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4화 (14/209)

#14화. 一觸卽發(일촉즉발)

“강호인들은 참 무리 짓는 걸 좋아한단 말이야. 다들 안 바쁜가? 어찌 생각하오, 삼사형?”

적우가 히죽히죽 웃으며 옆에 서 있는 유이정을 툭 쳤다. 사제가 그러든지 말든지 그는 팔짱을 낀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발을 들이느냐?”

황석파의 고유생이 벼락같은 호통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월산(月山)이라는 호(號)와 달리 고지식하고 완고한 성격의 그는 사파의 무리가 감히 정파의 영역에 들어온 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디 감히, 태을신교 따위가!”

“살인마들이 어찌…….”

그의 호통을 시작으로 오대산검 제자들은 너도나도 태을신교의 등장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심지어 흥분한 몇몇은 병장기를 뽑아 들고 뛰쳐나가려고도 했다.

“진정하십시오.”

차분하지만 조용한 목소리가 순식간에 좌중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조양은 흥분하여 수염까지 바들바들 떨고 있는 고유생의 어깨를 가만히 짚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고 선배님, 우선 이들이 온 연유에 대해 들어봅시다.”

그는 태을신교가 어떤 방식으로든 이곳에 나타날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 중 몇이나 온 것인지,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신중하게 파악해야 했다. 도발에 넘어가 쉬이 흥분하면 저 교활한 놈들의 덫에 걸릴지도 몰랐다.

“두 소협의 명성은 익히 들었으나 실제로 보니 과연 허명은 아닌 듯싶소.”

조양은 적우와 유이정 쪽을 향해 공수하며 말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예의가 바른지 듣는 상대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역시 현로 선생은 사리 분별이 정확하고 식견이 남다르시군요. 저 늙은이와는 근본부터 다른 듯합니다.”

적우의 되바라진 말에 황석파의 제자들은 얼굴이 시뻘게져 누구라 할 것 없이 자신의 검을 그러쥐었다. 부능파는 일부러 이쪽의 화를 돋우기 위해 막말을 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손을 들어 제자들을 진정시켰다.

“허나, 불청객(不請客)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을 터, 일단 물러갔다가 정식으로 방문을 청한다면 그 후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공손함은 잃지 않으면서도 단호하게 선을 긋는 조양의 발언에 정파 인들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너희 따위가 참석할 대회가 아니라는 말을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허허, 현로선생의 혀 안에 도끼가 있습니다.”

이때 부드럽고 잔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두타산의 깊은 산자락을 타고 공명을 일으켜 메아리처럼 퍼져나갔다. 곧이어 여유롭게 부채를 흔드는 말쑥한 차림의 서생이 대청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태을신교 천추, 이서문이 강호의 여러 선배님을 뵙습니다.”

그는 깍듯하게 예의를 지키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 어느 동작에도 경박한 구석이 없었다. 만약 그가 스스로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면 오대산검의 제자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이대협, 참으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조양은 수년 전 이서문을 만났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나 지금이나 외모 면에서는 조금도 달라진 점이 없어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이제 거의 중년에 가까워졌을 텐데도 얼굴이 해사한 것이 청년과 같았다.

“우리가 불속지객인 것은 틀린 말이 아니나, 이 대회의 원인이자 목적이 또한 우리이니 이보다 중한 관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서문이 싱글거리며 대답하자 시끌벅적 떠들던 장 내의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실로 틀린 말이 아니었다.

“흥! 그럼, 말이 나온 김에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져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조양이 바로 대꾸하지 못하자 성질이 급한 부능파가 불쑥 끼어들었다. 어차피 돌려 말해봤자 저 미꾸라지 같은 놈은 궤변을 늘어놓으며 빠져나갈 것이다. 이왕 오대산검이 다 모인 김에 저놈들의 자백을 받아낸다면 일이 더 쉬워질 터였다.

“저는 워낙에 시시비비 따지는 것을 좋아하니 반가울 따름입니다.”

이서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부능파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만 보면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이처럼 반가워 보였다.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적 아무개가 연반표국 일가족을 괴멸(壞滅)시켰다. 오대산검의 오랜 친구인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어찌 갚을 것이냐?”

“오오”

이서문은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의 뻔뻔한 태도에 독이 잔뜩 오른 부능파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생각 같아서는 저 빙글빙글 웃는 입꼬리를 쭉 찢어버리고 싶었으나 제자들 앞에서 체면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참는 중이었다.

“적우야, 이 말이 사실이냐?”

이서문은 마치 처음 듣는다는 듯, 적우를 보며 물었다.

“네, 대사형. 그 후안무치(厚顔無恥)한 놈들을 제 쾌도로 쓸어버렸지요.”

적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한껏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오해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던 운선은 그런 그의 모습에 작게 신음했다.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본 것이었다. 주운은 상심한 표정의 운선을 흘끗 쳐다보았으나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호의 정리(情理)란 몇 마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법이었다.

“그렇다는데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서문은 애써 미안한 표정을 지었으나 조금의 진정성도 느껴지지 않았다. 부능파는 더는 참지 못하고 비월을 꺼내 들었다.

“그럼 너 역시 머리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으드득 이를 가는 부능파의 얼굴은 마치 한 마리의 사나운 짐승 같았다. 황석파의 어떤 이도 그가 이처럼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그 기세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문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그건 좀 곤란합니다. 부선배님.”

“뭐라?”

이서문은 부능파의 비월을 부채로 가볍게 툭 치며 말을 이었다.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을 원하셨으니 한 마디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대뜸 부능파의 오른쪽으로 이동하여 그의 귓가에 다가갔다. 그 몸놀림이 어찌나 빠른지 지켜보는 이들이 눈치챘을 때는 이미 이서문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고 난 후였다.

“적우를 내어줄 수 없는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이서문의 귀엣말을 들은 부능파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의 얼굴은 순간 붉어졌다가 퍼레졌다가 낯빛이 오락가락하였는데, 분명 울혈이 안에서 들끓는 것 같았다.

도대체 저 마교도가 무슨 말을 했길래 기세등등하던 비월검의 말문을 막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사제의 위험을 눈치챈 고유생이 냉큼 다가가 그의 등에 손을 대고 조용히 본파의 내력을 주입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씩 부능파의 호흡이 안정되자 얼굴도 혈색을 되찾았다.

“그럼 일심방의 일은 어찌 된 것이냐?”

날카로운 목소리에 서문이 바라보니 선운검파의 무리 가운데서 깐깐하게 생긴 중년 여성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선운검파의 해미(海美) 소금정 장문 아닙니까? 실로 오랜만입니다.”

인사는 소금정을 바라보고 하였으나 그의 눈은 옆에 앉은 소소정을 향했다. 아름다움은 한풀 꺾였으나 고운 이목구비는 여전하였다. 서문은 왠지 모를 죄책감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흥! 그것도 몇 마디 말로 피해 갈 테냐?”

서문이 소소정을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챈 금정은 잔뜩 감정이 상해 더 표독스럽게 그를 몰아붙였다. 오대산검 그 누구도 자신만큼 이들을 증오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반가운 얼굴이 있습니다.”

서문이 피식 웃자, 아까 비무대에 올라 일심방의 참극을 증언하던 문지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내 분명 두타산으로 가 전하라고 했지만 이리 극적으로 지어낼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서문은 퍽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서문이 그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노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무언가 변명을 하려는지 입을 뻐끔거렸는데 땀을 뻘뻘 흘리는 양이,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런, 제가 도와드릴까요?”

서문이 눈썹을 축 내리며 그의 곁으로 가기 위해 움직였을 때였다.

“헉……, 허억!”

노인은 갑자기 두 손으로 목을 부여잡더니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다 이내 뒤쪽으로 나자빠지는 게 아닌가?

“저런…….”

서문은 살짝 당황한 듯 보였으나 곧 평정심을 찾더니 다시 부채를 천천히 움직였다.

“살인이다!”

“저 살인마 놈!”

“에잇, 빌어먹을 놈!”

대청은 온갖 욕설로 시끄러워졌다. 아무 잘못도 없는 노인의 끔찍한 죽음을 눈앞에서 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점잖은 얼굴로 태연하게 살인을 자행하는 이서문의 모습은 악귀의 현신(現身) 같았다.

“참으로 곤란하게 되었군.”

뒤쪽에서 무심히 관망하던 유이정은 청각만으로도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차피 이들과는 대화가 될 리 없는데도 굳이 말장난을 주고받는 대사형이 영 못마땅했다.

“대사형,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차분하고 조용한 말투였으나 중후한 내력을 쏟아부은 그의 목소리에 장 내는 일순 조용해졌다. 오대산검의 제자들은 갑자기 가슴이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공을 전혀 모르는 운선은 당장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오냐 오냐.”

서문은 셋째의 질책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다른 이는 몰라도 이정이 화가 나면 돌이킬 수 없었다. 그의 활 몇 개에 자신의 큰 그림을 망칠지도 몰랐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조양을 바라보며 가볍게 읍했다.

“이제 대화는 그만하면 되었고, 본론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조양은 생각보다 막강한 그들의 실력에 내심 마음이 무거웠다. 수적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훨씬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막상 접하고 보니 자신이 없어졌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마음과 달리 인자한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동안 우리는 태을신교가 세를 넓히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강호의 법도를 어기는 일이 있어도 차츰 나아지려니 하는 마음에 너그럽게 넘겼습니다. 허나, 연반표국이나 일심방의 일처럼 사리사욕을 위해 무고한 이들을 살해하는 행위를 더는 좌시할 수 없겠습니다. 하여,”

“하여?”

조양의 일장 연설에 서문이 배시시 웃으며 따라 말했다. 그의 표정에는 상대에 대한 조롱과 멸시가 가득 담겨 있었다.

“우리 오대산검은 태을신교의 해체와 경국에서 견축(見逐)될 것을 요구합니다.”

조양의 말이 끝나자 오대산검의 모든 제자는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 연설에 감동한 것은 물론이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태을신교의 뜻밖의 공격에 운기조식하느라 바빴던 그들은 조양의 한마디 한마디가 울려 퍼질 때마다 가슴이 시원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실제로 그의 목소리에는 유이정의 내력을 튕기는 또 다른 기운이 실려 있었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로구나!”

이번에는 구슬처럼 맑은소리가 대청을 가득 메웠다. 곧이어 현문 밖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태을신교의 옥형, 현진이었다.

“소백화다!”

“와……, 마치 선녀 같구나.”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에 오대산검의 청년들이 넋을 잃었다. 월궁항아(月宮姮娥)가 따로 없다는 소문은 들어왔으나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현진아, 생각보다 빨리 왔구나. 맡긴 일은 잘하였느냐?”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서문이었으나 사매의 얼굴을 보자마자 방긋 웃었다.

“말씀하신 대로 사문(四門) 안에 아이들을 배치하였습니다.”

그녀는 딱딱하게 대답하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청을 쓱 훑었다. 운선의 얼굴을 보며 잠깐 멈칫하는 것 같았으나 곧 시선을 거두었다.

“우리는 그리할 생각이 없으니, 할 수 있으면 한 번 내쫓아 보십시오.”

서문은 방금까지는 조양 때문에 잔뜩 화가 났으나 현진이 들고 온 소식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일이 순조롭게 잘 풀려가고 있었다.

“지금 이곳은 태을신교의 삼백 교도들로 포위되었습니다.”

충격적인 소식에 오대산검의 모든 이들은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이서문의 태도로 보아 허투루 흘리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문주님이 숨겨 놓은 두타공파의 제자들 역시 모두 제압하였으니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이대로 다시는 바깥 구경을 못 하든지, 저희의 조건을 들어주든지. 어찌하시겠습니까?”

조양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하여 입술을 꽉 깨물었다. 철저히 대비한다고 하였건만 어찌 이리 쉽게 제압당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 일촉즉발(一觸卽發):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할 것 같은 매우 위급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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