있어 차마 적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역시 그랬구나.”

조양은 한달음에 운선의 앞으로 달려와 그의 두 손을 꽉 부여잡았다.

“가능하다면 폐관 수련에 들기 전에 써 줄 수 있느냐?”

운선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혹여 잊을까 싶어 이미 적어놓은 종이가 있었으므로 더는 망설이지 않고 조양에게 전할 수 있었다.

“오오.”

그는 그것을 받아 바로 품속에 넣더니 운선을 꽉 끌어안았다.

“율천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어디 갔었느냐?”

“주운!”

운선은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온몸에 잔뜩 들어갔던 긴장감이 확 풀어졌다. 지난 시간 동안 거의 매일 그녀와 함께 있었기에 힘든 수련도 아픈 마음도 견딜 수가 있었다.

“의백이 부르셔서 갔다 왔습니다.”

“흥! 어린 제자들에게 맡겨놓고 나 몰라라 하더니 왜 불렀대?”

주운은 언제나 그랬듯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어 투덜거렸다. 운선은 언행과 달리 매번 자신에게 마음을 써주는 그녀가 고마워서 배시시 웃음이 났다.

“주운,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뭐?”

“시묵공을 익힐 때 기를 운용하는 방향과 태을 신공이 달라 도무지 내공이 늘지 않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사실 운선은 빨리 무공을 익히고 싶은 마음에 밤잠을 쪼개가면서 내 외공을 익혔다. 그런데 이전에 적우가 알려준 태을 신공을 연마하는 동시에 두타공파의 시묵공을 배우다 보니 언제부턴가 단중혈에서 기가 뭉쳐 버리는 느낌이 나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젯밤부터는 이곳이 뭐에 찔린 것처럼 콕콕 쑤십니다.”

운선이 단중혈을 가리키며 말하자 주운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건 좋지 않은 신호인데…….”

그동안 주운은 운선이 내공을 연마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구결을 풀어주고 있었다. 운선은 적우가 알려준 구결만으로는 팔을 고칠 수 없음을 잘 알았다. 하여 책에 적혀 있던 다음 내용을 스스로 연마하려 했던 것인데, 해석할 수가 없으니 여간 익히기 쉽지 않았다. 그것을 유일하게 풀어 수 있는 이가 주운이었다. 그녀는 앞뒤 정황을 알면서도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며 그의 신공 연마를 도와주는 중이었다.

“시묵공은 익히지 않는 것이 좋겠다. 두 무공의 기원이 전혀 달라 기운을 쓰는 방향이 반대인데 무리하다 보면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단다.”

운선은 깨달은 바가 있어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태을 신공은 물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속성 자체는 불에 가까웠다. 적우에게 도움을 받아 익힌 1단계는 특히 화기(火氣)를 주로 사용하였다. 몸속에 있는 물의 기운을 데워 기혈을 순행하면 막혔던 혈이 뚫리고 불순한 화기(火氣)를 내보내는 방식이었다.

반면 시묵공은 차가운 물의 기운에 가까웠다. 기의 불필요한 흐름을 막고 세 개의 혈에 그것을 모아 단전의 화기(火氣)를 다스릴 수 있었다. 완전히 다른 두 기운이 부딪쳐 혈맥을 상하게 할지 모른다는 주운의 추측이 맞아떨어지는 부분이었다.

“활인 검법은 내공을 쓰는 검법이니 지금의 몸 상태로는 한 초식도 제대로 펼칠 수가 없었겠구나.”

주운은 그동안 운선이 그렇게 열심히 연습하면서도 검법에 전연 진전이 없는 것이 의아하였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게 되니 딱한 마음이 들었다.

“월심을 배워볼 테냐?”

“네?”

깜짝 놀라 운선이 되묻자 주운의 얼굴이 되레 뾰로통해졌다.

“싫으면 말고.”

“아닙니다. 아닙니다. 배우고 싶습니다.”

운선은 혹여 변덕스러운 주운의 마음이 변할까 허겁지겁 손사래를 쳤다.

“오늘 밤부터 시작하자.”

주운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뿌듯하여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면서 운선은 가슴이 세차게 뛰는 것을 느꼈다.

*** 당구풍월(堂狗風月):

서당에서 기르는 개가 풍월을 읊는다는 뜻

그 분야에 대하여 경험과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도 오래 있으면 얼마간의 경험과 지식을 가짐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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