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왕성 작전 (5) >
“그게 정말인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희소식에 주코프는 자기도 모르게 의자를 밀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현황판만 응시하던 티모셴코도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예. 쿨리크 원수의 말에 따르면 오늘 안으로 메멜을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답니다.”
“그나마 다행이군. 실적이 아주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 말일세.”
티모셴코는 한시름 덜었다는 듯이 이마에 흐르던 땀을 소매로 문질러 닦아냈다.
천왕성 작전 전체를 놓고 보면 메멜 함락은 간에 기별도 되지 않았지만, 전 전선에 걸쳐 실패 소식이 쏟아지고 있는 지금 제아무리 사소한 전과라도 없는 것보다야 나았다.
어쨌든 붉은 군대가 독일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는 사실이 중요하니까.
물론 주코프도 이것이 언 발에 오줌누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개전 첫날에 국경에 밀집한 독일군 병력에 막대한 타격을 입히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불태워 독일군의 연료 수급을 차단하는 게 천왕성 작전의 1차 목표였지만, 소련군은 지금까지 그 어떤 것도 해내지 못했다.
메멜 점령으로 스탈린의 분노를 당장은 억누를 수 있어도, 그것이 오래가리라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2, 3일이면 다시 원상복구겠지. 그전까지 주코프는 새로운 전과를 올려야만 했다.
그래야 그와 그의 친족들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터.
“독일군의 방어가 가장 약한 곳이 어디지?”
“그, 그것이....”
“조금 더 확인이 필요합니다.”
주코프의 참모들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대답했다. 주코프는 터져 나오려는 고함을 목구멍 아래로 밀어냈다.
“확인이 더 필요하다니. 그건 또 뭔 소리야?”
“말 그대로입니다. 독일군의 방어태세가 워낙 철저해 특별히 약한 구석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나마 있는 곳이라면 쿨리크 원수의 제3기계화군단과 제10군단이 위치한 동프로이센 최북단 지역입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이토록 넓은 전선에서 적들의 방어가 가장 약한 곳도 찾아내지 못했다니!”
“차, 참모총장 동지. 천왕성 작전이 시작된 지 7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시면 분명 적의 방어선 중에 약한 곳을 발견-”
퍽 소리와 함께 주코프에게 진언을 올리던 참모장의 머리가 뒤로 날아갔다.
“겨우 7시간밖에 안 지났다고. 겨우? 겨우?”
주코프의 강펀치를 정통으로 맞은 참모장은 코뼈가 부러졌다.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는 부하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하며 주코프는 말을 이었다.
“7시간이나 지났는데 여태까지 제대로 된 전과가 없는데 그딴 태평한 소리가 나오나? 과연 크렘린에서도 같은 소리를 할 것 같냐고! 이번 작전의 결과에 우리 모두의 목숨이 걸려 있단 말이야!”
“크흠, 흠!”
보다 못한 티모셴코가 헛기침하자, 그제야 주코프는 이곳의 최선임이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주코프가 입을 다물자 티모셴코는 25000:1짜리 전술지도에 손을 올렸다.
“현실에 안주하는 일은 지양하는 게 맞지만, 그렇다고 너무 조바심을 가지는 것도 되도록 피해야겠지. 조금만 더 지켜보자고. 지금처럼 계속 공세를 가하다 보면, 분명 취약점을 발견할 수 있을 걸세. 무턱대고 윽박지른다고 다 해결되는 일은 아니지 않나.”
“주의하겠습니다, 동지.”
그럴듯하게 말하긴 했지만, 티모셴코 본인도 초조하긴 마찬가지였다.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길이가 얼마나 되는데 독일군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그 넓은 구역을 전부 다 철통같이 방어해낼 리가 없다.
분명 어딘가에 틈이 있을 터.
그 틈을 파고들면 소련군에게도 승산이 있겠지만 문제는 그 틈새를 언제 발견하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 및 반격으로 소련군의 피해는 당초 예상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손실이 지속된다면,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더라도 이를 뒷받침해 줄 병력과 물자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안 그래도 서기장의 독촉으로 예정된 개전 시기를 앞당기느라 병력과 물자 배치가 완료되지 않았는데, 소모까지 빠르니 티모셴코는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후방에서 보급되는 물자와 증원되는 병력의 수보다 전선에서 소모되는 분량이 더 많다니.....
이 전쟁, 정말로 이길 수 있을까?
***
쿨리크는 운이 좋았다.
남들이 강력한 방어선에 부딪혀 제대로 피를 보고 있을 때, 쿨리크의 부대는 극히 소수의 독일군 부대와만 교전을 치렀다.
이마저도 일선부대가 후발대에 증원을 요청하려고 하면 독일군은 교전을 멈추고 훌렁 철수해버렸다.
진격로에 매설된 지뢰와 독일군이 퇴각하면서 다리를 죄다 끊어버린 통에 시간이 다소 지체되긴 했지만, 아무튼 쿨리크가 지휘하는 소련군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격할 수 있었다.
“하핫, 천하의 독일군도 붉은 군대의 상대가 되지 못하는구만?”
공병대가 설치한 부교를 걸으며 쿨리크는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쿨리크에게 주어진 임무는 메멜을 점령하고, 독일군의 북부를 강타해 쾨니히스베르크를 압박하는 것.
평소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신과 거만함으로 가득 차 있던 쿨리크는 일주일 안에 쾨니히스베르크를 점령해 보이겠노라고 큰소리쳤다.
그가 하는 말을 믿는 사람은 쿨리크 자신을 제외하곤 한 명도 없었지만.
하지만 다른 부대들이 하나같이 죽을 쑤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쿨리크의 부대만 예정대로 전진 중인 거의 유일한 부대가 되었다.
망할 주코프 놈이 지금쯤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하군. 쿨리크는 얼빠진 얼굴로 지도판을 쳐다보고 있을 주코프를 생각하며 웃었다.
쿨리크는 주코프와 서로 삿대질을 하며 싸운 적이 없지만, 그가 자신을 하찮게 여긴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인성과 별개로 실력만큼은 확실했던 주코프는 직위만 높지 군사학의 기초도 모르는 쿨리크를 경멸했고, 쿨리크도 거만한 주코프를 역겨워했다.
그 많은 장군 중에 자신만 홀로 전공을 세운다면 서기장 동지도 주코프보다 자신을 더 신뢰하게 되지 않겠는가?
어쩌면 주코프를 참모총장 자리에서 내쫓고 자신을 그 자리에 앉힐지도 모를 일이다.
참모총장 직위에서 해임된 주코프는 투하체프스키, 로코소프스키처럼 형장에서 최후를 맞이할 테고.
경쟁자가 사라지고, 붉은 군대의 참모총장이 된 자신을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걷던 쿨리크는 뒤에서 들려온 폭발음에 놀라 바닥에 주저앉았다.
“뭐야!?”
쿨리크와 참모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회색 연기가 있었다.
쿨리크의 머리에 든 생각은 독일군의 포격이었다. 하지만 이내 푸른 하늘 위로 날아가는 기묘한 모양의 물체를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설마.... 공습인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새로운 폭음이 울렸다. 이것이 독일군의 공습이라 생각한 쿨리크는 황급히 부교 인근의 참호로 뛰어들어갔다.
그가 참호로 뛰어들기 무섭게 폭음이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연속으로 굉음이 울렸다.
***
“발사!”
열차에 설치된 로켓발사기에 탑재된 V1 로켓이 노란 꼬리를 물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영국의 도시들을 공격하기 위해 개발된 V1 로켓은 히틀러의 명령으로 소련군을 상대로 최초의 실전에 투입되어, 그 위력을 100% 발휘하고 있었다.
전진하는 소련군의 후방에 남은 관측반원들이 좌표를 전달하면, V1 로켓부대의 병사들은 해당 좌표로 V1을 발사했다.
발사대를 떠난 V1은 소련군의 보급로나 탄약고, 부교를 타격했고, V1의 정체를 모르는 소련군은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저 기묘하게 생긴 폭탄이 독일 공군의 신형 전투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폭탄을 떨어뜨리거나 기총을 쏘지 않고 그대로 목표물에 들이박잖아? 어? 뭐지?
“게르만스키 놈들, 대체 뭘 만든 거야?”
“낸들 알겠냐? 어? 또, 또 온다!!”
“엎드려-!”
생애 처음으로 경험하는 로켓 공격에 소련군 병사들은 아연실색했다.
훈련소에서 총 쏘는 법만 교육받은 병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나름 짬밥 좀 먹었다고 으스대는 고참 하사관들, 고급교육을 받은 장교들과 그들을 감시하는 정치장교들까지 모두가 독일군의 기묘한 병기에 충격을 받았다.
전투기처럼 날개가 달리고, 스스로 비행하는 폭탄이라니. 이건 듣도 보도 못했는데-
-콰아아아앙!!!
122mm 포탄을 가득 실은 GAZ-AA 트럭에 눈먼 V1이 명중하자 거대한 불꽃놀이가 일어났다.
폭발의 섬광은 길에 멈춰 선 트럭들과 주변의 병사들까지 모조리 집어삼켰고, 트럭들에 실린 탄약이 연쇄적으로 폭발하면서 피해를 더욱 키웠다.
섬광을 본 병사들은 시신경과 고막이 손상되면서 생기는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갈기갈기 찢어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수백 년 된 나무들조차 폭압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로켓의 착탄을 지켜보던 독일군 관측병들조차 폭압을 느낄 정도였다.
“내 생애 최고로 화려한 불꽃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로켓이 명중한 자리에는 운석이 충돌한 것만 같은 거대한 분화구가 생겼다.
분화구 주변에 널린, 주인 잃은 팔다리와 내장조각은 고기 타는 누린내를 진하게 풍겼다.
“전차가 옵니다!”
“침착해라. 당황하지 말고. 훈련한 대로만 하면 돼.”
후방이 V1 세례를 받는 사이, 최전선의 소련군은 메멜을 목표로 돌진했다.
쿨리크가 지휘하는 제3기계화군단과 제10군단의 선봉에는 쿨리크가 그토록 찬양해 마지않는 T-43이 위치하고 있었다.
T-43은 겉보기엔 T-34와 많은 부분에서 닮았지만, 장갑은 T-43이 두꺼웠다. T-34의 45mm 경사장갑이 4호 전차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방호력을 제공하는 것과 다르게 T-43의 60mm 경사장갑은 이론상 120mm에 달하는 방호력을 낼 수 있었다.
소련제 장갑의 품질이 떨어지는 관계로 실질적인 방어력은 그보다 더 낮지만, 티거의 100mm 직사장갑보다 더 나은 방호력을 중량 30톤의 중형전차가 가지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이다! 쏴!”
T-43이 다가오자 참호에 매복 중이던 일병은 상체를 일으켰다.
T-43의 정중앙에 조준점을 맞춘 일병은 격발기를 눌러 판처파우스트의 탄두를 쏘아 보냈다.
T-43과 일병 사이의 거리는 200m가 넘었지만, 신형 판처파우스트 ‘그로스’는 사거리가 앞서 등장한 ‘클라인’의 5배나 되는 사정거리를 가져 250m 떨어진 곳에서 발사해도 표적을 명중시킬 수 있었다.
탄두의 관통력이 200mm 이상으로 늘어난 것과 6번 이상 사용 시 불발률이 급상승하는 문제가 사라진 것도 큰 차이였다.
“잡았다!”
“잘했다, 프란츠!”
전면장갑 중앙-기관총좌와 조종수 해치 사이-에 탄두가 명중하자 T-43은 정지했다.
잠시 후 해치가 열리면서 피투성이가 된 전차병이 기어 나왔다.
오른쪽 다리가 절단된 전차병은 전차에서 굴러떨어져 신음하다가, 뒤에서 오는 아군 전차의 궤도에 밟혀 으스러졌다.
T-43의 기관총이 불을 뿜자, 판처파우스트를 발사한 일병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분대장인 병장이 상체를 내밀어 판처파우스트를 발사했다.
판처파우스트를 맞은 T-43은 어김없이 불꽃을 토해내며 정지했다.
“끄아아아아아!!!”
전신이 화염에 휩싸인 전차병이 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괴성을 질렀다.
히틀러의 전기톱이라 불리는 MG40이 불을 뿜어 고통에 몸부림치던 전차병의 숨통을 끊었다.
화염 속에서 산 채로 익어가던 전차병에게는 총알이 자비처럼 느껴졌다.
순식간에 전차 2대가 연달아 격파당하자, 좁은 통로는 완전히 봉쇄되었다. 뒤따르는 전차들은 길이 막히자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후진하려고 해도 뒤에 있는 전차에 막혀 움직일 수 없었다.
“이반들이 덫에 걸렸다.”
“발사!”
움직일 수 없게 된 소련군의 머리 위로 박격포탄이 날아들었다. 박격포탄을 맞은 전차들은 상부장갑이 관통되어 그대로 불타올랐다.
“명중. 잘하고 있어. 계속 쏴라.”
쌍안경으로 전투 현황을 관찰하는 대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소련군 전차 한 대가 불타올랐다.
전차에 탄 적 보병들은 포탄의 비를 피해 전차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가 전차와 함께 불타올랐다.
혼비백산하며 도망치는 적들을 보니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듯했다.
소련 국경에서 지나치게 가까이 있는 메멜을 사수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독일군은 메멜의 함락을 염두에 두고 방어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적어도 메멜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모두 피난을 완료할 때까지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할 필요가 있었다.
국방군 제90경보병사단 255보병연대의 병사들은 메멜의 철수가 완료될 때까지 최전선에 남아 적의 공격을 격퇴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았다.
병사들이 최전선에서 소련군을 막아내는 동안, 메멜에서는 시민들이 수송선에 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헌병과 경찰의 통제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움직였다.
적기의 공습으로부터 시민들과 배를 보호하기 위해 대공포병들은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하늘을 감시했다.
하지만 그들이 우려하는 적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엄마, 저것 좀 봐.”
왼손은 엄마의 손을 잡고, 오른손은 인형을 잡은 아이가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에는 한 무리의 전투기들이 비행하고 있었다.
적기일까 싶어 몸을 움츠렸던 시민들은 이내 비행기의 날개에 그려진 철십자를 보고 안도했다.
전투기들의 정체는 인근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Bf109였다.
“우리 공군이다!”
사람들은 독일 공군의 출현에 안도하며 손을 흔들었다. 전투기들은 이에 화답하듯 날개를 흔들어 보이곤 동쪽으로 날아갔다.
***
-고맙습니다, 총통. 독일 공군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어떤 재앙이 일어났을지....
“루마니아는 독일의 동맹국입니다. 동맹국의 안전을 수호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루마니아 육군 원수 겸 총리 이온 안토네스쿠는 독일 공군의 도움 덕에 소련군의 공습으로부터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지켜낼 수 있었다며 내게 거듭 감사를 표했다.
딱히 루마니아를 위해서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지켜낸 건 아니었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국왕 폐하께서도 독일군의 도움 덕에 루마니아가 멸망의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고 말씀하시며, 소련에 대한 선전포고에 동의하셨습니다. 곧 의회를 열어 대소 선전포고를 발표할 예정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루마니아와 독일은 하나입니다. 두 나라가 힘을 합치면 그 어떤 적도 두렵지 않을 겁니다.
안토네스쿠와의 통화를 끝낸 뒤에는 슬로바키아의 티소 대통령과 통화했다.
독일의 도움으로 권좌에 오른 그답게 내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티소는 슬로바키아도 독일을 도와 소련과의 ‘성전’에 뛰어들겠노라고 맹세했다.
유전의 존재 탓에 소련의 공격대상일 수밖에 없는 루마니아와 태생부터 독일의 괴뢰국인 슬로바키아는 참전이 자동으로 예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헝가리도 루마니아처럼 소련의 공습을 받았으니 참전이 확실하고.
전쟁이 터졌으니 이젠 망설일 게 없었다. 나는 샤흐트와 토트, 슈페어에게 독일 경제를 총력전 체제로 전환할 것을 지시했다.
1차대전의 고된 기억 탓에 나치는 국민들의 지지도 하락을 우려해 전황이 기울기 시작한 1942년 말까지도 국가 경제를 총력전 체제로 전환하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독일이 본격적인 총력전 체제에 돌입한 건 1943년 2월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참패로 패전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된 후의 일이었다.
독일이 1년이나 2년 일찍 총력전 체제로 들어갔다고 해도 결과를 바꾸지 못했으리란 예측이 지배적이지만, 늦은 총력전 체제 돌입이 독일의 패망을 앞당겼다는 말은 부정할 수가 없다.
전쟁이 얼마나 오래갈지 아무도 모르는 이상, 총력전 체제 돌입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독일 내 식량 배급 및 통제를 위해 폴란드 침공 직전에 설립되어 활동하다가, 프랑스 항복 후에는 활동을 중지한 제국통밀빵위원회(Reichsvollkornbrotausschuss)도 다시 부활했고, 국민들의 비타민 보급 및 비타민 연구를 위해 설립한 제국비타민연구소(Reichsvitaminanstalt )와 점령지 및 동맹국, 중국, 소련, 티베트로부터 입수한 종자들의 연구를 위해 설립한 SS 식물유전학연구소(SS-Institut für Pflanzengenetik)에도 전폭적인 지원을 지시했다.
“괴벨스 박사,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소?”
“예, 총통 각하. 배우들의 섭외와 지시사항 전달도 모두 완료되었고 당원 및 시민들의 동원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걱정하실 건 하나도 없습니다.”
“하기야 박사의 전문분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시기는 언제쯤으로 생각 중이오?”
“총통 각하께서 명령하신다면, 오늘 밤에라도 가능합니다!”
“그렇군. 알겠소.”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으니, 적들에게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한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독일 국민의 의지가 어느 수준인지 확실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기대하시라. 여태까지 본 적도, 앞으로도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지상 최대의 쇼를 보여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