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틀러가 되었다-123화 (123/150)

< 치욕의 날 (3) >

1941년 12월 14일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빌어먹을. 독일 놈들이 한 말이 맞았을 줄이야....

루스벨트는 지난날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막심했다.

이미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단 사실을 알면서도,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돌아가고픈 심정이었다.

진주만 공습 전, 독일은 곧 일본이 기습공격을 감행해올 것이므로 주의하라고 미 정부에 귀띔했다.

히틀러는 한술 더 떠 필리핀과 괌, 웨이크 섬 같은 태평양의 미국령 섬들뿐만 아니라 하와이에서도 동시다발적인 공격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독일의 경고를 흘려 넘겼다.

물론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미일 사이에 전쟁이 터지더라도 내년 봄쯤에서야 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전쟁이 이토록 일찍, 그것도 협상이 파토나기 무섭게 일본이 기습해오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는가!

....아니지. 히틀러는 예측했지.

지금쯤 기고만장해져 있을 히틀러의 모습을 생각하니 루스벨트는 부아가 치밀었다.

망할 독일 놈들은 분명 미일 간의 전쟁을 재밌는 구경거리 정도로나 여기며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있을 것이다.

퓌러쿠헨인지 뭔가 하는 괴상한 케이크를 먹으면서.

진주만에서 미 해군은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진주만에 정박한 8척의 전함 중 네바다, 오클라호마, 캘리포니아가 격침당했고 5척 중 웨스트버지니아와 애리조나는 중파 이상, 펜실베니아, 테네시, 메릴랜드는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

피해가 가장 적은 메릴랜드는 3주 안에 현역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고, 테네시와 펜실베니아 역시 3개월이면 수리를 마치고 복귀가 가능하다고 미 해군 태평양 함대의 신임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는 보고서에 적었다.

그리고 불행 중 다행으로 기습 당시 진주만에는 항공모함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미 태평양함대가 보유한 항공모함들 전부 제각기 다른 곳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었기에 일본군의 기습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다.

그래도 해군의 최중요 전력인 전함들이 박살 났으니 미 해군은 매우 곤란한 상황 처하고 말았다.

당분간은 전함 없이 항공모함으로만 일본 해군과 싸워야 하는데.... 가능할까? 루스벨트는 걱정이 앞섰다.

설상가상으로 일본군의 기습에 미군과 영국군은 연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괌은 함락되었고 홍콩과 웨이크는 함락 직전이며, 필리핀에도 일본군이 상륙했다.

필리핀 주둔 미군의 교리에 따르면 개전과 동시에 B-17 편대가 출격해 대만의 일본군 기지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이었지만, 진주만 공습 당일 날 일본군의 기습으로 항공기 대부분을 잃고 말았다.

믿었던 영국 동양함대조차 일본군에게 치욕적인 대패를 당했다.

귀중한 전함 2척이 이렇다 할 활약도 못 하고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것이다.

남중국해의 제해권은 일본군에게 완전히 장악되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역시 일본군의 침략을 받았다.

유일하게 긍정적인 것은 미합중국 국민의 항전의식이 하늘을 찌를 기세라는 것.

이제 막 전쟁이 시작되었기는 하나 보통 전황이 최악이면 사기는 바닥을 치기 마련인데, 날마다 이어지는 패전 소식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모병소에 늘어선 줄은 길어지고 있었다.

“쪽발이들에게 죽음을! 피의 복수를!”

미국 전역의 수백만 청년들이 몰려들어 모병소는 만원이었고,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 혹은 너무 많다는 이유로 입대를 거절당한 사람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쪽발이들을 죽이는데 겨우 나이 따위가 무슨 대수라고!

신검에서 탈락한 청년이 전쟁에 참전할 수 없다는 현실에 절망하여 자살하는 사건까지 발생할 정도로 미국인들의 전쟁을 향한 열기는 뜨거웠다.

심지어 일부 국회의원들까지 입대하겠노라고 육군과 해군의 모병소를 찾아갈 정도였다.

“나도 싸울 수 있소! 비록 관절이 삐걱거리지만, 총을 들고 뛰는 데 문제없소이다!”

“나도요. 나는 1차대전에도 참전한 바 있소. 일개 이등병으로라도 좋으니 입대시켜주시오.”

모병관들은 자신들도 입대시켜 달라고 조르는 국회의원들을 달래기 위해 식은땀을 흘러야 했다.

“육군은 병사로서의 의원님보다, 의사당에서 육군을 위한 예산 증액에 동의하시는 의원님이 더 필요합니다.”

“진정으로 해군을 위하신다면 입대 대신 의사당으로 돌아가 해군을 위한 예산을 배정해 주십시오.”

이 같은 국민의 항전 의지로 보건대, 미국의 승리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승리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소요되고, 몇만 명의 미국인들이 목숨을 잃을지가 문제지.

루스벨트가 우려하는 것은 또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독일.

미국과 일본이 태평양에서 맞붙는 동안, 히틀러가 무슨 장난을 저지를지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루스벨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가뜩이나 영국도 일본의 공격을 받았으니, 인도와 동남아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보낼 것이고, 자연스레 본토의 방비는 약해질 터.

그 순간을 노려서 독일이 기습적으로 쳐들어온다면, 영국은 한 달도 버티지 못하고 함락될 것이다.

루스벨트는 핼리팩스 총리와의 통화에서 독일에 대한 우려를 표했지만, 핼리팩스는 걱정도 안 되는 듯 루스벨트에게 지나친 걱정이라고 말했다.

-히틀러는 이미 중립을 선언했고, 독일군이 움직일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총리, 히틀러는 속을 알 수 없는 자입니다. 그자가 무슨 수로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차례차례 집어삼켰는지 총리도 알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여도, 언제 이빨을 드러낼-”

-대통령. 독일을 걱정하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지금 영국과 미국의 적은 일본입니다. 인도가 위험해 처했는데, 중립을 선언한 독일을 걱정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핼리팩스에게 독일을 경계하라는 충고를 전하려고 했던 루스벨트는 역으로 핀잔만 들었다.

후, 제기랄. 루스벨트는 짜증이 났지만, 일본에 맞서 함께 싸울 동맹국과 벌써부터 잡음을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참고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간 독일이 미국에 보낸 러브콜을 생각하면, 핼리팩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실제로도 맞았고). 그러나 루스벨트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는 진주만 공습 전 독일이 미국에 건넨 정보가 독일의 역정보라고 생각했고, 지금은 독일이 일본과 미국이 서로 싸우는 사이 다른 전쟁을 준비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작금의 유럽 지도를 보면 루스벨트가 과도할 정도로 독일을 경계하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

지도를 보라! 독일의 동맹국과 독일에 복속된 나라들이 몇 개나 되는지. 그리고 영국과 소련을 따르는 국가가 얼마나 있는지.

영국의 전통적인 동맹 포르투갈조차 자국의 항구를 독일에 임대하고, 아조레스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를 독일 해군과 공군의 전초 기지로 만드는 데 동의했다.

프랑스도 아프리카와 인도양, 태평양의 식민지들에 독일이 군사기지를 설치하는 것을 인정했다.

조만간 대서양을 넘어 인도양과 태평양을 휘젓고 다니는 독일 해군의 구축함과 공군의 전투기들을 보게 될지 모른다.

당장은 발등에 떨어진 불-일본-부터 끄는 게 맞다.

그러나 언제 울타리를 넘어 사람들을 해칠지 모르는 맹수-독일-을 목줄도 채우지 않고 놔두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핼리팩스가 하는 짓거리가 바로 그랬다. 독일이라는 맹수가 울타리 안에만 있다고 별일 없을 거라며 안도하는 꼴이라니.

차라리 처칠이 나았다.

물론 그도 자신의 책임을 체임벌린에게 뒤집어씌우려다가 망신을 당하는 등 제대로 된 인물이라고 하기에는 여러모로 흠이 많은 사람이나, 적어도 히틀러의 위험성 하나만큼은 명확하게 꿰뚫어 봤다.

만약 핼리팩스가 아니라 처칠이 총리가 되었더라면 유럽의 지도는 지금과 달랐을지 모른다.

최소한 그라면 독일과 강화 대신 항전을 선택했겠지. 그랬다면 미국도 유럽전쟁에 개입할 명분이 있었을 테고.

그러나 영국이 독일과 강화하여 전쟁이 끝나버린 지금은, 히틀러의 독일을 박살 낼 명분이 없었다. 명분이.

“각하, 회의 시작 5분 전입니다.”

“알겠네. 지금 가지.”

***

1941년 12월 15일

영국 런던 전쟁성

한심하기는. 자기 집 앞마당에 불이 났는데 나타나지도 않은 강도를 걱정하는 꼴이라니.

핼리팩스는 어제 루스벨트가 하는 말을 듣고 기가 찼다.

당장 일본과 싸우는데 전력을 쏟아부어도 모자랄 판에 중립을 선언한 독일을 더 신경 쓰라니.

물론 독일이 영국의 안전에 대단히 위협적인 존재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로 독일은 전쟁을 일으킬 기미를 보이긴커녕 경제회복에만 전념하는 중이다.

히틀러가 정말로 다른 전쟁을 계획 중이라면, 포로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낸 것과 사단들을 해체하고 병사들을 제대시킨 것은 뭐라고 설명할 수 있는가?

핼리팩스가 묻자 루스벨트는 독일의 속임수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루스벨트 외에 군 내부에서도 독일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긴 했다.

하지만 본토 방비를 위해 최소한의 병력은 남겨둬야 한다는 의견이었지 일본보다 독일을 더 신경 써야 한다는 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됭케르크에서 반 토막 난 육군은 한참 본토에서 재건 중이었기에, 당장은 아시아 식민지 주둔군과 식민지인 보조부대로 일본에 맞설 수밖에 없었다.

핼리팩스는 육군의 재건이 끝나는 대로 정예사단들을 인도 방어에 투입하라고 지시했다.

대영제국의 국력과 위상이 인도에서 나오는 만큼 인도만큼은 반드시 사수해야 했다.

“홍콩의 상황은 어떻소?”

“최악입니다. 홍콩 주둔군은 홍콩 섬으로 퇴각했으며 가우롱(구룡) 반도가 일본군에게 완전히 장악되었습니다. 홍콩 총독과 수비대는 결사항전을 결의했지만, 사실상 홍콩의 함락은 기정사실이라 여겨집니다.”

“....그들은 나보다 용감한 사람들일세. 진정으로 대영제국의 명예를 지키려고 하는군.”

일본군과 악전고투 중일 병사들과 시민들을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그들은 일본군의 포격과 공습, 물자 부족으로 크나큰 고통을 겪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항복 대신 항전을 선택했다. 대영제국의 명예를 위해서.

한동안 말이 없던 핼리팩스는 말레이반도의 전황을 물었다.

당연하지만 말레이반도의 전황 역시 최악이었다.

동양함대의 궤멸로 제해권은 완전히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으며 태국을 통과한 일본군은 영국군 수비대를 사정없이 몰아붙이며 전진을 거듭했다.

말레이 주둔 영국군은 훈련도 제대로 못 받고, 장비도 형편없는 3선급 부대인 반면, 그들을 공격하는 일본군은 중국에서 수년간 실전을 경험한 최정예 부대였다.

사실 영국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독일과의 전쟁이 조기에 끝났으니, 마음만 먹었다면 언제든지 본토의 정예부대를 말레이로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말레이반도의 수비보다 됭케르크에서 박살이 난 육군을 재건하는 게 급선무라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도 육군의 재건이 중요하기도 했고, 언제 독일이 강화조약을 깨고 도버해협을 건너올지 모른다는 불안도 있었기에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라고 볼 수 없지만, 결과만 놓고 본다면 완벽한 자충수가 되었다.

전차 등의 중장비도 마찬가지. 정글에서는 전차의 기동이 힘드니, 굳이 없어도 될 것이라는 판단한 말레이 주둔 영국군은 전차를 앞세운 일본군의 공격에 허를 찔렀다.

그래도 독일이 중립을 선언한 이상, 지금이라도 정예부대를 보낼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핼리팩스는 생각했다.

본토의 정예사단들이 도착할 때까지 말레이 주둔군이 버텨줄지는 의문이지만.

일본 항공대가 보유한 전투기의 성능도 회의의 중요한 안건이었다.

말레이 주둔군이 보유한 항공기는 미제 F2A 버팔로로 1941년 시점에서는 구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들이 상대해야 할 일본군의 전투기는 일본 육군 항공대의 1식 전투기 하야부사였다.

“아군의 버팔로는 일본군의 전투기를 상대로 완전히 무력합니다. 첫 교전에서 아군은 12대의 버팔로를 잃었는데, 일본군의 피해는 한 대도 전무했다고 합니다.”

“독일 놈들의 전투기만 괴물인 줄 알았는데, 일본 놈들도 괴물이었다니....”

핼리팩스는 고개를 숙였다. 천하의 대영제국이 해군과 육군에 이어 공군까지 일본군에게 패배했다.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었다.

“하루빨리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를 보내야겠군.”

“또 하나, 전차도 필요합니다.”

육군 중장 한 명이 손을 들고 발언했다. 그래, 전차도 있었지.

프랑스에서 성능 부족이 밝혀진 마틸다와 생산만 해두고 써먹지 못한 발렌타인을 서둘러 극동으로 보내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독일 전차들을 상대로는 무력한 모습을 보였지만, 일본군의 전차들을 상대로는 다르겠지.

“대영제국의 패배는 프랑스 한 번으로 충분하네. 더 이상의 치욕이 있어선 안 돼.”

결의를 다진 핼리팩스는 고개를 들다가 처칠과 눈이 마주쳤다. 처칠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멋쩍게 웃어 보이곤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해군 소장과 뭔가 의논하기 시작했다.

핼리팩스는 불현듯 이상한 예감이 들었지만, 기분 탓으로 생각하고 흘려 넘겼다.

뭐, 별일이야 있겠나.

***

1941년 12월 19일

독일 베를린 크람프닛츠 제2전차학교

남방작전을 개시한 일본군은 미군과 영국군, 네덜란드군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며 동남아시아를 천천히 뜯어먹고 있었다.

영국은 부랴부랴 본토에 고이 모셔놨던 정예부대들을 극동으로 보내기 시작했고, 미국은 진주만에서 박살 난 전함들을 수리하고, 대규모 징집을 실시해 향후 동남아시아 정글과 남태평양의 자잘한 섬들에서 일본군과 싸울 병사들을 제조 중이다.

소련은 투바의 합병을 선언했다.

역사에서 투바는 1944년 10월에 소련에 합병되었는데 여기서는 약 3년 일찍 합병된 것이다.

독소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관계로 스탈린의 생각에 변화가 생긴 게 아닌가 하고 추측할 뿐,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보니 다들 그런갑다 하고 넘겼다.

-목표 11시 방향. 거리 920. 유탄 장전!

무전기를 통해 훈련 중인 전차병들의 무전을 들을 수 있었다. 총통인 내가 직접 참관을 와서 그런지 다들 목소리에 기합이 들어가 있다.

-장전 완료!

-조준 완료!

-사격!

“호오?”

황색과 녹색, 갈색으로 도색된 판터가 우측으로 기동하면서 주포에 불을 당겼다. 포탄은 표적지에 정확하게 내리꽂혔다.

기동간 사격으로 표적에 명중시키는 건 무척 힘든 일인데. 그것도 1941년의 조준경으로는 더더욱.

누구인지는 몰라도 저 판터의 포수는 매우 숙련된 병사임이 틀림없었다. 단순 훈련만으로 저 정도 실력이 나오긴 힘들 터. 아무래도 실전을 경험한 베테랑이 분명했다.

쌍안경으로 훈련을 관찰하던 구데리안이 말했다.

“다들 실력이 상당한 것 같습니다.”

“그러게나 말이오. 조종이면 조종, 사격이면 사격, 뭐 하나 빠지는 게 없군.”

갈증이 난 나는 콜라를 한 모금 마신 뒤 옆에 서 있던 교장을 돌아보았다.

“평소에 빡세게 굴렸나 보군. 빈틈을 못 찾겠어.”

“감사합니다, 총통 각하.”

전차학교 교장 핫소 폰 만토이펠 소장은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시 훈련장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번에는 티거 전차들의 차례였다.

티거 5대는 공병대가 설치한 부교를 통과해 차례대로 전진했다.

부교를 통과해 전진하던 전차 한 대가 모형 지뢰를 밟고 멈춰 서자, 4대 모두 정지하여 포탑을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돌려 사주경계를 했다.

이윽고 4호 구난전차가 도착해 전차를 견인했고 보병들의 지원 아래 티거들은 언덕을 향해 돌진했다.

정지, 사격. 명중 확인 후 다시 전진.

“더 볼 것도 없겠군요.”

구데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봐도 이만하면 됐지 싶었다.

“훈련은 이만 끝내게. 다들 고생했으니, 회식 한 번 시켜줘. 내가 온다고 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뺑이쳤을 텐데.”

“알겠습니다.”

나는 훈련에 참여한 교관과 병사들 한 명 한 명과 악수하며 그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입대한 지 며칠 안 된듯한 이등병은 물론이고 군복 상의에 훈장을 주렁주렁 매단 대위조차 나와 악수할 때 벌벌 떨었다.

“긴장하지 마. 내가 그렇게 겁나냐?”

“아닙니다!”

사선을 넘나 들은 베테랑이 겨우 총통과 만났다고 쫄기는.

“원수는 병기국에서 제안한 신형 중전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나는 엊그제 병기국에서 제안한 신형 중전차 개발에 대한 구데리안의 의견이 듣고 싶었다.

중전차라면 티거가 있지만, 병기국은 티거만으로는 잠재적 적국인 소련의 몰로토프선과 스탈린선을 돌파하기 힘들다며 보다 강력한 주포로 무장한 신형 중전차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본래는 히틀러가 신형 전차 개발을 지시했고, 병기국이 난색을 표했다고 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반대가 된 셈이었다.

이유가 대체 뭘까.

“티거에 탑재된 88mm 56구경장 주포는 아주 강력한 물건입니다만, 콘크리트 진지로 구축된 소련의 방어선을 돌파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감이 없지 않지요. 그래도 병기국의 제안은 한 번쯤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뜻밖에도 구데리안은 병기국의 제안에 찬성의 뜻을 내비쳤다.

그의 예상 못 한 답변에 나는 깜짝 놀랐다.

“의외구만. 원수라면 무조건 반대할 줄 알았는데.”

내가 아는 구데리안은 허구한 날 별의별 전차와 돌격포의 바리에이션을 내놓는 히틀러를 뜯어말리느라 이래저래 고생한 양반으로 알고 있다.

그런 양반이 갑자기 왜 이러지? 뭘 잘못 먹었나?

어쩌면 3호 돌격포나 4호 구축전차, 8호 전차 마우스 같은 잡다한 바리에이션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 구데리안의 생각에 변화가 생긴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실 티거만으론 추후 등장할 소련과 미국의 중전차들을 상대하기에는 조금 부족했기에, 차기 중전차 설계를 준비하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전시도 아니니 자원과 인력도 널널하기도 하고.

판터와 티거가 나온 지 겨우 1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조금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유비무환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소련이 신형 중전차의 생산에 들어갔다는 소식도 내게 경각심을 일으켰다.

“그럼 신형 중전차 개발은 원수에게 전적으로 일임하겠소. 전차라면 원수가 전문가 아니오.”

루츠와 더불어 독일 기갑부대의 발전을 끌어낸 구데리안이니, 이번에는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될 것이다.

페르디난트와 마우스 같은 실용성을 1도 고려하지 않은 초중전차를 극혐하고, 4호 전차처럼 생산성 좋고 신뢰성이 입증된 전차들만 선호했던 그이니 믿고 맡겨도 되겠지.

“감사합니다, 총통 각하. 반드시 총통께서 만족하실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지요.”

“그래도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시오. 나이랑 건강도 생각하셔야지.”

이때는 몰랐다. 나중에 그가 어떤 물건을 만들어낼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