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무십일홍-9화 (9/209)

#9화. 水魚之交(수어지교)

“명문정파가 맞습니까?”

주운의 날카로운 눈빛에 형진은 움찔하였다. 월심 때문에 활인검을 놓쳐 민망하기 짝이 없는 데다가 여인에게 질책을 당하니 부끄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낭자는 누구시길래 이 무뢰한을 돕는 것입니까?”

애써 동요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형진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보법으로 심기를 흐트러뜨리고 기습을 하는 것이야말로 소인배 아닙니까? 당신들은 내 이름을 알 자격이 없으니 더 혼나기 전에 그만 자리를 비켜 주시지요.”

주운은 검을 거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거만한 말투에 뒤에 있던 어린 소년이 뛰쳐나오려 했으나 형진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저희의 무례한 행동에 마음이 상하신 것 같은데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해 바랍니다.”

“흥!”

주운은 마치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마냥 젓가락질만 해댈 뿐이었다. 그 틈에 적우는 어깨를 툭툭 털며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주 낭자, 신세 한 번 크게 지었소.”

주운의 잔에 술을 가득 따르며 적우가 말했다. 아까와는 다르게 자못 공손한 태도였다.

“흥, 그깟 잔재주에 당할 뻔하다니 그 대단한 명성도 다 허명이었군요.”

핀잔을 주는 주운에게 화가 날 만도 하건만, 적우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나 말이오. 허허. 어찌 되었든 내가 진 것이니 자네들도 그만 가 보시게.”

적우는 깨끗하게 승복하겠다, 너스레를 떨며 그들 쪽으로 손을 모아 연신 흔들어댔다. 두타공파의 제자들은 적우를 향한 검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시비를 거는 것도 우스운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형진은 주운과 적우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는 듯했으나 이윽고 포기했는지 안색을 확 바꾸며 말했다.

“일단 우리의 의견은 전하였으니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최대한 공손하게 읍을 하고 곧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남은 여섯 소년도 몹시 불쾌한 표정이었으나 그의 사형을 따라 차례로 객잔을 빠져나갔다.

“대사형, 마교의 악당을 이대로 내버려 두어도 되겠습니까?”

아직도 분이 안 풀려 식식거리는 사제를 바라보며 형진이 온화하게 웃었다.

“만약 그 낭자가 손속에 인정을 두지 않았다면 우리 중 누구 하나는 크게 다쳤을 것이다.”

“네? 그래봤자 어린 여인 아닙니까?”

형진은 그저 사제들에게 웃어 보일 뿐,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다만 빠져나온 객잔을 다시 돌아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검선(劍仙)의 제자라.”

한바탕 일전을 치른 세 사람은 눈치가 보여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었다. 적우의 제안으로 골목 어귀에 있는 작은 객잔으로 자리를 옮겨 행장을 풀기로 했다. 주운은 굳이 그와 같은 숙소에 머무는 것이 불편하였으나 적우가 은혜를 갚겠다 들러붙는 통에 차마 떼어낼 수가 없었다.

“주인장, 이곳에 있는 술이란 술은 다 꺼내오시오.”

적우는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양껏 음식과 술을 시키고는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주운은 내내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자리를 파하지는 않았다.

“꼼수를 부리지 않았다면 검술은 나쁘지 않았지. 특히 맨 앞에서 칼춤 추던 녀석은 악랄하기는 했으나 꽤 준수한 실력이었어. 일, 이년 지나면 내 도(刀)를 꺼내 들어도 이기기 쉽지 않겠더군.”

운선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상대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그의 인품에 또 한 번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사형과 참 비슷한 분이다.’

가능하다면 이런 사람과 친분을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에 적우의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운선의 눈길을 눈치챘는지 적우 역시 그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관심을 보였다.

“아우님, 내가 이 귀염둥이를 맡긴 것은 아우님에게 호감이 있어서네. 그러니 숨김없이 말해주면 좋겠네.”

“네, 형님.”

적우의 필요 이상의 관심에 주운의 눈빛이 불안정해졌다. 의리는 있으나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이므로 그에게 운선의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운선은 이미 적우에게 마음을 다 내준 것 같았다.

“자네 상처를 보니 이것은 태을신공에 당한 것 아닌가.”

자신의 도(刀)를 맡길 때, 적우는 운선의 까맣게 타버린 오른팔을 보았다. 핏줄을 태울 정도의 위력을 가진 무공. 그것은 본교(本敎)의 태을 신공밖에 없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태을신교의 제자일세.”

“태을신교요?”

강호의 경험이 전무한 운선은 낯선 문파의 이름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객잔의 무림인들이나 두타공파 제자들의 태도로 봐서는 사파인 듯한데 그중에서도 영 평판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주운은 졸음이 오는지 턱을 괴고 앉아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태을신교는 저 오대산검과 같은 명문정파들이 두려워하는 사파중의 사파지. 그들은 심지어 마교라고 부르더군.”

“마교(魔敎)요?”

운선의 화들짝 놀라는 표정을 본 적우는 피식 실소를 지었다.

“워낙에 기인(奇人)이 많기도 하거니와 그런 오명을 쓰게 만든 놈들이 없다고는 못하지. 아마도 네 팔을 이 지경으로 만든 놈들도 그중에 있을 테고.”

운선은 그제야 흑접영이 혹 태을신교의 제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소름 끼치는 얼굴로 살인을 즐기는 형제의 모습이 생각나자 두려움으로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태을신공은 오로지 신교의 교주와 그의 직속 제자만이 쓸 수 있는 무공이네. 이 무공에 당했다는 것은 네가 재수 없게도 그들 중 한 명을 만났다는 것이고.”

운선은 점점 더 자신의 의심에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적우는 흑접영과 같은 목적을 가진 이가 아닐까? 이제껏 그에게 향하던 신뢰가 단번에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안타깝게도 네 생각과는 다를걸. 이 자는 내가 만난 이들 중 가장 진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흑접영 같은 악당은 아니야.”

운선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주운이 한마디 툭 던졌다. 그녀의 말이라면 양잿물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신뢰하는 운선은 금세 표정이 풀어졌다.

“그럼 내 예상대로 흑접영에게 당한 것이냐?”

운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의 일이 머릿속에 주르륵 펼쳐져 오른팔의 통증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좌영은 태을 신공 2단계에 접어든 거의 유일한 제자였지.”

적우는 쓸쓸한 표정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을신공은 총 5단계를 거쳐야 비로소 익혔다고 말할 수 있네.”

그러나 완공을 한 이는 교단의 교주 한 명뿐, 그의 일곱 제자 누구도 2단계 이상 익히지 못했다. 그 이상을 익히려 하면 몸 안의 음양의 기가 충돌하여 주화입마에 빠지기에 십상이었다. 적우 역시 1단계 초입에서 도저히 진척이 없었다. 오직 그 한계를 벗어난 이가 바로 흑접영의 맏형, 좌영이었다. 그는 동생은 물론이고 신교의 어떤 제자보다 자질이 뛰어나 촉망받는 인재로 손색이 없었다.

“허나, 욕심이 지나쳤지. 결국, 교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건이 있었고, 그렇게 교단을 이탈해 버렸어. 그들이 저지른 잔혹한 범죄들이 수많은 명문정파를 적으로 돌린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네.”

그는 운선의 팔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며 혀를 끌끌 찼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짐작도 안 가는군.”

“고칠 수 없으면 그만 들여다봐요.”

적우가 신파를 늘어놓는 것이 짜증 났던 주운은 결국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고 말았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밤을 새울 것 같았다. 해결책이 없는 일에 푸념만 늘어놓는 것은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사실 고칠 방도가 없는 것은 아니네.”

“네?”

운선은 눈이 번쩍 뜨였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팔의 상태에 슬슬 조바심이 나던 차였다. 이 팔을 고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신공의 내력으로 다시 화기(火氣)를 거둬들이면 되지. 그것은 완전하게 신공을 연마한 교주님만이 할 수 있네. 허나 어디에 계신지도 모르는 그분을 찾아 헤매는 사이에 이 팔이 견디지 못하겠지.”

“아…….”

운선은 기대에 못 미치는 적우의 대답에 기운이 쏙 빠졌다.

“아니면 자네가 태을신공을 직접 익히는 방법이 있네.”

“네?”

적우의 굵은 눈썹이 팔자로 축 처졌다.

“하지만 본교 제자가 아니니 도리가 없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적우가 계속 운선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자 보다못한 주운이 적우의 팔을 툭 치며 쏘아붙였다.

“불쌍한 애 놀리지 말고 그만 헤어집시다. 오늘 이 술로 나한테 진 빚은 털어내고요.”

주운은 자신의 앞에 놓인 술을 입안에 급하게 털어 넣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형님, 제가 비록 게을러 무공을 전혀 모르는 몸이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꼭 신공을 익혀 팔도 고치고 복수도 하고 싶습니다.”

운선은 갑자기 적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주운과 적우가 모두 놀라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운선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만약 이 팔이 문제라면, 이것은 잘라내도 상관없습니다. 왼팔로 무공을 익히면 됩니다.”

불구가 되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은 스승님과 사형의 복수만 하면 그 이상의 삶은 의미가 없었으므로. 절세 신공을 익힌다면 복수는 왼손만으로도 가능할지 몰랐다.

“사실 이대로 두면 팔이 문제가 아니라 자네 목숨이 위태롭네.”

주운은 운선의 희망을 자꾸 꺾어버리는 적우를 말리고 싶었으나 눈치 없는 그는 운선에 대한 연민에 빠져 쓸데없는 말을 계속 지껄였다.

“안 됩니다. 저는…저는 사부님의 복수를…….”

운선은 결국 참고 있던 눈물을 왈칵 쏟았다. 여태껏 그 마음 하나로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어떻게든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적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운선의 등만 쓸어주고 있었다. 이제 겨우 열넷밖에 안 된 어린아이가 이토록 모진 운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혈혈단신으로 강호의 풍파를 겪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과 겹쳐 보이기도 했다. 이윽고 결심이 선 적우는 그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아우님, 내 어찌 모른 척할 수 있겠나. 위험하긴 하겠으나 내가 아는 내용만이라도 자네에게 알려 주겠네.”

태을신교의 내규는 엄격하여 함부로 내전 무공을 타인에게 전수할 수 없었다. 적우 역시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차후 있을 엄벌의 두려움보다 운선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훨씬 더 강했다. 그는 목숨을 살리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내 내공이 하찮아 겨우 앞부분의 구결만 알고 있을 뿐이네. 그러니 수명을 조금 늘릴 수는 있어도 완치는 힘들 것이야.”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형님.”

운선은 태을신교의 내규에 대해서는 정확히 몰랐지만 매우 힘든 결정이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더구나 처음 만난 자신에게 이토록 선한 마음을 베푸는 그의 인품에 감동하여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러다 몸에 있는 물이란 물은 다 빠져나오겠구먼.”

적우는 멋쩍어하며 머리를 연신 긁적였다.

“제가 요행히 목숨을 건진다면, 그 목숨을 바쳐 이 은혜를 꼭 갚겠습니다.”

“귀한 목숨 구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되었어.”

적우는 운선의 모습에 자신이 더 감동해 어느새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던 주운은 마음이 몹시 불편하여 먼저 자리를 뜨고 말았다.

‘제 앞가림도 못 하면서 무슨.’

적우가 한심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이상하게도 그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명치 끝이 간질간질했다. 아무래도 크게 체한 것 같았다.

*** 수어지교(水魚之交):

물과 물고기의 관계처럼, 아주 친밀하여 떨어질 수 없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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