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8화 (18/209)

#18화. 反轉(반전)

운선은 그날 밤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청색 도포인(人)이 부채를 휘저은 후 나타난 검은 나비들.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은 마치 그날을 고스란히 복기하는 것 같았다.

‘그럼 저 이서문이라는 자가 스승님을 해친 이인가?’

그러나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운선은 청색 도포를 입은 사내의 말투, 손동작, 독특한 출수 방식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이서문의 저 섬세한 손짓과 카랑카랑한 목소리와는 사뭇 달랐다.

“운선아, 괜찮으냐?”

주운은 자신의 옆에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운선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적우에게 태을 신공의 구결을 전수(傳受)한 이후로는 발작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 팔의 부패도 멈췄으며 호흡기까지 침범했던 화기도 제법 가라앉았던 터였다. 그러나 지금의 운선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몸도 가누지 못했다.

“괜찮습니다.”

운선은 혹여 주운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애써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사실 발작의 기미가 느껴지는 순간부터 계속 태을 신공의 구결을 머릿속에 그리며 운기조식을 시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 번 솟아오른 화기는 좀처럼 다스려지지 않았다.

“운선아, 시원한 우물을 떠올려라.”

그때 운선의 손끝에서부터 차가운 기운이 쏟아져 들어왔다.

“의백.”

운선의 부름에 조양은 가볍게 미소만 지을 뿐, 묵묵히 진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어쩌면 목숨마저 걸어야 할 순간에 그는 자신의 제자들이 아니라 운선을 구하러 온 것이었다. 그저 의형제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이 같은 희생을 감내할 사람이 있을까? 운선은 가슴이 뭉클하여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쳇! 그따위 망측한 탈을 뒤집어쓰고 위협하면 무서워할까 보냐?”

“어림없지. 우리 오대산검을 뭐로 보는 것이냐?”

한 무리의 고대산파 제자들이 일어나 대청 입구를 막고 있는 흑의인들 쪽으로 다가섰다. 이전에 매월 선생과 고근동의 패배에 자존심이 몹시 상한 그들은 고작 태을신교의 수하들에게조차 쩔쩔매는 상황이 여간 고깝지 않았다. 그들 모두 매월 검법을 상당 수준으로 익힌 직계 제자들이었으므로 칠원성군 정도가 아니라면 자신들을 막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두 명의 고대산파의 제자들이 검을 들자 뒤따르던 제자 여섯도 함께 검진을 만들었다. 매월 검법의 검진(劍陳)은 그 수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었다. 세 사람 이상이면 진을 만드는 데 충분하였으며 그 수가 많을수록 변형된 초식의 검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어디 막아보아라!”

앞선 두 사람이 검을 열십(十)자로 만들자 맑은 격음이 울리며 작은 진동을 만들어 냈다. 그것을 시작으로 여섯 사람의 검이 일사불란하게 상월 검법의 세 개의 초식을 구사하였다. 쌍둥이처럼 똑같은 검의 모양은 달처럼 둥글게 휘어지더니 그대로 검기를 쭉 내뿜어 앞으로 돌진했다. 선두의 둘은 여섯의 머리를 차례로 밟고 날아가 문 앞을 지키는 흑의 인들의 목을 뚫고 지나갔다.

챙!

퍽!

“으악!”

흑의인 네댓 명의 목이 떨어져 나가려는 찰나, 거대한 사내의 인영이 돌연 나타났다. 그가 든 묵직한 도(刀)는 두 명의 검기를 쳐낸 것으로도 모자라 그들의 몸뚱이를 반으로 갈라놓았다.

“저…, 적…적우!”

뒤쪽에서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던 여섯 제자는 두 사형의 잘린 몸에서 쏟아져 나온 피를 그대로 뒤집어썼다. 그리고 그것을 뚫고 나오는 적우의 악귀 같은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이 문을 넘으려면 나를 먼저 죽여 봐라!”

그의 눈에는 살기가 번뜩였다. 운선과 호형호제하며 웃음을 잔뜩 담았던 다정한 눈은 어디에도 없었다.

“네 이놈!”

제자들의 끔찍한 죽음을 목격한 고근남은 더는 참지 못하고 적우의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매월 신양선의 직계 제자이자 현진에게 망신을 당한 고근동의 친동생이기도 했다.

“어린놈의 몸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구나! 내 오늘 네 놈을 저승길로 보내주겠다.”

고근남은 준비 동작도 없이 검을 찌르며 수십 개의 초식을 한 번에 구사하였다. 매월 검법의 제 일 계승자인 그는 본파의 검법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있었다. 비록 그의 사부가 이서문에게 졌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그 여우 같은 놈이 잔꾀를 썼기 때문이었다. 만약 자신이 대결에 나섰다면 사부처럼 쉽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이서문마저도 그럴진대, 적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의 쾌도(快刀)는 단순무식하게 베기만 할 뿐, 정교함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자신의 적수는 절대로 될 수 없었다.

“도대체 그놈의 매월검인지 뭔지는 요란할 뿐 실속이 하나 없는데 왜 자꾸 눈앞에서 흔드는 것이냐?”

피를 잔뜩 뒤집어쓴 적우는 유달리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껄껄 웃어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근남은 내력의 팔 할을 실어 검에 쏟아부었다. 가장 길고 묵직한 검기로 저 건방진 놈의 머리통을 뚫어버릴 작정이었다.

“하현천무(下弦天武)”

고근남이 우렁차게 외치며 뻗은 검기는 수없이 많은 갈래의 검광을 쏟아내며 적우에게 향했다. 신양선의 검법보다는 못하였으나 그 빠르기와 화려함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한 초식에 마흔두 가지의 변화를 담은 하현천무는 하월 검법의 정수였다.

“오오. 이건 좀 볼만하군.”

적우는 살짝 놀란 듯한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검기가 얼굴 앞으로 다가오자 힘차게 도를 뻗었다. 몇 근은 족히 넘어 보이는 그의 묵직한 칼은 마치 춤을 추듯 움직이며 검기의 변화를 모두 막아내었다. 그리고,

“우리 행덕(行德)이, 맛있는 밥 먹자!”

알 수 없는 말을 뱉어내더니 그대로 도를 앞쪽으로 둘둘 말았다.

“어어!”

고근남은 자신의 검기가 마치 실제로 존재하는 것 마냥 적우의 도에 빨려 들어가자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다. 어느덧 검기를 다 빨아들인 도는 상대의 칼까지 말아버리기 시작했다.

캉, 캉, 캉, 캉, 캉.

고근남의 검은 도의 회전력을 버티지 못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장난감 검이군.”

“어…우…어….”

적우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고근남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벙긋했다.

“그래도 꽤 대단한 검법이었어.”

적우의 쾌도 행덕이 하늘 높이 치솟더니 그대로 고근남의 머리에 내려꽂혔다.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던 것처럼 눈조차 감지 못하고 절명하였다.

“아우야!”

뒤늦게 상황을 눈치챈 고근동은 아우의 죽음에 오열하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참혹한 살인에 오대산검의 모든 제자는 극도의 공포심을 느꼈다. 심약한 이들은 기절하기도 했으며 아직 무공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은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울먹였다.

“이 무슨!”

“장문!”

이제껏 자리를 지키고 있던 용문파의 용가 삼 형제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장문인 조상원을 재촉했다.

“우리 용문파는 오대산검 중에서도 가장 유서가 깊은 문파입니다. 이대로 뒷짐 지고 구경만 할 것입니까?”

“장문께서 나서지 않는다면 우리가 자진(子進)하겠습니다.”

“장문!”

용가 삼 형제의 비통한 울부짖음에도 조상원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뿐이었다. 실로 이들이 나선다면 적우를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으나 차마 허락할 수 없었다.

“사제들, 부탁이니 조금만 추이를 지켜봐 주시게.”

조상원의 뜻밖의 대답에 용가의 첫째 가현은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장문! 이리 비겁한 인물인지 미처 몰랐소이다.”

용가현의 선봉에, 남은 두 형제도 뒤따라 일어났다.

“우리끼리라도 용문파의 명예를 지키겠소.”

조상원은 수치심에 얼굴이 새빨개졌으나 선뜻 그들을 내보낼 수도 없었다. 그때,

“좋소. 협상을 좀 더 해 보도록 하지요.”

조양의 차분한 목소리가 아수라장이 된 대청을 한순간에 진정시켰다. 울며불며 비명을 지르던 이들도 어느덧 진정하여 코를 훌쩍이는 정도의 잡음만 겨우 들렸다.

“대사형, 제 쾌도 행덕은 이미 피 맛을 보았으니 이참에 배불리 먹게 해 줄 생각입니다.”

적우는 싸움을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안에 있는 삼백여 명의 정파 나부랭이들을 다 도륙해야만 이 슬픔과 분노가 진정될 것 같았다.

“적우야, 일단 이야기나 들어보자.”

이서문은 마진건을 바라보며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는 당장 선운검파의 제자들 몇을 죽일 작정이었는데 서문과 눈이 마주치자 이내 내력을 가라앉혔다.

“현로선생, 세 가지 조건을 다 들어주시겠습니까?”

이서문이 한껏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조양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평온한 얼굴로 대답했다.

“첫째와 둘째 조건은 군말 없이 받아들이겠소.”

“장문”

“현로선생”

“사백님”

조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대산검의 장로들은 저마다 그의 호칭을 부르며 만류하였다. 허나 조양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셋째 조건을 받아들이기 전에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뭐요?”

서문의 눈썹이 순간 위로 치켜 올라갔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적어도 이것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건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경전을 찾지 말라 하는 건, 이미 그것을 귀교에서 가지고 있다는 뜻인지요?”

“…….”

서문은 대답 대신 부채를 천천히 움직여 바람을 일으켰다.

‘저 늙은 구렁이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가?’

마진건을 비롯한 태을신교의 나머지 제자들도 같은 마음이었다. ‘해심밀경소’를 검신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강호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 터였다. 저 말을 하는 의도는 뻔히 검신의 죽음을 태을신교에 뒤집어씌우려는 것이 아닌가?

“어찌 검신이 가진 것을 우리가 갖고 있겠습니까?”

이윽고 서문이 대답하자 조양이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말을 받았다.

“태을신교가 경전의 일에 관여한 것을 증명할 사람이 있지요.”

“뭐?”

순간 서문은 가슴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조양의 속셈을 드디어 눈치챈 것이었다.

“운선아.”

조양은 운선의 손을 잡아 비무대 위로 올라섰다.

“이 아이는 검신 강율천의 둘째 제자 강운선입니다.”

“오오.”

조양이 대중에게 운선을 소개하자 대청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말로만 듣던 검신의 제자라니 다들 눈이 휘둥그레져 운선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수일 전, 이 아이가 저를 찾아와 검신의 소식을 전하였지요.”

조양의 눈시울이 이내 붉어지며 침통한 표정이 되었다. 자기 의형제의 죽음을 되새기자 밀려오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검신 강율천과 그의 첫째 제자 강종연은 살수들에게 처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아니, 어찌 그런 일이…….”

“헉.”

오대산검의 장문들은 저마다 다양한 신음을 내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다만 태을신교의 네 명의 제자만이 무표정한 얼굴로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이 아이는 그날 자신의 사부와 사형의 죽음을 목격하였으며 그들에게 끔찍한 고문도 당하였습니다.”

조양은 결국 턱밑으로 흘러내린 눈물을 소매 끝으로 닦으며 운선을 돌아보았다.

“운선아, 그저 그날의 일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되는 것이다.”

운선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너무나 놀라 다리까지 덜덜 떨렸으나 조양의 따뜻한 목소리에 차츰 마음이 차분해졌다. 의백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자신도 무언가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날 너의 팔을 이렇게 만든 이가 누구더냐?”

운선은 자신의 이 대답이 누구에게 유리한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상황을 지켜보면서 그는 도저히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심지어 적우는 자신과 마음을 나눈 지기가 아닌가? 아무리 그의 정체가 살인귀라 하더라도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원수로 갚고 싶지는 않았다.

그 순간 운선의 머릿속에 스승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여태껏 살아있는 이유는 오직 스승님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였다. 개인의 은원 때문에 스승에게 불효를 저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 쪽이든 결정을 해야 한다면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흑접쌍살의 우영입니다.”

“그럼 너의 스승과 사형을 죽인 이가 누구더냐?”

“흑접쌍살의 좌영입니다.”

서문은 말문이 턱 막혔다. 당했다. 저 늙은 구렁이는 단지 이 한 방을 위해 의미 없는 비무를 제안했고, 수 명의 오대산검 제자들을 희생시킨 것이었다.

“십사 년 전, 태을신교의 교주 검귀 성곤은 다음과 같이 약속하였지요. 검신 강율천이 살아있는 한, 절대로 해심밀경소를 탐내지 않는다.”

운선을 제외한 모든 무림인은 그가 할 다음 말을 알고 있었다.

“만약 강율천을 해하여 경전을 탐할 시에는 다시는 경국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

조양은 언제 울었냐는 듯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서문을 바라보았다.

“그럼 흑접쌍살은 도대체 어느 교파의 제자란 말입니까? 바로 칠원성군의 천권이 아니었습니까? 과연 당신들이 이곳에 발을 들일 자격이 있습니까?”

서문은 조양의 얼굴을 노려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태을신교의 완벽한 패배였다.

*** 반전(反轉): 일의 형세가 뒤바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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