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端初(단초)
두타공파의 본청(本廳)은 무림대회 준비로 한창이었다. 둥글게 배치된 연단에는 오대산검의 문패가 놓였는데, 정 가운데 용문파(龍門派)를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두타공파(頭陀功派)와 선운검파(禪雲劍派), 왼쪽에는 황석파(黃石派)와 고대산파(高大山派)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기품있고 우아한 모습이었다.
두타공파의 장문, 현로 선생 조양은 오늘따라 직접 진두지휘하며 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수염과 머리카락 모두 은빛이 도는 백발이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청년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주름이 없었다.
“제자 백형진, 장문을 뵙니다.”
형진을 위시한 일곱 명의 두타공파의 제자들이 대청(大廳)으로 들어왔다. 마침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조양은 만면에 웃음을 가득 띠고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래, 초대받은 손님들은 잘 모시고 왔느냐?”
“네.”
형진은 일단 맡았던 임무에 대한 보고를 간단히 마쳤다. 그리고 사제들을 뒤로 물린 후, 사부에게 조심스레 적우에 대한 일을 알렸다.
“예상대로 태을신교가 움직인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조양은 혀를 끌끌 차며 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호에 또 한차례 피바람이 불지도 모르겠구나.”
“그런데 사부님.”
형진은 그의 사부에게 한 걸음 더 바짝 다가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검선(劍仙)의 제자가 그와 함께 있었습니다.”
“뭐라?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검선(劍仙)의 검 ‘월심(月心)’을 들고 있었습니다.”
형진의 대답에 조양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검선은 사파든 정파든 무림 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 이로 유명하였다. 또한, 그 어느 쪽과도 대척점에 서 있지 않았으므로 상황에 따라서는 적우의 편을 드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그녀가 강호에 등장했다는 것이 좋은 소식은 아닐 듯싶다.”
조양은 왠지 모르게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의아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형진에게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는 남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天(천)은 以玄黙爲大(이현묵위대)하니, 其道也普圓(기도야보원)이요 其事也眞一(기사야진일)이니라. 하늘은 말할 수 없는 신비로움으로 침묵하고 있고 장대하니 하늘의 도는 한없이 넓고 圓融無碍(원융무애)하여 적용이 안 되는 곳이 없다.”
적우가 태을신교의 기본 정수라며 구결을 읊을 때마다 운선은 혼란스러워졌다.
“地(지)는 以蓄藏爲大(이축장위대)하니 其道也效圓(기도야효원)이요 其事也勤一(기사야근일)이니라. 어머니의 땅은 아버지가 내려주시는 하늘의 신성과 밝은 광명, 생명의 씨앗을 그대로 간직하고 그것을 갈무리해서 한없이 크다.”
“저, 형님.”
운선은 더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적우를 불렀다.
“왜 그러느냐?”
“이것이 정녕 태을신교의 기본 정신이 맞습니까?”
적우는 운선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 가는 바가 있어 껄껄 웃었다.
“아무래도 무공의 구결 같지 않은 게로구나. 그렇다. 우리 태을신교의 밑바탕에는 태일(太一)정신이라는 것이 있어 그것을 바탕에 두지 않으면 내공을 익힐 때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단다.”
아무리 무공을 모른다 해도 그동안 주운과 함께 강호를 유람했으니 이것저것 주워들은 구결(口訣)이 있겠다 싶어 적우는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아……, 네…….”
운선의 대답이 시원치 않았으나 아직 어려서 그러려니 하며 적우는 계속 구결을 읊었다. 운선은 의심을 넘어 이제 확신이 들었다.
그는 이미 태을신교의 내공 심법을 알고 있었다.
'해심밀경소'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평범한 불교 경전의 해석본이었다. 어릴 때부터 여러 책을 섭렵한 운선에게는 익히 읽어본 내용이었다. 하여 종연이 우영에게 팔을 잃은 시점에 그는 이미 책을 다 외운 상태였다. 서둘러 책을 다시 품에 넣으려는데, 운선은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분명 작고 얇은 책이었으나 장당 두께가 지나치게 두꺼웠다.
“설마…….”
운선은 허리에 매고 있던 수통을 꺼내 경전의 끄트머리에 조심스레 부었다. 처음엔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면지가 조금씩 울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경전의 면지 사이에 감춰져 있던 또 다른 책. 그것이 '해심밀경소'의 진실이었다. 물론 방금까지도 운선은 그것이 무공의 심법과 연결 고리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뭔가 심상치 않았기에 그저 달달 외워 놓았을 뿐.
“人(인)은 以知能爲大(이지능위대)하니 其道也擇圓(기도야택원)이요 其事也協一(기사야협일)이니라. 사람은 지혜와 능력으로 한없이 존대하고 위대하므로 도의 수양은 인간의 주체적인 선택에 달려 있다.”
지금 적우가 읽는 이 심결은 바로 첫 장에 숨겨져 있던 ‘염표문(念標文)’의 내용이었다.
‘경전을 흑접영이 그토록 찾았던 것은 태을 신공을 완전히 익히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좌영은 2단계에 겨우 접어들었다고 했다. 그들이 무리하게 신공을 연마하려 했기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웠던 것이라면 경전에 집착했던 이유가 이해가 되었다. 자신의 오른팔을 태우면서 주화입마에 빠지던 우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온몸의 실핏줄이 다 터진 것처럼 새빨개지던 그의 모습은 악귀와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남자는 왜?’
하지만 여전히 스승님에게 일 장을 날렸던 남자의 의도는 알 수 없었다. 신공을 얻기 위해서라기엔 그는 이미 충분히 뛰어난 고수였다.
“태일이 물을 생겨나게 하지만 도리어 물이 태일을 도와 하늘을 이루고 하늘이 도리어 태일을 도와 땅을 이룬다. 하늘과 땅이 서로 도와 신명(神明)을 이루니, 신과 명이 다시 도와 음양(陰陽)을 이룬다.”
적우는 신공의 구결 한 줄씩 읊은 뒤, 다시 그것을 어떻게 기(氣)로 운용하느냐에 대해 설명했다. 운선은 내용은 다 외우고 있었으나 그것을 내력(內力)으로 만드는 방법을 몰랐기에 적우의 해석은 한마디 한마디가 깨우침이었다.
“태을신교의 모태(母胎)는 무엇입니까?”
한차례의 연습 후에 운선은 적우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아무래도 의문점들을 해소해야만 자신의 적을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의 추측이 맞았다면, 태을 신공의 근원에는 '해심밀경소'가 있다. 그럼 스승은 분명 태을신교와 관련이 있을 터였다.
“태을신교의 교주님은 원래 려국(麗國) 사람이지. 모국이 망하고 경국(敬國)으로 건너올 때 사제, 사매와 함께 오게 되었는데 세 사람 모두 검(劍)에 있어서는 무림의 어느 고수보다도 실력이 월등했다고 하더구나.”
적우는 원래도 수다스러웠으나 특히 자신의 교단에 대한 자부심이 컸기 때문에 운선의 질문에 신이 났다. 물어보지 않은 교주의 내력까지도 줄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제와 사매요?”
운선은 설마 설마 하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비록 세 사람은 뜻하는 바가 달라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됐지만, 검(劍)에 대한 진심은 한마음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강호에서 검(劍)을 쓰는 이들 중에 이 세 사람을 모르는 이가 없지.”
“그럼……”
“아우님도 들어보았을걸? 바로 검신(劍神) 강율천과 검선(劍仙) 이무영. 알다시피 주 낭자가 검선(劍仙)의 유일 제자이고. 그리고 바로 우리 사부님이 그 유명한 검귀(劍鬼) 성곤이란다.”
적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슴을 탕탕 쳤다. 성곤은 사고무친(四顧無親)이 된 자신을 조건 없이 거둬줬던 은인이었다. 그에게는 아버지와 다름없었기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존경심이 가슴에 가득 차올랐다.
반면 운선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스승님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비급. 그것이 려국(麗國)의 내전 무공이었다니.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의 무엇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혹 교주님을 만나 뵐 방도는 없습니까?”
운선이 팔을 고치고 싶은 마음에 교주에 관해 물어본다고 생각한 적우는 안타까움을 잔뜩 담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검신은 강가장에, 검선은 구월산(九月山)에 있으나 교주님은 머무는 곳이 없어. 아쉽게도 당장은 만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사람의 인연이란 언제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니 너무 실망하지는 말아라. 내 나중에라도 그분을 만나거든 너의 이야기를 꼭 전하마.”
운선은 끝까지 자신을 걱정하는 적우가 한없이 고마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속내를 다 드러내지 못하는 점이 너무나 미안했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운선에게 사형과 같은 항렬이니 사정을 털어놓는 게 더 나을지 몰랐다. 허나, 스승님과 사백님의 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지금 시점에서 함부로 비급의 행방을 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까지의 대화로 봐서 적우는 강가장의 비극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굳이 말을 꺼내기보다는 일이 돌아가는 추세를 살피는 것이 더 현명하리라 판단했다.
적우가 신공의 구결을 전수하는 데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운선은 기의 흐름을 느끼고 단전에 모으는 법, 운기조식의 기본을 익히는 것만으로도 기진맥진이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심결을 한 번 시연할 때마다 오른팔의 통증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매일 시간이 날 때마다 기를 운용하면 곧 통증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단, 절대로 급하게 연마해서는 아니 된다.”
“감사합니다. 형님.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또다시 운선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자 적우는 민망하여 손사래를 쳤다.
“나는 첫인상에서부터 아우님이 나와 깊은 우정을 나눌만한 상대라는 것을 꿰뚫어 보았지. 우리는 이제 형제와 다름없으니 감사 인사가 오히려 서운하구나.”
운선은 지난 며칠간 자신의 팔자가 지독하게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목숨을 내놓을 지기(知己)가 생겼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나는 본교에서 내린 임무가 있어 이만 헤어져야겠다. 부디 몸조심하고 또 조심하여라.”
적우는 마지막 인사에서까지도 운선의 안위를 걱정했다.
주운은 두 사람의 눈물겨운 이별 장면이 아니꼬운 듯 계속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이냐?”
멀어지는 적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운선에게 주운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두타산으로 가겠습니다.”
“그들, 꽤 건방지던데 괜찮겠어?”
이틀 전에 만난 두타공파의 제자들을 떠올리며 주운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물색없고 마음 여린 운선이 괜히 그들에게 해코지나 당하지 않을지 걱정이었다. 심지어 적우와 함께 있던 것을 기억하는 이라도 있다면 오해를 받을지도 몰랐다.
“스승님의 유언(遺言)이니까요.”
운선은 전혀 고민해본 적 없다는 듯 해맑게 웃었다.
“혹, 그곳에 가기 불편하시면 함께 가자고 조르지 않겠습니다.”
운선은 사뭇 섭섭하였으나 주운을 곤란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를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 구월산에 찾아가면 되니 이대로 이별은 아닐 거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아니, 나도 간다.”
주운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고는 객잔을 나섰다. 적우가 가는 길과 방향은 같았으나 목적은 달랐다.
“감사합니다.”
운선은 한참을 헤죽거리다가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그런데 주운.”
“왜?”
앞서가던 주운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또 쓸데없는 질문이나 던지겠지.
“도대체 사(私)파와 정(正)파는 무엇으로 나누는 것입니까?”
“뭐?”
“그렇지 않습니까? 정파라는 이들은 무례하고 건방진 데 반해, 사파인 적우 형님은 참 의리 있는 사람 아닙니까?”
주운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땅만 보고 걷던 운선은 하마터면 그녀의 등에 크게 부딪힐 뻔하였다.
“주운?”
주운은 천천히 운선을 돌아보았다. 원래도 표정이 잘 없는 편이었으나 왠지 더 싸늘하고 굳은 얼굴이었다.
“너에게는 은인이나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악몽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녀는 한숨을 크게 내뱉으며 덧붙였다.
“운선아, 사람을 함부로 믿지 말아라. 설사 그게 나일지라도.”
*** 단초(端初):
일이나 사건을 풀어나갈 수 있는 첫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