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틀러가 되었다-140화 (140/150)

< 천왕성 작전 (1) >

1942년 5월 25일

독일 폴란드 보호령

“저기, 비트만 SS 중위님.”

“왜?”

“잠시 볼일 좀 보고와도 될까요?”

포수 발타자르 볼 SS 상병의 물음에 비트만은 고민했다.

조금 전에 연대본부에서 특수한 상황이 아니면 전차 밖으로 나가지 말고 안에서 대기하라는 지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보병들은 볼일이 급하면 바지를 내리고 볼일을 보면 되지만, 전차 안에 있어야만 하는 전차병들은 그럴 수 없었다.

이 경우 원칙상 전차 내에 배치해 둔 빈 탄약통이나 탄피에 볼일을 봐야 했지만 대기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는 마당에 악취가 나는 배설물을 전차 내부에 두고 싶지 않았다.

“빨리 갔다 와.”

“감사합니다.”

해치를 열고 밖으로 나갈 때, 볼은 탄약수 카를 리히터와 눈이 마주쳤다.

볼처럼 그도 적잖이 긴장한 탓에 얼굴이 경직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비쩍 마른 얼굴이 더 말라보였다.

어쩌면 어두워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밖으로 나간 볼은 바지를 내리고 소변을 보았다. 오줌 줄기가 땅바닥에 떨어지며 지면을 적셨다.

먹이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이던 개미 떼가 갑작스러운 날벼락에 의해 공황에 빠졌다.

“시원하게 쌌냐?”

“새로 태어난 기분입니다.”

“모두 볼일이 있으면 지금 내려서 해결하라고. 나중엔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으니깐.”

비트만은 그렇게 말했지만, 전차에서 내리는 이는 없었다. 다들 전차에 오르기 전에 속을 비웠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내리지 않자, 비트만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준비 하나는 확실하군.”

그 순간, 포성이 울렸다.

포성은 그들이 마주 보는 동쪽으로부터 들려왔다. 이윽고 전방에서 노란 불길이 치솟았다.

불길이 이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온 후에야 폭음이 한 발짝 늦게 귀에 닿았다.

“세상에.”

“와, 씨발.”

“이, 이게 대체 뭔.....”

비트만은 자신의 눈에 비친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폴란드와 프랑스, 유고슬라비아의 전장에서 봤던 광경들이 독일의 강토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1942년 5월 25일 새벽 1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쟁, 독소전쟁의 막이 올랐다.

***

“쏴!”

“쏴아!”

새벽 1시가 되자 소련의 대포들이 포문을 열었다.

붉은 군대는 몇 달 전까지 그들의 당이 영원한 우방이라고 선전하던 독일의 영토를 향해 무자비한 포격을 퍼부었다.

포탄을 장전한 채 대기하던 포병들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포에 불을 당겼다.

포성과 함께, 수천 발의 포탄이 허공을 가르며 적진으로 날아갔다.

지면에 처박힌 포탄이 터지면서 일으키는 굉음과 진동은 드넓은 대지를 뒤흔들기 충분했다.

갑작스러운 폭음과 진동에 놀란 새들이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하늘 위로 날아올랐고, 토끼와 사슴, 다람쥐들은 보금자리에서 빠져나와 소리와 진동이 울리는 곳의 반대 방향으로 무작정 도망쳤다.

소련군은 단 한 번의 포격을 위해 보유 중인 모든 화포를 총동원했다.

훗날 독일군으로부터 ‘스탈린의 오르간’이라 불릴 카츄샤 다연장로켓부터 러일전쟁과 1차대전에 사용되었던 구식 대구경 화포들까지 전부.

거인의 허벅지만큼이나 굵고 육중한 152mm ML-20 곡사포가 152mm 포탄을 쏠 때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땅이 진동했다.

약실이 구리로 된 탄피를 토해내면 곡사포의 포신처럼 팔뚝이 굵은 탄약수가 새 포탄을 밀어 넣었다.

“동무들, 서둘러라!”

“빨리, 빨리! 이렇게 느려서야 전쟁을 할 수 있겠나!”

트랙터와 트럭들이 탄약고와 포병진지를 오가며 탄약을 날랐다.

포탄을 쏘는 포병들만큼이나 탄약상자를 트럭에 싣는 병사들의 손놀림도 빨라졌다.

하지만 소련군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쏜 포탄이 떨어지는 곳에 독일군이 없다는 사실을.

최초의 포탄이 떨어지기 훨씬 전에, 만슈타인은 소련군의 포격에 대비해 병력을 미리 예비진지로 이동시켰다.

소련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최전선의 몇몇 진지에는 미끼용 부대를 놔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사실을 모르는 소련군은 쉬지 않고 포격을 쏟아부었다. 자신들이 쏜 포탄에 날아가는 독일군의 벙커와 참호를 상상하면서.

“서둘러라, 곧 로스케 놈들이 온다!”

“9mm 총탄은 저쪽으로! 수류탄은 이쪽으로 가져와라!”

소련군이 포탄만 쓸모없이 낭비하는 동안, 독일군은 다가올 전투에 대비해 마지막으로 무기를 점검하고 병력과 물자를 진지에 배치했다.

전차호에 들어간 전차들과 위장막을 씌운 대전차포의 대전차포병들은 약실에 철갑탄을 장전해 적 전차와의 교전을 준비했다.

신을 믿는 병사들은 저마다 기도문을 읊거나 십자가에 입을 맞추었다.

공격은 지상뿐만이 아닌 하늘과 바다에서도 가해졌다.

포병대가 불을 뿜기 전, 이미 항구를 떠나 발트해를 돌아다니던 소련 해군의 잠수함들은 독일 해군의 군함들이 정박한 항구를 향해 움직였고, 활주로에서 이륙한 소련 공군의 폭격기들도 죽음의 비행을 시작했다.

소련 해군의 첫 전과는 메멜을 떠나 단치히를 향해 항해 중이던 독일 여객선 ‘아우로라’를 격침시킨 것이었다.

아우로라에는 당국의 대피 명령을 받고 집과 고향을 떠나 승선한 피난민 600명이 타고 있었다.

슈넬보트 1척의 호위를 받으며 단치히로 향하던 아우로라를 발견한 S급 잠수함 S-8은 지체없이 어뢰를 발사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어뢰는 간발의 차이로 빗나갔지만, 세 번째 어뢰는 아우로라에 명중했다.

어뢰를 맞은 아우로라는 서서히 좌측으로 기울었다. 어뢰의 폭발로 생긴 구멍을 통해 발트해의 바닷물이 선내로 쏟아졌다.

아우로라를 명중시킨 S-8의 운명도 그리 좋지 못했다. 아우로라를 향해 S-8이 마지막 어뢰를 쏘기 전에 슈넬보트도 S-8을 발견하고 어뢰를 발사했다.

아우로라에서 거대한 물기둥이 치솟은 직후, 슈넬보트가 발사한 기젤라 어뢰도 S-8에 명중했다.

아우로라가 완전히 가라앉기도 전에 S-8은 발트해의 해저로 가라앉았다. 한때 S-8의 몸체였던 금속 조각들과 기름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적함을 격침시킨 슈넬보트는 아우로라에 돌아와 생존자들을 구조했다.

이것이 독소전쟁 개전 첫날 소련 해군이 거둔 거의 유일한 전과였다.

행동을 개시한 소련 잠수함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

상당수의 잠수함이 독일 해군이 부설한 기뢰와 접촉하거나, 구축함과 유보트, 해군 항공대의 Ar196의 공격을 받아 격침되거나 항해불능 상태에 빠져 손실되었다.

기껏 발사한 어뢰들도 미리 설치해 둔 어뢰 방지용 그물에 걸려 무용지물이 됐다.

공격에 실패한 잠수함들은 도주를 꾀하다가 추격해 온 구축함들의 제물이 되었다.

가뜩이나 독일 해군에게 질과 양 모든 면에서 밀리던 소련 해군은 기습의 이점조차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추태를 보인 건 소련 해군만이 아니었다. 독일 영토를 향해 가공할 포격을 퍼붓던 소련 포병들의 머리 위로 불의 벼락이 떨어졌다.

묵묵히 포탄을 장전하고 방아끈을 당기던 소련군 포병들은 영문도 모른 채 화염에 삼켜져 떼죽음을 맞이했다.

“끼아아아아아!”

가까스로 죽음을 피한 포병들도, 불똥과 파편을 뒤집어쓰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뱉었다.

포탄을 배달하기 위해 가속페달을 밟던 운전병들은 진지에 포탄이 떨어지는 광경을 보고 놀라 얼어붙고 말았다.

그들에게 재앙을 선물한 건 독일군 포병이었다. 사전에 후방의 진지로 이동한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독일군 포병대는 소련군의 포격이 시작되기 무섭게 반격을 준비했다.

독일군의 주력 곡사포인 15cm sFH 18의 사거리는 13km. 개량형인 15cm sFH 18M이 15km로, 사정거리가 17km를 넘어가는 152mm ML-20 곡사포를 상대하려면 18.2km까지 사정거리를 늘인 로켓추진 포탄을 이용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이에 히틀러는 기존의 15cm 곡사포보다 사정거리가 긴 15cm 평사포를 개발, 배치해 소련 포병에게 대항하고자 했다.

20.3km에 달하는 사정거리를 자랑하는 15cm 평사포는 로켓추진 포탄을 이용할 경우 최대 24km까지 포탄을 날려 보낼 수 있었다.

적 포병대의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하는 데 성공한 독일군 포병은 바로 포탄을 장전했다.

“발사!”

포병단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15cm 평사포들이 포구에서 섬광을 토해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15cm 포탄은 소련군 포병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선사했다.

“후진, 후진!”

적의 포격에 아군 포대가 새하얀 섬광에 휩싸이는 광경을 목격한 상사가 운전병을 재촉해 트럭을 후진시켰다. 그러나 곧 그들을 향해서도 독일군의 포탄이 날아들었다.

포탄 한 발이 152mm 탄약을 가득 실은 트럭에 명중하자, 하얀 공이 생겨났다.

섬광이 사라진 자리에는 거대한 분화구가 생겼다. 분화구에는 산산이 조각난 트럭의 부품과 인간의 육신이었던 조각들로 가득했다.

***

-전투 개시!

-단 한 대도 놓치지 마라! 모조리 격추시켜!

-우리가 저놈들을 막지 못하면 우리 가족들이 사는 도시들은 불바다가 된다!

독일 영공에 들어선 소련 공군의 폭격기들은 자신들을 기다리던 독일 공군 전투기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스페인에서 유고슬라비아까지, 수십에서 수백 번에 달하는 실전을 경험해 실력과 경험 모두 범접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른 독일군 조종사들은 소련군 조종사들이 당해낼 상대가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기체의 성능조차 독일 공군이 소련 공군의 그것보다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다.

폭격기들을 향해 접근하는 독일 전투기들을 막기 위해 호위기들이 나섰다. 호위기들의 기종은 Yak-7. 소련 공군이 운용하는 전투기 중에 가장 최신형에 성능도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기체였지만 Yak-7이 상대해야 할 적은 Me262 슈발베와 Bf109G였다.

둘 다 성능 면에서 Yak-7보다 몇 단계는 위에 있다고 평가받는 기종들.

심지어 전투기를 모는 조종사들조차 한 명 한 명이 수십 번의 실전과 훈련을 반복해오며 기체와 한 몸이 된 베테랑들이었다.

항공에서의 사투는 금방 일반적인 학살이 되었다. 독일기들이 불을 뿜으면 야크기들은 어김없이 연기를 내뿜으며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추, 추락한다!

-이반, 뒤! 뒤에! 아아아!

-누가 좀 도와줘!

소련군의 무전망은 금방 조종사들이 내지르는 절망의 비명으로 채워졌다.

소련 조종사들은 어느새 폭격기 호위가 아닌, 자신들의 목숨을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하지만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뭉친 독일 조종사들의 추격을 뿌리치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도 어려운 일이었다.

독일군 조종사들의 눈은 결코 먹잇감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씨발, 씨발, 씨발!’

겐나디 예고노프스키 소령은 조종간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전투가 시작된 지 5분도 되지 않았는데, 그 짧은 순간에 그는 벌써 6번이나 죽을 뻔했다.

6번이나 되는 죽음의 고비를 맞고도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그만큼 예고노프스키의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런 그조차 죽을 뻔했다는 사실은 상황이 그만큼 절망적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예고노프스키는 폴란드, 프랑스, 영국 공군이 독일군 조종사들에게 농락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독일군 조종사들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격차가 클 줄이야.

물론 기체의 성능에 힘입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냉정하게 판단해서 독일 조종사들은 소련 조종사들보다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기량이 뛰어났다.

그것만큼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런 씹!”

예고노프스키는 황급히 조종간을 위로 당겨 기체를 상승시켰다. 총탄 몇 발이 캐노피에 박혔지만, 예고노프스키는 무사할 수 있었다.

“안드레이, 뒤에 한 기 붙었다!”

가까스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 예고노프스키는 동료 안드레이의 기체 뒤에 Bf109가 붙은 것을 발견했다.

그의 무전을 들은 안드레이는 적기를 떼어놓기 위해 급강하를 시도했다.

-젠장! 이 새끼, 안 떨어져!

예고노프스키만큼이나 조종실력이 뛰어난 안드레이였지만, 독일 조종사는 거머리처럼 안드레이 기체 뒤에 찰싹 달라붙어 그를 바짝 추격했다.

예고노프스키는 위기에 처한 동료를 구하기 위해 적기를 향해 발포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20mm 기관포를 발사하기 전에 Bf109가 달려들어 그의 조준을 방해했다.

그 사이 안드레이의 기체는 적기의 집중사격을 받았다.

“안드레이! 안 돼!”

MG151에 난사 당한 안드레이의 Yak-7은 불덩이로 변해 유유히 추락했다.

Yak-7은 Yak-1보다 여러 면에서 발전한 전투기지만, 단점도 없지 않았다.

후방 좌석을 없애고 그 자리에 연료 탱크를 집어넣고, 주익 연료탱크 용적도 증가한 탓에 방호력은 Yak-1보다 떨어지는 편이었다.

여기에 독일 기술자들이 루프트바페를 위해 개발한 기관포용 고폭탄 미넨게쇼스(Minengeschoß)가 만나자 화려한 불꽃놀이로 이어졌다.

예고노프스키에겐 슬픔에 젖을 시간조차 없었다. 이미 동료기들은 거진 다 격추된 후였고, 적들은 수염고래를 물어뜯는 범고래 무리마냥 폭격기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Me262와 Bf109로부터 기관포 공격을 받은 TB-3이 회색 연기를 토하며 대열에서 이탈해 지상을 향해 낙하했다.

폭격기들을 목표지점까지 안전하게 호위한다는 임무는 이미 실패했다. 예고노프스키는 차라리 지금이라도 기수를 돌려 달아날까 고민했다.

그 많던 호위기 중 혼자 살아남은 이상, 저 많고 많은 적기로부터 폭격기들을 지켜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금이라도 도망치면 적어도 그는 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예고노프스키는 도망치지 않았다. 먼저 떠난 부하들과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그는 자신의 임무를 다할 생각이었다.

꼴사납게 도망쳐서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는 것보다 당당하게 싸우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고 싶었다.

예고노프스키는 어릴 적에 아버지가 해준 말을 떠올렸다.

남자란, 진다는 걸 알아도 싸워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였다.

“이야아아아!!!”

예고노프스키는 TB-3를 향해 기관포와 기관총을 동시에 쏘고 있는 Bf109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은 눈앞의 거대한 먹잇감에 정신이 팔려 주변의 경계를 소홀히 하고 있었다.

지금 공격을 가한다면 놈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Yak-7의 기축선상으로부터 20mm 기관포탄이 뿜어져 나오자 Bf109의 조종사는 화들짝 놀라 기체를 급상승시켰다.

하지만 기관포탄 한 발이 꼬리날개에 명중하여 구멍을 냈다.

고작 꼬리날개에 구멍이 난 것으론 적의 비행에 별 타격을 줄 수 없었지만, 예고노프스키는 적 조종사를 당황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놈은 일직선으로 도망치기만 했다.

이대로 기관포를 발사하면 놈을-

“커헉!?”

예고노프스키는 몸에서 격통을 느꼈다. 캐노피가 깨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고개를 숙이자 시뻘건 피로 물들어 가는 자신의 군복을 볼 수 있었다.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도 예고노프스키는 기체를 상승시키려고 조종간을 위로 당겼다.

그런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눈꺼풀도 갑자기 무거워졌다. 바로 직전까지 터질 듯이 뛰던 심장이 서서히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예고노프스키의 야크기가 거진 대지의 표면에 닿자 샛노란 화염이 그의 전신을 뒤덮었다.

***

-어이, 하르트만. 살아있냐?

“구,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편대장님!”

스무 살의 젊은 소위, 에리히 하르트만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편대장이 도와줬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하르트만도 그가 격추한 소련 폭격기의 승무원들처럼 골로 갈 뻔했다.

-내가 늘 말하지 않았냐. 늘 주변을 경계하라고. 언제, 어느 방향에서 적이 공격해올지 모르니까.

“죄송합니다!”

-알면 됐어. 지금은 이반들을 격추하는데 주력하도록. 기관총에 맞지 않게 조심하고.

“예, 알겠습니다!”

편대장은 충고를 끝내기 무섭게 TB-3에게 돌진해 기관포를 갈겼다.

물결무늬로 된 두랄루민 외피로 이루어진 길쭉한 동체에 숭숭 뚫린 구멍으로 회색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편대장의 Bf109로부터 집중공격을 당해 TB-3는 끝끝내 불길에 휩싸여 생을 마감했다. 하르트만도 편대장과 동료들을 따라 폭격기 사냥에 동참했다.

전쟁이 끝나는 그 날까지 하르트만은 셀 수 없이 많은 전투에 투입될 것이다.

최후까지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오늘의 기억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전쟁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