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3화 (13/209)

#13화. 不速之客(불속지객)

“아무리 원한이 있기로서니 어찌 무예를 모르는 이들의 목숨까지 노린단 말입니까?”

부능파는 들고 있던 비월검을 바닥에 퉁 소리가 나게 꽂으며 목청을 높였다.

“적우는 물론이거니와 흑접영 역시 태을신교에 적(籍)을 둔 적이 있지 않습니까?”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외치는 또 한 사람은 고대산파의 제자였다. 그는 흑접영 때문에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었다고 했다.

“기이한 무공으로 눈만 현혹할 뿐, 정통성도 없는 사파 놈들 따위에게 언제까지 당해야 하는 겁니까?”

하나둘 원한이 있는 이들의 울부짖음으로 대청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만난 적 없는 이들도 마치 직접 싸워본 것처럼 그들의 무공을 폄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연반표국 일은 오해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뭐라?”

대중을 바라보며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던 부능파에게 어디선가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워낙 작은 소리였으나 그의 예민한 귀에는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목소리의 주인을 단번에 찾아내고는, 한달음에 달려가 멱살을 잡았다.

“이 어린놈이 뭐라 지껄이는가?”

부능파의 손아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운선이었다. 도저히 적우의 살인을 믿을 수 없던 그가 안타까운 마음에 내지른 말이었다.

주운은 부능파가 운선의 눈앞까지 다가온 후에야 상황을 눈치챘다. 서둘러 운선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으나 그를 구하기는커녕 부능파의 완력에 밀려 열 걸음 이상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헉…….”

부능파가 아귀에 힘을 주자 운선은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조금씩 정신이 아득해지더니 주변의 소음이 메아리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부형제, 철부지 아이의 객기이니 그만 놔주시지요.”

어느새 달려온 조양은 부능파의 오른손을 자신의 오른손으로 덮어 쥐었다. 온화한 얼굴로 권유했으나 손바닥을 통해 맹렬한 기운을 방출했다.

“쳇, 장문의 체면을 보아 놓아주겠소.”

부능파는 구석까지 다 들릴 정도로 크게 대꾸하며 운선의 멱살을 놓았다. 그제야 조양도 자신의 손을 내려놓았다.

“부형제의 넓은 아량에 그저 감탄하였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거듭 감사하는 조양에게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앞에서는 왼손을 내저으며 겸양을 표했으나 뒤에 감춘 오른손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힘들었다. 조양이 흘려 넣은 차가운 장력이 손 마디마디를 마비시켰기 때문이었다.

부능파가 주춤주춤 황석파의 자리로 돌아가자 조양은 장내를 둘러보며 예의 인자한 웃음으로 상황을 정리하였다.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좀 더 신중하게 일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조양은 운선에게 눈짓하여 그를 자리에 앉히고는 비무대에 다시 올랐다.

“사실 태을신교가 만행을 저지른 것이 비단 이번뿐이 아닙니다.”

조양은 차분한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또 다른 화제를 꺼냈다.

“두 달 전에는 계정의 무역 상단 일심방(一心傍)이 화를 입었지요. 그리고 이번에는 증인이 있습니다. 그 지옥에서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남은 이가 얼마 전 저를 찾아왔습니다.”

조양이 두타공파의 제자들 사이에서 누군가를 쳐다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얼굴이 초췌한 노인이 일어나 대중 앞으로 걸어 나왔다. 비틀거리는 그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퍽 안쓰러웠다.

“저는 일심방의 문지기였던 소충입니다.”

그는 자신의 신상와 일심방에서 보낸 햇수를 먼저 설명하였다. 그간 안면을 트고 지낸 오대산검의 인사(人士)들이 그의 정체를 확인해 주었다.

“그래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가?”

조양의 물음에 노인은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천장을 한참 바라보았다. 모두가 조바심이 나서 침을 꼴깍 삼킬 때쯤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였습니다. 대문 앞에 쌓인 눈이 꽝꽝 얼어 더운물을 부으며 청소했던 기억이 생생하니까요. 날이 일찍 저물어 하나둘 불이 켜질 때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쪽에서 웬 부채를 든 서생 하나가 걸어오지 않겠습니까?”

노인은 문득 그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눈가의 근육이 심하게 실룩거렸다.

“여기는 안전하니 계속 말해 보게.”

조양은 따뜻한 손길로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것이 힘이 되었는지 노인의 눈동자가 점점 또렷해졌다. 그는 몹시 기이했던 그 날의 일을 천천히 떠올려 보았다.

***

날이 저물기도 하였거니와 일심방에는 서생이 드나드는 일이 없었기에 그의 등장은 수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용호 대인(大人)이 운영하는 상단 일심방이 맞습니까?”

서생은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공손하게 물었다. 그러나 얼굴은 빙글빙글 웃고 있었으므로 문지기는 꽤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

“이보시오. 일심방은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오.”

“아, 그렇습니까?”

서생은 아쉬움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입술을 쭉 내밀었다.

‘거, 별 싱거운 사람 다 보겠네.’

문지기는 그가 퍽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때,

쉬이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일심방 대문에 걸린 현판에 화살이 퍽 소리를 내며 박혔다.

“이게 무슨…….”

문지기가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현판이 반으로 쪼개져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으악!”

그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이미 머리가 박살 나고도 한참인 시간이 흘렀는데도 그의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되려 몸이 둥실 떠오르는 기분이 드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실눈을 살짝 뜨니 아까 그 서생의 얼굴이 정면에서 빙그레 웃고 있었다.

“당……당신…….”

문지기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서생은 들고 있던 그의 몸뚱이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가뿐히 몸을 날려 대문 안쪽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아… 아니… 아니…….”

문지기는 어떻게든 소리를 질러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황을 알리려 했으나 너무 놀란 나머지 목구멍이 탁 막혀 버렸다.

“쉿!”

그의 얼굴 위로 이번에는 삐쩍 마른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두 눈을 검은 천으로 감싸고 있었는데 마치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처럼 동작에 어색함이 없었다.

“되도록 천천히 들어오십시오.”

그는 한 번 더 검지를 들어 입술 위로 일자를 그리더니 서생의 뒤를 따라 일심방 내부로 사라졌다.

‘일이 났구나.’

문지기는 두 남자의 범상치 않은 모습에 그제야 큰 사달이 났음을 깨달았다. 사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저 안에는 몇 달 전부터 상단 일을 돕고 있던 자기 아들이 아직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방주님!”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불안한 마음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방…방…방주…….”

눈앞에는 기괴한 장면이 펼쳐졌다. 그가 애타게 부르짖던 용호 대인은 목이 화살에 꿰뚫린 채로 벽에 걸려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기다란 액자 같았다. 또한, 항상 방주를 근저에서 지키던 열두 명의 호위무사는 이마에 철편을 맞아 명을 달리했다. 검집에 검이 그대로 꽂혀 있는 것을 보니 한 번 휘둘러보지도 못한 듯했다.

문지기가 아연실색하여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데 그의 귓가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본 것을 꼭 두타산에 가서 알리십시오.”

서생은 문지기의 표정이 재밌다는 듯 피식 웃더니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궁사(弓師) 역시 그를 한 번 돌아보았을 뿐 곧 시야에서 멀어졌다.

“아버지!”

반가운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문지기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아들의 얼굴을 마주했다. 집안에서 잡일을 하는 이들은 모두 산 것 같았다.

***

“저를 바닥에 내리꽂고 일심방에 침입한 괴한들은 방주를 비롯한 일가족들을 전부 끔찍하게 살해했습니다. 제가 만약 죽은 체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곳에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문지기는 조양의 얼굴을 흘끗거리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상당 부분 각색되었으나 그 일을 아는 이는 이곳에 오직 그밖에 없었으므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태을신교의 풍안(風眼) 이서문과 계뢰(界雷) 유이정이구나.”

이제껏 아무 말이 없던 고대산파의 매월(枚月) 노인 신양선이 잔뜩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적우보다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기괴한 무공에 대해서는 악명이 자자했기에 두 괴한(怪漢)의 정체는 오대산검의 제자들 대부분이 짐작하였다.

이번에도 선운검파의 여제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울부짖었다.

“마교 놈들, 다 찢어 죽여 버립시다!”

다소 천박한 말투였으나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다. 모두의 가슴에 분노가 가득 들어찼다. 특히 오대산검의 젊은 제자들은 들끓는 의혈을 주체하기 어려워 저마다 떠들기 시작했다.

“흥분을 가라앉히셔야 합니다.”

조양은 손을 번쩍 들어 소란함을 잠재운 후 조곤조곤 발언을 이어갔다. 명문정파의 일원이라면 그를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모두의 눈이 조양의 입을 향했다.

“그동안 우리 오대산검은 예(禮)와 의(義)를 지켜 왔습니다. 비록 태을신교가 극악무도한 일을 일삼아 왔어도 그들을 교화(敎化)하는 데 뜻을 두었습니다. 허나, 이제는 그것이 잘못된 방법임을 압니다.”

“옳소.”

“옳소.”

장 내의 모든 이들이 한목소리로 뜻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제 태을신교를 경국에서 몰아내는 것만이 진정한 의(義)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여, 저는 태을신교와의 전면전을 준비하려 합니다.”

조양이 드디어 결심을 드러내자 오대산검의 장문 및 장로들은 모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특히 선운검파의 소금정은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주위 사람들에게 일 잔(盞)을 권했다.

“이제 구체적인 사안(事案)을 의논하는 일은 우리 부형제가 맡아 주시겠습니다.”

조양이 부능파를 향해 공수하자 그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다시 앞으로 나왔다. 오대산검의 제자들은 조양의 모습이 장로들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함성과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자자, 형제들. 우리 오대산검은 그간 교류는 활발했으나 한뜻으로 일을 도모한 적은 없었습니다. 하여 섣불리 마교 토벌을 진행하다 보면 사분오열(四分五裂)되지 않을까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오대산검은 지난 수십 년간 격년에 한 번 무림대회를 열어 비무를 경합하면서 친목을 다져왔다. 하지만 문파의 개성이 각기 다르다 보니 비무 도중 오해가 생기는 일 또한 잦았다. 그렇기에 부능파의 걱정은 비단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제 생각에는 무림 맹주를 뽑아 명령을 일원화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능파가 황석파 쪽을 바라보자 기다렸다는 듯, 월산(月山) 노인 고유생이 일어나 대안을 제시했다.

“맞습니다. 모두 모인 김에 당장 정하도록 합시다.”

“그럽시다.”

“옳습니다.”

혈기가 넘치는 용문파의 용가 삼 형제가 제각기 재잘거리며 고유생의 의견을 거들었다. 다만 뒤쪽에 앉아 있는 그들의 장문 조상원은 입을 꾹 다문 채로 인상만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이 일에 가장 적당한 이를 알고 있습니다.”

맑고 청량한 목소리가 고요하게 울리자, 그쪽으로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여태 아무 말 없던 선운검파의 부(副)장문 소소정이었다.

“저는 두타공파의 장문이신 현로 선생 조양 장문을 추천합니다.”

그녀의 말에 대부분의 사람이 함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다. 자신의 이름이 불린 것에 깜짝 놀란 조양이 어쩔 줄 몰라 손을 내저으며 사양했으나 그럴수록 추앙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아닙니다. 저는 결코 이 큰일을 맡을 재목이 되지 못합니다.”

조양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대중에게 읍하며 거듭 사양하였다.

“부덕(不德)한 저보다 나은 분을 추천하심이 좋겠습니다.”

그때였다.

“그럼 그거 내가 해 볼까?”

굵고 거친 목소리가 대청 내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어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만 멍하니 마주 보고 있었다.

쉭!

이번에는 바람을 가르는 또 다른 소리에 놀라 모두의 고개가 움찔하였다.

화살은 먼 거리임에도 전혀 휘어짐이 없이 목표물에 정확히 박혔다. 검은 화살이 박힌 곳은 굵고 정갈한 글씨로 五大山劍(오대산검)이라 쓰여있는 현판의 가운데였다. 大(대) 자의 다리 사이에 박힌 화살은 마치 하나의 획과 같아 멀리서 보면 太(태) 자로 보였다.

“태을신교?”

그들의 육안에 제일 먼저 들어온 이는 검은 천으로 두 눈을 가린 삐쩍 마른 남자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큰 도(刀)를 한쪽 어깨에 걸친 약관(弱冠)의 청년이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적우 형님…….”

운선의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그것이 반가움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자신도 알지 못했다.

*** 불속지객(不速之客):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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