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틀러가 되었다-122화 (122/150)

< 치욕의 날 (2) >

진주만에 모습을 드러낸 일본군의 전함 4척은 후소급 전함 후소와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 기리시마, 히에이였다.

항공모함과 함재기들이 대활약한 타란토 공습이 없었기에 대본영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내세운 전략을 완전히 믿지 못했다.

항모의 함재기들로 적의 항구를 때려 부순다는 발상은 참신하나, 그 효과가 아직 검증된 바 없으며 완벽한 한 방을 적에게 먹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막강한 화력을 보유한 전함을 직접 끌고 가서 포격을 퍼부어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야마모토는 귀중한 전함이 적 해안포대에 당할 위험이 있다며 반대했지만, 야마모토의 전략도 입증된 바가 없기에 똑같이 위험하다는 핀잔만 듣고 울며 겨자 먹기로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본래 역사의 진주만 공습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던 전함들은 뜻밖의 기회를 얻었다.

직접 적과 포화를 주고받을 기회.

항구의 전함들을 공격하기 위해선 우선 해안포대부터 먼저 침묵시킬 필요가 있었다.

거대한 전함들의 육중한 포탑이 빙그르르 돌아가면서 길쭉한 포신들이 목표물을 조준했다.

“발포!”

다른 전함들보다 유독 크고 높은 함교를 가진 후소가 먼저 발포했다.

41식 356mm 45구경장 주포가 불을 뿜자 바다가 요동치며 해안의 포대들이 거대한 섬광에 삼켜졌다.

“명중! 계속 발포하라!”

함포의 직격을 받은 해안포대 중 크기가 작고 방어력은 낮은 포대는 금방 섬광을 토해내며 파괴되었다.

그러나 콘크리트와 강철로 이루어진 대형 포대들은 전함의 포격을 꿋꿋하게 버텨냈다.

곧 해안포들도 일본군의 전함에 맞서 포격을 감행했다.

전함들 주변으로 높이 수십 m에 달하는 물기둥이 치솟고 수병들에게 차가운 바닷물을 뿌렸다.

해안포 1문은 같은 구경의 함포 3문과 동급의 위력을 가진다는 말이 있다.

바다에 떠 있는 군함보다 미동이 없는 육상에 장착된 해안포의 조준이 더 정확한 데다 위장도 용이하며 크기도 상대적으로 작아 적함이 조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적함의 눈에 띈 포대들 중 방어력이 약한 포대는 파괴되었지만, 철근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대형 포대들은 적함의 포탄을 여러 번 맞고도 멀쩡히 살아서 포격을 주고받았다.

“적함! 거리 16,000!”

“발사!”

이윽고 일본군의 전함이 발견하지 못한 포대들도 난타전에 가세했다.

포격전이 시작되고 10분이 다 되갈 무렵에, 해안포를 조작하던 미군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맞았다! 명중이야!”

“이야아아아!!!”

바벨탑을 연상케 하는 후소의 함교가 해안포의 포탄에 맞아 박살이 났다.

무너지는 함교의 잔해물들이 낙하하면서 당황한 일본군 수병들을 깔아뭉갰다.

그 모습을 본 포병들은 힘을 얻었다. 적들은 무적이 아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용기를 얻은 포병들은 서둘러서 다음 포탄을 장전했다.

주포의 크기만큼이나 포탄도 거대했기에 장전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해안포대가 포탄을 장전하는 사이, 항구에 정박한 전함 중 피해가 가장 적었던 USS 테네시가 바다로 나와 포격전에 가세했다.

해안포대들과 싸우느라 여념이 없던 일본군 전함들에 테네시의 참전은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테네시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전함은 후소였다. 후소가 포탑을 돌리기도 전에 테네시의 356mm 함포가 후소를 조준했다.

“적함 조준 완료!”

“발포!”

철갑탄이 후소의 정면장갑을 아슬아슬한 차이로 관통하자, 불의 폭풍이 내부를 휩쓸었다.

사방에서 화염이 치솟고, 구멍 난 축구공의 바람처럼 회색 연기가 곳곳에서 뿜어져 나왔다.

불에 그을리고 파편에 찢어진 수병들이 바닷속으로 몸을 던졌다.

함장이 살아 있었다면 퇴각을 명했겠지만, 함장은 함교가 해안포의 공격을 받았을 때 참모들과 함께 즉사했다.

명령을 내릴 사람이 없이 후소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바다에 떠 있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후소를 향해 미군은 가용할 수 있는 전 화력을 집중시켰다.

고막을 찢을듯한 굉음이 연거푸 울려 퍼졌다.

위기에 처한 후소를 구하기 위해 전함들이 열심히 포탄을 날렸다.

공고의 포탄이 해안포대에 명중했지만, 포대의 장갑이 워낙 두꺼워 관통에 실패했다.

포대 내부의 병사들은 포대에 약간의 진동을 느꼈을 뿐 별일 아니라는 듯이 분주히 움직이며 포탄을 장전하고, 적을 조준하여 발사했다.

“적함에 명중!”

“좋아, 계속해!”

공고는 4기의 포탑 중 1기가 완파되고, 근접한 포탄 1기는 폭발의 영향으로 고장을 일으켰으며 기리시마와 히에이도 경미한 손상을 입었다.

직접적으로 피해를 본 공고는 물론이고 기리시마와 히에이도 겁을 먹고 거리를 좁힐 엄두를 내지 못했다. 3척의 전함이 우물거리는 사이 해안포대에서 발사된 356mm 철갑탄이 후소의 측면장갑을 찢어발기고, 탄약고를 유폭시켰다.

귀청이 찢을듯한 굉음이 일면서, 후소는 반으로 쪼개졌다.

“적함, 침몰합니다!”

함교가 포격에 날아가 지휘체계가 마비되었을 때부터 후소의 운명은 침몰을 피할 수 없었다.

두 동강이 난 후소의 쪼개진 몸통을 바다는 굶주린 괴물처럼 집어삼켰다. 함 내에 남아 있던 수병들까지 함께.

후소가 당하자 남은 3척의 전함들은 포격을 멈추고 함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침몰하는 후소에서 탈출한 생존병들을 구조한 뒤 서둘러 현장을 벗어났다.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고요함을 되찾았다.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에는 전함이 침몰하면서 남긴 기름띠와 기름띠에 엉긴 시체들, 그리고 침몰한 전함의 잔해로 가득했다.

***

“이런....”

나구모가 보내온 전문을 받아든 야마모토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기습은 성공이었다. 일단은.

진주만에 정박한 미 전함 8척 중 3척을 격침하고, 5척에 중대한 손상을 입혔다.

순양함과 구축함 각각 2척씩 손상에 미군기 180여 기를 파괴했으며 140여 기를 파손하는 데 성공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일본군의 대승이었으나, 문제는 일본군이 입은 피해도 만만치 않다는 것.

진주만 공습에서 일본군이 동원한 항공기는 도합 441대.

이 중 72대가 격추당하고 90대가 크고 작은 손상을 입었다. 동원한 갑표적 5척 모두 손실한 것은 덤이고.

정작 가장 중요한 미 해군의 항공모함은 한 척도 격침하지 못했다.

그래, 여기까지는 뭐 예상한 피해 범위 안이었으니 그러려니 한다. 항모도 항구에 없었으니 왜 항모를 격침하지 못 했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후소가 격침당하고, 3척의 전함들도 크고 작은 손상을 입은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항모의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했던 야마모토조차 당시 일본 해군에서 주류로 통하던 함대결전사상에 찌든 터라, 함대결전사상에 필수적인 전함을 손실한 것은 무척이나 뼈아팠다.

심지어 전함 1척을 상실한 대가로 얻은 전과가 미군의 해안포 일부를 파괴한 게 전부.

애초에 전함을 작전에 동원한 이유가, 공습으로 파괴하지 못한 적의 생존함을 박살 내고 해안기지 초토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해안포에 막혀서 피해만 보고 그대로 물러서다니!

그나마 위안거리를 찾자면, 격침된 후소와 손상을 입은 순양전함들 모두 만든 지 25년을 훌쩍 넘긴 구식함들이라는 것이었다.

최중요 전함인 나가토나 무츠를 작전에 동원했다가 격침당하면 그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기에 야마모토는 꼭 전함을 동원해야 한다면 구식함들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주장이 받아들여져 훈련함으로나 사용되던 구식 전함들이 최전선에 투입되는 아이러니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격침된 후소의 승조원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의 목숨에는 등급이 없지만, 무기에는 우선순위가 있으니까. 특히 전시에는 더더욱.

전함의 손실은 뼈아프지만, 그래도 최신예도 아니고 퇴물 취급을 받던 구식함이라 그런지 참모들은 천만다행이라고 여겼다.

비록 전함 한 척을 잃었지만, 그 대가로 진주만의 미 해군을 불구로 만들었으니 작전은 성공이라 해도 무방하다.

야마모토는 작전 성공에 들떠 만세를 외치는 참모들을 덤덤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저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다. 일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리고 분노한 미국이 어떤 자세로 나올지.

“우리가 잠자는 거인을 깨운 게 아닌지 모르겠군.”

***

“진심으로 말하건대, 지난 9개월 동안 본인은 거짓말을 한 적이 없으며, 이는 기록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다.”

노무라는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헐의 시선을 애써 못 본 척했다.

“저는 공직 생활을 50년 동안 해 왔지만 이런 문서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이토록 악질적인 거짓말과 왜곡으로 가득 찬 나머지 지구상에 이런 문서를 낼 만한 정부가 있다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헐은 권총으로 눈앞의 일본인의 정수리에 구멍을 내고 싶은 욕망을 겨우겨우 억눌렀다.

그의 한 가닥 남은 이성이, 분노라는 본능이 몸의 통제권을 빼앗는 것을 간신히 막고 있었다.

노무라도 헐의 분노를 아는지 말이 없었다.

“하실 말씀 있습니까, 대사?”

“.....”

노무라는 대답 대신 눈을 질끈 감았다.

암호문이 대미 선전포고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증오에 가득 찬 비난과 멸시의 시선을 받으리라곤 예상했었다.

하지만 해독이 늦어져 기습공격이 이루어진 후에야 상대방에게 선전포고문을 전달하게 될 줄은 그조차 예상 못 한 일이었다.

미국은 자신들이 일본의 철저한 기만질에 속아 넘어갔다고 굳게 믿었다.

선전포고 전에 기습공격이라니. 이게 과연 문명국을 자처하는 나라가 저지를 짓이란 말인가?

노무라는 뭐라고 변명하면 좋을지 머리를 굴리다가, 이내 깔끔하게 포기했다.

지금 같은 분위기에선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으리라.

오히려 끝까지 장난질이냐며, 상대의 분노를 완전히 터뜨리는 결과를 맺게 될지 몰랐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장관님.”

“암, 없어야지요. 있다고 하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헐은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숙이는 노무라를 꼴도 보기 싫은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나마 이것이 그가 대사에게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미 경찰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대사관으로 복귀한 노무라는 각종 기밀문서를 소각하느라 여념이 없는 대사관 직원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있을까?

만약 황국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그는 이곳에 승리자로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그를 증오가 담긴 시선으로 쳐다볼지 몰라도, 적어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전쟁에서 진다면, 그럴 기회조차 없겠지.

황국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자신했기에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노무라가 보기에 황국에 승리할 가능성이 애초에 있기는 한 것인지 의문이었다.

선전포고문 하나조차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나라가, 그것도 석유가 부족해 전쟁을 일으켰는데 어떻게 미국처럼 거대한 나라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을까?

***

1941년 12월 11일

독일 베를린 신 총통관저

일본의 진주만 기습과 대미 선전포고 소식은 전 세계로 일파만파 퍼졌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분노한 미국 전역은 복수를 부르짖었다.

공습 다음 날인 12월 8일에 루스벨트는 국회의사당에서 그 유명한 ‘치욕의 날 연설’을 했다.

“어제, 1941년 12월 7일—치욕의 날로 기억될 날에 —미합중국은 일본의 해군과 항공대에 의해 고의적이며 기습적인 공격을 당했습니다.”

루스벨트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기습공격을 감행한 일본의 비겁함에 대해 비난했고, 국회에 대일 선전포고를 요청했다.

결과는 당연히 통과. 상원 만장일치, 하원에서 388:1로 가결되어 미국은 공식적으로 참전을 선언했다.

진주만 공습이 있던 날 일본은 필리핀과 웨이크, 괌, 미드웨이 등 미국의 영토와 홍콩, 말레이 반도 등 영국령 식민지를 공격했다.

영국의 동양함대는 어제 있었던 말레이 해전에서 2척의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로드니를 잃으며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했다.

말레이 해전에서의 참패로 영국 동양함대는 불구가 되었고, 일본은 천하의 영국군도 자랑스러운 황군 앞에 무릎을 꿇었다며 열심히 자국민들과 세계에 선전했다.

총통관저는 내 예언이 이번에도 맞아떨어지자 들뜬 분위기였다.

독일 국민은 태평양 전쟁의 발발에 놀라워하면서도, 하나의 거대한 구경거리 정도로만 여겼다.

전쟁의 당사자는 어디까지나 미국과 영국, 일본이지 독일이 전쟁에 휘말린 게 아니니까.

역사에서 오늘은 히틀러가 미국에 선전포고한 날이지만, 나는 정반대의 행보를 걸었다.

나는 리벤트로프로 하여금 일본의 기습 침략을 규탄하고 자국민들이 희생당한 미국과 영국에 애도를 표함과 동시에, 독일은 아시아-태평양에서 벌어지는 분쟁에 철저한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번에는 미국도 반응을 보였다.

백악관은 독일의 애도에 미국인들을 대표해 감사를 표한다는 짤막한 논평을 내놓았고 영국의 핼리팩스 총리는 BBC 방송에 나와 독일의 중립 선언과 애도가 영독의 우호관계 증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소련의 경우 자신들은 이번 진주만 공격에 관여한 바 없으며, 일본과 영미 사이의 분쟁에 어떤 방식으로든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소련의 선언에 중국은 소련이 일본을 손절할 것을 기대하며 국경 봉쇄 해제를 요청했지만, 이건 또 거부당했다.

중국과의 국경분쟁을 명분으로 내세웠으니, 모양새 빠지는 것을 우려한 건가?

독일과 소련의 발표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없었다. 이미 전쟁 중인 중국과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주고받았을 뿐.

정보통제 때문에 미군이 피해를 얼마나 입었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실제 역사에서 전함 4대가 격침당하고 항공기 188대가 박살 났으며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3600명 가까이 죽거나 다쳤으니 여기서도 피해가 대충 비슷하려나?

참, 그리고 확실한 정보는 아니지만 진주만 공격에 일본군이 전함을 동원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항공모함에서 함재기들을 발진시켜 1차로 때리고, 마지막은 전함의 포격으로 마무리를 지었다는 것이다.

타란토 공습이 일어나지 않은 결과가 전함을 동원한 진주만 공격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되다니. 오묘하다면 오묘한 일이리라.

그래도 혹시 일본군이 다른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진주만을 공격하지는 않을까 생각했는데, 실제 역사와 비교하면 그렇게까지 많이 달라진 것도 아니었다.

“아무튼 거만한 양키들이 날벼락을 맞은 모습을 보니 조금은 속이 후련합니다.”

레더의 말에 괴링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멍청한 녀석들, 총통께서 미리 귀띔까지 해줬는데도 무시하더니. 아주 쌤통입니다, 그려.”

괴링은 ‘슬슬 한 말씀 해주시죠’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분위기를 맞춰주기 위해 나는 짐짓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미리 정답까지 알려줬는데도 당하는 꼴이라니. 그놈의 자존심이 애꿎은 자국민 수천 명을 골로 보냈구만. 우리 독일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말이야.”

“맞습니다, 총통 각하. 그리고 이제부턴 우리가 미국에 굽히고 들어갈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이번 일로 미국은 우리에게 의지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아,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괴링은 우리가 제공한 정보를 무시했다가 제대로 당한 미국이 앞으로 독일에 의존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희망회로를 돌리고 있었다.

여기에 레더와 브라우히치도 편승해 저마다의 추측을 꺼냈다.

“차라리 잘된 일입니다. 이번 기회에 미국에 빚을 지게 해서 식량과 광물, 철강 같은 것들을 헐값에 수입해오는 겁니다.”

“나쁘지 않군요. 잘하면 루스벨트의 목에 목줄을 채울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레더 제독. 루스벨트의 목에 목줄을 채운다니,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어이가 없어진 내가 묻자 레더는 마피아 보스마냥 사악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지금 미국인들은 일본의 기습공격으로 눈이 뒤집힌 상태입니다. 그런데 루스벨트 정부가 일본의 기습공격 사실을 미리 알고 있는데도 이를 방치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 루스벨트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미국에 정보를 건넸다는 사실을 미국인들은 아직 모르고 있지요. 이걸 가지고 루스벨트 정부를 협박하는 겁니다. 비밀이 폭로되고 싶지 않으면, 우리한테 알아서 기어라고 명령하는 거죠.”

레더는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우리가 루스벨트의 목에 목줄을 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괴링과 브라우히치 같은 다른 장성들까지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했고.

“말만 들으면 그럴 듯한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겠소? 루스벨트가 독일의 선전이라고 해버리면 그만일 텐데. 미국인들이 우리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는 보장도 없고. 되려 미국의 분노를 사게 되면 우리만 곤란해질 것이오.”

“하지만 미국에 상당한 정치적 혼란을 주는 게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가능은 하겠지. 그래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굳이 미국 내부의 혼란을 유도해봤자 독일이 이득을 보는 일은 하나도 없소. 오히려 일본 놈들만 좋아라 하겠지.”

레더가 제안한, ‘비밀 가지고 협박하기’ 제안은 거부되었다.

그래도 앞으로는 미국에 우리가 저자세로 나갈 필요가 없어졌다.

전쟁이 터졌으니 이제 미국은 유럽 쪽 일에 관심도 없을 테고, 우리 역시 미국이 우릴 공격할 가능성이 없어졌으니 벌벌 떨 필요가 없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느긋하게 앉아 팝콘이나 먹으며 일본이 몰락해가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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