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오르는 불꽃 (1) >
1941년 6월 2일
독일 뮌헨
“아돌프 할아버지다!”
“우왕!”
이날, 나는 오랜 측근이자 동지인 에밀 마우리스의 집을 방문했다. 품에 선물 보따리를 한가득 싸 들고.
“아니, 총통 각하. 이곳에는 웬일로....”
“웬일이긴. 내가 전우를 보러왔다는데 안 될 게 있나? 겸사겸사 손주들도 보고.”
“어머, 삼촌. 오셨어요?”
“아니, 여보. 총통 각하라고 불러야지.”
“내가 못할 말 했어요? 총통이기 전에 내 삼촌인데.”
“그래, 총통이기 전에 삼촌인데 뭘.”
나를 총통 각하라는 호칭 대신 삼촌이라 부르는 여자의 이름은 겔리 라우발. 실제 히틀러의 조카이자, 히틀러가 연인으로 생각했던 여자다.
참, 겔리 라우발이라는 이름은 이제 옛날 이름이고 지금은 ‘겔리 마우리스’라고 불러야겠군.
삼촌인 히틀러와 연인에 가까운 사이였던 라우발은 히틀러의 최측근이자 개인 운전사였던 마우리스와 썸을 타기 시작했다.
이를 알게 된 히틀러는 자신의 연인을 ‘NTR하려고 한’ 마우리스를 좌천시켰고, 동시에 라우발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삼촌 히틀러의 통제에 지친 라우발은 반항을 시도했지만, 히틀러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우울증에 걸린 라우발은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나는 실제 히틀러와 달리 근친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지라, 라우발이 마우리스와 썸을 타던, 연인이 되던 알아서 하게 내버려 뒀다.
그 결과 둘은 눈이 맞아 결혼에 골인했고, 지금은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아 알콩달콩 잘살고 있다.
즉, 마우리스는 내-정확하겐 히틀러의-조카사위인 셈이다. 그리고 나를 ‘아돌프 할아버지’라 부르며 앵기는 두 아이는 내 손주였다.
한국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할아버지 칭호를 독일에서 먼저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무튼, 내가 마우리스네 집을 방문한 이유는 오늘이 마우리스의 장남 아돌프와 막내딸 앙겔라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자~ 이 할아버지가 선물을 가져왔다.”
“우와아아아앙!?”
“역시 할아버지!”
내가 손짓하자, 크라우제와 귄셰가 커다란 상자를 들고 저택으로 들어왔다.
상자를 감싼 포장을 풀고 뚜껑을 열자, 아돌프와 앙겔라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튀어나왔다.
“내, 내가 갖고 싶었던 거!”
“끼얏, 호우!”
역시 이 나이 때 애들은 장난감을 좋아하는 법이지.
아돌프에겐 정교하게 만들어진 ‘독일군 미니어처 세트’가, 앙겔라에겐 황제펭귄 인형과 북극곰 인형이 주어졌다.
“할아버지 최고!”
“사랑합니다!”
“그래, 나도 사랑한다.”
둘 다 내가 준비한 선물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방방 뛰고 난리도 아니다.
아아, 말하는 걸 깜빡 잊었는데 아돌프에게 선물한 ‘독일군 미니어처 세트’는 일주일 전부터 유럽 각국에서 발매를 시작한 장난감 세트다.
가로세로 70cm 크기의 상자에 공장에서 찍어낸 정교한 독일군 병정과 전차, 장갑차, 항공기, 대포 총 36개가 들어있는데, 가격은 겨우 12라이히스마르크 80라이히스페니히 밖에 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혜자스러운 가격인가.
만약 당신이 아이가 있는 가장이라면, 당신의 아이에게 평생의 즐길 거리를 선물해보는 게 어떨까?
집에 애가 없거나 솔로라고?? 걱정하지 마시라. 어른들도 즐길 수 있게끔 모형에 상당히 공을 들였으니, 장식용으로도 안성맞춤이다.
유일한 흠이 하나 있다면, 티거와 판터 모형은 없다는 거 정도? 그래도 4호 전차의 각 형식부터 몇 대만 생산된 3호 전차의 모형까지 있으니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구성이라고 본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마우리스는 옷을 갈아입고 오겠다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방에서 나온 마우리스는 흑색의 SS 제국지도자 제복을 입고 있었다.
“굳이 제복까지 차려입을 필요는 없는데. 너무 격식을 차리는구만.”
“그래도 총통 각하 앞인데...”
“어허, 오늘은 총통이 아니라 집안 어른으로 찾아온 것이네. 편하게 있으라니까. 여긴 자네 집이 아닌가.”
내가 한사코 만류하는데도 마우리스는 꿋꿋하게 SS 제국지도자 제복 입기를 고집했다.
현재 독일에서 SS 제국지도자 직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3명 밖에 없다. 하인리히 힘러, 에밀 마우리스, 요제프 베르히톨트.
SS 제국지도자로서의 업무는 힘러가 도맡아서 하고 있기 때문에 마우리스와 베르히톨트 둘은 말이 SS 제국지도자지, 실질적으론 명예직이나 다름없었다.
SS에서 하는 일이라면 중요 행사가 있을 때 참석해서 얼굴만 비추는 게 전부.
평소에 제복 입을 일이 잘 없어서 그러는 것인가 싶어서 저러는 건가 싶어 결국 내버려 뒀다.
본인이 알아서 입고 있겠다는데, 굳이 만류할 필요는 없지.
“마리아는? 아까 전부터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 같은데.”
“삼촌은 모르시겠구나. 마리아는 BDM 단원이라 어제부터 합숙에 들어갔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보내지 않고 집에 남겨두는 건데.”
마우리스 부부의 장녀 마리아는 BDM 합숙에 참가하느라 집에 없었다.
히틀러 유겐트와 더불어 나치즘 꿈나무 양성소였던 BDM은 여기서는 청소년들의 건강과 체력 증진을 위한 국가 공인 헬스클럽으로 변모했다.
개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가입이 원칙이었던 실제 역사와 달리 유겐트와 BDM의 가입은 철저한 자유.
본인이 가입하고 싶으면 가입하지, 가입하기 싫으면 안 들어가도 전혀 상관이 없다.
가입한 청소년들은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모토에 따라 구보와 체조, 복싱, 수영, 응급치료 등 건강을 유지하고 체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는 운동들과 훈련을 집중적으로 배우게 된다.
나치당 산하에 있는 조직이면서도 정치교육은 하나도 없는 데다, 한 달에 3마르크의 회비만 내면 국가가 알아서 자식들 건강 관리를 시켜주니 부모들이 너도, 나도 할 거 없이 자식들을 유겐트와 BDM에 가입시켰다.
그 결과, 사실상 독일의 거의 모든 청소년이 두 조직에 가입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들 보는 게 보통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안 힘드냐?”
“힘들긴 하죠. 그래도 애들 커가는 거 보는 맛이 있잖아요.”
“힘들면 언제든지 가정부 써라. 건강을 젊어서부터 챙겨야 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삼촌. 그리고 아돌프, 엄마가 셀러리만 골라내지 말라고 전에도 말했을 텐데?”
샐러드에서 셀러리를 골라내던 아돌프가 현장에서 적발된 사이, 나는 마우리스에게 말을 건넸다.
“겔리가 바가지는 안 긁나?”
“가끔씩요. 그래도 평소에는 저와 아이들에게 잘 대해줍니다. 요리 솜씨는.... 그래도 전보다는 많이 나아진 편입니다, 하하.”
웃음에 영혼이 없는데.
평소에 전용 요리사들이 해주는 최고급 요리만 먹어서 입맛이 고급이 됐는지, 겔리가 내온 요리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없었다.
식사란 자고로 생명을 유지하는 데 있어 꼭 필요한 행위일 뿐 아니라 일상에 행복을 주는 일인데, 여기서는 정반대였다.
마우리스도 같은 생각인지, 겔리가 접시에 담은 클뢰세(Klöße, 으깬 감자와 밀가루로 만든 경단) 위에 그레이비 소스-라고 추측되는 걸쭉한 갈색 액체-를 뿌릴 때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전용 요리사는 두는 건 생각 안 해봤나?”
“저도 얘기해봤는데, 주부가 됐으면 요리는 직접 해야 한다면서 한사코 거절하더군요. 10년이나 말입니다.”
마인드는 참 좋은데....
가장 중요한 실력이 받쳐주질 않으니 참 난감한 문제였다. 밥 맛없으니까 요리하지 말라고 솔직하게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래서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이 나온 건가 싶었다.
“삼촌, 다 드셨네? 클뢰세 더 드려요? 아니면 비어주페(Biersuppe, 맥주 수프)?”
“아니, 난 됐다. 요즘 다이어트를 하고 있어서 위가 줄었는지 벌써 배가 부르구나.”
“그래요? 당신은? 접시에 음식이 그대로 있네?”
“....먹고 있어. 재촉하지 마. 너무 빨리 먹으면 몸에 탈 나.”
전우가 고통받고 있는데 총통이란 자가 옆에서 할 수 있는 게 영혼 보내기가 전부라니.
이러려고 총통이 됐나 자괴감이 느껴졌다. 산다는 게 뭔지.
고행 같은 식사가 끝나고, 케이크를 먹을 시간이 되었다. 천만 다행히도 겔리는 한 가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케이크를 오븐에 넣고 깜빡 잊어버리는 바람에, 케이크가 숯덩이가 된 것이다.
겔리는 자녀의 생일 케이크를 망친 것에 비통해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슬픔에 공감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돌프와 앙겔라조차도.
“걱정 말거라. 할애비가 생일 케이크를 준비해왔으니.”
“하, 할아버지!”
“총통 각하!”
뮌헨의 고급 제과점에서 특별주문한 프린츠레겐텐토르테(Prinzregententorte, 뮌헨 특산 초콜릿 케이크)를 가져오자, 아돌프와 앙겔라의 입에서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엄마가 직접 만든 생일 케이크 대신 밖에서 사온 케이크를 먹을 수 있다는 게 정말 기뻤는지 둘의 눈가에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붙이려는데, 크라우제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작은 쪽지를 내려놓았다.
“총통 각하, 리벤트로프 장관으로부터 온 전문입니다.”
“전문?”
나는 크라우제가 내려놓은 전문을 집어 들었다. 전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타이핑되어 있었다.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함.
***
본래 역사에서 일본은 1940년 9월 22일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에 진주했다.
1941년,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은 일본이 소련의 연해주를 공격해 자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히틀러는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비시 프랑스를 압박하여 인도차이나 전역에 일본군의 진주를 허용케 했다.
이러한 독일의 노력에도 정작 일본은 베를린이 소련군에게 함락될 때까지 소련과 중립을 유지했다는 게 코미디.
그러나 내가 히틀러에 빙의해 본격적으로 역사를 비틀자 극동의 상황은 내가 아는 역사와 다르게 흘러갔다.
중국은 소련을 통해 독일과 교류를 이어갔고,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 일본군의 진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일본도 독일의 눈치를 봐서 인도차이나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놈의 땅 욕심은 어떻게 할 수 없었는지, 일본은 끝끝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했다.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프랑스 놈들은 황국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천황 폐하를 위해 돌격!”
“반자이!”
평소 사이가 더럽게 안 좋기로 유명한 일본 육군과 해군은, 이상하게도 남의 나라 침략할 때만큼은 서로 쿵짝이 아주 잘 맞았다.
인도차이나 주둔 프랑스 해군은 일본 해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육군이 인도차이나-중국 국경을 넘는 사이 일본 해군은 프랑스 해군과 싸워, 그들을 모조리 수장시켰다.
일본 해군과의 교전에서 살아남은 프랑스 함정들은 영국이 지배하는 말레이로 도주했다.
6월 3일, 프랑스는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일본은 자국에 있는 프랑스인들을 모조리 체포해 수용소에 처박는 것으로 프랑스의 선전포고에 응답했다.
6월 6일, 하노이가 함락되었고 사이공은 일본 해군의 무자비한 포격과 공습에 불바다가 되었다.
프랑스 해군이 전멸한 관계로, 육군과 해군 육전대 병력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육지에 상륙했다.
***
1941년 6월 9일
독일 베를린 라디오 방송국
프랑스와 일본 사이에서 전쟁이 터졌지만, 우리가 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애초에 독일과 관련된 일도 아닌데 꼽사리 낄 건덕지가 뭐가 있다고.
프랑스가 독일의 괴뢰국이니, 엄밀히 따지면 일본의 인도차이나 공격은 독일에 대한 도발 행위이기도 했다.
페탱도 이 사실을 강조하며 내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나는 페탱의 요청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독일이 제3국의 공격을 받을 경우, 프랑스는 독일을 돕기 위해 군대와 노동자들을 파견하기로 약속했지만, 반대로 독일은 프랑스가 제3국의 공격을 받을 경우, 프랑스를 위해 뭘 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독일은 프랑스를 도와 태평양에 병력을 파견할 의무가 없다는 말씀.
“그래도 일본 때문에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반독 감정이 거세지기라도 하면 그것 역시 곤란한 일이지. 적당히 립서비스 정도는 해주는 게 낫지 않겠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리벤트로프를 내세워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성명문을 발표했다.
성명문에는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한 규탄만 있을 뿐, 독일이 프랑스를 지지한다느니,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주일 독일대사 오이겐 오토를 추방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일본이 먼저 독일대사를 추방함에 따라 독일에서도 일본 대사를 추방해야 한다는 여론이 생겨났다.
21세기도 그렇지만, 이 시대 유럽인들의 인식은 무조건 피부색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어서 동양인이 길을 걷다가 몰매를 맞거나, 잠을 자고 있는데 창가에 돌멩이가 날아드는 일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게 전부 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생긴 일이었다.
태어난 나라도, 쓰는 언어도, 생활습관도, 인종도 모두 다 다르지만, 유럽인들이 보기에는 거기서 거기였다.
눈이 작고 피부가 노랗다? 무조건 동양인. 동양인=일본인. 일본인=독일을 모욕한 역겨운 종자들.
즉, 이놈들은 때려도 된다. 아니, 때려야 한다.
이 기적의 논리로 수백 명의 피해자가 양산되었다.
미리 일본 대사관에 무장 병력을 배치했기에 대사관은 별일이 없었지만, 군과 경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일반 소시민들은 전혀 아니었다.
독일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물론이고, 오히려 일본과 전쟁 중인 중국인들도 혐오범죄에 노출되었다.
독일에 거주하는 동양인들의 수가 극소수이긴 하나, 혐오범죄의 증가는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히틀러이기 전에, 나 또한 동양인이었기에 이번 사태에서는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간만에 라디오 방송에 나와 독일 국민들에 직접 연설했다.
“친애하는 독일 국민 여러분. 작금의 사태로 분노를 느끼시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저 역시 문명국이라는 일본의 무도하기 짝이 없는 행태에 분노와 경악, 그리고 실망감을 감출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국민 여러분, 우리는 상대의 이해할 수 없는 증오와 행패에 직면했을 때보다 더 냉정해져야 합니다. 독일은 비스마르크와 베토벤, 프리드리히 대왕과 니체, 바그너를 배출한 위대한 나라입니다.
이토록 위대한 나라가 우리에게 적의를 드러내는 야만적인 나라가 저지른 만행을 그대로 답습해서야 되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독일이 낳은 위대한 철학가, 니체는 자신의 저서 ‘선악의 저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심연을 들여다보는 만큼, 심연도 우리를 들여다볼 것이라고. 우리는 괴물과 싸우게 되더라도 결코 우리 자신이 괴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인간으로 남아야 합니다. 왜냐면 그것이 바로 인간이며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인간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춘 뒤 목청을 가다듬었다. 오랜만에 연설하려니 목이 비쩍 마르는 느낌이었다.
연설 연습을 게을리 한 결과라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앞으론 연습량을 다시 늘려야겠군.
“저는 국민 여러분께서 부디 이성적으로 판단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최근 독일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혐오범죄에 대해서는 매우 단호하게 대처할 것을 알려드립니다.
일본인들뿐만이 아니라 독일과 우호적인 중국인들, 그리고 그 외 수많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일본인들과 같은 피부색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많은 증오와 폭력의 희생양이 되어 입에 담기도 힘든 만행을 겪었습니다.
제가 국민 여러분께 연설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이유 없는 증오와 무지가 무고한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순간부터 타 인종을 대상으로 한 모든 종류의 범죄는 중범죄로 분류하여 강력히 처벌할 것입니다. 범죄를 저지르는 당사자는 물론이고 이를 알고도 방치하거나 동조한 자들 역시 처벌 대상에 포함되리라는 사실 또한 명심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