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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1화 (1/209)

#1화. 花無十日紅 (화무십일홍)

추위가 아직 가시지 않아 바람이 매서웠다. 강가장(姜家莊)에 모인 수십의 무림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내공을 익혔다지만 워낙에 한 가지 사실에 몰두해 있다 보니 추위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강가장은 십 년 전의 참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무너진 대들보와 부서진 현판은 먼지와 거미줄 때문에 제 모습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나마 강가장임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흐드러지게 핀 매화나무뿐이었다.

강율천이 처음 경국(慶國)에 들어와 터를 잡을 때 자신의 고향에서 가져온 매화 씨를 마당 정 중앙에 소중하게 묻었다고 했다. 그 정성을 아는지, 부러 가꾸는 이가 없었을 텐데도 잊지 않고 제때 피어난 것이었다.

일 년에 단 며칠만 존재감을 드러낸다는 매화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안다는 듯 붉은 꽃잎을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무림인들을 달래기라도 하듯 머리와 어깨에 하나둘 안착했다.

“운선! 오늘이야말로 패륜(悖倫)을 저지른 대가를 치러라!”

단전에서부터 올라온 굵은 목소리가 넓은 강가장의 마당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맞다!”

수많은 이들이 미리 맞추기라도 한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들은 모두 비장한 얼굴을 하고 흥분해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대상으로 보이는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제 죄가 패륜이 맞습니까?”

우습다는 듯 한쪽 입술을 올리며 남자가 말했다. 검은 긴 머리를 반쯤 내려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으나 그 눈빛만은 형형하여 주저함이 없었다.

“참으로 건방지구나.”

푸른 도포를 입은 백발의 도사가 무리를 떨치고 몇 걸음 앞으로 나왔다. 황석파의 장로인 고유생이었다.

“너는 네 스승의 의형인 현로 선생(賢露先生) 조양을 죽였다. 이보다 큰 죄가 어디 있느냐?”

“맞소!”

고유생의 일갈이 멈추자 또다시 군중들의 동의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들이 원하는 것은 저의 죽음입니까? 아니면…….”

남자는 가슴팍에서 손바닥만 한 책을 꺼내 들었다. 떠들썩하던 장내가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이 경전(經典)입니까?”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리자 남자의 이마에서 관자놀이까지 긴 자상이 보였다. 그 상처가 없었더라면 꽤 눈에 띄는 미남자임이 분명했다.

“둘 다!”

정적을 깨고 하얀 옷을 입은 서생 하나가 일갈했다.

“먼저 강호의 노(老) 선배님들 앞에서 이리 나서게 된 점 사죄드립니다.”

서생은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며 사방에 서 있는 무림인들에게 공손하게 읍(揖)하였다. 그가 나서자 고유생은 뚱한 표정으로 황석파의 무리로 들어가 버렸다.

“저는 두타산에서 온 형진이라 합니다. 강호에서는 백의행(白義行)이라고 불리기도 하지요.”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웅성거리던 무림인들은 소개를 듣자마자 모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강호에서 검을 쓰는 이라면 백의행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심지어 그는 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조양의 제자이기도 했다.

“스승을 잃은 슬픔을 무엇으로 보상받겠습니까? 다만 그를 처벌할 수 있다면 나중에 스승님을 만났을 때 면목이라도 서지 않을까 싶습니다.”

“맞소!”

또다시 군중들이 그의 의견에 세찬 동의를 표했다.

“저는 이뿐입니다. 허나 강호를 피바다로 만든 죄는 용서받지 못할 터, 그 원흉인 저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를 파기해야 할 것입니다.”

백의행의 말이 끝나자 장내는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이것이 그들이 모인 진짜 이유였다. 저 앞에서 눈썹을 꿈틀거리며 비웃고 있는 강운선을 절대 고수로 만든 저 책. 지난 십여 년간 강호의 크고 작은 문파 중에 저것을 노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그 위대한 심결(心訣)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참으로 우습구나!”

운선은 한참 동안 고개를 젖히며 크게 웃었다. 붉은 매화꽃 아래 서 있는 그의 모습이 악귀라도 된 것 같았다.

“형진아, 형진아, 네 스승에게 정녕 부끄럽지 않으냐?”

웃음을 그친 운선은 들고 있던 검을 왼손으로 옮겨 잡았다. 운선의 보검 ‘수월(水月)’이었다. 순식간에 모든 무인들이 자신들의 병장기를 있는 힘껏 그러쥐었다. 수월을 든 운선을 홀로 막을 수 있는 이는 이 자리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었다.

백의행 형진 역시 움찔하였으나 짐짓 아닌 척 여유를 부리며 미소를 지었다.

“운선, 우리는 한때 형제와 같지 않았는가? 형의 체면을 생각하여 더는 죄를 짓지 말고 결과에 승복하게.”

“결과?”

순간 매화꽃 잎이 조금 더 흔들리는 것 같았다. 운선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측근에 서 있던 오대산검(五大山劍)의 기수(旗手)들은 모두 엄청난 한기를 느꼈다. 그의 그림자를 쫓아 시선을 옮기자 운선의 손아귀에는 이미 형진의 목덜미가 잡혀 있었다.

“강운선!”

형진은 소리를 내질렀으나 목덜미를 찌르고 들어오는 운선의 손톱 때문에 그 이상은 저항할 수 없었다.

“이것이 결과 아닌가? 너와 나의 차이가 이런 것이다.”

운선은 왼손에 든 검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오대산검 장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참으로 역겨운 군상들이 아닌가? 운선은 경멸이 가득한 표정으로 실소를 터뜨렸다. 저 유명한 이들 중에 그 누구도 존경할 만한 자가 없었다.

“인제 그만하십시오.”

그때 가늘고 차분한 목소리가 마당에 가득 울렸다. 무림인들은 고개를 휘두르며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으나 딱히 보이지 않았다.

“해심밀(解深密)을 내어주면 그뿐 아닙니까?”

이윽고 여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분명 가까이에서 들려온 소리였는데 여자의 모습은 강가장 대문 건너편에서 나타났다.

“주운…….”

운선은 웅얼거리듯 그녀의 이름을 내뱉었다. 그 소리를 들은 형진은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어쩌면 지금이 최적의 기회일지도 몰랐다.

“운선, 그만 놓아주어라.”

주운은 여전히 형진의 목을 꽉 움켜쥐고 있는 그의 오른손을 가볍게 잡았다. 비웃음으로 가득했던 운선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당신도 결국 이들과 똑같습니다.”

단어 하나하나를 씹어 내뱉는 운선의 목소리에는 가느다란 떨림이 있었다. 주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쉬이 그를 멈추게 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네가 바라는 것이 복수라면 내가 하겠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주운을 바라보는 운선의 눈에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눈은 붉게 물들었다. 큰 눈에 가득 고인 물이 마치 핏빛 같았다.

“그렇다면 당신부터 죽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순간 운선의 오른손에 힘이 쑥 빠져나갔다. 형진을 향한 분노가 주운에게로 옮겨지는 찰나에 힘이 분산된 것이었다. 형진은 그 기회를 놓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잡혀 있던 목에 힘을 빼고 턱을 당기니 쉽게 운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운지행(雲地行)의 방법으로 상대와 두 치 정도 거리를 넓혔다. 곧이어 오른손으로 장력을 모아 운선을 향해 방출하였다. 아무리 고수일지라도 그 정도 거리의 일 장은 치명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흥분한 운선과 달리 주운은 형진의 움직임을 순식간에 눈치챘다. 워낙에 간교한 그의 성정을 알고 있었기에 몸을 빼는 순간 일 장이 날아오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비켜라!”

주운은 자신에게 향해 있는 운선의 얼굴을 힘껏 때려 중심을 흔들리게 한 후 왼발로 그의 무릎을 쳐냈다. 불시에 일어난 일에 대비할 수 없었던 운선은 무릎에 타격을 느낌과 동시에 운지행의 방법으로 세 걸음 물러섰다. 그 순간 형진의 일장이 두 사람의 사이로 흘러나갔다.

“오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탄성을 내질렀다. 운지행은 일류 고수들도 배우기 어렵다는 두타공파(頭陀空派)의 내전 무공으로, 실제로 눈앞에서 볼 일이 흔치 않았다. 그런데 단 몇 초식 만에 두 번의 실연을 보고 나니 그 빠르고 화려한 기술에 감탄이 아니 나올 수 없었다.

“암습을 하다니 비겁하지 않습니까?”

주운이 그를 노려보며 일갈하자, 형진은 가소롭다는 듯 부채질을 했다.

“사저(師姐)가 끼어들 일이 아닙니다.”

운선은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에 헛웃음을 쳤다. 같은 편끼리 서로를 험담한다고 해서 속을 리가 없었다. 끝까지 모두를 기만하려는 연극일 뿐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칼춤이나 한번 춥시다.”

운선은 키득키득 웃으며 순식간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찌나 그 모습이 가볍던지 그가 건드리고 지나간 얇은 매화 가지조차 움직임이 없었다.

운선을 바라보는 주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망설일 필요도 없었다. 그의 다음 행동을 막아야만 했다.

“안 돼!”

주운은 몸을 날려 운선이 있는 매화나무 아래까지 한달음에 다가갔다. 경공만큼은 그녀가 운선보다 뛰어났으므로, 훨씬 빠르게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예상이라도 한 듯 운선은 그녀가 도착하기도 전에 나무 위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경전은 이미 수 갈래로 찢어져 있었다.

“그대들이 원하는 절세비급이 여기 있소!”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와 함께 낱장으로 찢어진 종이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은 차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각하지 못한 채 멀뚱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해심밀이다!”

“주워라!”

“여기에 있다!”

누군가의 외침이 시작이었다. 삽시간에 수많은 무림인이 마당에 뒤엉키기 시작했다. 저 비급의 한 장만 있어도 고수가 될 수 있다. 그들은 그 한 장을 위해 몸을 날렸다.

캉! 캉!

찢어진 종이에 비해 사람 수가 월등히 많았다. 이제 뺏지 않으면 자신의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들은 각자의 병장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한때는 강호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빛나던 보물들이었다. 주인의 욕망에 휘둘러지는 병기들은 본래의 존재 가치를 잃어가고 있었다.

"내놓아라! 내 것이다!"

“으악!”

방금까지 뜻을 함께했던 명문정파의 제자들은 한낱 종이 쪼가리를 얻기 위해 서로의 목숨줄을 노렸다. 손을 짓밟고 어깻죽지를 베어내면서도 양심의 가책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약육강식(弱肉强食). 욕망에 눈이 먼 그들은 짐승과 다름없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마당은 아수라장이었다. 주운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정의를 부르짖으며 모였던 명문정파의 무림인들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직 욕심에 눈이 벌게져 서로를 짓밟는 짐승들만이 가득했다.

“이것이 당신이 말하던 진실입니다.”

그녀의 등 뒤에서 운선의 격양된 목소리가 들렸다. 주운은 차마 등을 돌릴 수 없어 그 자리에 동상처럼 얼어붙었다. 누가 그 착한 아이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어느덧 강가장은 붉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것이 붉은 매화인지 누군가의 핏방울인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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