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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4화 (4/209)

#4화. 誑詐(광사)

“으악”

종연의 찢긴 팔뚝 아래로 선홍색 피가 용솟음쳤다. 그것을 얼굴에 잔뜩 뒤집어쓴 우영이 야차 같은 모습이 되어 낄낄대며 웃고 있었다.

“검객이 팔을 잃었으니 어쩌나?”

뒤에서 이들을 바라보고 서 있던 좌영도 허리를 반으로 꺾으며 웃기 시작했다.

“외팔이 검객이 되었네.”

“오른팔을 잃었으니 어쩌나?”

“오른팔을 잃었으니 왼팔을 쓰면 되지?”

우영이 못내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균형이 맞지 않으니 어쩌나?”

“나머지 팔도 잘라주면 되지.”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대화를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두 사람이 승리를 만끽할 시간은 충분했다. 어차피 종연은 팔이 잘려 나갔으니 지혈하기 위해서라도 당분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비록 그가 강호에서는 햇병아리에 불과하였으나 검신 강율천의 제자이니만큼 대결에서 이겼다는 사실이 여간 뿌듯하지 않았다.

우영이 거들먹거리며 흑접영의 단원들 쪽으로 몸을 돌리려던 찰나였다. 종연은 전광석화와 같은 동작으로 여전히 불진에 감겨 있는 오른손의 ‘수월’을 왼손으로 낚아챘다. 그리고는 몸을 반 이상 비틀어 돌며 그대로 우영의 허리를 찔러 들어갔다.

수월 검법 제2 초식이었다. 오른쪽으로 낙차 큰 원을 그리며 수월을 휘두르자 검이 시계 방향으로 강하게 회전하였다. 상대의 허리를 노리고 들어간 회심의 일격이었다.

“아우야!”

그제야 종연의 움직임을 눈치챈 좌영이 동생을 크게 불렀다. 형의 소리에 위험을 감지한 우영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쭉 뺐다. 그의 눈에는 수월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나 강한 살기가 허리춤으로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몸을 핑그르르 돌리며 검과의 거리를 최대한 벌렸다. 그러나 이미 검이 옆구리에 닿은 후였다.

아우가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거리라는 것을 깨달은 좌영은 임기응변으로 왼손 약지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동생의 옆구리 쪽으로 강하게 던졌다.

캉!

귀를 찢을 듯한 날카로운 금속성이 대청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으악!”

수월은 우영의 옆구리에 한 치 이상의 깊은 자상을 내고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수월의 길고 매끄러운 칼날을 타고 검붉은 피가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좌영의 반지가 아니었다면 생사를 갈랐을 일격이었다.

애초에 오른팔이 불진에 잡혔을 때, 종연은 팔을 내어줄 생각이었다. 그 틈을 노린다면 필시 치명상을 입힐 수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좌영의 암기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죽여버리겠다!”

아우가 크게 다친 것을 본 좌영은 웃음기를 싹 거두고 흉측한 표정으로 종연에게 달려들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힘이 빠져 주저앉는 종연의 무릎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그의 턱 밑까지 다가왔다.

휙!

좌영의 손톱이 종연의 목에 박히려던 그때, 경쾌한 소리와 함께 검은 무언가가 공기를 갈랐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줄 알았던 강율천이 제자를 구하기 위해 던진 흑 돌이었다. 그것은 정확하게 좌영의 왼쪽 손등에 박혔다.

“으악!”

“형님!”

좌영이 뒤로 자빠진 틈을 타 종연은 그의 사정거리 안에서 빠져나왔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혈을 눌러 오른팔을 지혈할 정도의 여유는 생겼다. 피가 서서히 멈추자 흐릿했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이 늙은 여우가 우리를 속였구나!”

손등에 박힌 흑 돌을 뽑아내는 것도 포기한 채 좌영은 이번에는 강율천에게 몸을 날렸다. 흑 돌에 기운을 실어 보내느라 또 한 번 기혈이 뒤틀린 율천은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좌영이 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좌영의 불진이 율천의 얼굴로 날라왔다. 하얀 분진이 바둑판 위로 후두두 떨어졌다.

“오늘 네 놈을 죽이고 이 모욕감을 씻어내리라!”

그러나 불진에 곧 닿을 줄 알았던 율천의 얼굴이 한 치가 더 멀어졌다.

“어라?”

좌영은 약이 올라 왼쪽 팔을 한 번 더 쭉 뻗어 휘둘렀다. 불진의 하얀 털이 얼굴에 닿기 직전에서야 율천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이놈!”

벼락같은 호통과 함께 율천은 좌영의 왼쪽 뺨을 세게 갈겼다. 그저 따귀 한 대에 불과하였으나 내공을 실어 보냈기에 그 힘이 실로 어마어마하였다. 상대가 다쳤다는 생각에 미처 방어하지 못했던 좌영은 얼굴이 반대쪽으로 완전히 돌아가고 말았다.

“형님!”

우영은 율천이 어느새 기력을 꽤 회복했다고 생각했다. 그의 공력이 반만 돌아와도 형님은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도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그는 몸을 일으키기조차 쉽지 않은 상태였다. 어느덧 옆구리에서 흐르던 피는 멎었지만 워낙에 예리한 검에 찔린 상처라 고통이 대단했다.

‘하지만 형님을 구해야 한다.’

우영은 바닥에 떨어진 불진을 손으로 더듬어 찾았다.

“어림없다.”

종연은 수월 검법 제3 초식을 구사하여 우영에게 달려들었다. 오른팔이 없어 그 위력이 반도 되지 않았으나 쾌검이었으므로 또 한 번 자상을 입히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감히!”

형님을 구하고 싶은 우영은 다급하였으나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종연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십 수 번의 초식을 주고받았다.

율천의 일격에 얼굴에 큰 상처를 입은 좌영은 모욕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입안에 가득 고인 피를 뱉으니 부러진 어금니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죽여버리겠다!”

왼손에 상처를 입어 불편했으므로 오른손에 장력을 담아 율천에게 일장을 날렸다. 그의 주 무기는 불진이었으나 내공 또한 깊었으므로 그 위력이 무시무시했다.

율천은 자리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손바닥으로 탁자를 탕하고 치니, 옥돌로 만든 바둑판이 공중으로 버쩍 들렸다. 때마침 들이닥친 좌영의 장풍이 그대로 적중하여 바둑판은 산산조각이 났다.

“늙은 여우가 잔재주를 쓰는구나.”

비록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으나 율천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좌영은 마음이 놓였다. 저 늙은이는 차차 처치해도 늦지 않으리라는 판단이 섰다.

좌영은 불진을 오른손으로 바꿔 들었다. 그리고는 율천의 얼굴 정면으로 나비 문양의 단검 세 개를 날렸다.

휙!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자 율천은 고개를 뒤로 젖혀 암기를 피했다. 세 개의 단검은 그의 뒤쪽 병풍에 차례로 소리를 내며 박혔다.

‘아뿔싸!’

암기를 피하고 나서야 율천은 이것이 허수(虛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미 좌영은 아우를 구하기 위해 종연 쪽에 다다른 후였다.

“감히 내 아우를 해치려 하다니.”

하얀 분진이 뿌옇게 날려 종연의 시야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이미 기운을 모두 써 버린 종연은 대책 없이 분진을 마셔 버리고 말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제 너는 끝이다!”

“이제 너는 끝이다!”

두 흑접은 낄낄거리며 종연의 다리를 각각 잡았다. 이대로 힘을 준다면 다리도 잘릴 것이 분명했다. 종연은 있는 힘껏 수월을 휘둘러 보았으나 재빠른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때였다.

“너희가 찾는 것이 여기 있다.”

“툭!”

앳된 목소리와 함께 그들의 발아래에 책 한 권이 떨어졌다.

“찾았다!”

“찾았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책 쪽으로 달려들었다. 이 틈에 종연은 몸을 굴려 그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운선은 종연의 목숨이 위태로운 것을 보고 더는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급한 마음에 책을 먼저 던지고 지붕 아래로 내려온 것이었다.

두 흑접이 책 쪽으로 시선을 뺏긴 사이, 운선은 율천에게로 뛰어갔다.

“스승님!”

“어째서…….”

율천은 운선의 모습을 보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 많은 아이의 경솔함 때문에 제 계획은 수포가 된 셈이었다.

“스승님, 괜찮으십니까?”

운선은 그런 율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울먹거리며 스승을 끌어안았다.

“어라?”

“어라?”

한참을 정신없이 책에 몰두하던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를 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우릴 속였어!”

“우릴 속였어!”

그제야 상황을 깨달은 두 흑접은 무시무시한 표정이 되어 운선을 바라보았다. 운선이 던진 책은 그들이 찾던 무공비급이 아니라 한낱 출납명부에 불과했다.

“운선아!”

운선은 사형의 다급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으나 이미 늦고 말았다. 좌영이 운선의 뒷덜미를 낚아채어 종연이 있는 쪽으로 그를 던져 버렸다. 무공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운선이었기에 그대로 몸이 날아가 바닥에 크게 부딪혔다.

“으악!”

딱딱한 돌바닥에 오른쪽 팔부터 강하게 떨어졌다. 아무래도 골절이 된 듯 팔꿈치에서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운선아!”

종연은 움직일 기운조차 없었으나 아우의 안위를 살피기 위해 몸을 바닥에 질질 끌며 다가왔다. 그 모습이 너무 처참하여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사형, 저는 괜찮습니다.”

운선은 매우 고통스러웠으나 애써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피투성이가 된 종연을 보니 자신의 상처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다.

“다 외웠느냐?”

종연은 흑접에게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사제에게 물었다.

“네.”

운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잘하였다.”

종연은 자신이 일러준 대로 완벽하게 수행한 운선이 기특하여 왈칵 눈물이 났다.

“해심밀경소는 어디 있느냐?”

“어디 있느냐?”

두 사람은 부들부들 떨며 운선을 노려보았다. 비급만 찾아내면 이 세 녀석을 다 죽여버릴 작정이었다. 누가 봐도 한 줌밖에 안 되는 것들이 자신들을 조롱하는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상했다.

“여기 있다.”

종연은 태연한 얼굴로 운선의 가슴팍을 뒤져 작은 책을 꺼냈다.

<解深密經疏(해심밀경소)>

먼 거리에서 봐도 알아볼 정도로 명확하게 책의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율천은 두 제자의 행동에 말문이 막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운선은 그렇다 치고 종연은 또 왜 저런단 말인가?

그 책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종연이었다. 율천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제자가 자충수를 두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섬뜩하였다. 이 늙은이의 목숨 따위는 저 책에 비할 것이 못 되었으므로.

좌영은 율천의 절망적인 표정을 보고는 종연의 손에 들린 책이 진짜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우영을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까딱 좌우로 두 번 흔들었다. 우영은 형님의 의도를 찰떡같이 알아듣고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들에게 책을 가로채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우영이 책을 낚아채면 좌영이 두 놈을 죽이면 될 일이었다.

“어디 가져가 보아라!”

종연의 외침과 동시에 두 사람의 인영이 빠르게 이동했다. 고작 스무 걸음도 채 되지 않는 거리였다.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였다.

화르르.

종연의 손안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안 돼!”

“안 돼!”

두 사람의 외침이 강가장 마당 안을 가득 채웠다.

*** 광사(誑詐) : 거짓말로 속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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