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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5화 (5/209)

#5화. 滅門(멸문)

눈 깜짝할 사이에 책은 한 줌의 재가 되었다. 그 허망한 광경을 보는 좌영의 눈에는 또 다른 불꽃이 화르르 타올랐다.

“네놈들 모두 찢어 버리겠다!”

우영이 차마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좌영의 불진이 종연 쪽으로 향했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저 머리통을 박살 내 버리리라.

“형님!”

지금 이들을 죽여버리면 비급은 영원히 갖지 못하게 될 터였다. 아무렴, 자기 스승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지키려던 것을 저리 쉽게 불태워 버릴 리는 없었다. 우영은 흥분한 그의 형을 막아섰다.

“분명 차선책이 있을 것입니다.”

“뭐?”

“저렇게 쉽게 태울 책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우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좌영은 종연에게 향하던 불진을 다시 거둬들였다.

“진짜는 어디 있느냐?”

애써 분노를 누르느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좌영이 물었다.

“보지 않았느냐? 이게 바로 너희가 찾던 경전이다.”

종연은 잿가루를 사방에 흩날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강가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이유가 한낱 먼지에 불과했다는 것이 우습기만 했다.

“흥! 허튼수작 부리지 마라!”

찢어진 옆구리를 한쪽 손으로 잡으며 우영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다시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빨리 치료받지 않으면 손상된 장기에 고름이 찰 것이 분명했다. 마음 같아서는 저놈의 모든 장기를 꺼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하물며 필사본이라도 있겠지!”

일단 큰소리를 쳤으나 좌영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부터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강율천의 모습을 보니 더욱 심장이 벌렁거렸다.

‘진짜 없애 버린 거면 어쩌지?’

저 대단한 비급을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가. 자존심을 바닥까지 보이면서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종연은 쾌재를 불렀다.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예상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추악한 욕망이 운선의 살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자신을 믿고 따라온 사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목숨을 구할 수는 있으나 모진 고초를 겪을 아우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허나 그 어떤 고통을 감내하더라도 너는 살아야 한다.’

종연은 드디어 결심이 섰다.

“필사본보다 더한 것이 있지.”

“그게 뭐냐?”

“그게 뭐냐?”

두 사람은 동시에 종연에게 한발 다가서며 물었다. 역시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이었다. 좌영은 다행이라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책을 차지하고 나면 저 지긋지긋한 녀석을 반드시 죽여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아이다.”

“뭐라고?”

종연의 말에 놀란 것은 두 흑접 뿐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묵묵히 사형의 말을 듣고 있던 운선은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붕 위에서 사형이 자신에게 말해준 계획은 딱 여기까지였다.

***

“책을 외우고 나면 어찌합니까?”

“책을 다 외우거든 마당으로 내려와 그들에게 가짜를 내어주거라.”

“네? 그들이 속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어이없어하는 운선을 바라보며 종연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속이려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벌려는 것이다.”

“네?”

운선은 도통 사형의 속내를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그러자 종연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너는 그저 나를 믿고 따르면 된다.”

***

누구보다 믿고 의지하는 사형의 말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분명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으나 현명한 그라면 비책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행동은 운선의 믿음을 철저히 배신하고 있었다.

“사형!”

종연은 울부짖는 운선의 외침을 애써 모른 척하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 아이만이 유일하게 비급의 내용을 온전히 안다.”

종연의 행동에 적잖이 당황하고 있던 율천은 그제야 제자의 의도를 눈치챘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라면 어떤 잔인한 짓도 마다하지 않는 악귀들이었다. 아무리 의연하게 대처한다 해도 자신과 종연에게 비급이 없다는 사실은 곧 들킬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다음 목표는 당연히 운선이 될 것. 운이 좋아 하루를 번다고 해도 흑접영의 수색 능력이라면 운선이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만약 운선이 책 그 자체라면? 그들은 절대로 비급을 없애지 못할 것이다. 운선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종연의 무모한 행동의 이유는 오직 운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허나 앞으로 저 아이가 겪을 고통을 어찌 가늠할 수 있을까?’

주름이 깊게 잡힌 그의 두 뺨을 타고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끔찍한 고문을 당해 죽는 것보다 못한 상처를 입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운선만은 꼭 살려야 했다. 경전을 지키는 일 못지않게 그 또한 율천의 소명이었다.

“흥! 내가 그 말을 어찌 믿느냐?”

“흥! 비루한 목숨을 구걸하고자 하는 거짓말이 분명하다!”

말은 그리하였지만 두 흑접은 모두 마음이 흔들렸다. 눈앞에서 경전이 사그라지는 것을 본 충격 때문이라도 일단 종연의 말을 믿고 싶었다.

“믿기지 않으면 죽이면 그뿐!”

종연은 의연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자신의 소매를 붙잡고 늘어지는 운선을 애써 모질게 떼어냈다. 그들이 제발 이 마지막 수를 받아주기를 바랐다.

“형님, 아무래도 수작을 부리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럴까?”

좌영은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율천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체념한 듯한 그의 얼굴을 보니 영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혹 거짓이라면 그때 죽여도 늦지 않습니다.”

“그건 그렇지.”

어쨌든 저 쥐꼬리만 한 녀석의 머릿속에 있다면야 어떻게든 말하게 하면 되지 않겠는가. 고문이야말로 흑접영의 주특기라 할 수 있었다.

“흥! 그럼 이 아이는 우리가 데려가겠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좌영은 불진을 움직여 원을 그리듯이 크게 휘둘렀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종연의 옆에 붙어있던 운선의 허리를 꽉 조여 감쌌다.

“사형!”

당황한 운선이 소리를 지르며 종연의 소매를 그러쥐었으나, 불진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소매가 쭉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운선의 몸이 공중으로 들렸다. 좌영이 손목에 힘을 강하게 주자 운선은 그대로 흑접영들이 있는 쪽으로 던져졌다.

쿵!

“으악!”

이번에는 왼쪽 어깨를 바닥에 심하게 부딪쳤다. 끔찍한 고통이 전신을 휘감았으나 운선은 어떻게든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버티고 또 버텼다.

“그럼 너는 이제 필요 없지?”

좌영은 다 죽어가면서도 거만하기 짝이 없는 종연이 계속 눈에 거슬렸다.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 줄 심산이었다.

살인할 생각을 하니 방금까지의 초조함은 싹 사라지고 마음속에 희열이 가득 찼다. 좌영은 귀밑까지 찢어진 입으로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내며 종연에게 달려들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종연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제를 구하기 위한 희생이었기에 조금도 후회되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는 운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어린아이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준 것이 못내 미안하여 흘리는 눈물이 그의 턱 밑으로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퍽!

“사형!”

좌영의 불진이 종연의 가슴팍을 완전히 꿰뚫었다. 종연은 비명 하나 없이 그대로 절명하였다.

“어라?”

“어라?”

두 흑접은 서로를 바라보며 아쉬움에 어깨를 으쓱 추어올렸다. 고통스럽게 죽이려던 계획과 달리 너무 신이 나서 힘을 조절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길래 흥분 좀 하지 말라니까.”

“아이고, 세상에 아플 겨를도 없었겠다.”

쓰러진 종연의 얼굴을 발로 툭툭 차며 좌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늙은이가 하나 더 남았잖아.”

“그래, 저 늙은이는 훨씬 고통스럽게 죽여주자.”

좌영은 키득거리며 천천히 강율천이 있는 탁자 쪽으로 다가갔다. 우영은 다쳤으니 형님에게 이 희열을 양보할 생각으로 두세 걸음 뒤따라갔다.

“스승님!”

운선은 사형의 죽음을 본 바로 뒤에 또다시 사부의 위기를 목격하자 분노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흑접영들의 발이 자신의 몸을 짓누르고 있어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물론 간다고 해도 무공을 못 하는 운선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병신 같은 놈,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구나…….’

운선은 자책감에, 멍이 들 정도로 가슴을 탕탕 쳐댔다. 할 수만 있다면 이대로 콱 죽어버리고 싶었다.

“강율천, 눈을 뜨고 네 제자의 몰골을 보아라.”

좌영은 한쪽 다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율천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좌영은 검신의 망연자실한 모습에 흥분하여 그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검신, 검신 떠받들어주니, 진짜 신이라도 된 것 같더냐? 그럼 정말 신이 맞는지 한 번 보자꾸나.”

그의 손에는 어느새 나비 문양의 단검이 들려있었다.

“그렇게 눈을 뜨기 싫으면 눈알부터 뽑아보자.”

좌영의 칼날이 곧 얼굴을 찌를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율천의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형님, 오른쪽 눈알은 내 것이오.”

뒤쪽에서는 우영이 키득거리며 참견했다.

“오냐, 오른쪽은 다 네가 떼어내거라.”

단검은 마치 자아가 있는 것처럼 주인의 손안에서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나비 문양의 손잡이가 그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 걸치고 나서 칼날을 수직으로 세웠다. 그대로 율천의 눈 쪽으로 내리꽂으면 영락없이 왼쪽 눈을 잃을 것이었다. 좌영은 목표물을 향해 내공을 실은 검을 휘둘렀다.

“네 이놈!”

예상치 못한 호통에 좌영이 흠칫 놀라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쑥 뺐다. 하지만 공격의 사정거리 안에서 벗어나기에는 너무 늦고 말았다. 강한 바람이 휘몰아치더니 그대로 얼굴 쪽으로 덮쳐왔다.

“헉!”

율천은 반 식경 전부터 단전에 있던 기운을 오른손에 한껏 모아놓고 있었다.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던 그는 흑접 중 하나라도 가까이 오면 일격을 날릴 속셈이었다. 그리고 그의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퍽!

“형님!”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율천의 손바닥은 인정사정없이 좌영의 이마를 강타했다. 그대로 뒤로 넘어간 좌영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다 뭉개져 형체만 겨우 남았다. 확인할 필요조차 없이 절명이었다.

“으아아아악!”

충격적인 장면에 우영은 목이 터지도록 괴성을 질렀다. 그는 이미 이성을 잃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옆구리에서는 상처가 터져 다시 피가 떨어지고 있었으나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단주님!”

흑접영들 역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운선을 감시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좌영의 시신 쪽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강율천!”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으며 우영은 강율천에게 달려들었다.

그제야 율천은 눈을 뜨고 자신의 둘째 제자를 내려다보았다. 흑접영들의 포위에서 겨우 벗어난 운선이 자신을 향해 비틀거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운선아, 네 말이 맞았다. 그 수는 자충수였다.”

인자하게 웃는 그 모습이 스승의 마지막이었다. 우영이 온 힘을 다해 내던진 불진은 그대로 율천의 목을 뚫었다. 너무 평온해서 살아 있는 것 같은 그의 목이 툭 소리를 내며 대청 바닥에 떨어졌다.

“스승니이이임!”

운선의 울음 섞인 외침이 강가장 안을 가득 메웠다. 그 소리에 놀라 매화 가지에 앉아 졸던 까마귀들이 서글픈 소리를 내며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어느덧 어둠이 걷혀 동이 터오고 있었다.

*** 멸문(滅門):

한 집안을 다 죽여 없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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