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전야 (1) >
1942년 5월 13일
영국 런던 외무성 청사
“런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몰로토프 장관님.”
외무성 청사에 들어서는 소련 사절단 대표 몰로토프에게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은 손을 먼저 건네 악수를 청했다.
“이 먼 곳까지 오시느라 대단히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허허. 간만에 느긋하게 여행도 할 수 있어서 무척 편안했습니다.”
독일 문제로 심기가 불편한 스탈린의 얼굴에 화색을 돌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미국과 영국이었다.
최근 소련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를 습득한 영국은 바로 소련과 접촉을 시도했다.
서로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 영국의 접촉에 소련은 즉각 반응했다.
영국 정부로부터 극비 메시지를 받은 스탈린은 지체없이 몰로토프를 영국으로 보냈다.
독일과의 전쟁을 앞둔 마당에 영국을 동맹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분명 전쟁에 유리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처칠 총리께서는....?”
“총리 각하께선 오늘 군수공장 노동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리버풀로 가셨습니다.”
“그렇습니까? 이거 아쉽군요.”
이든의 대답에 몰로토프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심 불쾌함을 느꼈다.
먼저 만나자고 제안한 당사자가 정작 이 자리에 없다니, 이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어쩌면 골수 반공주의자로 소문난 처칠이 협상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일부러 연극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연하게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떠넘기고, 상대가 마치 죽을죄라도 지은 것처럼 윽박지르고 모함하는데 능한 처칠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대신 총리께선 제게 귀국과 협상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일임하셨습니다.”
몰로토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라도 챈 것인지 이든이 덧붙였다.
처칠은 비록 이 자리에 없지만, 이든에겐 처칠을 대신해 몰로토프와 합의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4년 전 프랑스와 함께한 회담에서 체임벌린 내각이 저지른 실수를 답습하지 않으려는 처칠이 내린 결정이거니와, 이든이 처칠에게 얼마나 신뢰받고 있는지에 대한 방증이기도 했다.
회담은 곧바로 시작되었다. 영국과 소련, 두 나라 모두 독일이라는 커다란 문제를 두고 근심이 많은 상태이므로 단 1초라도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솔직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귀국은 정말로 독일과 전쟁을 벌일 예정입니까?”
이든의 물음에 몰로토프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자신이 여기서 무슨 대답을 한들, 반독파인 처칠이 독일과의 회담에서 자신이 한 발언들을 모두 일러바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몰로토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기는 언제입니까?”
이것까지 알려줘야 하나? 몰로토프는 다시 한번 고민했다.
이미 소련이 독일을 공격할 계획이란 사실을 영국에게 알린 이상, 다른 것들을 숨겨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서기장 동지께서는 6월이 되기 전에 독일을 공격하실 계획이십니다.”
“6월이 되기 전이라.... 그럼 대략 2주 정도가 남았군요.”
“뭐, 대충 그 정도 남았지요. 그래서, 영국은 어떻게 할 계획입니까?”
이번에는 이든이 대답을 망설였다. 몰로토프는 이든이 일부러 대답을 늦춘다는 인상을 받았다.
“대영제국은 귀국이 독일과 전쟁 상태에 돌입하면, 독일의 후방을 공격할 계획입니다.”
이든의 말에 몰로토프는 저도 모르게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게 사실입니까, 장관?”
물자와 기술 지원만 생각하던 몰로토프는 이든의 입에서 참전 얘기가 나오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가뜩이나 소련 단독으로 독일을 상대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그도 밤잠을 설칠 때가 많았는데, 예상치 못한 원군이 나타난 것이다.
그 원군이 반공주의자 처칠이 총리로 있는 영국이란 것도 예상 밖이었고.
“총리께선 히틀러의 독일이 유럽과 세계에 더 큰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고 확신하십니다. 독일을 무찌르기 위해선 두 나라가 서로 힘을 합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만, 영국 국민들이 독일과의 전쟁을 과연 받아들일까요? 소련과 영국은 다르지 않습니까?”
영국의 참전에 몰로토프는 진심으로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게 과연 말처럼 가능할지 의구심을 품었다.
스탈린의 말이 곧 법인 소련에서는 인민들의 의견 따윈 중요치 않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인 영국은 아니다. 타당한 이유 없이 독일과 전쟁을 벌인다면 영국 국민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
특히 일본과 전쟁 중인 지금은 더더욱. 몰로토프는 처칠이 무슨 수로 대독전에 끼어들지 궁금했다.
“그야 그렇지요. 하지만 이미 플리머스 사건으로 우리 국민도 독일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국민이 대독전에 찬성하진 않겠지만, 독일이 영국의 평화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국민이 인지하는 이상, 참전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장관, 내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무엇인지요?”
“플리머스 사건 말입니다. 정말로 독일이 관여했습니까?”
몰로토프는 이든이 진실을 말해주지는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이든은 그와 선을 그었다.
“물론입니다. 설마 저희가 조작이라도 했겠습니까?”
비록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서 서로 협력하는 입장이 되었지만, 자국의 기밀까지 공유할 사이는 아니었다. 이제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쭉.
이든의 단호한 대답에 몰로토프는 입맛만 다시며 물러섰다. 그러나 정치판에서 구를 대로 구른 그가 보기에도 플리머스 사건에는 여러모로 미심쩍은 구석이 많았다.
소련과 대립 중인 독일이 뭐가 아쉬워서 잠자코 있는 영국을 건드릴까? 괜히 영국을 건드려서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알겠습니다. 그럼 서로 상대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부터 한 번 의논해봅시다.”
***
1942년 5월 16일
독일 베를린 신 총통관저
소련에 이어 영국까지.
온 세계가 독일 하나만 노리고 달려드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군.
정말로 신이 있다면 억까 좀 그만하라고 빌고 싶다, 진짜.
그래도 요 며칠 동안 매일같이 나쁜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나쁜 소식이 더 많긴 했지만).
Me264의 시제기가 벌써 완성되어 실험에 들어갔으며, 도르니에 사가 개발한 Do335도 양산 및 배치가 시작되었다.
Hs123, Ju87, Me410 같은 지상공격기들이 사용할 60mm 로켓포와 탄넨자펜(Tannenzapfen, 솔방울) 대전차 항공폭탄도 최종양산이 결정되었다.
구데리안이 개발을 맡은 티거 II와 야크트판터는 어느새 프로토타입 제작에 들어갔다.
별 잡다한 바리에이션 없이 진작에 생산체계를 효율화해서 그런지 전례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프랑스가 크릭스마리네에 넘겨주기로 한 조프르급 항공모함도 완성되어 정식으로 크릭스마리네에게 인계되었다.
새 항모의 이름은 베저(Weser). 실제 나치 독일이 만들고자 했던 항공모함에 붙었던 이름이다.
그라프 체펠린처럼 이놈도 종전까지 완성 못 하고 전후 소련에 배상함으로 넘겨졌다가 자침으로 최후를 맞이했었지.
이로써 독일 해군이 보유 중인 항모는 2대로 늘었다.
달마다 항공모함을 찍어냈던 미국에 비하면 참 초라한 개수지만 전쟁 시작부터 종전까지 항모를 단 1척도 굴리지 못했던 역사와 비교하면 훨씬 양호한 편이다.
에우로파(Europa)도 내년 봄에는 완성된다고 하고.
또 좋은 소식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애매한데, 독일을 돕겠다고 자처하는 이들이 내게 면담을 요청해왔다.
그중 한 명이 콘스탄틴 로자예프스키라는 남자로, 러시아 파시스트당의 수장이었다.
그가 나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말을 크라우제한테서 들었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대로라면 로자예프스키의 러시아 파시스트당은 지금 만주국에 있었어야 하니까.
만주국에 있어야 할 남자가 독일에 나타났다니, 이건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굳이 그런 자를 만날 필요가 있겠습니까? 스스로를 러시아 파시스트당의 수장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지지자도 수백 명 안팎에 거처도 웬 여관에서 지내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만.”
크라우제의 말에 따르면 로자예프스키는 베를린에 사는 백계 러시아인의 여관에서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
여관에서 살며 지지자들이 보내주는 성금으로 입에 풀칠하고 다니는 약소정당의 당수 따위를, 독일 총통인 내가 만날 이유가 있냐고 크라우제는 진지하게 의문을 표했다.
“꼭 만날 필요가 없다는 말은, 반대로 꼭 만나지 말아야 할 필요도 없다는 말 아닌가. 특히 소련이 심상치 않은데, 소련에 적대적인 러시아인이라면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지. 그를 데려오게.”
35세의 청년인 로자예프스키는 나와 거의 20살 가까이 차이가 나지만 얼굴 하관을 뒤덮은 수염 때문에 동년배처럼 보였다.
그는 이탈리아 검은 셔츠단을 모방한 러시아 파시스트당의 검은 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군데군데 찢어지고 울이 터져 있는 게 러시아 파시스트당의 형편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당수인 로자예프스키도 백계 러시아인이 운영하는 여관에서 사는 중이라고 하니, 지지자들의 삶은 어떤 수준일지 안 봐도 뻔했다.
“총통 각하를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나도 만나서 반갑소.”
내가 손을 내밀자 로자예프스키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로자예프스키 선생? 만주에서 독일까지는 어떻게 오셨소?”
내가 한 말을 통역관이 러시아어로 통역해서 그에게 들려주자, 로자예프스키는 흥분해서 뭐라고 막 얘기했다.
통역관이 말을 하는 중에도 로자예프스키의 말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본래 로자예프스키의 러시아 파시스트당은 만주국을 지배하는 일본과 괜찮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독관계가 악화되면서, 독일을 추종하는 러시아 파시스트당을 대하는 일본의 태도도 서서히 달라졌다.
일본은 독일 외교관들을 추방하면서 동시에 만주국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파시스트당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해산시켰다.
여기서부터 러시아 파시스트당은 3개의 분파로 나뉘었다.
공산주의 소련에 대항할 자신들을 일본이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으니 당분간은 일본의 지시에 따르자는 친일파와 백계 러시아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미국으로 이주하자는 친미파, 근본 파시스트 국가인 독일로 가서 독일의 지원을 받자는 친독파로.
미국에서 살다가 만주로 넘어온 아나스타시 본샤츠키와 백군 장군이었던 블라디미르 키슬리친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고, 친독파였던 로자예프스키는 자신을 추종하는 지지자들을 이끌고 독일로 갈 계획을 세웠다.
로자예프스키의 계획은 필리핀-싱가포르-인도-이집트를 거쳐 독일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필리핀에 도착한 로자예프스키 일행이 싱가포르로 갈 배편을 기다리는 중에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로자예프스키는 계획을 바꿔 우선 호주로 떠났다.
필리핀을 떠나는 피난민들을 태운 수송선을 타고 겨우 호주에 도착한 반공 러시아인들은 다시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갔다.
미국을 거쳐 배를 타고 독일로 간다는 게 로자예프스키가 세운 계획이었지만 미 정부에서 그들을 억류하면서 얘기가 달라졌다.
미국이 이들 러시아 파시스트당 당원들이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에서 온 것에 주목했다.
일본은 미국의 적국인데, 일본의 괴뢰국에서 온, 한때 일본의 지원을 받았던 자들이 미국에서 무슨 짓을 벌일 줄 누가 알겠느냐?
이런 이유로 로자예프스키는 3개월가량 미 본토에 억류되어 있다가 미국에 거주하던 백계 러시아인들의 도움으로 겨우 억류상태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미 정부는 이들의 목적지가 독일이라는 것을 알곤 유럽행 선박을 타는 것을 금지했다.
하는 수 없이 파시스트 당원들은 미국과 국경을 접한 멕시코로 발길을 돌렸고, 멕시코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배를 타고 유럽에 도착했다.
겨우 독일에 도착했지만, 독일로 오는 과정에서 수중에 있던 거의 모든 돈을 소진해버리는 바람에 이들은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당장 로자예프스키 본인부터 생활비를 벌기 위해 법률 자문 일을 하며 지냈고(로자예프스키의 본래 직업은 변호사다), 그의 지지자들은 막노동하며 각자의 생활비와 당비를 충당했다.
무슨 로빈슨 크루소도 아니고. 가만 보니 로자예프스키 이 친구 외모부터가 어째 로빈슨 크루소 느낌이 나는 것 같기도 하군.
“대단히 고생했구만. 아무튼 나를 만나고자 한 이유가 무엇이오?”
“총통 각하께 러시아 파시스트당을 지원을 부탁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로자예프스키는 자신과 러시아 파시스트당을 독일이 지원해준다면,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독일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돕겠노라고 내게 말했다.
“독일군이 볼셰비키들과 싸우는 동안 저와 러시아 파시스트당은 러시아 국민들을 선동해 볼셰비키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볼셰비키들은 사면초가에 빠져 자멸할 것이고, 독일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은?”
“당연히 러시아에 파시스트 국가를 세우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공산주의를 버리고 반공과 파시즘을 받아들인 러시아는 단언컨대 독일의 가장 강력한 우방이 될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켄크로이츠 깃발이 브르타뉴에서 우랄산맥을 지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휘날리는 광경을! 강력한 군사력과 뛰어난 기술력을 갖춘 독일이 발트해에서 베링 해협에 이르는 광활한 러시아와 힘을 합친다면, 세계 어느 나라도 감히 대적하지 못할 것입니다!”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휘날리는 하켄크로이츠기라.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웅장해지는군.
현실에서 일어나는 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만 빼면 말이다.
1년 전의 나였다면 로자예프스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렀을 것이다.
크비슬링에게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을 이 친구에게 했을지도 모른다.
허나 언제 소련과의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지금은, 로자예프스키의 말을 마냥 헛소리로 치부할 수 없었다.
나도 안다. 로자예프스키의 계획이 현실성 낮다는 거.
하지만 소련과 전쟁이 발발할 경우, 로자예프스키의 러시아 파시스트당이 독일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란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로자예프스키의 주장대로 러시아인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켜 소련을 궁지로 몰지는 못하더라도 통역이나 선전, 후방침투 및 교란 같은 임무에는 나름 유용하게 쓰이지 않을까 싶었다.
실제 로자예프스키도 저런 생각으로 내게 말한 것일 테고.
“내 감상을 솔직하게 말하겠소. 나는 당신의 구상은 현실이 될 거라고 믿지 않소. 정말로 러시아인들에게 반란을 일으킬 용기가 있었다면 진작에 일으켰겠지. 아니, 그전에 러시아가 공산화되지도 않았을 테고.”
내 말을 들은 로자예프스키는 당황하여 뭐라 말하려 했다. 하지만 내가 손을 들어 발언을 제지했다.
“허나 당신의 구상보다는 당신의 용기가 더 마음에 드는군. 그래, 아무리 현실성 없는 계획이어도 남자라면 이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그래야 큰일을 할 수 있지 않겠소.”
당황하던 로자예프스키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그 말씀은.... 제가 총통께 드린 요청의 수락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그렇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