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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3화 (3/209)

#3화. 苦肉之策(고육지책)

강가장의 모습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검은 그림자가 휩쓸고 지나가는 곳곳은 아수라장이었다. 그들은 모든 가구와 집기를 샅샅이 뒤지다 못해 박살 내고 있었다. 원하는 물건을 찾을 때까지 멈출 생각이 전연 없어 보였다.

“어쩌나, 많이 다친 모양이네?”

귀청을 찢을 듯 날카로운 목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소란스럽던 흑접영의 단원들의 움직임이 일순 멈췄다. 그리고 곧 십수 개의 검은 그림자가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양옆으로 도열 하였다. 마당에 길고 검은 길 하나가 만들어졌다.

목소리의 주인은 마치 초대받은 손님인 양, 한껏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걸어 들어왔다. 구척장신의 삐쩍 마른 그 남자는 얼굴이 어찌나 창백한지 시퍼런 핏줄이 다 보일 지경이었다. 왼손에는 하얀 털이 수북한 불진(佛塵)을 들고 있었는데 걸을 때마다 좌우로 흔들려 마치 사람의 머리카락 같았다.

“어쩌나, 많이 다친 모양이네?”

메아리처럼 똑같은 목소리가 한 번 더 반복되었다. 같은 사람의 목소리인 줄 알았으나 또 다른 인영(人影)이 앞선 이의 등 뒤로 불쑥 나타났다.

“흑접쌍살(黑蝶雙殺)”

종연은 운선의 귀에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먼저 들어온 이가 흑접쌍살의 형인 좌영(左影), 뒤에 선 이가 아우인 우영(右影)이었다. 같은 외모와 목소리를 지녔기에 오로지 무기를 사용하는 손의 방향으로만 두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강호에서는 ‘검은 나비를 만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내빼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흑접영은 악명이 자자했다. 단체의 성격이 이럴진대, 단주인 흑접쌍살은 말할 것도 없었다. 강호의 거대한 살수 집단의 악명 높은 쌍둥이 단주가 직접 나타났다면 강가장의 운명은 풍전등화(風前燈火)나 다름없었다.

“쯧쯧, 그 대단하신 검신이 어쩌다 이리되셨을까?”

“쯧쯧, 그 대단하신 검신이 어쩌다 이리되셨을까?”

좌영이 먼저 말하자 우영이 따라 말했다. 그들은 간드러지게 웃으며 그저 율천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만 있었다. 검은 망토를 두른 두 그림자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자 그 모습이 귀신과 다르지 않았다. 어떤 공격도 하지 않았으나 그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공포였다.

“…….”

그러나 이 같은 심란한 상황 속에서도 강율천은 묵묵부답이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앉은 그의 얼굴은 잠을 자는 사람처럼 평온해 보였다.

한참을 돌던 흑접쌍살은 아무리 해도 상대가 반응하지 않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이번에는 강율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서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책을 먼저 찾을까?”

“목숨을 먼저 거둘까?”

“일단 먼저 물어보자.”

“그래 먼저 물어보자.”

“왼쪽 눈을 먼저 도려낼까?”

“오른쪽 눈을 먼저 도려낼까?”

“왼쪽 팔을 먼저 잘라낼까?”

“오른쪽 팔을 먼저 잘라낼까?”

무엇이 웃긴 지 흑접쌍살은 연신 소름 끼치는 소리로 킥킥댔다.

종연은 당장 지붕 아래로 뛰어내려 두 사람에게 일 검을 휘두르고 싶었다. 물론 객관적인 전력으로 보았을 때 종연의 실력은 그들에게 한참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 조롱당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느니 자신이 갈가리 찢기는 게 더 나을 듯싶었다.

‘허나 이 아이만은 살려야 한다.’

종연은 자신의 옆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운선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더 우선순위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저 이 분노를 속으로 삭일 수밖에 없었다. 종연은 자신도 모르게, 있는 힘껏 주먹을 쥐었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손바닥에 손톱이 박혀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앗!”

“앗!”

만담처럼 주고받던 대화가 갑자기 뚝 끊겼다. 흑접쌍살은 이제야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서로의 이마를 세게 내리쳤다. 붉은 손바닥이 하얀 이마에 선명하게 자국을 남겼다.

“제자에게 줬구나!”

“제자에게 줬구나!”

그들이 동시에 내뱉은 말에 강율천은 움찔하며 얼굴을 크게 찡그렸다. 지금껏 눌러 놓았던 기혈이 다시금 뒤틀린 것이었다.

“헉!”

그는 결국 외마디 비명과 함께 울컥 선혈을 토해냈다.

“큰 애한테 줬을까?”

“작은 애한테 줬을까?”

흑접쌍살은 자신들의 예측이 맞은 것에 신이 났는지 다시 빙글빙글 율천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율천이 토해낸 피로 옥색 바둑판이 검붉게 물들고 있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종연은 스승의 행동에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운선을 돌아보며 물었다.

“사부님이 네게 주신 것이 있느냐?”

“네? 아, 네…이 책을…….”

운선은 소맷자락에서 주섬주섬 작은 책을 꺼내 사형에게 내밀었다.

<解深密經疏(해심밀경소)>

그제야 확인한 책의 표지에는 세로로 긴 제목이 휘갈겨 쓰여 있었다.

“이 책을 가지고 두타산으로 가라 하셨습니다.”

책을 받아든 종연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늘 걱정하고 있던 그때가 결국 오고 만 것이었다. 예상했던 상황임을 인지하자 더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그는 운선의 어깨를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나는 지금 곧 사부님을 구하러 내려갈 것이다.”

운선은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사형의 실력이라면 아무리 스승이 크게 다쳤더라도 구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었다.

“저는요? 저도 뭐라도 하겠습니다.”

비록 무공은 못 하지만 작은 도움이라도 되지 않겠냐는 마음에 운선은 사형의 소매를 붙잡았다.

“아니다. 네가 할 일은 따로 있다.”

“네?”

종연은 운선의 어깨가 저릴 정도로 양손에 잔뜩 힘을 주며 말했다.

“그동안 너는 경전의 내용을 모두 암기해야 한다.”

“네?”

운선은 사형의 뜻밖의 말에 힘이 빠져 뒤로 나자빠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사형이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마당 밑으로 떨어져 크게 다칠 뻔하였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차라리 사람을 불러오는 게…….”

“아무도 도우러 오지 않는다.”

종연은 담담한 말투로, 그러나 단호하게 사제를 타일렀다.

“저들은 흑접영이다. 강호 최대의 살수 집단이지. 누가 도우러 오기 전에 이미 강가장은 멸문할 것이다.”

“사형…….”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나는 사부님 곁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너는 이것을 암기하거라.”

운선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종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도무지 스승님을 구하는 것과 책을 암기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사형…….”

종연 역시 회의적인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으나 이 방법 외에는 어떠한 길도 없었다. 이 소심하고 유약한 아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얼마나 걸리겠느냐?”

“네?”

“암기하는 데 얼마나 걸리겠느냐?”

평소 침착하고 느긋한 성격의 종연이었으나 지금은 다급한 마음에 사제를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사부의 목숨이 위태로웠다.

“한 식경이면 충분합니다.”

어안이 벙벙하여 어쩔 줄 모르던 운선은 사형의 초조한 모습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가 아는 사형은 허투루 행동하는 이가 아니었다. 분명히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거면 되었다.”

운선의 눈에 결심이 서는 것을 확인한 종연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그의 사제의 귀에 대고 한참을 더 당부했다. 사형의 말이 계속될수록 운선의 동공은 점점 더 커졌다. 막중한 책임감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차갑게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운선아, 너라면 해낼 수 있다.”

종연은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제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더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곧장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자신이 미끼가 되는 것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다만 끝까지 곁에서 아우를 지켜주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었다.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난장을 부리는 것이냐?”

우렁찬 소리를 내지르며 종연은 흑접영 무리의 머리 위를 순식간에 지났다. 그가 대청 안으로 사뿐히 날아 들어가는 동안 살수들 누구도 그의 옷자락조차 건들 수 없었다.

“어머나, 큰아이가 나타났네?”

“어머나, 큰아이가 나타났네?”

흑접쌍살이 종연 쪽을 바라보며 동시에 외쳤다. 일부러 찾아갈 생각을 하니 귀찮았는데 제 발로 걸어들어오다니 이보다 반가울 수가 없었다.

“사부님, 괜찮으십니까?”

종연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율천의 얼굴을 확인하자 가슴에서 뜨거운 울혈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들이 아직 위해를 가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미 내상을 크게 입어 움직이기조차 힘든 모양이었다.

“종연아…….”

율천은 제자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가 무슨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종연은 사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려 하는 것이다.

‘착한 녀석…….’

죄책감과 미안함에 감정이 격해지자 또다시 크게 기혈이 뒤틀렸다. 강율천은 심한 기침과 함께 한 번 더 울컥 피를 토해냈다.

“사부님!”

종연은 자신의 예상이 첫걸음부터 엇나갔음을 깨달았다. 혹여 아무리 내상을 입었더라도 검신 강율천과 함께라면 한 식경은 가뿐히 버텨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생각보다 상처가 큰 것 같았다.

‘나 혼자 이들을 상대할 수 있을까?’

종연의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지켜야 하는 사람이 있는 그에게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네가 갖고 있느냐?”

“빨리 내어주면 쉬이 죽여주마.”

흑접쌍살은 키득거리며 한 마디씩 주고받았다. 강율천이 직접 나선다면 모를까, 저 어린 애송이 따위야 한 사람으로도 충분했다.

“흥, 나부터 넘어봐라!”

종연은 크게 일갈하며 오른손으로 긴 검을 뽑았다. 새벽 달빛에 반짝하며 빛을 내는 검날에는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수월(水月)’이라고 쓰여 있었다. 처음 외공(外功)을 익히는 날, 율천이 그에게 하사한 보검이었다.

“너는 나 하나로도 충분하지.”

“맞아 너 하나로도 충분하지.”

간드러진 웃음소리를 내며 율천의 우측에 서 있던 우영이 허리에 차고 있던 불진을 오른손에 꺼내 들었다. 불진을 좌우로 흔들자 수북한 털 사이로 하얀 분진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흑접쌍살이 암기로 사용하는 분진은 피부에 스치기만 해도 신경을 마비시킬 정도로 독성이 강했다.

워낙에 강호 경험이 많은 종연은 이미 그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기에 크게 숨을 들이켠 후 호흡을 멈췄다. 불진에 최대한 몸이 닿지 않도록 그의 왼쪽을 공격해 들어갔다.

‘수월’은 빠르고 부드러운 검이었다. 단순하게 손을 쭉 뻗은 것 같았으나 수월이 크게 휘어지면서 우영의 왼손을 찔러 들어갔다. 날카로운 칼끝이 이대로 손목에 닿는다면 그의 왼손이 필시 잘려나갈 것이었다.

그러나 우영은 피할 생각이 없는지 그대로 자리에 서서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어림없지.”

검이 손목에 막 닿는 순간 우영이 불진을 살짝 흔들자 수월이 털 속으로 말려 들어가며 검을 들고 있던 종연의 팔뚝까지 당겨졌다.

“헉!”

서둘러 검을 거두려고 했을 때는 이미 오른팔이 반쯤 불진에 감겨 있었다. 우영은 당겨지는 힘의 반동으로 몸을 날려 종연의 얼굴 바로 앞까지 한달음에 접근했다.

“이봐, 나 하나로도 충분하다 그랬지?”

그의 붉은 입술이 귀밑까지 쫙 찢어지며 종연의 왼쪽 귀를 물어뜯었다.

“악!”

종연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뒤로 세 걸음 물러섰으나 오른팔은 차마 구할 수 없었다.

*** 고육지책(苦肉之策):

적을 속이는 수단으로서 제 몸 괴롭히는 것을 돌보지 않고 쓰는 계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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