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小康(소강)
서문은 자신이 모든 계획을 망쳐버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본교에서 축출된 이들의 만행까지 우리가 책임질 이유는 없소.”
마진건이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따져 물었으나 조양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우활(迂闊)한 노부가 그것까지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이미 경전을 빼돌려 놓고 참견하지 말라 하니 기가 막힌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조양은 다시금 운선을 돌아보며 그의 오른팔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저는 목숨을 걸고 저를 찾아온 이 아이의 간절함을 모른 체하지 않을 것입니다.”
서문은 더 이상의 입씨름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십사 년 전의 약속은 교주와의 일이므로 자신이 나서서 부당함을 성토할 수 없었다. 만약 이를 어기고 억지를 부린다면 무림의 모든 문파를 적으로 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허나 이렇게 아무 소득도 없이 물러나는 것 또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흥! 그들이 설혹 경전을 탈취했다 하더라도 좌영이 죽었는데 우영이 저 아이만 살려 보냈을 리가 없다. 경전은 네 놈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
분을 참지 못하고 적우가 소리를 빽 내질렀다.
“적우야!”
현진이 뒤늦게 적우의 입을 막으려 했으나 이미 늦어 버렸다.
“아, 그렇게 된 것이군요. 역시 당신들은 흑접쌍살이 이 일에 개입된 사실을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조양은 적우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 능청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서문에게는 이제 선택권이 없었다.
“고작 책 하나 때문에 자신의 사제를 죽이다니 사람이 아니구나.”
“마교 놈들 아니랄까 봐.”
“그래 어디 우리와 붙어보자. 내 절대 네놈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짐승 같은 놈들!”
고유생은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하며 욕을 내뱉었다. 그를 필두로 다른 문파의 장로들도 한 마디씩 덧붙이니 어느덧 대청은 태을신교에 대한 비난으로 소란스러워졌다.
“태을신교가 경전의 행방에 대해 밝힐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강율천을 죽였다는 것도 경전을 가져갔다는 것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서문은 드디어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천천히 부채질하며 말을 이었다.
“십사 년 전의 약속이야말로 우리가 모른다고 하면 그뿐, 이곳에 모인 여러분들을 모두 죽인다면 그 또한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되겠지요.”
그의 표독스러운 목소리와 표정에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다시 장내는 고요해졌다.
“허나 약조를 어기는 것 또한 교주님이 원하는 바가 아닐 터, 그쪽에서 방금 한 약조를 지켜준다면 우리도 여기서 물러가겠습니다.”
“대사형!”
“사형!”
마진건과 적우가 서문을 말리려 했으나 그는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목숨을 걸고 이들을 죽인다 한들, 얻을 것이 너무 적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는 것이 더 나으리라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아까의 약조대로 앞으로 태을신교의 일은 관여하지 않을 것이며 오대산검의 담합은 없을 것입니다.”
조양은 문파의 장로, 장문들과 잠깐 눈짓을 주고받은 뒤, 대답했다. 가장 큰 피해를 본 고대산파의 제자들만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노려볼 뿐, 대부분의 오대산검 제자들은 조양의 기지에 박수를 보냈다.
“그럼 저희는 물러가지요. 곧 다시 만나 뵐 일이 있을 것입니다.”
서문이 부채를 두 번 휘두르자 대청을 둘러싸고 있던 흑의인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항렬이 낮은 문파의 제자들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가슴을 쓸어내렸다.
운선은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자 적잖이 마음이 불편하였다. 또한, 적우의 억울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죄책감이 밀려왔다.
‘형님…….’
마침 자신을 바라보는 적우와 눈이 마주친 운선은 서둘러 손을 모아 그에게 인사를 했으나 적우는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무래도 기분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오히려 그의 옆에 서 있던 현진이 운선을 뚫어지라 보고 있었는데 감정을 전혀 알 수 없는 복잡한 눈빛이었다.
“괜찮으냐?”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주운이 운선의 손을 잡아 비무대 아래로 끌어내렸다.
“네. 단지…….”
운선이 적우 쪽으로 시선을 향하자 주운은 그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번 일은 네 잘못이 아니니 마음 쓰지 말아라.”
주운은 조양의 급작스러운 행동에 기분이 몹시 상한 상태였다. 이제 운선은 강호에서 모두의 표적이 될 것이 자명했다.
‘저 늙은 영감탱이가 아주 가증스럽구나.’
주운은 이 순진하고 어리숙한 아이를 앞으로 어찌 지켜야 할지 눈앞이 캄캄하였다.
서문은 사제들을 자신의 위치로 불러 모았다. 적우의 반발이 있기는 하였으나 현진의 설득으로 이쪽도 곧 분위기가 정리되었다. 이정의 시신을 어깨에 멘 진건은 잠깐 선운검파의 소금정을 노려보았지만, 곧 앞장서서 두타공파를 빠져나갔다.
두타공파의 제자들의 빠른 뒤처리로 수오당은 곧 안정을 되찾았다. 조양에게 마음이 상한 고대산파만이 급하게 하산하였을 뿐, 나머지 문파들은 삼사일 정도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움직이기로 했다.
“그럼 오대산검의 무림대회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깟 마교 놈들과의 약속을 지킬 이유가 있습니까?”
용가 형제의 물음에 조양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당분간 전서구나 파발을 통해 소식을 전하도록 합시다. 그들의 움직임을 잠시 멈춰놓았을 뿐, 반드시 다시 찾아올 것이니 그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고유생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렇습니다. 이제 그 일을 진두지휘할 맹주를 추대하여 이 수치를 갚아야 할 것입니다.”
“이 일에 공로가 큰 현로 선생께서 맡아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소금정이 조양을 추켜세우자 모든 문파의 장로들이 크게 호응하였다. 조양은 끝까지 사양하였으나 결국은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축하드립니다.”
오직 용문파의 장문 조상원만이 떨떠름한 표정이었을 뿐, 다들 밝은 얼굴로 후일을 기약하고 있었다.
“대사형, 도대체 왜 물러선 것입니까?”
적우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이서문에게 따져 물었다. 비록 우리 편에도 큰 타격이 있을 것이지만 오대산검을 뿌리 뽑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때가 있었을까? 그는 삼사형의 복수를 하지 못하고 온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었다.
“대사형, 저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여태껏 한 번도 서문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현진도 한 마디를 덧붙였다. 늘 제이, 제삼의 상황까지 고려하는 대사형이 조양의 얕은수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서문은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드디어 입을 뗐다.
“그는 우리 중 셋이 한꺼번에 덤벼야 겨우 이길 정도의 고수다. 하물며 그 자리에 있던 고유생이나 용가 형제까지 고려한다면 결코 우리에게 유리한 싸움이 아니었다.”
마진건은 묵묵히 걷고 있었으나 사형의 의견에 크게 동의했다.
“애초 내 목적은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한 상태에서 그들이 세 가지 조건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었다.”
두 문파의 장문이 크게 다쳤으니 그들을 압박한다면 그 정도 조건은 무리가 아닐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또한, 세 번째 조건은 운선을 데려오기 위한 덫이었다. 적우의 말처럼 우영이 만약 경전을 취했다면 결코 운선이 살아있을 리가 없었다. 경전의 행방은 오직 운선만이 알고 있을 것이므로 그 아이를 데려온다면 앞의 조건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나쁠 것은 없었다.
“내가 간과한 것은 두 가지.”
서문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한 듯 가던 길을 멈추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나, 부능파가 그곳에 나타난 것.”
유이정의 죽음에 서문은 이성을 잃고 말았다. 이는 적우가 고대산파를 도륙하는 것을 막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이정을 잃은 것은 우리 전력에 큰 손실이었다. 또한, 현진이의 부상 역시. 만약 진건이 오지 않았다면 목숨이 위태로웠던 쪽은 우리였다.”
현진은 진건이 엎고 있는 이정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매사 조용하고 얌전한 이였으나 누구보다 따뜻한 사형이었다. 그녀는 울음을 참기 위해 코를 크게 훌쩍였다.
“둘, 조양의 인품을 믿은 것.”
명문정파의 사람이라면 이를 부득부득 가는 적우는 사형의 말에 반발심이 들었다.
“아니, 어찌 그런 능구렁이를 믿었단 말입니까?”
서문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수년 전, 나는 조양에게 목숨 빚을 진 일이 있었다.”
젊은 혈기에 철없이 덤볐던 서문을 보내주었던 그의 너그러운 얼굴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조양의 인품이라면 결코 그 아이를 대중 앞에 드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경전의 행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이가 모두에게 밝혀졌으니 이제 그 아이의 목숨은 풍전등화가 아니겠느냐? 그자가 그러리라고는 차마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사람을 완전히 잘못 판단한 것이지.”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진건은 서문의 대답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럼 조양에게 불리한 것이 아닙니까?”
서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그는 그 아이를 버리려는 것이다.”
“네?”
적우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자신의 도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럼 운선이는 어찌 된다는 말인가? 가슴이 너무 뛰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에게 경전이 없군요.”
현진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 무릎을 ‘탁’ 치며 돌아보았다.
“그래, 그렇기에 아이를 데리고 있는 것이겠지. 알아낸 후에 아이를 버리면 그뿐.”
“정말 무서운 작자군요.”
적우는 새삼 강호의 무서움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가 참 어리석었구나.”
서문은 자신의 오판이 부끄러워 고개를 푹 떨궜다. 고작 과거의 인연 때문에 사제들을 위험에 빠뜨린 것도 모자라 사부의 명을 완수하지 못하다니. 당장 땅에 머리를 박고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 아이를 이대로 버려두실 겁니까?”
망설이던 끝에 현진이 묻자, 옆에 있던 적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는 사실 운선에게 마음이 많이 상하였다. 그가 너무 쉽게 자신을 배신한 것이 서운하여 그의 눈길을 피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위험하다는 사형의 말을 듣자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가서 운선을 빼내 오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
그러나 서문은 적우의 기대와 달리 잠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율천이 자신과 아들의 목숨까지 바쳐 지킨 아이 아닙니까?”
현진은 처참한 몰골로 쓰러져 있던 종연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강율천의 제자이기 이전에 그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아들의 목숨보다 운선을 중히 여겼던 율천을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그녀 역시 마냥 운선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서문은 더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적우는 어떻게서든 사형의 마음을 돌려 보려 간청했지만, 서문의 결심은 굳건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진건을 보았으나 그 역시 운선의 생사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사저…….”
현진은 적우를 한 번 돌아보았을 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 무리를 앞질러 가버렸다.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것이냐?”
소금정의 매서운 물음에 소소정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들 무리에 잡혀 있다가 이제야 풀려났습니다.”
그녀의 몰골이 꾀죄죄한 것으로 보아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소금정은 좀 더 그녀를 문책하고 싶었으나 제자들 앞이라 일단 그만두었다.
“흥! 그래 옛 연인의 얼굴을 보니 좋더냐?”
잠시 쉬어 가는 와중에 소금정은 옆에 앉은 아우가 못마땅해 잔뜩 비아냥거렸다.
“이제 다 지난 일입니다.”
그녀는 누가 들을까 무서워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잊을만하면 금정이 긁어대는 통에 아무리 온화한 성격의 소정이어도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더러운 네년을 받아 주었더니 그 은혜도 모르고 정에 이끌려 일을 그르치다니…… 돌아가면 죄를 크게 물을 줄 알아라.”
소금정은 자기 분에 못 이겨 이를 부득부득 갈며 말했다. 외모도 무공도 자신보다 앞서 있는 동생이 언제나 눈엣가시와 같았다. 아예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마교 놈의 아이까지 낳은 그녀를 사부님이 받아 주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언니, 저를 미워하시는 마음 잘 알아요. 벌은 달게 받겠으니 일단 목이라도 축여요.”
소정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금정에게 수통을 내밀었다. 뒤에 서 있던 제자들은 매번 망신을 당하면서도 언니를 극진히 섬기는 소정의 인품에 다시금 감동하였다.
“저리 치워라!”
금정은 소매를 크게 휘둘러 소정이 내민 수통을 내팽개쳤다. 반쯤 담겨 있던 물이 그대로 바닥에 다 쏟아지고 말았다.
“네년이 여기에 뭘 탔을 줄 알고…….”
자신의 수통을 꺼내 물을 마시며 금정은 한껏 동생을 노려보았다.
“문주님, 노여움 푸세요.”
제자들의 만류에 겨우 진정한 금정은 다시 무리를 이끌고 두타산을 내려왔다. 날씨가 꽤 많이 풀렸는지 점점 몸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한 번 더 쉬어야 할 것 같다.”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아 금정이 다시 일행을 멈춰 세우자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문주님, 서두르지 않으면 노숙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힘드시더라도 재촉해야 합니다.”
“아…아…억…….”
그때였다.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던 금정이 그대로 땅에 고꾸라져 버렸다.
“문주님!”
“사부님!”
온몸의 구멍에서 피가 터져 나온 그녀는 곧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게, 제가 준 물을 마시지 그러셨습니까?’
소정은 금정의 부릅뜬 눈을 감겨 준 후, 천천히 두 손을 모으고 합장을 했다. 그녀의 소매 속에는 고독을 잔뜩 묻힌 구슬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 소강(小康):
소란하거나 혼란하던 기색이 그치고, 잠잠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