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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6화 (6/209)

#6화. 起死回生(기사회생)

혈전이 벌어졌던 자리는 폐허와 같았다. 단정하고 고요했던 강가장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잠시 멈췄던 싸리 눈이 피로 붉게 물든 마당 위로 다시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눈처럼 새하얀 옷을 입은 중년의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대청 바닥을 뒹굴고 있는 강율천의 머리 쪽을 향했다.

“그러길래 제 말을 듣지 그러셨습니까?”

차분하지만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여인이 말했다. 참으로 질긴 인연이었다. 끊어내고 싶었으나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리석었습니다.’

검신이라는 화려한 수식어와 다르게 초라한 결말이었다. 율천의 얼굴은 이제 누구의 것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여인은 차마 그대로 돌아서지 못하고 분리된 시신을 온전한 모습으로 놓아두었다.

어느새 하얀 옷 소매에는 검붉은 얼룩이 잔뜩 묻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참을 망설이던 여인은 결국 결심이 선 듯, 소매 끝을 매정하게 잘라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가뿐해지는 것도 같았다.

여인은 이 지독하게 고지식한 늙은이를 땅에 묻어줄 마음은 없었다. 아주 짧은 묵례만 남기고 마당을 가로질러 강가장을 벗어났다. 그녀의 손에는 종연이 마지막까지 손에 꼭 쥐고 있던 검, ‘수월’이 들려 있었다.

흑접영에게 둘러싸인 운선은 벌써 한 시진이 넘도록 고초를 겪고 있었다.

“경전의 내용을 읊어 보아라!”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미 백 번도 넘게 같은 질문과 같은 대답이 반복되었다. 질문하는 이와 달리 대답을 하는 이의 몰골은 점점 더 처참하게 변해갔다. 얼굴은 퉁퉁 부어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었고 모진 매질에 상체의 피부가 다 찢겨 피투성이였다.

형님을 잃은 우영은 그 원흉의 제자를 온전한 몸뚱이로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손가락부터 시작하여 사지를 잘라낼 심산이었다. 어떤 고문을 하여도 자신의 이 찢어지는 고통과 비교할 수 없었다.

“어디 손가락이 다 잘려 나가도 같은 대답을 하는지 두고 보자.”

우영의 손에는 나비 모양의 단검이 들려 있었다. 어찌나 날을 날카롭게 갈아 놓았는지 움직일 때마다 햇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어느 손가락부터 잘라줄까?”

우영이 음흉한 웃음을 흘리자 그의 기다란 입이 턱밑까지 치켜 올라갔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잘라내는 방법은 이 강호에 그만큼 잘 아는 이가 없었다.

“엄지부터 시작하자.”

우영이 작게 고갯짓을 하자 흑접영의 단장이 운선에게 다가와 오른쪽 손을 덥석 잡아챘다. 운선은 필사적으로 손을 뒤로 숨기려 했으나 양팔이 골절되어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으아악!”

우영은 운선의 오른쪽 손목을 잡아 부러질 정도로 꽉 쥐어 자신의 앞으로 당겼다. 그는 늘 고문을 할 때 오른쪽을 잘라내었다. 그것이 손가락이든, 팔이든, 다리든.

“이래도 말하지 않을 테냐?”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번 더 운선에게 물었다.

“차라리 그냥 죽여라!”

두려운 마음에 정신이 아득해지면서도 운선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경전은 사부와 사형의 목숨값이었다. 그것을 겨우 자신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져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영은 입술이 새파래져 덜덜 떨고 있는 운선이 우스워 죽을 것 같았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놈이 대단한 신념이라도 있는 양 버티고 있는 꼴이 가소로웠다.

‘인간은 어느 한계 이상의 고통을 느끼면 극도의 절망감에 빠진다. 딱 임계점만 넘기면 될 것이다.’

어쩐지 손가락 몇 개를 잘라내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딱 죽기 직전까지 고통을 주리라. 흥분한 우영의 큰 입이 조금씩 옆으로 벌어졌다.

“어디 얼마나 견디나 보자.”

새파란 핏줄이 팔딱팔딱 뛰는 운선의 손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우영은 엄지와 중지를 이용하여 손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태을(太乙) 신공을 끌어올려 두 손가락에 집중했다. 서서히 기가 올라오며 두 손가락에 집중됐다.

“으아아악!”

살을 태우는 것 같은 뜨거운 기운이 손목으로 전해지자 운선은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불길은 손목을 지나 핏줄을 타고 팔뚝까지 올라갔다. 뼈가 바스러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이래도?”

“끄으윽”

운선은 울부짖다 못해 목에서 쇳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목구멍이 찢어져 피가 터져 나왔지만 우영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이래도?”

태을 신공을 사용하면 할수록 우영은 점점 신이 났다. 오직 살인하고 싶다는 충동만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냥 죽여 버릴까?”

“단주님!”

이미 눈에 초점을 잃은 단주의 모습에 놀라 흑접영들이 모여들었다. 태을신공을 사용할 때 그들의 단주가 이성을 잃은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매번 그들은 말리기보다는 피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만큼 무시무시한 무공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흑접영의 단장은 이대로 운선을 죽여버린다면 좌영의 죽음이 헛되이 될까 두려웠다. 어떻게든 단주를 말리고 경전의 내용을 알아내야 했다.

“단주님!”

단장은 차마 단주를 건드리지 못하고 운선 쪽으로 장력을 내질렀다. 그가 아는 한, 우영의 폭주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퍽!

그러나 그의 장력은 운선에게 닿기도 전에 태을신공의 항력에 의해 본래의 주인에게로 튕겨 나갔다. 단장은 뒤쪽으로 스무 걸음 정도 밀려 나가며 울컥 선혈을 토했다.

“단장님!”

흑접영의 단원들이 우르르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다행히 단장은 큰 부상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혹여 단주가 다칠까 봐 공력을 줄였기에 망정이지 되려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져 갔다. 끔찍한 고통에 이미 혼절한 운선은 목숨줄을 놓기 일보 직전이었다.

“차라리 저놈의 손목을 잘라 버리는 건 어떻습니까?”

그때 단원 중 누군가가 단장에게 다가가 귀엣말을 했다. 내공은 튕겨낼 수 있으나 쾌검이라면 닿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해 보자.”

단장은 단원들이 다칠까, 그들을 뒤로 물린 후 자신의 검을 천천히 빼 들었다. 흑접영 중에서도 검술이 가장 뛰어난 그였다. 예리한 검 끝은 오직 운선의 손목만을 노리고 있었다. 단장은 호흡을 멈추고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휙!

챙!

“으악!”

흑접영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하여 눈앞에 일어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단장의 검이 정확하게 운선의 손목에 박히는 것까지 모두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그러나 정작 검이 잘라낸 손목은 운선의 것이 아니라 단장의 것이었다.

“단장님!”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목을 바들바들 떨며 단장은 단주가 있는 쪽을 눈으로 가리켰다. 그들의 시선이 따라간 자리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서 있었다.

“너무 늦진 않았군요.”

열대여섯이나 되었을까? 유달리 하얀 피부에 이목구비가 또렷한, 앳된 얼굴의 소녀가 새하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운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흑접영 단장의 칼을 쳐낸 것은 그녀가 들고 있는 가느다란 검이었다.

“누……누구냐?”

흑접영의 단원들이 하나둘 무기를 꺼내 들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은커녕 이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곤란하게 되었네요.”

소녀는 팔짱을 끼고 서서 뭔가를 고민하는 듯 한참을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 여유로워 흑접영 누구도 섣불리 그녀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다쳐도 어쩔 수 없지.”

혼잣말을 끝낸 소녀는 한 손으로는 운선의 손목을 잡아채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우영의 얼굴 쪽으로 일곱 개의 세침(細針)을 날렸다. 그 동작이 어찌나 빠른지 주변에 있는 그 누구도 암기가 날아가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휘익.

우영은 이미 신공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가 있어 자신의 옆에 누군가가 서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인(武人)인지라 얼굴 앞으로 스치는 바람결에 퍼뜩 위험함을 감지했다. 고개를 젖혀 세 개의 세침을 차례로 피한 그는 오른손을 땅에 짚고 몸을 뒤로 비틀어 이후에 오는 세 개의 세침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으악!”

적절한 대처였으나 마지막 것은 결코 피할 수 없었다. 우영의 몸놀림보다 소녀의 세침이 더 빠르고 정확했다. 그대로 우영의 오른쪽 눈에, 바늘귀만 겨우 보일 정도로 깊게 박혔다.

실명의 두려움과 살을 파고드는 끔찍한 고통에 우영은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어떻게든 세침을 빼고 싶었으나 조금만 건드려도 눈알이 빠져버릴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단주님!”

흑접영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고수가 나타났음을 깨달았다. 쓰러진 단장 대신 부단장의 지휘 아래 대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재빠른 움직임으로 소녀를 둘러싸고 나니 하나의 거대한 나비 모양이 만들어졌다. ‘접사진(蝶寫陳)’이었다. 이는 웬만한 무공 고수는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그들만의 필살기였다.

“흥!”

소녀는 가소롭다는 듯 크게 콧방귀를 뀌었다. 동시에 왼손으로 잡고 있던 운선을 진(陳)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미 혼절한 그의 몸은 반원을 그리며 빠르게 곤두박질쳤다. 그대로 추락한다면 내상을 입을 정도의 세기였다.

그러나 매서운 눈으로 그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소녀가 가벼운 일 장을 날리자 하강하는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운선은 마치 근거리에서 넘어진 모양으로 작은 타격음을 내며 바닥에 엎어졌다.

‘내공이 실로 가늠하기 어렵구나.’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정신이 혼미해지면서도 단장은 소녀의 무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의 식견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문파였으나 혀를 내두를 정도의 놀라운 실력이었다.

“방심하지 마라!”

단장의 외침과 함께 접사진의 날개 모양이 변하기 시작했다. 횡으로 서 있던 흑접영들이 삼 보를 움직이면 종으로 서 있는 흑접영들이 다섯 보를 물러났다. 날개가 움직일수록 중앙의 크기가 좁아졌는데 그 간격이 촘촘하여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쉬이 몸을 빼낼 수 없었다.

“재밌는 재주를 부리네요.”

소녀는 그들의 일사불란한 모습을 무표정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공격이 시작될 때까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휘익!”

휘파람 소리가 신호였다. 홀수 일곱의 흑접영이 검을 뽑더니 좌우로 수십 번 손목을 꺾어 각기 다른 일곱 초식을 구사했다. 호접(胡蝶)검법의 초식은 이름처럼 화려하고 어지러웠다. 한 사람의 검이야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각기 다른 방향에서 쏟아지는 검광은 보기만 해도 어지러웠다.

“휘익!”

두 번째 휘파람 소리가 들리자, 이번에는 짝수 열의 일곱이 몸을 날려 중앙으로 돌진하며 또 다른 일곱 초식을 구사했다. 이제 소녀는 사방에서 좁혀오는 열네 초식을 막아내야 했다.

“오오.”

그러나 그녀는 놀라움의 감탄사를 내뱉을 뿐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열넷의 칼날이 그대로 닿는다면 필시 종잇조각처럼 온몸이 산산이 찢길 것이었다.

캉!

“억”

요란한 금속성이 고요한 산속을 흔들어 놓았다. 이어서 짧고 굵은 열네 번의 비명이 들렸다.

딱 한 초식이었다. 완전히 수세에 몰린 줄 알았던 소녀는 옷자락에 칼날이 닿는 순간 검을 들어 올렸다.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단 한 번 검초를 휘두른 것 같았으나 사실 그녀의 검날은 무려 열네 명의 단중혈을 찌르고 지나갔다. 악심을 품고 조금만 힘을 가했더라면 흑접영 모두 절명했을 것이다.

“살인을 좋아하지 않으니 이쯤 하지요.”

소녀는 어깨를 으쓱 들어 올리며 바닥에 쓰러진 흑접영들을 내려다보았다. 검 끝에 맺힌 핏물이 아침이슬에 젖은 풀잎 위로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오른쪽 눈 통증 때문에 한동안 두 눈을 다 뜨지 못했던 우영은 수하들의 비명이 들리자 그제야 큰일이 났음을 알았다. 이미 태을신공으로 인한 주화입마에서는 벗어난 상태였다. 기습에 대비하기 위해 나무에 등을 기대고는 오른손에 불진을 들었다. 오른 눈은 가망이 없었으나 왼 눈으로는 조금씩 또렷하게 앞을 볼 수 있었다.

“워… 워…월…월심(月心)”

우영은 소녀가 들고 있는 검에 쓰인 글자를 더듬더듬 읽었다. 그러더니 마치 귀신을 본 것처럼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어째서…어째서 네가 여기에….”

쓰러진 흑접영들 사이를 사뿐사뿐 건너온 그녀는 드디어 우영의 앞까지 다가왔다.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로, 그러나 차가운 목소리로 주운이 말했다.

“아저씨가 훔친 것을 가지러 왔지요.”

*** 기사회생(起死回生):

거의 죽을 뻔하다가 다시 살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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