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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7화 (7/209)

#7화. 勞而無功(노이무공)

“운아(雲兒), 오랜만이구나. 그 검이 아니었다면 몰라볼 뻔했다.”

우영은 고통을 억누르며 최대한 상냥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속에서는 열불이 차올랐으나 그녀의 정체를 안 이상 함부로 덤빌 수는 없었다.

“네. 여전히 아저씨는 혐오스러운 모습이네요.”

주운은 아무 감정이 담기지 않은 말투로 심드렁하게 되받았다. 우영은 꽤 불쾌했으나 내색하지 않으며 다시금 친절하게 물었다.

“그런데 혹 검선(劍仙)이 같이 왔느냐?”

대답을 듣기도 전에 그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검선이 나타난다면 흑접영 모두가 전멸이었다. 사실 주운도 형님이 함께 있다면 모를까, 혼자 힘으로는 버거운 상대였다.

“글쎄요. 오시기 전에 돌려주는 건 어때요?”

주운은 그의 뻔한 속셈이 보여 몹시 심기가 불편했다. 또한, 평소에도 이들의 악명은 익히 들어왔던 터라 별로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사부의 심부름만 하면 되니 이쯤에서 일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주기 싫다면 제가 아저씨를 죽이고 가져가도 괜찮겠지요?”

주운이 다가오자 우영은 오른손에 든 불진을 몸쪽으로 바짝 당겼다. 언제든 기습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일단 물러나자.’

검선이 주변에 있든 없든, 지금은 그것이 최선이었다. 자신을 비롯한 흑접영의 대다수가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결전을 벌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에게 없다.”

“영영 앞을 보고 싶지 않은 모양이죠?”

주운은 그가 상황을 모면하려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세침 세 개가 들려 있었다. 피하기는커녕 그것을 쳐낼 기운도 없는 우영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정말로 나에게 없다. 검신의 큰 제자 놈이 우리가 보는 앞에서 태워 버렸다.”

우영은 동의를 구하기 위해 주변에 쓰러져 있는 자신의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단주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대부분 혼절했거나 곧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정말이다. 정말이야. 믿어줘.”

우영은 적잖이 당황하여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수치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주운에게 사정했다. 수많은 소(小) 문파들을 멸하고 잔악한 기행으로 강호를 벌벌 떨게 했던 살수 집단의 단주였으나 그러한 악명 따위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저 이 순간만 모면한다면 그는 더한 비굴한 짓도 할 수 있었다.

“흐음.”

주운은 간절해 보이는 그의 태도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설마 자신의 수하들 앞에서 이 치욕을 당하면서도 거짓을 말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럼 저 아이는 왜 저리 만든 건가요?”

주운은 이 소란 속에서도 깨어나지 못하는 운선을 검 끝으로 가리켰다. 눈앞에서 경전이 불에 타는 것을 보았다면 두 제자를 같이 죽이면 될 일이지 귀찮게 데리고 다니며 괴롭힐 이유가 없을 테니까.

“혹여 저 아이가 경전의 필사본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한 거란다.”

우영은 임기응변으로 재빨리 변명을 늘어놓았다. 사실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약간의 기대도 있었기에 영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행히 주운의 표정을 보니 꽤 믿는 것 같은 낌새였다. 잘하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감이 차올랐다.

“검선에게 나를 못 본 것으로 해주면 나중에 꼭 은혜를 갚으마.”

주운은 사뭇 고민이 되었다. 아무리 간악하기 그지없는 흑접영의 단주라지만 이미 상처가 깊어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원한도 없는데 굳이 죽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주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경전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 거짓이라면 사부님이 직접 당신을 찾아갈 것입니다.”

“여부가 있겠느냐? 만약 그렇다면 내가 먼저 너를 찾아가 할복이라도 하겠다.”

우영은 그녀가 갑자기 말을 바꿀까 염려되어 손짓, 발짓 섞어가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가세요, 그럼.”

주운의 고운 미간에 가느다란 주름이 세 개나 생겼다. 그와 일면식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자신도 그들과 한패가 된 것 같았다. 문득 역겨운 마음이 들어 우영 쪽에서 몸을 획 돌려 버렸다.

우영에게는 이보다 귀한 기회는 없었다. 그의 눈에 박힌 세침은 이미 안구 안쪽까지 들어가 찾을 수가 없었으나 다리를 움직이는 데에는 크게 지장이 없었다. 일단 몸을 추스를 수 있는 단원들과 운선을 데리고 하산할 생각이었다. 산 아래에는 어제부터 흑접영의 정찰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우영은 아까부터 바닥에 엎어진 자세로 꼼짝도 안 하는 운선에게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이놈이 죽기 전에 반드시 경전의 내용을 알아내야만 했다.

“잠깐!”

운선의 팔을 잡아 어깨에 걸치려고 할 때였다. 언제 움직였는지 그의 앞에 주운의 하얀 옷자락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누가 이 아이까지 데려가도 된다고 했죠?”

주운은 칼등으로 우영의 오른쪽 가슴을 세게 타격했다. 내력이 실리지는 않았으나 워낙에 빠르고 간결한 동작이라 대비할 새도 없었다. 우영은 숨이 막혀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뒤쪽으로 나동그라졌다. 아까 올라온 태을 신공의 진기가 채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당한 일격이라 선혈을 가득 토했다.

주운은 넘어지려는 운선을 잡아 상태를 살폈다. 오른쪽 팔은 이미 핏줄이 다 타버려서 시커멓게 변색 되어 있었다. 맥을 짚으니 가느다란 진동만 느껴지는 것이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저 아이는 내 형님을 죽게 한 원수이니 데려갈 수 있게 해 다오.”

정신을 차린 우영은 헉헉거리며 주운에게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대로 저 아이를 뺏긴다면 경전의 내용을 알 방법은 요원하기만 했다.

“사부님께서 명하신 일은 두 가지입니다. 경전을 찾을 것! 그리고 이 아이를 구할 것! 그러니 데려가려거든 저 다친 나비들이나 챙기세요.”

주운은 싸늘한 시선으로 우영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도 운선을 데려가려 한다면 그를 죽이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래. 알았다.”

잠시 망설였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름 이성적인 판단을 해 보았을 때, 일단 후퇴하는 게 더 낫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저 녀석을 검선이 데려간다면 어떻게든 목숨줄은 붙여 놓을 것이다. 그다음에 기회를 노려도 늦지 않았다. 어차피 경전을 찾기 위한 열쇠가 저 녀석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도 자신밖에 없었다.

“가자!”

우영은 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흑접영들만 데리고 하산을 준비했다. 주운을 힐끗 보았으나 인사는 하지 않았다. 다음에 만나면 꼭 몇 배로 갚아주리라 다짐할 뿐이었다.

운선의 상처는 보기보다 훨씬 심각했다. 태을신공의 열기에 심맥(心脈)까지 상해 웬만한 약으로는 치료할 수 없었다. 숨이 붙어 있는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이를 어쩐다.’

급한 대로 주운은 품 안에서 단정환을 꺼냈다. 본래 내상을 치료하는 약이지만 일반인에게는 입에 물고만 있어도 각성의 효과가 있었다. 하나를 다 삼키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아, 반을 잘라 운선의 입안에 대충 쑤셔 넣었다.

“으으”

얼마나 지났을까? 운선이 신음을 내며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옆에 턱을 괴고 앉아있던 주운은 그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 수통에 있던 물을 쏟아부었다.

“앗!”

차가운 물세례에 운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앞에는 처음 보는 낯선 여자가 심통이 가득 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누…누구? 악!”

주운에게 말을 걸다 말고 운선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오른쪽 팔을 붙잡았다. 혼절하는 동안 자각하지 못했던 고통이 한 번에 밀려온 것이었다.

“꽤 아플걸.”

주운은 남 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내려다볼 뿐이었다.

“누구십니까?”

고통을 이기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며 운선이 물었다. 찬찬히 보니 어디서 본 듯도 한 얼굴이었다.

“검선 이무영의 제자 주운이야. 내가 너보다 네댓 살 위니까 앞으로는 말을 놓을게.”

“아…네.”

호전적인 주운의 태도에 살짝 주눅이 든 운선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검선 이무영이라면 스승님의 사매가 아닌가? 그녀에게 제자가 하나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으나 이처럼 퉁명스럽고 쌀쌀맞은지는 몰랐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주운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자세히 이야기하자니 귀찮고 또 대충 넘기려니 계속 귀찮게 물어볼 것 같았다.

“사부님이 너를 구하라 하셨고, 그렇게 했으니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다행히 운선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아마도 검선은 스승의 위기를 눈치채고 이곳에 온 모양이다. 다만 너무 늦었을 뿐.

“감사합니다. 사저.”

“뭐?”

주운은 운선이 부른 호칭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살을 찌푸렸다.

“징그러우니 그냥 이름으로 불러.”

그녀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었다. 괜히 인연을 만들어 이런저런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 아이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곧 죽을 것 같았다. 만약 불쌍한 마음에 도와주었다가 엉겨 붙으면 아주 곤란했다.

“그나저나 경전은 어디에 있니?”

운선은 우영에게서 벗어난 것에 안심하고 있다가 주운의 질문에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설마 검선도?’

‘해심밀경소’는 너무나도 평범한 경전의 해석본이었다. 운선은 경전을 외우면서도 도대체 왜 그들이 이것을 노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스승과 사형을 한꺼번에 잃었으므로 아무나 함부로 믿으면 안 된다는 생각만은 확고했다.

“이제 없습니다. 사형이 태워 버렸습니다.”

운선은 애써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혹여 주운에게 거짓말을 들킬까 손에서는 흥건하게 땀이 배어 나왔다.

“흐음.”

우영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 주운은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이제 이 녀석만 떼어내면 사부의 심부름은 완전히 끝난 것이다.

“경전은 없고 너의 목숨은 구했으니, 그럼 우리는 이만 헤어지자.”

운선은 주운이 의심 없이 자신의 말을 믿어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그녀가 가버리면 자신 혼자 그 먼 길을 가야 한다는 사실에 암담해졌다.

“저…….”

운선은 차마 바로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주운의 눈치를 살폈다.

“왜?”

“같이 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뭐?”

주운은 기가 막혀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운선을 쳐다보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이 화난 것 같기도 하였으나 운선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스승님께서 두타산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하산하여 다음 마을인 금당까지만 같이 가주실 수 없겠습니까?”

주운은 간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운선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오른쪽 팔은 벌써 부패가 시작됐는지 썩은 냄새가 진동했고 찢긴 윗옷 사이로 피고름이 맺힌 상처가 보였다. 자신이 이대로 간다면 아마 이 산 중턱에서 목숨이 끊어질 것이었다.

“뭐, 나도 가는 길이니 거기까지라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운의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운선은 방방 뛰며 환하게 웃었다. 주운은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휙 돌리고 먼저 갈림길을 내려가 버렸다.

“경전은 어찌 되었소?”

청색 도포를 입은 남자는 매서운 눈으로 우영을 노려보았다. 황당하기는 우영도 마찬가지였다. 입산 길목에 잠복하고 있어야 할 자신의 수하들이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우영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남자 쪽으로 불진을 날렸다.

“감히!”

불진은 정확하게 남자에게로 날아갔으나 털 한오라기도 그에게 닿지 못했다. 남자는 단지 소맷자락을 휘둘렀을 뿐이었다. 그러나 불진의 머리는 두 동강이 나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하얀 털 사이에서 떨어진 분진이 두 사람 사이에 뽀얗게 떨어졌다.

“경전은 어디 있는가?”

청색 도포의 남자의 벽력같은 외침에 우영과 흑접영들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내공이 실린 목소리에 입은 상처는 웬만한 무기에 당한 것보다 타격이 더했다. 반 이상이 이미 실신한 상태였다.

“우리는 당신의 수하가 아니오!”

그러나 우영의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의 부추김 때문에 자신의 형인 좌영이 죽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정찰대의 생사도 알 수 없었다. 여기서 밀리면 흑접영은 멸문이었다.

“당연하지. 너희 같은 벌레들과 어찌 내가 동류란 말인가?”

남자는 경멸의 시선으로 우영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그의 오른쪽에 쓰러져 있는 흑접영 한 명의 목을 잡아 들었다. 단장이었다.

“으헉…….”

“경전은?”

“둘……둘째.. 둘째에게…….”

그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진실을 내뱉었다. 어떻게든 살고자 하는 본능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대답을 듣자마자 망설임 없이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단장의 목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노오옴!!!”

우영이 피를 토할 정도로 목소리를 긁으며 소리를 내질렀다. 자신과 형은 이 간악하고 표리부동한 놈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것이었다. 무지하고 또 무지했다.

“흑접영의 명맥을 유지하고 싶다면 경전을 찾아와라.”

청색 도포의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까만 나비들의 시신 속에서 한동안 우영은 짐승처럼 울부짖고 있었다.

*** 노이무공(勞而無功): 애쓴 보람이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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