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新局面(신국면)
“어째서일까요?”
운선이 주운을 바라보며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저 맹인 궁사(弓師) 말입니다. 궁시(弓矢)는 원거리에 적합한 무기인데 부 선배님의 비월(飛越)과 같은 검을 상대하기엔 불리하지 않겠습니까?”
주운은 그의 말이 일리가 있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비월은 근거리에서는 오대산검파의 일류 고수도 당해내기 어려웠다. 아무리 태을신교의 무공이 신묘하다고 해도 궁시를 사용하는 이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어째서 이서문이 저런 자충수를 두는 것일까?’
이는 비단 운선의 생각만이 아니었다. 비무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은 두 사람이 맞붙은 것에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서문은 무공도 뛰어나지만 영악한 면에서는 강호에서 따라갈 자가 없었다. 유이정의 활이 정확하다고 해도 공격을 하려면 일단 거리를 벌려야 하는데, 비월을 상대로는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천하의 백호(白狐) 이서문이 또 무슨 잔꾀를 내는 것인가…….’
부능파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내심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계뢰 유이정의 놀라운 활 솜씨는 이미 현판에 쏜 활로 충분히 확인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돌을 뚫을 만큼 위력적인 화살도 근접전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이는 필시 다른 계산이 숨어 있는 것이리라.
“당신 앞에 있는 상대는 나요. 이곳에 집중하시오.”
그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이정이 조용히 충고했다. 비록 눈은 없었으나 그의 귀는 짐승의 그것보다 훨씬 예민했다. 약간 과장하자면 부능파의 숨소리에 담긴 감정까지도 식별할 수 있었다. 지금 그는 자신을 한참 얕잡아 보고 있었다.
“기회를 주겠다. 대진을 바꿔라!”
부능파는 설사 어떤 꼼수도 없어 예상대로 자신이 이기더라도 마음이 영 찝찝할 것 같았다. 어쨌든 강호에서 비월검 부능파라고 하면 정정당당하고 의리를 지킬 줄 아는 협객이었다. 맹인을, 그것도 궁사를 검으로 제압했다고 하면 이겨도 망신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부능파가 아무리 눈치를 주어도 이서문은 그저 묵묵부답이었다.
“당신은 정말, 구제할 수 없는 인간이로군.”
유이정이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중얼거렸다. 부능파가 이런 식으로 나올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거짓으로 쌓아 올린 그의 명성이 한낱 모래성이었음을 이 자리에서 보여 주고 싶었다. 유이정은 등에 멘 화살집에서 화살을 하나 빼 들었다.
“너의 검이 아무리 대단해도 이 화살 하나만 못하다. 여기서 망설이는 것은 내가 무서워서가 아닌가?”
좌중을 돌아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부능파는 유이정의 도발에 버럭 화가 치솟았다. 넓은 아량을 베풀어 양보하려고 했건만 감히 건방진 말을 지껄이다니, 화를 자초한 꼴이었다.
“알아서 관에 들어가시겠다?”
부능파는 드디어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비월이 자태를 드러내자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감탄사를 연발했다. 정말 아름다운 검이었다. 검인지 도인지 알 수 없는 두께와 모양도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무엇보다 푸르스름한 검의 빛깔에 넋을 뺏길 것 같았다.
“우리 비월이 오늘 피로 포식하겠구나!”
부능파는 우렁찬 기합과 함께 검을 한일 자로 쭉 뻗었다. 그러고는 오른손을 크게 휘둘러 정면에 거대한 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남들이 보기에는 매우 가볍게 흔드는 것 같았으나 검의 무게를 생각한다면 어마어마한 근력이 아닐 수 없었다.
검이 회전할수록 묵직한 소용돌이가 일었다. 주변의 공기가 후끈해지더니 조금씩 소용돌이의 안쪽으로 푸른 기운이 모였다. 비월 검법 1 초식이었다.
그는 어차피 수준 차이가 확실한 시합이라면 빨리 끝내는 것이 더 나으리라 판단했다. 괜히 손속에 여유를 두었다가 상대와 거리가 벌어지면 자신에게 불리할지 모른다는 계산도 포함된 것이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유이정은 기다렸다는 듯, 비월에서 뻗어 나오는 검광(劍光)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미세하게 그의 귓불이 움직였다. 손에 들린 활의 촉은 미동 없이 계속 한쪽을 향해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하게 원을 그리고 있던 비월은 어느덧 그 궤도를 달리했다. 그러자 검광의 색이 짙어지더니 어느 순간 그사이를 뚫고 비월이 그대로 찔러 들어왔다.
“헉!”
대결을 지켜보는 이들은 모두 숨을 훅 들이쉬었다. 비월의 아름다운 몸짓에 현혹되어 공격의 맥을 전혀 읽지 못해 그 빠른 일격에 홈칫 놀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유이정이 손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목숨을 잃으리라 확신했다.
“사형!”
적우는 이정이 혹시라도 눈치채지 못할까 싶어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아까부터 여차하면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대일 대결이라고는 해도 이정에게 몹시 불리한 조건이 아닌가. 어차피 강호의 법도 따위 자신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소중한 이의 목숨이 제일 중요했다.
“흥! 버러지 같은 것들!”
적우의 움직임을 눈치챈 부능파는 코웃음을 쳤다. 허나 별로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적우가 비무대 위로 올라오기도 전에 이미 대결은 끝나 있을 것이었다.
휙!
그때, 부능파의 얼굴 위로 섬뜩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비월이 당도한 곳은 이정의 명치가 아니라 텅 빈 허공이었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상대는 이미 자신의 등 뒤로 날아온 후였다. 심지어 그는 새까만 화살촉을 자신의 눈알에 박아넣으려 하는 중이었다.
“헉.”
부능파는 최대한 허리를 뒤로 꺾으며 유이정의 화살을 간신히 피했다. 그러나 이 또한 따라잡은 유이정은 기어이 그의 오른쪽 귀의 반을 뜯어내고 말았다.
“사부님!”
“사제!”
부능파의 귀에서는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황석파의 제자들은 뜻밖의 상황에 놀라 허망한 표정으로 자기 편의 이름만 부르고 있을 뿐이었다.
“네 이놈!”
부능파의 분노는 이미 표정에서 다 드러났다. 송충이 같은 그의 눈썹은 거꾸로 쓴 팔(八)자가 되어 이글거리는 눈으로 유이정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이번엔 반드시 눈을 파낼 것이다.”
오히려 차분해진 유이정은 하나의 화살을 더 꺼내더니 들고 있던 활과 함께 반으로 쪼갰다. 한 자(尺)도 채 되지 않는 길이의 그것들을 양손에 하나씩 나눠 드니, 상대의 눈에는 긴 젓가락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것으로 어찌 저 묵직한 검을 이긴단 말인가?’
운선은 그들의 대결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누가 봐도 버거운 상대인 부능파를 대하면서도 조금도 투지가 줄지 않는 유이정의 모습이 멋있게 느껴졌다. 분명 머릿속에서는 악인(惡人)이라 생각하면서도 자꾸 마음이 반대로 흘렀다.
부능파는 유이정의 준비 동작을 기다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화살을 반으로 자르고 있는 순간에 이미 비월을 휘둘러 또 다른 도형을 만들었다. 그것은 처음엔 육방(六方)의 모습이었으나 조금씩 그 각이 많아져 곱으로 늘었다. 점차 늘어나는 검기 때문에 부능파의 신형마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비월검법 6 초식 ‘심재(心齋)’였다.
휘익!
부능파의 오른손이 그대로 이정의 목덜미를 향해 움직이자, 비월이 만들어 낸 다각형의 검기가 동시에 그에게로 쏟아져 뻗쳤다. 그 현란한 움직임에 지켜보는 이들의 눈은 사시가 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눈이 없는 이정에게는 보일 리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멈추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 빠르게 움직이더니 수십 개의 검기를 유려하게 피해 순식간에 부능파와의 거리를 좁혔다.
대결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유이정에게 훨씬 불리할 것 같은 근접전이었다. 허나 실제로 뚜껑을 열어보니 거리를 벌리고 있는 쪽은 오히려 부능파였다. 유이정이 자신의 눈앞까지 바짝 다가오자 당황한 부능파는 본능적으로 보법을 사용하여 뒤로 두 척이나 피해 버렸다.
“사형!”
적우의 외침에 그제야 사람들은 유이정의 왼팔이 이미 비월의 검기에 닿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잿빛 도포가 점차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이정은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부능파의 안면만을 노리고 계속 전진했다.
“네 이놈!”
부능파는 일갈하며 왼손으로 주먹을 쥐고는 빠르게 세 번을 돌렸다. 그러더니 그 회오리 안에 팔 할에 가까운 내력을 쏟아붓는 것이었다. 그의 또 다른 특기인 권풍(拳風)이었다.
“이정아! 피해라!”
여태 입을 꾹 다물고 지켜보던 이서문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그의 내력이 실린 목소리에 대청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 귀를 막았으나, 정작 그 소리를 들어야 할 이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유이정은 부능파의 권풍을 정면으로 맞으며 그의 얼굴 쪽에 다다랐다.
퍽!
아니나 다를까, 거대한 힘이 이정의 명치에 적중하였다. 그의 몸이 인형처럼 반으로 훅 접히더니 그대로 비무대 아래로 던져졌다.
“사형!”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적우는 그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이정에게 달려가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가망이 없을 것 같았다.
“사부님!”
“사숙!”
“사제!”
유이정으로 쏠렸던 모두의 시선이 이번에는 한순간에 황석파 쪽으로 돌아갔다. 아까의 상황에서 그 누구도 부능파가 어찌 되었는지는 보지 못했다. 벼락같은 권풍을 뿜어내던 그가 다칠 수 있다는 생각을 과연 누가 할 수 있었을까?
“혈을 누르십시오.”
달려온 조양은 부능파의 두 눈에 박힌 두 개의 화살을 차마 제거하지 못하고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정확하게 꽂았는지 상처에서는 피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만약 섣불리 활을 제거했다가는 안구가 뽑히는 것은 물론이고 목숨도 위태로웠다.
“으아아아악!”
고통에 겨운 부능파의 비명이 대청을 가득 메웠다. 두 사람의 혈전을 지켜본 이들 모두 공포심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부능파의 실력도 그러했지만, 그보다 죽음을 불사하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유이정의 집념에 두려움을 느낀 탓이었다.
“무엇이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든 걸까요?”
“뭐?”
마치 뜬구름 같은 소리를 하는 운선이 당황스러워 주운이 되물었다.
“그는 이 싸움의 승패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어요. 그저 상대를 죽이겠다는 투지만 있었지요. 자신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단 말입니다.”
운선은 왠지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가 왜 승산 없는 대결에 자원했는지 이제 알았습니다.”
운선은 놀란 토끼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주운을 향해 슬픈 표정으로 웃었다.
“사형!”
쿨럭거리며 검붉은 피를 계속 토해내는 이정은 죽음의 문턱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서문은 우선 삼사형을 끌어안고 애달프게 울고만 있는 적우를 힘겹게 떼어냈다.
“이정아, 이제 되었다.”
서문은 애써 눈물을 삼키며 사제의 손을 꼭 잡았다.
“대사…형…제가 잘…잘… 해냈습니까?”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한 서문은 목이 메어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사부님, 사부…님께 죄…송…하….”
이정은 마지막 말을 다 잇지 못하고 검은 피를 잔뜩 토하더니 그대로 숨이 끊어졌다. 그의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린 땀이 피와 섞여 턱밑까지 흘렀다. 분명 불가능한 일일 텐데도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 편히 쉬어라.”
서문은 눈을 감더니 한동안 사제의 손을 잡고 있었다. 다시 일어났을 때는 그의 얼굴에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치명상을 입었으니 이 판은 무승부 아닙니까?”
서문은 조양을 바라보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양은 차마 대꾸하지 못하고 무서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다음은 누가 나오시겠습니까?”
“접니다.”
조양이 대답하기도 전에 비무대 위로 나선 것은 선운검파의 부장문 소소정이었다. 이서문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으나 곧 현진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으나 넋이 나가버린 것 같았다.
“가능하겠느냐?”
서문은 유이정의 죽음을 헛되이 하고 싶지 않았다. 대결은 계속되어야 했다.
“아까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현진은 서문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소소정이라 해도 봐주지 않겠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이미 쌍검 강강이 들려 있었다. 서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더 이상의 자비는 없었다.
*** 신국면(新局面): 새로운 국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