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틀러가 되었다-112화 (112/150)

< 방문객들 (2) >

“독일이 보유한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의 활약상은 익히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소련도 그런 항공모함을 보유할 수 있게끔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만.”

소련이 이다음으로 원한 것은 그라프 체펠린의 설계도였다.

그건 그렇고 육군 참모총장의 입에서 항공모함 설계도 얘기가 나오니까 조금 신선하군.

“조금 무리한 요구사항 같군요. 이미 독일은 일전에 비스마르크의 설계도를 넘겨주지 않았습니까?”

레더가 불쾌한 듯이 말했다. 그러고보니 소련에 비스마르크의 설계도를 넘기는 것을 결사반대한 이도 레더였지.

전함에 살고 전함에 죽는 레더에게 비스마르크의 설계도를 준 것도 통탄스러운 일인데, 이제는 그라프 체펠린까지 요구하는 소련이 날강도처럼 보일 것이다. 레더의 반발에 샤포시니코프가 덧붙였다.

“당연히 공짜로 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이후 조건들까지 수락해주신다면 농산물의 18%, 석유와 목재는 13%, 광물은 각각 7% 이상 추가로 독일에 보급하겠습니다. 어떠십니까?”

“흐음.”

항공모함 한 척의 설계도 가격치곤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레더도 소련의 제안이 마냥 무시하기 힘든 조건이라 판단했는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레더 제독,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괜찮은 제안 같소만.”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총통 각하, 레더 제독.”

거래가 성사되자 소련 대표단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올랐다. 러시아인들의 웃음을 보니 갑자기 우리가 손해 보는 장사라는 생각이 확 드는데.

하지만 이미 성사된 거래를 도로 물릴 수도 없는 노릇. 아쉬운 마음에 나는 추가 조건을 제시했다.

“대신 석유와 목재의 공급량을 15%로, 광물은 10%로 인상해주시오. 우리도 그라프 체펠린을 얻기 위해 상당한 수고를 했거든.”

“석유와 목재는 받아들이겠습니다. 하지만 광물의 10%는 조금 힘들 것 같군요. 8%는 어떻겠습니까?”

협상 끝에 크롬과 니켈, 구리는 9%로, 텅스텐과 몰리브덴은 8%를 유지하기로 했다.

보로실로프와 샤포시니코프는 판처파우스트와 StG39의 설계도, 헷처, Fw190 F형을 요구했다.

판처파우스트와 StG39는 내가 안 된다고 딱 잘라 거절했고, 괴링은 Fw190 A-6까지만 제공할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괴링이 제공하겠다고 밝힌 Fw190 A-6은 주익 바깥쪽에 있던 MG FF 20mm 기관포를 MG151 20mm 기관포로 교체한 버전으로, A형의 최종 버전이라 할 수 있는 A-9는 카울링 상단에 MG131 2정, 주익 내측과 외측에 MG151 2문이 각각 탑재되었으며 엔진도 보다 강력한 BMW 801T를 장착해 전반적으로 성능이 업그레이드된 녀석이다.

이것을 빠른 속력을 가진 전술용 전폭기로 개량한 게 Fw190F, 장거리 전폭기로 개발한 게 Fw190G이며 Fw190의 기종 중에 가장 우수하다고 할 수 있는 고공 폭격기 요격용 버전인 Fw190D는 곧 출고를 앞두고 있다.

그래서 소련 대표단의 입에서 Fw190의 최신형 버전 F형을 원한다는 말이 나왔을 땐 다소 의아스러웠다.

Fw190은 이미 최종형 D형까지 나왔는데, 저들은 정보 수집이 늦었는지 F형이 최신형인 줄 잘못 알고 있었다.

저들이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는 것처럼 발언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그럴 가능성은 작아 보였다.

달라 할 것이면 최신형을 달라고 해야지, 굳이 이전 버전을 말해서 손해를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리고, 콕 집어서 Fw190만 말한 걸 보니 저들은 우리가 제트전투기도 개발 중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독일 내 소련의 첩보망은 어디까지 무너졌는지 알 수 있겠군. 실제 역사에서는 최전선의 독일 장군들보다 먼저 작전 계획서를 손에 넣었던 소련이 어쩌다가....

참, 원인이 바로 나였지? 잠시 깜빡했구만.

헷처, Fw190 A-6을 제공하는 대가로 나는 IL-2 슈토르모빅과 T-34를 요구했다. 아무래도 우리만 너무 손해보는 기분인지라, 최소한 이 정도는 받아와야지 싶었다.

그런데 이놈들, 내가 말하기 무섭게 생각 좀 해봐야겠다고 말을 흐리는 게 아닌가.

본인들이 먼저 말을 꺼내놓고 본인들이 얼버무리더니.

이럴 거면 뭐하러 말을 꺼낸 건지 원.

“총통 각하. 총통 각하께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무슨 부탁 말이오?”

회의가 거의 끝나갈 무렵, 보로실로프가 한 말이었다. 또 뭘 넘겨달라, 그런 부탁은 아니었으면 하는데.

“내일 독일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전차를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작년 겨울부터인가 올해부터 독일이 4호 전차보다 더 강력한 신형 전차의 양산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한 바 있어서 말이죠.”

이건 또 정확하게 알고 있군? ....아니지. 판터와 티거의 양산을 대대적으로 홍보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비밀로 한 것도 아니라 소련이 티거와 판터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해도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좋소. 내 그러리다.”

***

1941년 5월 20일

독일 쿠머스도르프 시험장

“자, 마음껏 보시구려. 독일을 자랑거리들을.”

“이것이 바로....”

“세상에.”

고대하던 판터, 티거와 마주하게 된 소련 대표단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 모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놀라움과 경이, 충격과 경악이 동시에 느껴지는 표정들이란.

크기 비교를 위해 가져다 둔 4호 전차와 비교하니 판터와 티거의 크기가 더욱 커 보이는 효과가 나왔다.

한동안 말이 없던 대표단은 정차된 전차들에 다가가 표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 전차의 이름이....?”

“이놈은 판터요. 정식 명칭은 5호 전차 판터. 장차 4호 전차를 대체할 독일의 주력 전차지.”

“판터. 판터라.”

보로실로프가 내가 말해준 이름을 되뇌다가 이내 판터의 주변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유심히 살폈다.

샤포시니코프도 넘치는 흥분과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보로실로프와 함께 전차 여기저기를 살폈다.

몰로토프도 이 신형 전차들에 관심이 지대한 듯 했지만, 앞의 둘과 달리 전차를 만지지도 않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외교에 몸담은 자와, 군에 몸담은 자들의 차이인가.

“총통 각하. 정말로 저들에게 티거와 판터를 보여주실 생각입니까?”

어제 회담이 끝나기 무섭게 카이텔이 불안한 눈초리로 물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두 전차는 독일의 최신형 무기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걸 소련에 쉽게 보여준다면 나중에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나라고 그 생각을 왜 안 했겠소. 하지만 판터와 티거의 존재가 완전한 비밀도 아니었고 이미 저들도 두 전차의 존재를 아는 이상 숨기거나 거절해봤자 의미가 없는 일이오.”

카이텔도 그렇고 브라우히치, 구데리안은 보여줘선 안 된다고 반대했지만 이미 허락한 것을 도로 취소했할 수도 없는 노릇.

이미 티거와 판터의 배치가 시작된 만큼 가까운 시일 내에 소련도 최소한 두 전차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게 될 테니 숨겨봐야 의미가 없었다.

실제로도 히틀러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앞둔 상태에서 독일을 방문한 소련인들이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전차를 보여달라는 요청을 그대로 들어줬었다.

그리고 숨겼다가 되려 의심 많은 스탈린이 이상한 생각이라도 하게 되면 골치 아파진다. 차라리 화끈하게 보여주는 게 낫지.

숨기는 게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 스탈린도 조금은 독일을 덜 경계하지 않겠나.

“이거이거, 보면 볼수록 무척 탐이 나는 물건들이군요. 할 수만 있다면 돌아갈 때 몇 대 훔쳐서 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하하! 우리 기술자들이 그 말을 들으면 아주 기뻐할 거요.”

***

1941년 5월 22일

소련 모스크바 크렘린 궁전

히틀러는 소련 대표단에 상당한 친절을 베풀었다.

그는 소련 대표단에 전차의 생산공장과 전투기들의 시연을 보여주었으며 모스크바로 떠나는 그들을 위해 성대한 환송회까지 열어주었다.

소련 대표단은 독일의 극진한 대우에 대단히 만족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의 시선을 보냈다.

이렇게까지 잘해주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불가침조약을 맺은 사이라곤 하나, 히틀러가 그들에게 보여준 친절한 태도는 역으로 숨겨둔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만들어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설령 가족이라도 완전히 믿어선 안 된다.

상호 간의 감시와 의심, 고발이 일상화된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어낸 자들답게 그들은 사소한 행위 하나조차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인지라, 쉽게 바꿀 수 없기도 했다.

모스크바로 돌아간 그들은 곧장 스탈린 앞에 출두해 독일에서 보고 들었던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보고했다.

스탈린은 의자에 앉아 연한 홍차를 마시며 측근들의 얘기를 경청했다.

그는 그라프 체펠린의 설계도를 얻은 것을 무뚝뚝한 말투로 칭찬했고, 동시에 히틀러 총통이 헷처와 Fw190을 양도하는 조건으로 소련이 보유한 T-34와 IL-2를 요구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무뚝뚝한 말투로 물었다.

“그래서? 받아들였소?”

“일단 거절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사실 스탈린은 히틀러가 T-34와 IL-2의 존재를 언급한 것에 대해 상당히 놀랐다.

두 장비의 존재는 독일에 비밀이 아니었나? 그런데 어떻게 히틀러가 알고 있는 거지?

‘....아무래도 정보가 어디에서 새고 있나 보군. 빌어먹을.’

스탈린은 저녁에 베리야를 불러 얼이 나갈 정도로 질책하기로 마음먹으면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히틀러 총통이 신형 전차를 보여달라는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에 대해선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오?”

“음....”

“그게....”

스탈린의 물음에 3명 모두 마땅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3명 중 스탈린과 가장 사이가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보로실로프가 말했다.

“숨겨둔 의도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저는 그가 우리에게 계산적인 호의를 보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계산적인 호의라고?”

“소비에트 연방은 독일에 매년 수많은 물자를 거의 무상에 가깝게 지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독일도 소련에 각종 기계류와 기술자들을 파견하고 있지만, 그래도 저희가 독일에 퍼주는 양에는 다소 미치지 못합니다. 히틀러 총통도 그것을 알고 있으니 보답하는 의미에서 호의를 보여준 게 아닌가.... 그렇게 추측하고 있습니다.”

“일리가 있군.”

속내를 알 수 없기로 유명한 히틀러라지만, 보로실로프의 추측대로 그가 보답 차원에서 호의를 베풀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도 아니면 단순한 변덕이라던가.

철저히 계산된 행동을 하면서도 그는 베를린 올림픽에서 자신과 하등 관계가 없고, 이득도 되지 않는 흑인과 동양인 선수와 만났다. 이번에도 그가 변덕을 부렸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의 행동으로 소련은 소문만 무성하고 실체는 자세히 알지 못했던 독일의 신형 전차들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행 비행기 안에서, NKVD 요원들은 자신들이 본 티거와 판터의 형상을 스케치하고 대략적인 크기를 추산해 수치로 기록해 간략한 보고서를 만들었다.

NKVD에서 만들어 올린 보고서에 첨부된 티거와 판터의 형상을 본 스탈린이 말했다.

“이 판터라는 전차는 우리의 T-34와 형상이 비슷하게 생겼군.”

독일의 신형 중전차 티거는 직각의 장갑판을 두르고 있어 4호 전차를 확대해놓은 것처럼 생겼지만, 판터는 T-34처럼 경사장갑을 채용해 멀리서 보면 서로 분간이 힘들 정도로 닮아있었다.

이 역시 T-34의 정보가 독일로 유출된 결과물이려나? 어느 것이 진실이든 간에 결코 좋은 현상은 아니었다.

신형 전차들의 크기가 어느 정도가 어떻게 생겼는지까지는 알아냈지만, 가장 중요한 제원은 알지 못했기에 대략적인 추측만 할 뿐이었다.

현재까지 소련이 판터와 티거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보는 두 전차의 주포 구경이 전부였다.

일단 4호 전차보다 더 강력할 터이니, 방어력도 그 이상일 터.

티거 전면부 장갑은 대략 100mm쯤 되는 것 같고 판터는.... 50mm? 60mm? 중형전차라 했으니 전체적인 방어력은 티거보다 떨어질 테지만, 차체 전면의 경사장갑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일단 100mm쯤 된다고 보는 게 맞으리라.

스탈린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T-34와 KV-1에 장착된 76mm 주포로는 정면은 어림도 없고 측면과 후면을 노려야겠구만.”

T-34와 KV-1에 장착된 76mm L-11 전차포의 위력이 너무 낮다는 게 지적되어, 길이를 늘이고 관통력을 키운 76mm F-34 전차포가 개발되었지만 이조차 티거와 판터를 정면에서 관통하기엔 한참 못 미치는 성능이었다.

그나마 T-34는 높은 기동성을 활용해 우회해서 공격하는 방법이라도 쓸 수 있지만 T-34보다 속력이 떨어지는 중장갑의 KV-1은....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해.’

스탈린은 76mm 주포의 부족한 관통력 문제 해결을 위해 개발된 57mm 주포를 떠올렸다. 57mm 73구경장 주포를 장착한 T-34, 일명 T-34-57은 500m에서 118mm 수직장갑을 관통하는 우수한 위력을 보여주어 육군 상층부의 기대를 받았지만, 소련의 기술력으론 생산이 무척 어렵다는 것과 비싼 단가, 57mm 유탄의 낮은 성능 등 여러 문제가 겹쳐 극소량만 생산된 상태였다.

하지만 티거와 판터가 등장한 이상 T-34-57의 높은 관통력은 숱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KV-3 역시 마찬가지. 76mm 주포를 사용하는 KV-1은 중전차인데 중형전차인 T-34와 화력이 동일하다는 것이 문제였고, KV-2는 152mm 주포를 탑재하여 매우 막강한 화력을 가지는 데 성공했지만 지나치게 거대화된 포탑과 53톤이나 되는 중량이 발목을 잡았다.

KV-3는 KV-1과 KV-2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107mm M-60 대전차포를 주포로 탑재하여 화력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장갑도 최대 120mm에 달해 방어력도 높고.

68톤의 중량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독일 전차들을 일격에 격파할 수 있는 화력과 안정적인 방호력을 얻을 수 있으니 나름 감내할만한 대가였다.

“T-34-57의 생산을 늘리고, KV-3도 연말이 되기 전에는 양산에 들어가야 하오. 그리고 쿨리크 원수가 말한 A-43의 개발은 어디까지 진행되었소?”

“프로토타입이 완성되어 현재 테스트 중이라고 합니다.”

쿨리크가 T-34에 대항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밀던 A-43은 원래대로라면 1941년 여름이 되기까지 목업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독소전쟁이 발발한 뒤부터는 개발이 중단되었다. 그러나 빨라진 독일 전차들의 성능 개량과 판터, 티거의 이른 등장은 역설적으로 A-43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원인이 되었다.

“쿨리크 원수에게 전하시오.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결과를 보길 원한다고. 마지막으로.... 히틀러는 소비에트 연방의 남하 정책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소? 그게 가장 궁금하구만.”

“히틀러 총통은 우리의 발칸반도 진출에 대해선 용인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내비쳤습니다. 하지만 중동과 인도양 진출에 관해서는 용인할 수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몰로토프가 대답했다.

“그런가, 음. 알겠소. 고생들 했을 테니 이만들 돌아가 보시오.”

“예, 서기장 동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