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破帳(파장)
서로 공수하며 읍하는 두 여인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느껴졌다.
“오랜만입니다.”
맑은 목소리로 소소정이 먼저 입을 뗐으나 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른손에 든 강(剛)은 눈앞으로 비스듬히 들고 왼손에 든 강(剛)은 등 뒤로 숨겼다. 소소정과의 대결에서 두 검을 다 쓸 생각은 없었다. 실력 차이는 월등했다.
“그이는 잘 지냅니까?”
소정은 냉정한 현진의 얼굴을 마주하면서도 계속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세상 매서운 여인 같지만, 현진이야말로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차피 이 대결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들의 소식을 알고 싶을 뿐이었다.
“검을 드십시오.”
소정은 매몰찬 그녀의 반응에 결국 검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모습처럼 얇고 가냘파 보이는 검이었다. 선운검파의 앵화 검법은 초식이 많고 쾌검이었기에 검이 얇을수록 좋았다. 그의 언니인 소금정의 천천(穿川)검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하였으나 그녀의 검 역시 본파의 검법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이었다.
“그럼 아이의 안부만이라도 알려 주십시오.”
소정은 마지막으로 현진의 인정에 기대 보기로 했다. 사형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직후라 하더라도 그간의 정이 있는데 아예 모른 척할 것 같지는 않았다.
“…….”
예상대로 현진의 오른손이 살짝 아래로 처졌다. 이사형의 안부를 묻는 것까지는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감히 은이의 안부를 묻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휙!
그때였다. 선운검파 쪽에서 날아온 구슬이 현진의 가슴 정면으로 향했다. 소소정의 질문 때문에 방심하고 있던 현진은 미처 피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눈치채고 몸을 비틀었을 때는 이미 그것이 왼쪽 어깨에 다다른 후였다.
“악!”
“현진아!”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현진이 바닥에 쓰러지자 서문이 재빨리 비무대 위로 뛰어 올라왔다. 현진의 왼쪽 어깨를 뚫고 지나간 구슬이 피범벅이 된 채 바닥에 또르르 구르고 있었다.
“소소정!”
이서문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부채를 뽑아 들었다. 그간의 정리(情理)로 소소정을 상대하는 데에는 인정을 두고 싶었던 그였다. 하지만 이 역시 자신의 섣부른 오지랖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소소정은 미안한 마음에 눈물을 흘렸다. 처음 소금정이 이 같은 간계를 제안했을 때, 자신은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이들과 일대일로 붙어서는 조금도 승산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당신이 사람이면……. 적어도 사람이면…….”
서문은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니 이 치졸한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참으로 간교하고 매정한 여인이 아닐 수 없었다.
“이대 일로 싸우다니 정녕 태을신교는 소인배임이 틀림없구나.”
어느새 소금정이 비무대에 올라와 검 끝으로 서문을 가리켰다. 자신의 계획이 성공한 것에 대해 한껏 들뜬 얼굴이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마무리 짓겠습니다.”
“현진아…….”
서문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말리려 했으나 현진은 가볍게 사형의 손을 쳐냈다.
“저를 설마 못 믿으십니까? 저 늙은 여자나 데리고 들어가십시오.”
서문은 결심이 선 듯한 그녀의 눈빛을 보자 더는 말릴 수가 없었다.
“이제 이대 이가 되었으니 저랑 먼저 싸워보시겠습니까?”
서문은 너스레를 떨며 부채의 방향을 소금정에게로 틀었다. 여기서 끼어들면 직접 나서겠다는 뜻이었다.
“흥!”
금정은 어차피 이번 대결의 승패는 갈렸다고 생각했으므로 더 이상 서문과 입씨름할 생각이 없었다. 크게 콧방귀를 뀌고 나서는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비무대에서 내려왔다. 소정이 아무리 무능해도 저렇게 크게 다친 현진을 이기지 못할 리가 없었다.
현진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은 천을 집어 들고는 어깨의 상처를 감싸 묶었다. 부능파와의 싸움에서 유이정이 풀어 던졌던 눈가리개 천이었다.
“이 정도 상처는 있어야 비등한 실력이 되리라 생각하셨습니까?”
현진은 소소정을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한 것이 곧 쓰러질 것 같았으나 눈빛만큼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허나, 잘못 아셨습니다. 아직도 당신은 한참 멀었습니다.”
현진은 왼손에 쥐고 있던 강(剛)을 들어, 오른손에 있는 강(剛)의 칼자루에 끼웠다. 칼자루끼리 맞붙으니 손잡이가 가운데에 있는 양날의 창이 되었다.
“이것이 진짜 강강(剛剛)의 모습입니다.”
현진은 오른손으로 강강을 가볍게 휘둘러 보더니 소정의 앞으로 팔을 쭉 내밀었다.
“앞으로 다시는 은이를 입에 올리지 마십시오.”
소정은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고독(蠱毒)이 몸에 퍼지는 시간까지는 버텨야 한다. 한 식경이면 스스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게 될 것이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소정은 검을 들어 허공에 크게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앵화 검법 1 초식이었다. 검이 휘어지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모습이 마치 꽃이 떨어지는 모습 같았다.
현진 역시 그녀의 초식을 받아 줄 마음이 없었다. 그대로 오른손을 뻗어 소정의 초식을 무너뜨리기 위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갔다.
챙!
여러 차례의 맑고 청아한 격음(激音)이 대청 안에 가득 울렸다. 강강의 모든 초식은 투박하고 촌스러웠으나 앵화 검법의 일사불란한 검 끝을 모두 막아내고 있었다. 소정이 스물네 개의 초식을 사용했음에도 현진의 소매조차 스치지 못했다. 반면 현진의 검은 벌써 여러 번 소정의 단중혈을 지나쳤는데 매번 아슬아슬하게 간격을 두었다.
“아무래도 실력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걸.”
“외모도 실력도 다 졌구먼.”
“태을신교의 무공이 이렇듯 대단하다니…….”
오대산검의 제자들은 모두 마음을 비웠다. 애초에 실력 차이가 월등한 싸움이었다. 대결이 반 식경쯤 지나자 승패는 확실해졌다. 소정이 크게 다치지 않은 것은 단지 현진이 계속 양보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도복은 수십 개의 자상으로 인한 핏자국으로 이미 얼룩덜룩해졌다.
‘점점 느려지는구나.’
그러나 오직 한 사람, 그들의 대결을 지켜보는 소금정은 얼굴에 기쁜 빛을 감추지 못했다. 현진의 호흡이 차츰 가빠지면서 검의 움직임이 아주 조금씩 느려지는 것이었다. 구슬에 발라놓았던 고독(蠱毒)이 슬슬 올라오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되었다.’
금정의 손에는 긴장감으로 땀이 가득 찼다. 소정이 그녀의 마지막 진기를 끌어낸다면 현진은 더는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챙!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소정의 검이 반 토막이 되어 비무대 밖으로 날아갔다. 현진의 강강의 틈으로 소정의 검이 끼면서 반으로 부러진 것이었다. 비무대 근처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자리를 피하면서 대결을 벌이던 두 사람에게도 틈이 생겼다.
‘지금이다!’
강강의 빈 곳 사이로 자신의 검을 넣어 반을 부러뜨린 것은 소정의 마지막 계략이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현진의 호흡을 흐트러뜨릴 수 없었다. 앞서 고근동의 검을 부러뜨리던 현진의 모습을 떠올린 소정은 그것이 강강의 움직임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순간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소정은 부러진 나머지 검을 그대로 현진의 목덜미에 찔러 넣었다. 비스듬히 잘린 검날은 부러진 쪽보다 오히려 날카로워 경맥을 자르기에 한결 수월하였다.
“현진아!”
서문이 달려가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그는 검이 부러지는 순간 소정의 움직임을 확인하였으나 그녀를 막을 도리가 없었다.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또 한 명의 사제가 비명횡사(非命橫死)하게 된 현실에 기가 막혀 서문은 숨이 턱 막혔다.
퍽.
“악!”
소정은 현진의 목덜미에 칼을 꽂는 순간 거대한 반탄지공을 느꼈다. 그녀의 몸은 종이 인형처럼 나풀나풀 밀려나 허공에서 크게 한 바퀴를 돌았다. 바닥에 엎어지고 나서도 도저히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만하자.”
익숙한 목소리에 소정의 낯 색이 확 붉어졌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토록 만나고 싶지 않았던, 그러나 너무나 그리웠던 그이의 목소리였다.
“마진건!”
소금정의 앙칼진 목소리가 울려 퍼진 뒤에야 사람들은 비무대 앞에 서 있는 덩치 큰 남자를 알아챌 수 있었다. 소소정의 일격을 팔뚝으로 막아낸 그는 태을신교의 천선(天琁), 어상천(於上川) 마진건이었다.
“진건!”
“이사형!”
진건은 형제들의 부름에 차례로 응답한 후, 멍하니 서 있는 현진을 돌아보았다.
“괜찮으냐?”
“네.”
현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진건은 그녀의 안색을 한참 살폈다.
“고독(蠱毒)이구나. 알면서도 대결을 했다면 빨리 끝낼 일이지 왜 시간을 끌었느냐? 설마 나 때문이냐?”
현진은 대답 대신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비무대를 내려가 버렸다. 비틀거리는 것이 서 있기도 힘들어 보였다.
“소금정! 해약을 주어라.”
마진건은 분노로 떨고 있는 소금정을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오대산검의 제자들 모두 큰 두통을 느꼈다.
“흥!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마진건은 미처 소금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에게로 한달음에 날아갔다. 비무대에서 선운검파의 자리까지는 십여 척이 넘는 거리였는데 마진건의 걸음으로는 채 두 걸음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선운검파의 제자들은 급하게 검을 들어 진건의 경로를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는 눈 깜짝할 새에 소금정의 눈앞까지 도달하여 그녀의 목을 틀어쥐었다.
“죽인다.”
굵은 저음의 마진건의 목소리는 충분히 공포였다. 대청에 있는 그 누구도 선뜻 소금정을 구하러 나서지 못하고 자신의 병기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언니를 놔주세요.”
소정은 체념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서문에게로 다가갔다.
“비겁한 수를 쓴 점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겠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졌기 때문에 주는 것입니다.”
자신을 경멸하듯 바라보는 서문의 눈길을 무시하고 소정은 그대로 대청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 자리에서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못 견디게 힘들었다.
“놔라!”
마진건의 손에 힘이 풀린 것을 눈치챈 금정이 그의 팔을 휙 내치며 물러섰다. 선운검파의 제자들이 순식간에 그를 둘러싸며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흥!”
그러나 진건은 조금도 개의치 않아 하며 코웃음을 쳤다.
“이 대결은 참으로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서문이 웃는 낯으로 나서며 좌중을 두루 돌아보았다. 그는 조양 쪽으로 눈길을 멈추며 말을 이었다.
“설마 이겼다 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조양은 한참 동안 무서운 얼굴로 서문을 노려보았다. 오대산검은 의를 중시하고 정도를 추구하므로 본파의 무공 외에 사사로운 잡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암기는 물론이거니와 독을 쓴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허나, 제삼자가 두 번이나 대결에 끼어들어 방해한 것 역시 정당하지 못할 터, 서로의 과실을 인정하고 무승부로 하시지요.”
조양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마진건의 웃음소리가 온 사방에 울려 퍼졌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 따로 없구나. 어찌 너희 같은 이들을 명문정파라 할 수 있느냐?”
마진건은 그의 절기인 창을 들어 오대산검의 문파들을 하나씩 짚으며 말했다. 여차하면 모두 한꺼번에 상대하겠다는 투지가 느껴졌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선운검파는 두려움에 가득 찼으나 차마 검을 거두지 못하고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현로 선생, 그동안 선생의 인품을 존경해 왔으나 오늘로써 그것이 얼마나 착각이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서문은 적우를 불러 현진을 보살피라 이른 다음 천천히 비무대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마진건까지 온 마당에 이깟 장난 같은 비무 대결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종전의 계획대로 전면전을 치르면 그뿐이었다.
“우리가 봐주는 건 여기까지. 나름 재밌게 잘 놀았습니다. 그럼 이제…….”
서문의 얼굴에서 한순간에 웃음기가 싹 걷혔다. 미소가 없는 그의 얼굴은 먹이를 노리는 짐승의 그것 같았다.
“이곳에 있는 누구도 살아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서문이 부채를 들어 크게 두 번 휘두르자 현문 안으로 수십 명의 괴한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요사스러운 탈을 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탈의 눈은 축 처져 울고 있는데 입은 귀밑까지 쫙 찢어져 있어 마치 울면서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흑접영…….”
운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털이 다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저 탈은 흑접영들의 모습과 똑 닮았기 때문이었다.
*** 파장(破帳):
과장(科場: 마당이나 판을 이름)을 깨뜨려서 취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