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11화 (11/209)

#11화. 游於釜中(유어부중)

“그 대단하던 강가장이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다니…. 쯧쯧”

낭랑한 목소리가 공허한 강가장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당에 들어선 이는 머리를 하나로 질끈 동여맨 백면서생(白面書生)이었다.

탁자 앞에 앉아 있는 강율천의 시신을 한참 들여다보던 남자는 이번엔 마당 한쪽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는 종연의 시신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창 꽃피울 나이건만.”

남자는 부패해서 썩은 내가 진동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종연의 시신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온몸에 난 상처는 이미 뭉그러져 알아볼 수 없었지만, 가슴을 관통한 무기의 정체는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도 종연의 몸에 붙은 하얀 털을 집어 올리며 옅은 신음을 내었다.

“대사형, 찾았습니까?”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는데 어느새 젊은 여자가 남자의 뒤에 불쑥 나타났다. 그녀의 옷차림은 매우 단아하고, 소박하였으나 외모 때문인지 몹시 화려한 느낌이 들었다. 하얀 얼굴에 오목조목한 이목구비는 한 번 보면 절대로 잊히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우리가 너무 늦은 듯하네.”

남자는 쭈그리고 앉아서 매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여자는 남자와 달리 강율천과 종연의 시신에 별다른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사형이 쓸데없는 감상에 빠진 양이 영 못마땅하였다.

“적우야, 너도 구경 그만하고 내려와서 찾아보렴.”

지붕 위에서 강가장의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적우는 사저의 꾸짖음이 한차례 있고 나서야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마당으로 내려왔다.

“두 시체는 여기 버려져 있는데, 저쪽에 있는 가묘(假墓)는 누구의 것일까요?”

그제야 남자는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그는 태을신교의 첫째 제자이자 천추(天樞), 풍안(風眼) 이서문이었다. 성곤의 일곱 제자는 칠원성군(七元星君)이라 불렀다. 각각 천추(天樞), 천선(天璇), 천기(天璣), 천권(天權), 옥형(玉衡), 개양(開陽), 요광(搖光)의 위치로 나뉘는데 그 중의 제일이 천추였다.

그는 겉으로 보았을 때는 여리여리한 미남자였으나 절기인 부채를 휘두를 때는 마치 태풍과 같은 박력이 있었다. 강호에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적우보다 유명하지 않을 뿐, 무공에서는 모든 사형제를 압도했다.

“제가 직접 확인해 보죠.”

“아이고, 사저. 무섭지 않으십니까?”

적우가 너스레를 떨며 방정맞게 구는데도 여자는 쳐다보지 않았다. 그대로 가묘로 걸어가 칼끝으로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대사형, 사저는 귀신이 무섭지도 않나 봅니다.”

“그러게 말이다. 현진아, 웬만하면 시신을 다치게 하지는 말아라.”

이서문과 적우의 호들갑을 들은 체 만 체, 현진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선녀 같은 외모와 달리 대범하고 패기가 넘쳤다. 태을신교의 다섯째, 옥형(玉衡)이었으나 사형제 중 누구보다도 대장부의 기질이 있어 늘 임무에 앞장서고는 했다. 다만 강호에서는 그녀의 외모만 보고 소백화(小白華)라고 불렀다.

“넷째 사형이군요.”

땅에 묻힌 지 며칠이 지났으나 이상하게도 좌영의 시체는 부패가 없었다. 아무래도 우영이 형에 대한 애정으로 시신에 방부약(防腐藥)을 뿌린 것 같았다.

“얼굴에 일 장을 맞았군.”

뭉개진 얼굴이 흉측하여 차마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는 적우와 달리 이서문은 좌영의 시체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태을 신공의 부작용으로 내상을 입기는 하였으나 좌영의 실력이라면 웬만한 상대의 일격에 당할 리는 없었다.

‘역시 검신(劍神)이군. 극독(劇毒)에 당했음에도 이 정도 장력을 출수(出手)할 수 있다니…….’

이서문은 혀를 내두르며 다시금 강율천에게 존경심을 느꼈다.

“이제 어찌합니까?”

발로 흙을 대충 차서 좌영의 얼굴을 덮으며 현진이 물었다. 성질 같아서는 불로 태워 버리고 싶지만 애써 참는 중이었다.

“넷째를 이렇게 묻어주었다는 것은 아직 우영이 살아 있다는 뜻이겠지. 검신에게는 제자가 둘이 있다. 시체가 하나 부족하니 필시 우영이 그 아이를 데려간 것 같구나.”

여기까지 듣던 적우는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어 얼굴이 새하얘졌다.

“적우야, 왜 그러느냐?”

눈치가 빠른 이서문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적우를 팔꿈치로 툭 쳤다.

“대사형, 아무래도 제가 엄청난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뭐?”

현진이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서문은 그녀를 진정시키는 한편 적우의 어깨를 토닥였다.

“실수는 바로잡으면 되는 것이다. 말해 보아라.”

적우는 이마에 맺힌 땀을, 팔로 쓱 문지르며 대답했다.

“이틀 전에 그 아이를 만난 것 같습니다. 그때는 그저 넷째 사형이 또 나쁜 짓을 하여 다친 아이인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검신의 두 번째 제자인가 봅니다.”

적우가 더듬더듬 상황을 설명하자 서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현진은 적우의 경솔함이 진절머리 난다는 듯 험상궂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검선의 제자가 끼어들었다?”

서문은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검선(劍仙)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지 몰랐다. 만약 그녀가 적극적으로 이 일에 끼어들 생각이었다면 어설프게 제자를 보낼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나섰을 것이다. 우영의 목숨을 살려둔 일이 바로 그 증거였다.

검신이 경전을 둘째에게 주었다면 분명 자신의 의형인 두타공파의 장문을 찾아가라 했을 것이다. 어차피 다음 목적지는 두타산이었다. 잘하면 한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으리라.

서문은 빙그레 웃으며 걱정이 늘어진 적우의 어깨를 끌어안아 주었다.

“아우야, 참 다행이다. 네가 그 아이의 목숨을 살려주어 경전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네?”

못 알아듣는 적우와 달리 현진은 사형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그럼 우리는 두타산으로 바로 가면 되겠군요.”

“옳지.”

서문이 흐뭇하게 웃자 현진은 벌써 강가장의 대문 밖을 나서고 있었다.

“적우야!”

“네?”

머리를 긁적이며 적우가 대답하자 서문은 인자한 얼굴로 말했다.

“경솔한 행동을 했으니 그 벌로 사숙님과 사형제를 잘 묻어주고 오려무나.”

서문이 고갯짓으로 율천과 종연의 시신 쪽을 가리켰다. 적우는 다소 당황하였으나 사형의 명을 거역할 수 없어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적우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서문이 어느덧 부채를 꺼내 흔들며 강가장을 천천히 벗어나고 있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그의 말처럼 붉은 매화는 이미 거의 다 시들어 앙상한 가지만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운선과 주운이 두타공파의 현문(懸門)에 도착했을 때, 일전에 만났던 5대 제자 두 명이 그들을 막아섰다.

“당신들은 마교 제자와 함께 있던?”

해사한 외모와는 달리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한 제자가 버럭 소리를 쳤다. 5대 제자 중 막내인 곽도평이었다. 아직도 그는 대사형이 주운의 일 검에 제압당한 그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때도 사형이 말리지 않았다면 대신 나서서 검을 휘두를 작정이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찾아오느냐?”

“도평아, 진정하여라.”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분노하는 도평을 막은 것은 이번에도 형진이었다.

“다시 또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형진은 공수하여 허리를 굽히며 예를 차렸다. 주운은 여전히 그가 못마땅하였으나 차마 예의를 무시할 수 없어 가볍게 고개만 숙였다. 운선은 혹여 큰 싸움이 날까 싶어 가슴이 쿵덕거렸다. 서둘러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일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는 강가장에서 온 강운선입니다. 스승의 전언이 있어 장문을 뵙고 싶습니다.”

그제야 형진은 운선의 모습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얼굴이 파리한 것이 병색이 짙었으나 눈빛은 형형하니 기개가 있어 보였다. 검선의 제자와 함께이므로 그의 정체를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정말입니까? 이런, 제가 아우님을 몰라보고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

형진은 허겁지겁 뛰어와 운선의 두 손을 잡았다. 주운은 그의 행동이 가식적으로 느껴졌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먼 길 오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진작에 신분을 밝혔더라면 훨씬 더 편하게 모셔왔을 것이라며 아쉬워하는 형진의 모습을 보자 운선은 그동안의 걱정이 싹 씻겨 나갔다.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 것이지, 하마터면 이 사람에 대해 오해할 뻔하였구나.’

물론 뒤따라오는 도평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으나 그 또한 곧 풀어지리라 생각하니 크게 불쾌하지 않았다.

“사부님, 누가 왔는지 좀 보십시오.”

형진은 대청에 들어서기도 전에 목청을 돋워 장문을 불렀다. 황석파 장로인 고유생과 담소를 나누고 있던 조양은 평소와 다른 형진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무슨 일이냐?”

“사부님, 운선이가 검신의 전언을 들고 방문하였습니다.”

형진은 조양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상황을 알렸다. 운선 역시 그의 행동에 당황하여 함께 무릎을 꿇었다.

“네가 운선이냐?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구나.”

조양은 한달음에 그들 앞으로 달려와 운선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

“네. 감사합니다.”

운선은 얼떨떨한 기분이기는 했으나 조양의 따뜻한 환영 인사에 괜히 울컥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일련의 사건들을 겪었기에 자신을 지켜줄 든든한 어른을 만나자 마음이 확 풀어진 것이었다.

“그래, 너의 스승, 율천은 잘 있느냐?”

조양은 운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애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스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운선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스승님은…스승님은…….”

운선이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하자 조양은 내심 짚이는 바가 있어 마음이 덜컹하였다.

“설마 무슨 일이 생겼느냐?”

뒤에서 그들의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황석파의 장로 고유생은 대화의 내용이 궁금하여 삐쭉 얼굴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강가장에 큰일이 난 모양이었다.

운선이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저 지켜보기만 하려던 주운은 그의 모습이 안쓰러워 결국 앞으로 나서 강가장의 참극을 설명했다.

“아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이야기를 다 들은 조양은 무릎을 일으켜 세우려다가 머리를 감싸 안으며 뒤로 넘어갔다. 고유생과 형진이 재빨리 움직여 뒤를 받쳤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크게 다칠 뻔하였다.

“으허허허어…….”

조양은 장문의 체면은 생각하지 않는 듯,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처량 맞아서 마치 피붙이를 잃은 것 같았다.

“사부님.”

“장문”

대청 안에 있던 두타공파의 제자들과 황석파의 장로 및 제자들은 모두 조양의 의리에 감동하여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운선아, 율천은 나의 의제이니 너 또한 내 제자와 다름이 없다. 이제부터 나를 의백으로 부르고 이곳을 네 집처럼 여기거라.”

이윽고 정신을 차린 조양은 운선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네. 의백”

운선은 조양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오직 뒤에 서 있는 주운만이 그들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 游於釜中(유어부중) :

가마솥 속에서 논다. 생명이 매우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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