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전야 (2) >
로자예프스키와 러시아 파시스트당에는 독일 공산당의 당사를 내줬다. 당원들 먹고 자는 데 쓰라고 활동비도 좀 주고.
단, 로자예프스키에게는 몇 가지 조건을 걸었다. 소련에 대해 선전 활동을 하는 건 좋다.
단, 아직은 소련과 공식적으로 적대하는 사이가 아니니 수위는 알아서 조절해라.
그리고 독일은 공식적으로 인종차별에 반대하므로 반유대주의를 비롯한 모든 인종주의 선전을 엄격히 금지한다.
로자예프스키는 히틀러 못지않은 반유대주의자로, 이 문제 때문에 동료인 본샤츠키와도 자주 다퉜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샤츠키는 로자예프스키의 지독한 반유대주의에 질린 나머지 자신을 따르는 당원들을 이끌고 러시아 파시스트당에서 출당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의외로 로자예프스키는 내가 내건 조건들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우리가 물주가 되어서인지, 자신의 우상인 내가 반유대주의를 배척하니까 나를 따라 하는 것인지 몰라도 로자예프스키는 절대 인종주의 선전이나 발언을 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했다.
볼멘소리 하나 없이 반유대주의 선전 안 하겠다고 맹세하는 로자예프스키의 모습이 다소 의아스러웠지만 나쁜 일은 아니니 넘기기로 했다.
러시아 파시스트당이 독일에서 활동을 시작하자, 독일 각지에 흩어져서 살던 백계 러시아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독일에 정착한 대표적인 반공 파시스트 러시아인이자 나치당원이기도 한 세르게이 타보리츠키와 타보리츠키의 친구 표트르 샤벨스키 보크, 마찬가지로 친나치 인사인 빅토르 라리오노프도 러시아 파시스트당에 합류했다.
로자예프스키 말고도 나를 찾아온 외국 인사는 더 있었다.
수바스 찬드라 보스. 인도의 독립을 위해 추축국과 손을 잡았던 남자.
2차대전이 발발하자 보스는 영국과 전쟁 중인 독일의 힘을 빌려 인도 독립을 이뤄내고자 했지만, 영국이 독일과 조기에 강화하면서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처칠이 집권하고 영독관계가 험악해지면서 그는 다시 활동을 개시했다.
보스는 내게 자신이 조직한 자유 인도 임시정부를 정식 정부로 승인해줄 것과 지원을 요청했다.
그렇게 하면 독일이 다시 영국과 전쟁 상태에 돌입할 경우, 자신이 이끄는 인도 임시정부의 군대가 인도로 잠입해 게릴라전을 벌여 영국의 후방을 어지럽히겠다는 것이었다.
“늙고 탐욕스러운 제국주의자 처칠은 독일과 전쟁을 벌일 생각입니다. 총통께서 허락해주신다면 저는 저를 따르는 동지들과 함께 영국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하겠습니다. 자유를 갈망하는 인도의 국민들도 저희와 함께할 것입니다!”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인도 독립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는 보스에게 나는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소련뿐 아니라 영국과의 전쟁도 염두에 둬야 하는 이상, 보스의 자유 인도 임시정부는 영국에 적잖이 신경이 쓰이는 존재가 될 터.
만약 이들이 인도에 잠입해 게릴라전을 벌인다면, 영국은 인도의 안정을 위해 하나라도 더 많은 사단을 인도에 묶어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않아도 영국군, 특히 육군은 아직도 됭케르크에서 입은 피해를 완전히 회복 못 시켰다고 들었다.
심지어 버마 방면에서 치고 들어오는 일본군까지 상대해야 하니 당분간은 현상유지에 급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자유 인도 임시정부와 임시정부 산하 군대인 자유 인도 군단이 정식으로 창설되었다.
서부 전격전 당시에 국방군의 포로가 된 인도 식민지군 병사 중에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독일에 잔류한 이들과, 독일에 거주하는 인도인 노동자,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모병을 실시한 결과 2천 6백 명이라는 의외로 많은 인원이 모였다.
군단은커녕 사단이라고 부르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숫자지만, 당장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이 350명 정도였는 데다 어차피 이들의 주 임무는 일반 보병으로서의 역할이 아닌, 인도에 잠입하여 게릴라전을 벌이는 것이었으므로 2천 6백이라는 숫자는 결코 작지 않았다.
영국과의 전쟁이 발발하면 자유 인도 군단 장병들은 수송기를 타고 이란과 국경을 접한 인도 서부, 오늘날의 파키스탄 남부에 해당하는 발루치스탄에 강하하여 게릴라전을 펼치는 것이었으므로 이들은 공군 공수부대에서 위탁훈련을 받았다.
2천 6백 명 전원이 수송기 편으로 발루치스탄까지 가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육로로 인도까지 가는 방법도 연구되었다.
국방군에서 낸 방안은 제1파가 수송기 편으로 발루치스탄에 강하한 뒤 인도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2파가 터키, 이란을 거쳐 인도로 잠입하는 것이었다.
국경 방비가 삼엄할 경우 아프가니스탄을 거치는 방법도 고려되었다.
마지막 인사는 프랭크 라이언.
아일랜드 독립운동가이자, 현직 IRA 대원.
라이언은 여러모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일선에서 영국군과 싸워 그토록 원하던 독립을 쟁취해냈지만, 북아일랜드 문제로 이전의 동지들과 갈라져 싸우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 되었다.
1932년 3월, 감옥에서 출소한 그는 다시 IRA에 들어갔다가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자 공화파 소속으로 참전했다.
최전선에서 싸우던 그는 프랑코를 돕기 위해 스페인에 파병된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되어 국민파에게 인도되었고, 공화파 편에서 싸운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후 부르고스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라이언을 눈여겨본 셸렌베르크는 라이언을 독일로 데려오자고 하이드리히에게 제안했고, 하이드리히는 이를 힘러에게 보고, 승인받아 프랑코에게 라이언의 석방을 요청했다.
석방된 라이언은 스페인-프랑스 국경에서 아프베어가 준비한 차량을 타고 독일로 왔다.
그는 현재 베를린의 아파트에서 살며,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영어와 아일랜드어를 가르치고 동시에 IRA 대원들과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었다.
처칠의 자작극 소식에 분노한 건 독일만이 아니었다.
반독여론을 고취시키려는 처칠의 농간에 멋대로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IRA는 분노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북아일랜드에서 영국을 몰아낼 무력이 부족했다.
IRA는 무력의 부족을 해결할 방법으로 독일을 선택했다.
IRA는 독일의 힘을 빌려 부족한 무력을 보충하고, 독일은 영국을 세상 그 누구보다 증오하는 IRA를 이용해 영국의 후방을 들쑤시고 다닌다.
서로 이해관계가 일치한 영국에 대항해 손을 잡기로 했다.
스페인 공화파 편에서 싸운 만큼 그 자신도 공화주의자였던 라이언은 독일 당국과 그렇게까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공화주의자인 그와 파시스트 독재자인 나는 완벽한 대척점에 서 있었고, 영국이라는 공통의 적만 아니었어도 서로 손을 잡기는커녕 대립할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하지만 독일의 호의에 기대어 살고 있으며, 자신이 몸담은 IRA가 독일과 손을 잡기로 결정한 이상 그는 전적으로 협력할 의사를 밝혔다.
라이언과의 대화는 앞서 이루어졌던 로자예프스키, 보스와 다르게 훨씬 짧고 무미건조했다.
내가 IRA가 독일에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라이언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영국 놈들을 죽일 총알과 폭탄입니다.”
“겨우 그거면 되겠소?”
“영국 놈들을 죽이는데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라이언의 태도가 내 신경을 거스를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인지, 동석한 IRA 간부가 나섰다.
“독일에서 IRA 대원들의 훈련과 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내 힘이 닿는 곳까지 그대들을 지원할 터이니.”
환하게 웃는 IRA 간부들과 달리 라이언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 변화는 입꼬리가 아주 슬쩍 올라간 게 다였다.
그러나 그도 고개를 숙여 감사하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협력을 제안해온 것은 IRA뿐만이 아니었다. IRA와 껄끄러운 관계였던 아일랜드도 우리와 접촉을 시도했다.
이유인즉, 처칠이 아일랜드를 독일의 침략 야욕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며 아일랜드의 모든 항구와 비행장, 군사 기지를 영국군이 이용할 수 있도록 무상으로 대여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아일랜드 정부는 속이 빤히 보이는 처칠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했다.
선의 같지도 않은 선의가 거부당하자 처칠은 곧바로 이빨을 드러냈다.
처칠은 아일랜드가 독일과 손잡고 영국을 협공할 우려가 있다고 공공연한 우려를 표하며, 아일랜드가 헛된 야욕을 부리질 않길 바란다고 연설했다.
심지어 여차하면 아일랜드를 무력으로 점령해 일시적으로 영국의 지배를 받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안 그래도 반영 감정이 차고 넘쳤던 아일랜드인들은 처칠의 협박에 격분하며 반영 시위를 벌이고 영국 대사관을 공격했고, 아일랜드 정부는 명목상이긴 하나 엄연히 아일랜드 법에 남아있던 영국 국왕의 국가원수 지위를 삭제시키는 것으로 처칠의 도발에 응수했다.
자연스레 두 나라 사이의 감정의 골을 깊어졌고, 아일랜드 대통령 에이먼 데 발레라는 중립을 유지하면서도 뒤쪽으로는 독일과 손을 잡기로 했다.
이미 아일랜드는 자국 군대를 무장시키기 위해 독일로부터 무기를 사들이고 군사고문단을 초빙했지만, 여전히 아일랜드군의 전체 군사력은 영국군 3개 보병사단에서 정리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아일랜드 단독으로 영국에 맞서기란 불가능하니, 고로 독일, IRA와 손을 잡는 게 훨씬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
1942년 5월 19일
소련 모스크바 크렘린 궁전
예정된 개전 날짜가 다가오면서 스탈린이 밤을 지새우는 날이 잦아졌다.
혁명가이자 독재자이기 전에 행정처리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레닌의 호평을 받았던 스탈린은 사소한 업무 하나조차도 허투루 넘기는 일이 없었다.
꼭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하고 검토를 거쳐야만 직성이 풀렸다.
티모셴코와 주코프도 자신들의 위치에서 주어진 임무를 다하고 있었다.
주코프는 직접 두 발로 현장을 뛰어다니며 병력과 물자의 이동현황을 체크하고,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거나 그의 지시에 토를 다는 장교들에겐 어김없이 주코프의 거친 욕설과 주먹,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능력 면에서는 도무지 흠잡을 구석이 없다고 평가받는 그였지만, 인격적인 측면에서는 소련에서 따라올 자가 드물 정도로 주코프는 거칠고 과격하기 짝이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부하들을 대할 때 늘 입에 욕을 달고 살았고, 구타도 서슴지 않았다.
아무리 그와 오랜 시간을 보내 안면이 있는 사이라고 해도 한 번 주코프의 심기를 거슬렸다가는 코뼈가 부러지거나 정강이를 걷어차일 각오를 해야만 했다.
그나마 구타에서 끝나면 운이 좋은 편이었고, 자신의 명령에 반한다고 판단된 장교들은 군사재판에 회부시켜 강등시키거나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고립시켰다.
베리야의 보고에 따르면 주코프는 열차 시간표를 잘못 보고 연대의 이동을 이틀이나 지체시킨 중위를 총으로 쏴 죽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그에게 구타당해 병원으로 실려 간 장교들만 5명이나 되었다.
베리야는 주코프의 폭력성을 이유로 들며 그가 붉은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베리야의 보고를 묵살했다.
베리야의 보고를 믿을 수 없어서 그런 게 아니다.
독일 스파이 색출 건으로 신뢰가 깎이긴 했지만, 아직 그를 불신할 정도는 아니었다.
독일과의 전쟁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주코프를 제거하거나 한직으로 좌천시키면 그를 대체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쿨리크? 용맹하고 믿음직스러운 자이긴 하나 스탈린이 보기에도 쿨리크의 전체적인 능력은 주코프보다 떨어졌다.
샤포시니코프는 건강이 크게 악화해 오늘내일하는 상태였고, 보로실로프는 믿음직스러우나 능력이 없었다. 부됸니는 쿨리크와 비슷했다.
결국 적임자는 주코프뿐. 게다가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자신과 친족의 목숨이 인질로 잡힌 상태라 그 누구보다도 절박한 상태였다.
따라서 스탈린은 주코프를 현재의 직위에 계속 유임시켰다.
베리야 다음은 몰로토프의 보고서였다. 영국으로 가서 이든과 회담을 가진 몰로토프는 소련으로 돌아온 뒤에는 미국 대사와도 회담을 가졌다.
주소 미국 대사 윌리엄 해리슨 스탠들리는 몰로토프에게 중소 국경봉쇄를 해제해달라는 FDR 정부의 뜻을 전달했다.
“몰로토프를 데려오게.”
10분 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몰로토프가 스탈린 앞에 대령했다. 몰로토프는 스탈린이 자신을 질책하기 위해서 부른 게 아니라 질문을 하기 위해 불렀다는 것을 알고 안도했다.
“왜 미국이 우리에게 국경봉쇄를 풀라고 한 건가?”
몰로토프는 그 이유를 보고서에 적었지만, 스탈린은 일부러 읽지 않은 척하며 몰로토프에게 질문했다.
그는 부하들을 자주 골리기 위해 일부러 보고서에 적힌 내용을 자주 물었다.
보고서에 적힌 것과 같은 내용을 말하면 그냥 넘어갔지만, 조금이라도 다른 내용이 있으면 자신이 쓰고도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냐는 가차 없이 질책과 모욕을 퍼부었다.
이미 스탈린의 이러한 수법에 호되게 당한 적 있는 몰로토프는 거의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일본과 전쟁 중인 중국에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서입니다, 서기장 동지. 미국은 대일전선에 중요한 국가인 중국이 물자수급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 상태가 지속되면 중국이 일본에 굴복할지 모른다고 보고 있습니다. 중국이 무너지면 중국 대륙에 있는 일본군은 동남아와 남태평양에 재배치될 것이고 이는 연합군에게 큰 희생을 강요하게 할 것입니다. 때문에 미국은 중국이 무너지지 않도록 충분한 물자를 공급해야 한다며-”
“잘 들었소. 하긴 중국이 일본에 굴복하면 우리에게도 마냥 좋은 일은 아니지. 그래도 미국이 우리에게 그냥 국경봉쇄를 풀라고 하지는 않았을 텐데?”
스탈린은 귀찮은 구색을 팍팍 내며 몰로토프의 말을 잘랐다. 그러나 몰로토프는 어떤 내색도 하지 않고 스탈린의 다음 질문에 대답했다.
“우리가 대중 지원에 협력한다면 그 대가로 미국은 우리에게도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하겠다고 했습니다.”
“호오?”
식량은 몰라도 의약품은 소련에 부족했다. 미국과 유럽에 비해 의학 기술이 낙후된 소련은 자국에서 구할 수 없는 각종 의약품을 독일에서 수입해오고 있었지만, 최근 독일과의 관계가 얼어붙으면서 의약품 수급에도 제동이 걸렸다.
그러잖아도 전쟁이 터지면 의약품 소모량이 급증할 텐데, 미국이 이를 메꿔준다면 더 바랄 것도 없었다.
“괜찮은 조건이군. 국경을 다시 열고 철로를 이용하게 해주는 대가로 우리는 식량과 의약품을 제공받는다. 역시 자본주의자들은 거래하는 방법을 잘 알아.”
미국은 소련에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했다. 일본과 미국은 전쟁 중이긴 하나 소련은 중립을 선언한 상태이기에 소련 선박이 중국에 전달할 물자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시베리아 횡단 철로를 통해 중국에 물자를 전달하면 일본은 전혀 모를 것이다.
오히려 알아챈다고 한들, 이미 미국과 전쟁 중인 마당에 굳이 소련을 공격해 적을 더 늘리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소련을 공격한다면 미국은 일본과 함께 싸울 동맹국이 하나 더 느는 셈이니 결코 손해가 아니다.
“당장 미국 대사에게 달려가 전하시오. 귀국의 요청을 받아들이겠다고.”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