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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2화 (2/209)

#2화. 自充手(자충수)

후드득.

까마귀가 한꺼번에 날아오르자 매화 가지 위에 내려앉은 때늦은 눈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대들보에 기대앉아 졸고 있던 운선은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들고 있던 검을 손에서 놓쳐버렸다. 어차피 무공을 전혀 할 줄 모르는 그에게는 무용지물인 검이었으나 그마저도 제대로 못 들고 있는 자신이 창피해 얼굴이 벌게졌다.

“많이 피곤하냐?”

운선은 몇 시진이 지나도록 같은 자리에 앉아 바둑을 두는 스승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구나 율천은 이 추운 날 얇은 장포 하나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스승님, 이 판은 글렀습니다.”

무공에는 소질이 없지만, 머리 쓰는 일에는 꽤 자신만만한 운선이었다. 아까부터 스승의 흑돌은 길을 완전히 잃어버린 터였다.

“너라면 다음에 어떤 수를 두겠느냐?”

제자의 버릇없는 말투에도 율천은 조금의 불쾌함도 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자애롭게 웃으며 운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이곳을 공략하면 양쪽을 동시에 단수몰이 할 수 있습니다. 백은 둘 다 수비할 수 없으니 한쪽으로 반드시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죄송스러운 마음에 목소리가 잔뜩 움츠러든 운선이 느릿느릿하게 말하며 흑 돌을 움직였다. 바둑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율천이 그의 짧은 턱수염을 왼손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운선아.”

“네, 스승님.”

평소와 사뭇 다른 듯한 스승의 목소리에 놀라 운선은 바짝 긴장했다. 율천의 얼굴에는 어느덧 웃음기가 사라졌다.

“만약에 길을 찾을 수 없다면 말이다.”

율천은 운선이 내려놓은 흑 돌을 다시 들어 올렸다.

“상대의 길을 따라가거라.”

“하지만 스승님, 그리하면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율천이 내려놓은 그 자리는 더 이상 갈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의아해하는 제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스승은 그의 손을 잡고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너의 이름대로 살아라.”

“스승님?”

순간 운선은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굳이 무공도 할 줄 모르는 자신을 불러 몇 시진이나 보초를 세운 것도, 뜬금없이 오늘 새벽 집안의 하인들에게 휴가를 내어준 것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율천은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제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마 지금, 이 순간이 그를 마주하는 마지막 순간일 것이다.

“심부름을 하나 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네?”

율천은 가슴팍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운선의 손에 쥐여주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두께도 얇은 편이라 소매 속에 넣어도 쉬이 들킬 염려가 없어 보였다.

“이것을 가지고 지금 곧 두타산으로 가거라. 이후 현로선생의 전언이 있을 것이다.”

운선은 스승의 어투와 행동에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삼백 리는 족히 걸리는 거리를 어린 제자 혼자 보내다니 평소의 그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하물며 운선은 현로 선생을 직접 만나본 적도 없었다.

“스승님, 무슨 일이 있는 것이지요?”

율천의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니다. 급한 일이나 내가 직접 갈 수는 없고, 종연은 출타 중이니 너밖에 없지 않으냐?”

“하지만 제가 떠나면 이 큰 강가장에 스승님 혼자 남습니다.”

율천은 인자한 표정으로 제자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네 사형이 곧 돌아오니 내 걱정은 말아라.”

운선은 더 이상 대거리를 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사형이 돌아온다면 그가 남아 있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든든할 것이었다.

열 살 터울의 사형 종연은 이미 무림에서 이름을 날리는 협객이었다. 그는 일 년에 서너 달은 하산하여 강호에 머물렀다. 갖은 선행(善行)으로 강호에서는 그를 매화선협(梅花善俠)이라 부른다고 했다.

반면 운선은 그 기본이라는 내공 심법 하나 연마해 본 적이 없었다. 설혹 스승에게 위기가 닥친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을 지키려다가 스승이 더 위기에 처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으나 실체 없는 감정만으로 스승의 뜻을 감히 거역할 수는 없었다.

‘설마 검신(劍神) 강율천을 누가 감히 해칠 수 있겠어.’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며 운선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간단한 행장만 챙겨 나오는데도 이미 축시(丑時)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왠지 강가장을 떠나기 싫은 마음에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다시 대청에 돌아갔다. 율천은 아까와 마찬가지의 자세로 앉아 바둑판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운선은 뱃심으로 소리를 내며 마당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꽤 오랫동안 못 뵈리라 생각하니 괜히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두 번 머리를 조아리고 고개를 들었으나 스승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스승님!”

운선은 다시금 크게 스승을 불렀다. 그러나 여전히 율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운선은 못내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스승님! 저라면 그 판은 진즉에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제야 율천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빙그레 미소만 지을 뿐, 역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운선은 허탈한 마음으로 마지막 읍(揖)을 하며 강가장을 나섰다. 스산한 바람이 등 뒤로 불어와 그의 옷깃을 파고들었다.

혼자 하산하는 길은 아득하게 멀기만 했다. 한 시진 가까이 걸었는데도 산 중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슬슬 해가 뜰 시간에 가까워졌지만, 숲의 어둠은 쉬이 물러가지 않았다.

호오오오오.

밤 산새가 예의 처량 맞은 소리를 냈다. 운선은 두려운 마음에 괜히 어깨를 으쓱해 보았다.

‘왜 굳이 이 밤에 쫓아내느냔 말이야.’

운선은 화가 잔뜩 치밀어 올랐다. 정말 생각할수록 오늘 밤 스승의 태도는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평소 강가장 밖으로는 산책조차 마음대로 못 하게 하던 그가 왜 이런 엄한 심부름을 시킨 것일까?

‘설마…….’

생각이 여기까지 도달했을 때, 운선의 온몸에 소름이 쪽 끼쳤다. 그는 곧장 오던 길 쪽으로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불길한 마음이 들었음에도 스승을 혼자 두고 떠나온 것은 절세 고수인 율천에게 크게 별일이 있으랴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승님이 위험한 거야. 애초에 감당할 수 있었다면 나를 보내지 않았겠지.’

운선의 눈에 눈물이 가득 맺혔다. 속도를 낼수록 뒤쪽으로 물기가 흘러 붉어진 얼굴에 끈적끈적하게 늘어 붙었다. 필시 따끔할 텐데도 그는 어떤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오직 머릿속에는 스승의 안위에 대한 걱정만이 가득 찼다.

얼마나 달렸을까? 한 시진이나 걸린 내리막길을 두세 식경 만에 뛰쳐 올라갔을 때, 비로소 눈 안에 강가장의 위풍당당한 현판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스승, 읍…….”

운선이 한 단어를 다 내뱉기도 전이었다. 누군가의 큰 손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운선아, 나다.”

익숙한 목소리에 바짝 힘을 주었던 몸이 스르륵 풀어졌다. 달포 전에 하산했던 사형 종연이었다. 운선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 그제야 종연은 입 주변을 꽉 잡았던 손을 놓았다.

“사형!”

반가운 나머지 운선은 종연의 허리춤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사형이라기에는 너무도 피붙이 같은 이였기에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운선아, 조용히 해야 한다.”

종연은 굳은 표정으로 운선의 허리를 감싸 안고 지붕 위로 몸을 날렸다. 경공이 뛰어난 그였기에 단 세 걸음 만에 가장 높은 처마까지 끼쳐 올라갈 수 있었다.

“헉!”

운선은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종연이 그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자 재빨리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차가운 사형의 눈길을 처음 접한 운선은 생각보다 일이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여전히 바둑판 앞에 앉아 있는 스승의 모습이 보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그런 스승의 주위를 천천히 돌고 있었는데 청색 도포 자락만 보일 뿐 얼굴은 좀처럼 식별할 수 없었다.

“그저 경전의 해석본일 뿐입니다. 당신이 욕심낼 이유가 없습니다.”

율천이 나지막하게,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

푸른 도포의 남자는 잠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율천의 앞에 멈춰 서 있었다.

“설령 소유한다고 하더라도 절대 깨우치지 못할 것입니다.”

율천의 마지막 한 마디가 다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그에게 일 장을 날렸다. 출수가 얼마나 빠른지 고수의 경지에 가까운 종연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퍽!

강한 타격 소리에 운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스승이 크게 다친 것 같았다.

“스,”

“쉿”

종연은 다시금 운선의 입을 손으로 막고 자신의 왼손 검지를 들어 입에 갖다 대었다. 저 정도 일 장을 날리는 고수라면 약간의 움직임에도 눈치를 채고 말 터였다.

“감히!”

남자는 뻗은 손을 차마 거두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큰 모욕감을 느낀 것이 분명했다.

“당신은 결코…….”

율천은 끝까지 다 뱉지 못하고 말을 멈췄다. 아까의 공격으로 기혈이 완전히 뒤틀려 버린 것이었다.

“정 그렇다면 스스로 찾도록 하지요.”

어느덧 목소리를 가다듬은 남자는 부채를 꺼내 두어 번 흔들었다. 그리고는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크게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대청 밖으로 사라졌다.

이 추운 날씨에 웬 부채냐 싶어 운선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기분 나쁜 탁음이 귓가를 스쳤다. 처음에는 거슬리는 정도였는데 조금씩 소리가 강해지더니 속이 울렁거렸다.

“단전에 힘을 주고 온몸에 기를 그쪽으로 보내는 상상을 하렴.”

운선이 몸을 비틀기 시작하자 종연이 그의 팔목을 잡고 조용히 말했다. 무공을 알지 못하는 그였으나 깨우침은 빨랐기에 사형의 말을 곧 이해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기를 움직이는 그림을 머릿속에 그리니 구역감이 점차 줄어들었다.

“사형, 갔습니까?”

운선은 목소리를 최대한 줄이고 종연에게 물었다. 내상을 입은 스승을 빨리 구하러 가고 싶었다.

“아니.”

그러나 종연은 심란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휙”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 수십이 강가장 마당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망토를 펼치고 뛰쳐 들어오는 모습이 한 무리의 나비 떼였다.

‘흑접영(黑蝶影)’

그들의 모습을 빠르게 확인한 종연은 이 끔찍한 현실을 감당할 수 없어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스승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아무래도 틀린 듯싶었다. 이제 이 어린 아우를 구하는 것이 그의 최대 난제가 되었다.

종연의 어두운 얼굴을 확인한 순간, 운선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는 오늘이 그의 사부와 사형과 함께하는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 자충수(自充手):

스스로 행한 행동이 결국에 가서는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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