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5화 (15/209)

#15화. 激戰(격전)

“그만하시오!”

이제껏 잠자코 있던 용문파의 조상원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일이 벌어지는 내내 수심에 가득 찬 얼굴이었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서문은 그의 얼굴을 흘끗 보고 말았을 뿐, 별다른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제가 제시하는 조건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 앞으로 오대산검은 태을신교의 일에 절대로 관여하지 않는다.”

이서문은 천천히 대청을 크게 돌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의 발끝을 따라 움직였다. 마음속에는 불길이 치밀었으나 먼저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둘, 이후 오대산검은 일절 무림대회를 열지 않는다.”

태을신교의 나머지 사형제들은 대사형의 모습을 상당히 못마땅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저 목적을 달성하면 되는 것이지 언제나 그는 이렇게 상대에게 기회를 주곤 했다. 좋게 말하면 인간적이었으나 참으로 손해 보는 성격이 아닐 수 없었다.

“셋, 다시는 ‘해심밀경소’를 찾지 말 것!”

그의 마지막 조건을 듣자 운선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왜 그들의 입에서 저 이름이 나오는 것인가? 그는 본능적으로 옆에 있는 주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침 자신을 바라보는 주운과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주운은 그 이유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월광취우(月光驟雨)”

고대산파의 신양선은 그들의 오만방자한 조건을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일갈하며 내지른 그의 지팡이는 속살을 덮고 있던 나무집과 분리되며 순식간에 본래의 모습을 찾았다.

챙!

퍽!

불시의 일격이었는데도 서문은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신양선의 검을 가볍게 받아내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서너 합을 주고받았는데 놀랍게도 신양선의 검은 한 합에만 십수 번 초식이 바뀌었다.

부채가 짧아 검을 상대하기 쉽지 않았음에도 이서문은 그의 현란한 초식을 모조리 받아내었다. 허나 매월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맹렬한 기세를 내뿜었다. 아마도 몇 합이 더 지나면 이서문의 부채는 산산조각이 날 것이었다.

“놀라운 검법입니다.”

분명 수세에 몰리는 것 같은데 서문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더 황당한 것은 근거리에 그의 사매인 현진이 서 있었으나 조금도 사형을 도울 기미가 보이지 않는 점이었다.

“월훈(月暈)”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신양선이 검법을 바꾸자마자 검날이 갑자기 춤을 추듯 출렁였다. 분명 석 자(尺) 정도의 검이었는데 거의 두 배가 넘는 길이로 보이는 것이었다. 이때야말로 서문도 자못 놀란 눈치였다.

“아…, 저것이 바로…….”

매월검을 바라보는 주운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그토록 궁금했던 검법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니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검으로만 본다면 매월 선생을 빼놓을 수 없지. 무려 한 초식에 마흔두 가지 움직임이 있단다. 상월검이라면 또 몰라도 하월검은 나조차도 버겁지.”

주운은 사부의 평가를 떠올리며 그의 검법을 자세히 훑었다. 과연 그 빠르기와 변화가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검이 마치 채찍 같습니다. 어떤 것이 진짜입니까?”

운선은 매월검의 움직임에 현혹되어 머리가 어지러웠다. 스승과 사형의 수련 장면을 옆에서 지켜본 적은 있었으나 이렇게 현란한 검법은 처음이었다. 지팡이가 검이 된 것도 놀라웠는데 이번에는 채찍이 되어 이서문의 온몸을 휘감아 들어가고 있었다.

“저것을 검기(劍氣)라고 한다.”

서문 역시 신양선의 검법이 바뀐 것은 허수일 뿐, 검에 내력을 담아 움직이는 것임을 곧 간파했다. 하지만 알고도 도무지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송 솟아오르고 있었다.

“대사형, 아무래도 어렵겠습니다.”

여태 남 일처럼 지켜보던 현진이 그제야 한마디를 툭 던졌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서문은 멋쩍은 듯 뒷걸음질 치더니 순식간에 부채를 거둬들였다.

“헉!”

불안한 마음으로 대결을 지켜보던 운선은 이서문의 의외의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나 다를까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매월검이 빠르게 그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다음 장면이 너무 뻔하여 운선은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턱!

“억!”

단말마의 비명이 들리고 나서 장 내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결국, 검기를 피하지 못했구나 싶어 운선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쯧쯧, 선배님께서 몰아붙이지만 않았어도 절대로 꺼내지 않았을 겁니다.”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이는 서문이 아니라 신양선이었다. 그의 중부혈에서는 검붉은 피가 송송 뿜어나오고 있었는데 조양이 달려와 혈을 막지 않았다면 생명이 위태로울 뻔하였다.

“네 이놈! 무슨 암기를 쓴 것이냐?”

신양선의 제자인 고대산파의 고근동이 사부의 앞으로 뛰쳐나왔다. 그는 나오는 동시에 출검하였는데 그 동작이 신속하여 칼끝이 이미 서문의 목덜미에 다다랐다. 하지만 서문은 비켜서기는커녕 곤란한 얼굴로 미소만 짓고 있었다.

“저런, 암기라니요. 서생에게는 목숨보다 중한 붓이 아닙니까?”

그제야 대중들의 시선이 그의 왼손으로 옮겨갔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는 부채를 든 오른손을 거둬들이며 왼손으로 가슴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두 번째 병기(兵器), 철편(鐵片)이었다. 손바닥 크기만 한 철편은 그 끝이 뾰족하여 마치 붓과 같았는데 유달리 손이 큰 이서문이 들고 있으니 암기와 다를 바 없었다. 신양선은 검의 위력만 믿고 서문의 계산된 빈틈에 들어갔다가 치명상을 입은 것이었다.

“요사스러운 속임수로 우리를 우롱하다니, 내 너를 용서할 수가 없다.”

서문이 주절주절 무언가를 더 말하려고 하자, 고근동은 그에게 겨누고 있던 검을 그대로 쭉 뻗었다. 사실 그의 목적은 사부의 복수가 아니라 서문의 입을 막는 것이었다. 그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순간 고대산파의 위신은 밑바닥으로 떨어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근래 그들의 검법 수준이 오대산검 중 가장 떨어진다는 평가가 심심치 않게 들렸다. 오직 신양선의 매월검만이 그들의 자존심이었는데 백 합도 넘지 못하고 마교의 제자에게 패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더는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할 것 같았다.

“흥! 너 따위가 우리 사형의 옷깃이라도 스칠 수 있겠느냐?”

고근동의 검이 서문의 목덜미에 닿으려던 찰나, 갑자기 큰 원을 그리며 휘어져 버렸다. 서문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현진의 쌍검 강강(剛剛)이었다. 강강의 형태는 매우 기묘하여 검의 가운데가 일 자로 비어 있었는데, 고근동의 검이 그사이에 걸려 완전히 반으로 부러지고 만 것이었다.

“요망한 년이!”

그러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매서운 검기가 그의 명치 쪽으로 불어 닥쳤다. 몸을 뒤로 반 접어 피하려 했으나 결국 그의 앞섬이 반쯤 뜯겨나가 버렸다.

“자자, 일단 진정들 하십시오.”

이서문이 현진의 팔을 잡아 말리며 좌중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순식간에 고대산파의 고수 두 명이 상처를 입은 것을 본 사람들은 선뜻 나서지는 못하고 짧은 숨만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이렇게 몸과 마음이 상할 수 있습니다. 허니, 헛된 노력은 그만하시고 이만 대회를 마무리하시지요.”

이서문은 계속 웃는 낯으로 말하고 있었으나 그의 말투는 아까보다 훨씬 고압적이었다. 그는 웬만하면 다치는 사람 없이 원만하게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적우나 유이정 같은 거친 사제들이었다면 이미 두타공파의 수오당은 피바다가 되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자꾸 변수가 생기니 슬슬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묵묵히 신양선의 상처를 돌보던 조양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아까의 인자함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리를 포위한 후에 일방적으로 조건을 들이민 것은 소인배의 짓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여 동등한 조건을 걸어 서로의 요구를 조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태껏 답답해도 꾹 참고 있던 적우가 결국 폭발하였다. 대사형이 다 계획이 있겠지 싶어 애써 혈기를 억누르고 있었는데 자신들을 소인배라고 부르니 참을 수가 없었다. 하여, 그는 짧은 기합과 함께 조양의 앞까지 한달음에 뛰쳐 달려왔다.

“이 늙은이가 분수를 모르고 뭔 개수작을 부리려 하는가?”

“흥!”

조양은 적우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일 장을 날렸다. 두타공파의 절기 시묵(詩黙) 15절 중 3장이었다. 손바닥과 마디의 금이 새빨개지며 출수 된 장력은 파공음만으로도 몸이 떨릴 정도의 한기를 내뿜었다.

휘익!

일직선으로 뻗어가던 장력은 서문이 필사적으로 날린 부채의 바람 때문에 크게 왼쪽으로 휘어졌다. 방향을 바꾼 묵직한 힘은 대청 밖 마당 구석으로 돌진하여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어냈다.

퍽!

“조양!”

이서문의 온화한 얼굴이 순식간에 잔뜩 구겨지며 흉측한 인상이 되었다. 자신의 가족과도 같은 사제가 죽을 뻔한 사실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서문이 부채로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면 적우의 배가 어린아이 머리통만 하게 뚫렸을 것이었다.

그러나 조양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차분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이미 고대산파와는 겨뤘으니 남은 네 개의 문파에서 한 사람씩 나와 당신들을 상대하겠습니다. 만약 우리 중 과반이 진다면 요구에 따르도록 하지요.”

미리 약속한 것은 아니었으나 오대산검의 장문들은 모두 그것이 최선임을 알고 있었기에 누구도 반발하지 않았다. 사실 수오당에 갇힌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럽시다.”

이서문은 분해서 씩씩거리는 적우를 돌려세우며 대답했다. 자신이 가장 염려했던 부분을 조양은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들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힘으로 이 많은 고수를 제압하려 든다면 이길 수 있을지언정 피해는 면치 못할 것이 뻔했다. 당장 적우의 상황이 그것을 잘 보여주었다.

그들은 잠시 의논할 시간을 갖기로 하고 서로의 거리를 벌렸다. 조양은 장로 이상의 항렬을 가진 이들을 따로 모아 내당으로 이동했다. 서문 역시 현문 밖으로 나가 사제들을 한곳에 모았다.

“참으로 여우 같은 사람이네요.”

현진이 쌍검을 칼집에 넣으며 서문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서문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한숨을 크게 쉬었다. 원래 그는 말로 현혹하여 시간을 벌고 한두 사람을 빠르게 제압하여 조건을 수락하게 할 작정이었다. 허나, 조양에게는 그 얕은수가 먹히지 않았다.

“너는 그 성질머리부터 좀 내려놓아라. 아까는 정말로 죽을 뻔하였다.”

적우는 잔뜩 억울한 표정이었으나 사형이 몹시 화난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는 대거리는 하지 않았다.

“순서는 누가 나오는지를 보고 결정하면 된다. 다만 선운검파는 현진이 맡는 것이 좋겠다.”

“혹여 소 낭자 때문입니까?”

현진은 아무렇지 않은 척 툭 뱉었으나 심란한 표정은 감출 수가 없었다. 서문 역시 같은 마음이었기에 되도록 내색하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만약 소 낭자가 출전하거든 다치게 하지는 말아라.”

초가 반쯤 탈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 그들은 다시 대청으로 모였다. 아까와는 달리 오대산검의 제자들은 비무대를 가운데 두고 둥글게 자리를 잡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결코, 명문정파인 자신들이 질 리 없다는 자신감과 아까 본 이서문의 무공에 대한 두려움이 섞인 묘한 표정이었다.

“자, 누구부터 선공(先攻)하시겠습니까?”

다시 표정에 여유를 찾은 듯한 이서문이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첫판이니 서로의 실력이나 가늠하자는 의도로 적당한 고수를 내세울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흥! 이 버러지 같은 놈들, 내 본때를 보여주마!”

부능파가 비월검을 힘차게 휘두르며 비무대로 뛰어 올라왔다. 아까 이서문의 귀엣말에 온몸이 굳어버렸던 그가 아니었다. 누구라도 걸리면 죽여 버리겠다는 표정으로 좌중을 돌아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황석파의 제자들은 모두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비월검이라면 결코 이서문의 무공에 뒤지지 않았다. 하물며 그 밑의 사제들은 견줄 바가 되지 못했다.

“다시 한번 말해 보시오.”

별말 없이 추이를 지켜보던 유이정이 갑자기 비무대 쪽을 향해 외쳤다. 그 목소리의 기저에 가느다란 떨림이 있어, 오대산검의 제자들은 그가 부능파에게 겁을 먹은 것으로 생각했다.

“흥! 열 번이라도 더 말해주지! 이 버러지 같은 놈들아!”

이서문은 당황하여 부능파를 저지하려 했으나 이미 한발 늦어버렸다. 유이정은 떨리는 손으로 대사형의 팔을 더듬더듬 잡으며 물었다.

“이곳에 부능파가 있습니까?”

“사제…….”

이서문은 차마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저 이정의 손만 꼭 잡을 뿐이었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이정아…….”

“제가 나갑니다.”

서문이 잡고 있던 이정의 손이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비무대에는 맹인 궁사가 긴 검은 머리를 나풀거리며 부능파 앞에 서 있었다.

“드디어 만났구나.”

그는 눈을 잃은 후로 한 번도 벗지 않았던 눈가리개를 천천히 풀었다. 검은 천에 가려져 있던 그의 눈은 안구가 없어 휑한 자리만이 남아 있었다.

*** 격전(激戰): 격렬하게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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