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왕성 작전 (2) >
소련군의 공격은 독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독일의 동맹국, 헝가리와 루마니아도 개전과 동시에 소련 공군의 공습을 받았다.
기껏해야 2류 군대에 불과한 헝가리군과 루마니아군은 붉은 군대의 상대가 되지 못하지만, 그냥 놔뒀다가 독일로 진격하는 붉은 군대의 측면이나 후방을 찌를 위험이 있으니, 사전에 박살을 내 위험이 될 만한 요소를 제거해야 할 것이다.
스탈린은 천왕성 작전의 세부 계획을 짜던 티모셴코와 주코프에게 헝가리와 루마니아를 단기간에 점령할 방도를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둘은 소련군 전력 전체를 독일에 쏟아부어도 모자랄 판에 헝가리와 루마니아로 병력을 할애하는 것은 자살행위라고 주장하며 설득을 시도했다.
결국 스탈린은 기존 계획을 바꿔, 헝가리와 루마니아 방면에는 이들 두 군대를 견제할 만큼의 병력만 배치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어차피 독일만 무너지면 동유럽 전체가 소련의 강역이 될 테니 티모셴코와 주코프의 말대로 귀중한 병력과 물자를 소모하면서까지 점령할 필요가 없었다.
허나 루마니아의 플로이에슈티 유전만큼은 논외였다.
플로이에슈티 유전에서 산출되는 석유가 독일 산업과 군사의 기둥이 되는 만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파괴해야 했다.
히틀러도 소련이 공격을 해오면,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1순위로 노릴 것을 알았다.
독일은 루마니아는 물론이고 자국에도 중요한 유전을 지키기 위해 제3항공군을 루마니아로 파견해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사수케 했다.
소련 공군의 폭격기들이 활주로에서 이륙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독일 공군과 루마니아 공군의 전투기들도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지키기 위해 행동을 개시했다.
루마니아 상공에 도착한 폭격기들은 성난 황소처럼 자신들에게 달려드는 독일과 루마니아 전투기들을 상대해야 했다.
***
한스 요아힘 마르세이유 소위에게는 이번이 3번째 전장이었다. 그의 첫 전장은 이탈리아 상공이었고, 두 번째 전장은 유고슬라비아 상공이었다.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에서 마르세이유는 총 8기의 적기를 격추해 에이스의 칭호를 얻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도 그는 상관들에게서 그리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전투가 시작됐다 하면 주변의 제지를 뿌리친 채 무작정 공격에 나서 주위를 당혹스럽게 만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닌 데다, 자신도 4번이나 탑승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2기를 격추할 때마다 1번 격추당한 셈인데, 적기나 대공포에 격추당해서가 아니라 기름이 다 떨어져 불시착한 것이라는 게 위안 아닌 위안이었다.
매번 불시착할 때마다 그는 부상 한 번 입지 않고 멀쩡히 살아서 돌아왔지만, 허구한 날 애꿎은 전투기만 날려 먹는 문제아로 상부에 낙인찍히고 말았다.
그로 인해 그는 적기를 8기나 격추한 에이스임에도 불구하고 동기들이 모두 소위 계급장을 달고 다닐 때 혼자서만 사관후보생 신분으로 지내야 했다.
그가 정식으로 소위로 진급한 날은 전쟁이 터지기 나흘 전이었다.
-야, 마르세이유!
전투가 시작되기 전, 마르세이유의 동료 한스 아놀트 슈탈슈미트는 마르세이유에게 무전을 걸었다.
-오늘은 사고 치지 마라. 이번에도 격추당하면 단장이 네 불알을 걷어차 버릴지도 몰라.
“걱정도 팔자다, 새꺄. 나는 알아서 잘 할 테니 너나 조심하라고.”
마르세이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평소처럼 큰소리를 쳤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그도 상관들이 자신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자신의 8기 격추 기록 탓에 여태까지 가만히 놔두고 있을 뿐.
마르세이유가 소위로 진급하던 날, 중대장 노이만 중위는 마르세이유를 따로 불러 상부가 그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또 사고를 쳐서 기체를 날려 먹는다면, 반영구적으로 지상근무로 돌려버릴 생각이라는 것까지도.
‘자네가 전투에 소질이 있다는 건 나도 알아. 그건 인정하네. 하지만 말이야, 조종사의 미덕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과 달라. 개개인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동료들과 합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단 말이네.
상부에서는 자네를 실력만 믿고 날뛰는 난봉꾼으로 여기고 있어. 다음번에도 사고가 생기면 영원히 조종간을 못 잡게 될 걸세. 그 결정에는 나도 동의했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게. 자네를 위해서이기도 하니까.
지금까지 자네가 살아 있는 건 순전히 재수가 좋아서야. 계속 조종간을 잡고 싶으면, 그리고 죽기 싫으면 조금은 차분해지는 게 좋을 거야. 조금 더 경험을 쌓으라고. 내 말 명심하길 바라네.’
마르세이유는 노이만 중위의 말을 결코 잊지 않았다.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소련군이다!
-다들 훈련대로 움직이도록! 행운을 비네!
이윽고 소련군과의 전투가 시작되자 마르세이유는 당장이라도 적진에 뛰어들고픈 욕망을 억누르며 조종간을 움직였다.
Ta152가 폭격기를 상대하고, Fw190D가 호위기들을 상대했다. Fw190은 마르세이유가 전에 탔던 Bf109와는 다른 전투기였다.
고공에서의 성능은 Bf109가 Fw190보다 뛰어나고 저속기동성에서도 Fw190을 앞섰지만, 중저고도에서는 그 반대였다.
또, Bf109보다 조종하기 편하다는 것과 공중전, 폭격기 요격, 대지상공격 등 Bf109보다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것도 Fw190의 강점이었다.
이 같은 장점 덕에 신참 조종사들은 Bf109보다 Fw190을 더 선호했지만 고참 조종사들은 Bf109만의 장점과 손에 익숙하다는 이유로 Bf109를 더 선호했다.
그래서인지 Fw190으로 기종을 전환해 훈련을 받을 때는 조종사들 사이에서 말이 제법 나왔었다.
Bf109도 충분히 훌륭한 전투기인데, 굳이 기종을 바꿀 필요가 있나? 차라리 신참들에게 주고 고참들은 계속 Bf109를 타게 하면 될 텐데....
타고난 조종사였던 마르세이유는 금방 Fw190에 익숙해졌지만, 그도 내심 Bf109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상념에 빠진 그를 향해 Yak-1 한 기가 돌진해왔다.
“어딜!”
마르세이유는 가뿐하게 기수를 움직여 야크기가 발사하는 20mm 기관포 세례를 피했다. 그리곤 능숙하게 적의 후방에 따라붙어 기관포를 발사했다.
20mm 기관포탄을 뒤집어쓴 야크기는 수명이 다해버린 하루살이처럼 맥없이 추락했다. 이걸로 마르세이유의 전과는 8기 격추에서 9기로 늘었다.
예전이었다면 마르세이유는 광분해서 적진에 뛰어들었겠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는 노이만 중위의 충고대로 침착함을 유지했다.
아직 적기는 많다. 즉, 싸울 기회는 널리고 널렸다. 이번에도 흥분해서 무턱대고 달려들었다가 불시착하는 날에는 영원히 조종간을 놓게 될지도 모른다.
위기감은 그를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 마르세이유는 평소의 그라곤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달려드는 야크기들을 상대했다.
소련군 조종사들은 용맹했지만, 경험이 없고 어설펐다. 소련은 스스로의 손으로 유능한 조종사와 지휘관들을 거진 다 죽여 없앴기 때문이다.
스페인 내전에서의 활약으로 29살의 젊은 나이에 공군 중장으로 진급한 파벨 리챠코프는 공군 소령인 아내 마리아와 함께 인민의 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숙청당했으며, 마찬가지로 스페인 내전에서 활약한 폭격기부대 사령관 에른스트 샤흐트 소장, 국방인민위원회 방공의장 그리고리 슈테른 상장도 처형대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나마 소련 공군에 남은 유일한 희망이던 알렉산드르 노비코프조차 처형되면서 소련 공군은 사실상의 사형을 선고받았다.
유능한 지휘관들을 모두 잃은 소련 공군은 덩치만 큰 어중이떠중이들의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고, 애송이 조종사들은 제대로 된 훈련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채 무작정 기체에 몸을 실어 출격해야 했다.
-좋았어! 또 한 놈 잡았다!
-병신 같은 새끼들. 애새끼만도 못한 수준이라니.
수년간의 실전으로 다져진 실력을 바탕으로 훈련을 받은 독일 조종사들을 소련 조종사들을 일방적으로 농락했다.
처음에는 긴장한 채 전투에 임하던 마르세이유의 동료들도 어느새 적진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하지만 마르세이유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전투의 시작부터 끝까지 침착함을 유지하며 적과 싸웠다.
그가 쫓던 적기가 동료의 손에 격추되어도 그는 화를 내거나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그저 다음 상대를 찾을 뿐이었다.
호위기를 모두 떨어져 나가자 Fw190 편대는 폭격기 사냥에 동참했다.
Ta152들의 활약으로 폭격기들의 수는 처음의 3분의 2로 줄어있었다.
여기에 Fw190들까지 끼어들자 폭격기 조종사들은 절망과 공포에 사로잡혔다.
TB-3에는 적기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4정의 기관총이 달려 있지만, 베테랑 독일 조종사들을 상대로는 있으나 마나였다.
독일기들은 TB-3에서 쏘아대는 기관총 세례를 요리조리 피하며 둔중한 몸체에 기관포탄을 박아넣었다.
적 기총사수의 탄막을 피해 비행하던 마르세이유는 TB-3의 조종실 바로 위를 향해 MG151을 발사했다.
조종사들을 잃은 TB-3는 몸체가 뒤집힌 채 추락하며 바로 밑에서 비행하던 다른 TB-3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동료기와 충돌한 TB-3는 우측 날개가 동강 나 지상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동료들이 일제히 탄성을 내질렀다.
-오오오! 굉장하구만!
-장난 아닌데?!
한 번의 공격으로 폭격기 2기를 격추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무전망에선 마르세이유를 칭찬하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호위기들이 당하자 폭격기들은 기수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플로이에슈티 유전에 투하하기로 한 폭탄을 그대로 싣고서.
그러나 독일 공군은 소련 폭격기들을 곱게 보내주지 않았다. 루마니아 공군 역시 마찬가지. 도주하는 소련 폭격기들은 독일과 루마니아 전투기들로부터 쉬지 않고 공격을 받았다.
늙고 힘 빠진 수염고래를 사냥하는 범고래 떼처럼, 집요하게 따라붙어 공격을 퍼붓는 전투기들에 의해 폭격기들의 수는 빠르게 줄었다.
폭격기들의 수가 4분 1 밑으로 내려간 후에야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연료도 슬슬 간당간당한 데다 잔탄도 얼마 되지 않았기에 조종사들은 미련 없이 기수를 돌렸다.
그렇게 플로이에슈티 유전 사수를 위한 첫 공중전은 독일과 루마니아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기지로 돌아온 조종사들은 기지에서 대기하던 지상요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사방에서 만세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전투기에서 내린 마르세이유는 지상요원들에게 둘러싸여 축하 인사를 받던 슈탈슈미트에게 다가갔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듯한 마르세이유의 얼굴을 본 슈탈슈미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 마르세이유. 오늘 굉장하던데? 몇 기나 잡았냐? 나는 전투기만 3대 잡았는데.”
“나도 3대야. 전투기 1대, 폭격기 2대. 그건 그렇고.....”
“?”
“나 말이야.... 이제 감을 좀 잡은 것 같아.”
***
새벽 4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지만, 총통관저의 모든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장군들의 입을 통해 쏟아지는 보고에 귀를 기울였다. 전쟁이 시작되었고,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기까지, 동부전선 전역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만슈타인이 사전에 병력을 뒤로 물린 덕에 소련군의 포격에 의한 피해는 적은 편이었다.
동시에 소련 공군도 공습을 가해왔지만, 대부분 우리 공군에 의해 격추되었다.
괴링은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소련 공군의 공습으로 인한 독일 전방 도시들의 피해는 미미한 수준이며, 동시에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노린 소련군의 공습 역시 성공적으로 격퇴되었다고 말했다.
“확인된 전과만 폭격기 232기 격추에 전투기 176기 격추입니다!”
“오오오오!”
입이 떡 벌여지는 수치에 장군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괴링의 말이 진짜라면, 적군은 전쟁 발발 3시간 만에 전투기와 폭격기를 합쳐 400기를 넘게 잃었다는 소리가 된다.
루프트바페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소련 공군의 수준을 알만했다.
“굉장하군. 아무튼 플로이에슈티 유전의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하오. 플로이에슈티 유전이 불타면, 우리는 이 전쟁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소. 승리를 축하하는 것도 좋지만 전쟁은 이제 시작이니, 자만하지 말고 유전 사수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주길 바라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총통 각하. 그래도 걱정하지 마시지요. 공군이 있는 한 플로이에슈티 유전은 멀쩡할 테니 말입니다!”
“암. 제국원수만 믿겠소.”
레더는 600명의 승객을 태운 아우로라가 소련 잠수함에 의해 격침된 소식을 전했다.
아우로라에 탑승했던 승객 중 379명이 아우로라를 호위하던 슈넬보트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어선들 및 유보트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러나 221명의 승객은 구조되지 못했다.
“아우로라를 공격한 소련 잠수함은 슈넬보트가 격침시켰습니다. 이외에도 단치히를 비롯한 7개 항구에서 소련 잠수함들에 의한 공격이 보고되었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피해는 조업 중이던 어선 1척이 피격된 게 전부입니다. 공격을 시도했던 소련 잠수함들 중 11대가 아군이 부설한 기뢰와 구축함, 슈넬보트, 정찰기에 의해 격침되었으며, 2대가 손상을 입고 표류하다가 아군에게 나포되었습니다.”
포로가 된 소련 잠수함 승조원들은 단치히에 있었다. 포로 전원은 정보습득을 위해 베를린으로 이송될 예정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최전선으로부터 쏟아지는 보고를 듣고 장군들과 대책을 논의하려면 아침이 될 때까지 뜬눈으로 밤을 보내야 했다.
나는 피로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커피를 마셨다. 영미권에서 흔히 ‘비엔나 커피’로 알려진 아인슈페너로. 장군들에게도 아인슈페너를 한 잔씩 돌렸는데, 가뜩이나 퇴근 못하고 하루를 꼬박 새고 있는 장군들은 차갑고 달달한 아인슈페너를 무척이나 반겼다.
“총통 각하, 만슈타인 원수입니다.”
“연결하게.”
수화기를 들자 만슈타인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현재 전황은 어떻냐는 내 물음에 만슈타인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아직까지는 순조롭습니다.
그 말인즉 사전에 세워둔 방어계획대로 전황이 진행 중이라는 소리였다. 다행이군.
“그래도 너무 방심하지는 마시오. 러시아인들은 간혹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을 보여줬으니까.”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총통 각하! 제가 누굽니까? 천하의 만슈타인이 있는 한 빨갱이들은 결코 독일 땅에 발을 딛지 못할 겁니다.
전쟁이 막 시작되었지만, 만슈타인의 목소리에선 여유가 넘쳤다.
여유를 넘어 다소 자만심까지 느껴지는 만슈타인의 보고를 듣자 바짝 타들어 갔던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내가 별말 안 해도, 알아서 잘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만슈타인인데 아무렴.
“잘 알겠소. 그럼, 모쪼록 수고해주시오.”
***
같은 시각, 리벤트로프는 주독 소련대사 블라디미르 데카노조프로부터 크렘린의 입장을 전해 들었다.
“-해서, 소비에트 연방은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는 바입니다.....”
선전포고문 낭독을 마친 데카노조프는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리벤트로프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늘상 봐왔던 베를린의 풍경이었지만, 한동안은 보게 될 일이 없을 터였다.
어쩌면, 영원히.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허.”
제3제국의 거물 중 대표적인 친소파이자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리벤트로프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돌연 입을 열어 질문을 던졌다.
“이것이 정녕 스탈린 서기장의 뜻이오?”
“그렇습니다.”
데카노조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리벤트로프가 독소 양국의 우호관계 유지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로 그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가 침이 마르도록 주장해온 베를린-모스크바 동맹은 이제 없다.
소련은 선전포고 없이 독일을 기습했고, 독일은 기습을 당한 후에야 소련으로부터 선전포고문을 전달받았다.
친소파인 그가 한동안 정계에서 어떤 취급을 받을지 안 봐도 뻔했다.
“당최 이해할 수가 없군. 우리가 귀국에게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러는 겁니까? 예? 어디 이유나 한번 들어봅시다.”
“죄송하지만, 저로서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군요. 저는 스탈린 동지께서 지시하는 대로 따를 뿐입니다.”
“알겠소이다. 그럼, 더 이상 여기 있을 필요도 없겠구려.”
리벤트로프는 의자를 소리 나게 밀며 일어섰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밖으로 나갔다.
“당장 총통관저로 가지.”
“알겠습니다.”
메르세데스의 뒷좌석에 앉은 리벤트로프는 절망과 분노, 그리고 허탈감에 빠졌다.
그토록 양국의 우호를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녔는데, 이제는 그 노력이 모두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소련과의 전쟁을 엄밀히 말해 그의 잘못이 아니고, 총통도 그에 대한 신뢰는 변함이 없을 터지만 그의 발언권이 줄어들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괴링, 괴벨스, 힘러만 좋아라 하겠군. 지금쯤 싱글벙글 웃고 있을 3명을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었다.
그는 스탈린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던 날 스탈린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히틀러 총통에게 전해주시오. 나는 이 협약을 끝까지 지킬 것이라고.’
빌어먹을 사기꾼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