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見仁見知(견인견지)
“그래,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
조양은 제자들에게 두 사람의 거처를 마련하라 지시한 후, 운선만을 데리고 내당(內堂)으로 향했다. 지난 닷새간의 이야기를 전하며 운선은 쉴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 조양은 함께 울기도 하고 운선의 손을 꼭 잡아주기도 하며 그의 서러웠던 마음을 풀어주었다.
“사실은 스승님의 전언(傳言)이 있습니다.”
조양은 소매 끝으로 눈시울을 닦아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일단은 네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네 얼굴을 보려무나. 곧 쓰러질 것 같구나. 스승의 유언을 전하는 것은 천천히 해도 늦지 않으니 기력을 회복한 후에 차차 들으마.”
의제가 죽은 참담한 아픔 속에서도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조양의 배려에 운선은 크게 감동을 하였다.
“아닙니다. 어쩌면 제 목숨보다 급한 일일지 모릅니다.”
“혹여 너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 또 있느냐?”
운선을 안아 일으키려던 조양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은 아닙니다. 허나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를 다른 이가 듣는다면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 있겠지요.”
조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당의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급작스럽게 일하는 이들이 드나들 수 있으므로, 출입구 역시 모두 막았다.
“그래, 이제 이야기해 보아라.”
조양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운선의 오른손을 꼭 잡았다. 시원한 기운이 핏줄을 타고 쭉 뻗어 올라가면서 가슴이 뻥 뚫렸다. 운선은 모처럼 정신이 아주 맑아졌다.
“흑접쌍살이 경전을 노리는 것을 알고 있던 사형은 저에게 그것을 외우라 하였습니다.”
“뭐라?”
조양은 의외의 상황에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내용이 적다고 하더라도 어찌 그 짧은 시간에 모두 외운단 말인가?
“무공에는 영 소질이 없지만, 암기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운선은 다소 쑥스러워하면서도 또박또박하게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스승님께서는 경전을 의백께 전하라 하였으니 제 머릿속에 있는 내용을 수기로 남기겠습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마친 운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양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니 의백, 제발 스승님과 사형의 복수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미 다 흘린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솟구쳐 올랐다. 운선은 바닥에 엎드린 채, 고개를 들 줄 몰랐다.
“그래, 네 마음을 왜 모르겠느냐? 다만 너의 건강을 해칠까 염려되니 필사(筆寫)하는 일은 시일을 두고 천천히 하자꾸나.”
어린아이가 이런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이 안쓰러워 조양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천천히 운선의 팔을 잡아 다시 자리에 앉히려고 할 때였다.
휙!
“누구냐?”
운선에게는 조양의 손놀림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가 소매를 휙 휘두르자 꽉 닫혀 있던 내당의 출입문이 앞뒤로 활짝 열렸다.
“허허, 내 너무 예민해서 착각한 것 같구나.”
분명 인기척을 느꼈으나 문 앞에는 누구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조양은 마음 한쪽이 영 찝찝했지만 그렇다고 확인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그만 잊기로 하였다.
“의백, 제가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경전의 사본(寫本)을 드리겠습니다.”
운선을 바라보는 조양의 눈에는 안쓰러움과 기특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무림대회 당일이 오자, 두타공파의 본진(本陣)인 수오당(羞惡堂)은 오대산검의 제자들로 북적거렸다. 두타공파의 사람들은 각각 맡은 바 임무가 있어 운선과 주운을 챙길 겨를이 없었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은 자유롭게 수오당을 구경할 수 있었다. 운선은 그녀와의 시간이 내심 즐거웠다.
“주운, 고마운 마음을 어찌 전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주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성의 없이 대답했다.
“괜찮으시다면 차후에 구월산으로 찾아가도 되겠습니까?”
운선은 주운이 자신을 다시 만나기 싫다고 할까 봐 가슴이 콩닥거렸다.
“왜?”
앞서가던 길을 멈추고 주운이 획 뒤를 돌아보자 운선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야, 다시 보고싶…….”
“그럴 필요 없다.”
주운은 운선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대답했다.
“나 역시 당분간 이곳에서 수련하기로 마음먹었다.”
“네?”
운선이 화들짝 놀라는 것을 보자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되물었다.
“왜? 싫으냐?”
“아니, 저야 좋지만…왜?”
주운은 한참을 대답하지 않고 운선의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몰라도 된다.”
그녀는 차마 거짓으로 둘러대고 싶지 않아 톡 쏘아붙이고 뒤돌아섰다. 아무 의지할 데 없는 불쌍한 아이를 자신조차 궁지로 몰아넣는 것 같아 영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것을 판가름하고 선택할 의지가 없었다.
“되도록 그 아이 곁에서 떠나지 말아라.”
“네?”
어젯밤 만난 사부는 그녀에게 너무나 낯선 모습이었다.
“지켜주란 말이다.”
“사부님, 저번에는 분명 목숨은 구해줄지언정 그 이상은 절대로 상관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랬지.”
무영은 약간 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다. 그저 자신의 말이라면 죽는시늉도 마다하지 않던 제자의 반항에 적잖이 놀란 것 같았다.
“경전 때문입니까?”
운선이 ‘해심밀경소’의 내용을 다 암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저 보고였을 뿐, 그 한 마디에 사부의 마음이 흔들릴 줄은 몰랐다.
“그럴지도.”
“사부님!”
주운은 사부에게로 대뜸 한 걸음 다가섰다. 무영은 소매를 크게 휘저으며 그녀를 밀어냈다.
“거기까지다! 더 건방지게 굴었다간 다시는 안 볼 줄 알아라.”
주운은 너무나 놀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주변인을 인지할 수 있는 나이부터 쭉 그녀는 오로지 사부의 밑에서 컸다. 주운에게 유일한 가족인 무영에게 내쳐지는 것만큼 무서운 일은 없었다.
“네.”
“그리고 그 아이가 경전을 깨우칠 수 있도록 힘써 주어라.”
무영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자를 한 번 쓰다듬어 주지도 않고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주운 역시 사부의 뒷모습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산을 올라 수오당으로 돌아왔다.
“운선아, 미안하다.”
주운은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정원의 구름다리 위에서 운선은 마냥 헤실거리고 있었다. 곧 헤어질 줄 알았던 주운이 계속 함께 있어 준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여기 있었습니까?”
저쪽에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이는 도평이었다. 그는 그간의 오해를 풀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들이 못마땅하였다. 하여 예의를 다하기는 했어도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기색이었다.
“사부님께서 두 사람도 대회에 참석하랍니다.”
“네.”
“알겠소.”
주운은 그의 태도가 마뜩잖았으나 솔직히 무림대회가 궁금하기도 하여 곧 뒤를 따라나섰다. 물색없는 운선은 가는 내내 도평에게 사문에 관한 질문을 던지며 친해지려 노력하고 있었다.
주운은 운선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한편으로는 그의 옆에 있는 것이 속 편하겠다 싶었다. 적어도 자신에게 속는 게 엄한 놈에게 크게 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는 마음이었다.
대청에는 이미 오대산검 문파의 대표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문파당 각기 십수 명에서 수십의 제자들을 대동하였는데 그중에서도 황석파의 인원이 제일 많았다.
장문인 팔마(八馬)도사 마세풍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월산(月山)노인 고유생이 대신 참석한 것으로 조양의 위신을 세워주었다. 무엇보다 비월검(飛越劍) 부능파의 출현에 모든 문파의 제자들이 입을 딱 벌렸다.
“드디어 비월(飛越)을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거야?”
도평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자 운선이 의아한 듯 물었다.
“저 사람이 그리 유명합니까?”
그의 질문에 주변에 있던 제(諸) 문파의 제자들이 모두 황당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헐. 어이가 없어서. 검(劍)으로 치면 검신(劍神)도 감히 상대가 안 된다는 부능파 사백님을 모르다니 제정신이요?”
그중에 누군가가 악의 없는 한마디를 툭 던졌다. 운선은 순간 울컥하였으나 주운이 손을 잡아 그를 저지하는 바람에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얼굴이 벌게진 운선을 보자 도평이 고소하여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곳까지 먼 걸음 하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조양이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 맞이하니 건장한 중년의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용문파의 장문 묵안(黙顔) 조상원이었다. 활인검도 묵직하기로는 강호에 따라올 검이 없었으나 조상원의 검은 양날이 아니었으면 도(刀)라고 착각할 정도로 굵고 무거웠다. 그것을 마치 총채를 휘두르듯 가볍게 다루는 모습은 언제 봐도 장관이었다.
그의 뒤에는 용가(龍家) 삼 형제가 함께했다. 그들은 비록 검을 다루지는 않았으나 각자의 절기가 있어 강호에서 삼왕(三王)이라고 불렸다.
“그럼 저쪽에 있는 저 노인은 누구입니까?”
운선이 주운에게만 들리도록 귀엣말을 했다. 회색 수염이 명치에 닿을 듯하고 삐쩍 마른 체구로 보아 무인 같아 보이지 않았다.
“고대산파의 매월(枚月)노인 신양선도 왔구나.”
주운도 소문만 들었을 뿐, 그를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이 검이 되었다가 채찍이 되었다가 한다는 구설이 있었다. 무공이 워낙 기괴하다는 이야기에 기회가 되면 몇 초식만이라도 구경하고 싶었다.
그때 한 무리의 여인들이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전혀 꾸미지 않았는데도 시선이 돌아갈 정도의 미모들이었다. 제일 앞에 선 이는 머리를 하나로 묶어 땋아 올렸는데 어찌나 옷차림이 단정한지 깃에 손이 베일 정도였다.
“선운검파의 소금정, 장문을 뵙습니다.”
여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울리자 장 내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쏠렸다.
“어서 오십시오. 혹여 참석하지 못하실까 염려하였습니다.”
조양이 얼굴 가득 미소를 띠며 인사하자 소금정은 쌀쌀맞은 말투로 응수했다.
“마교를 소탕하는 일에 어찌 우리 선운검파가 좌시하고 있겠습니까? 이왕 이렇게 오대산검이 모두 모였으니 이번에는 꼭 결심하셨으면 합니다.”
다소 건방진 발언에 두타공파의 장로들은 발끈하였으나, 조양은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껄껄 웃었다.
“그렇습니다. 그 말씀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소금정은 살짝 눈치가 보였는지 더는 덧붙이지 않고 자리를 찾아갔다. 뒤에 서 있던 동생 소소정이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조양에게 고개를 깊이 숙였다.
“자, 이제 인사가 다 끝난 것 같으니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조양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든 무림인의 주의를 끌었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차분하게 발언하였으나 한마디 한마디가 장 내 모든 이들의 귀에 또렷하게 전달되었다.
‘정말 내력의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겠구나.’
주운은 크게 감탄하였으나 겉으로는 전혀 드러내지 않고 차려진 음식에 집중하는 척했다. 운선은 이 모든 것이 마냥 신기하고 멋있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얼마 전, 아주 끔찍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양의 하얗고 긴 눈썹이 아래로 축 처지자 마치 십 년은 늙어 보였다. 그는 소식을 전하는 일이 힘겨운지 말하는 내내 오른손으로 가슴 춤을 부여잡고 있었다.
“황석파의 부형제가 나와 이야기를 이어가시겠습니까?”
조양의 말이 끝나자마자 비월검 부능파가 거친 숨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황석산은 운평 연반성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경국의 두 번째로 큰 상단인 연반표국이 있지요. 황석파는 대대로 연반표국과 형제 관계를 유지하며 돈독하게 지내왔습니다.”
오대산검의 제자 중에 연반표국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유명하기도 했거니와 웬만한 보물은 그곳을 거치지 않고 운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오대산검 모두 일 년에 한 번은 꼭 연반표국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달 보름, 표국의 식구 백이십오 명 전원이 몰살당했습니다.”
부능파는 비통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쳤다. 장내는 비명과 한숨으로 가득 찼다. 아무리 표국의 상당수가 무공을 할 줄 모른다 해도 실무를 보는 이들은 강호 경험이 상당했다. 또한, 그들 중 몇 명은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무공의 고수였다. 그런 이들이 한 번에 몰살이라니… 모두 믿기 힘든지 옆 사람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누가 그리한 것입니까?”
선운검파의 여제자가 분기충천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곧 눈물을 흘릴 것처럼 눈가가 촉촉했다.
“제가 뒤늦게 찾아갔을 때, 벽에는 붉은 피로 우(雨) 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네,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그 괴물. 적우(赤雨)의 표식이 분명했습니다.”
운선은 방금 들은 소리가 무슨 뜻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하찮은 생명도 소중하다며 눈물을 흘리던 적우가 하루아침에 백 명이 넘는 이들을 도륙했다니. 뭔가 큰 오해가 있음이 분명했다.
“적우의 적(赤)은 붉다는 뜻이다. 붉은 비, 그게 그의 진짜 이름이다.”
주운은 덜덜 떨고 있는 운선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다.
*** 見仁見知(견인견지) :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