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틀러가 되었다-93화 (93/150)

< 우란프로옉트 >

전쟁에서 패배한 국가의 운명은 가혹한 법이다.

그것도 먼저 전쟁을 일으킨 국가라면 더더욱.

이탈리아는 트렌티노알토아디제와 이스트리아반도를 포함,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으로부터 할양받은 북부의 모든 영토를 독일에 할양했다.

이제는 독일 영토가 된 지역에 살던 이탈리아인들에겐 선택권을 줬다. 이 땅에 그대로 남을지, 고향을 떠나 ‘이탈리아’로 갈지.

선택은 자유였지만, 고향에 남을 생각이라면 독일어를 배우고 주기적으로 시험에 치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자 많은 이탈리아인이 가족과 함께 짐을 꾸려 고향을 떠났다.

독일어를 배우는 것도 보통 쉬운 일이 아니지만, 독일에서 받을 취급을 생각하면 차라리 이주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반면 1차대전 이전부터 이들 지역에 거주해오던 이탈리아인들은 고향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독일어에 익숙한 것도 있지만, 그들 입장에선 1차대전 이전의 생활로 되돌아간 것뿐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민이 아닌 독일 제3제국 국민이라는 점의 차이만 있을 뿐.

알바니아와 에티오피아는 독립을 쟁취했고, 독일과의 전쟁 기간 중 활약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이탈리아 해군은 건조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은 최신 리토리오급 전함 리토리오와 비토리오 베네토 두 척과 콘도티에리급 경순양함 네 척 그리고 구축함 일부를 독일 해군에게 인도했다.

그 대가로 이탈리아가 지불해야 할 배상금은 20년 이내로 25억 마르크 납부로 줄었으며, 리비아와 에리트레아, 소말릴란드의 보유도 허가받았다.

독일과 동맹을 맺고 전쟁을 일으켰다가 식민지 전체를 잃고 개털이 된 원 역사와 비교하면 그나마 나은 결말이지.

그럼에도 이탈리아 사절단의 얼굴에선 절망이 떠나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이들은 내가 아는 실제 역사를 모른다.

이탈리아가 원 역사에선 개털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면 기절초풍하겠군.

정전협정 문서에 서명을 끝내자마자 긴장이 확 풀리면서 성취감과 안도감이 물밀듯이 몰려왔다.

"드디어 전쟁이 끝났군요. 축하드립니다, 총리. 이걸로 유럽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참으로 기뻐할 일이지요."

서명을 끝낸 나는 웃으며 바돌리오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바돌리오는 복잡한 얼굴로 나와 악수했다.

"자, 이제 만찬장으로 이동하시지요. 여러분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음식이 있습니다."

"?"

협상장으로 이동한 이탈리아 사절단은 만찬장의 테이블에 놓인 음식의 정체를 보곤 바위처럼 몸이 굳어졌다.

테이블 위에 자리잡은 수많은 산해진미들 중에 가장 돋보이는 요리.

그 요리는 바로....

"하와이안 피자입니다!"

짜잔.

"하, 하와이안 피자....?"

이탈리아 협상단은 눈을 끔뻑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피자에 올라가는 재료라곤 토마토 소스와 치즈, 바질에 기껏해야 올리브나 살라미 정도만 생각하다가 뜬금없이 파인애플이 올라가리라곤 생각도 못했겠지.

"호, 혹시 하와이 요리입니까....?"

"아아. 이름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겠군요. 오해 마시길. 어디까지나 내 머릿속에서 나온 요리입니다. 하와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그냥 어감이 좋아서 붙인 겁니다."

이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곤 하는데, 하와이안 피자는 하와이와 연관성이 없다. 오히려 독일과 관련이 있다.

하와이안 피자의 창시자인 그리스계 캐나다인 샘 파노풀로스는 1955년 독일의 요리사 클레멘스 빌멘로트가 TV에서 선보인 '토스트 하와이'에 영감을 받아 하와이안 피자를 만들어 1962년에 세상에 선보였다.

즉, 하와이안 피자의 원조는 자그마치 독일 요리란 말씀!

"자아, 뜨거울 때 한 번 드셔보시죠. 원래 피자는 식으면 치즈가 굳어져서 맛이 없습니다."

"고, 고맙습니다."

바돌리오와 이탈리아인들은 떨떠름한 것을 넘어 진심으로 충격을 받은 모양새였지만, 내가 하와이안 피자를 권하자 억지미소를 지으며 피자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한입.

"맛이 어때요? 먹을만 한가요?"

"어, 음... 예, 맛있습니다...."

"그거 참 다행이군요. 오늘을 위해 특별히 고안한 요리인데, 혹시 입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아닙니까! 자아, 더 드시지요!"

나의 권유 아닌 권유에 비장한 얼굴로 하와이안 피자를 먹는 이탈리아 사절단을 괴링과 리벤트로프는 딱하다는 듯이 응시했다. 카이텔은 아예 고개를 돌렸고.

하와이안 피자 맛있는데.

***

알바니아와 에티오피아 주둔군은 즉시 두 나라에서 철수하고, 배상금 대신으로 보유 중인 무기를 독립하는 두 나라 군대에게 넘기기로 했다.

그 과정을 감독하기 위해 독일과 그 동맹국-슬로바키아, 스칸디나비아-군대에서 감시단을 파견할 예정이다.

이탈리아 놈들이 무기를 바닷속에 수장시키거나, 전쟁에서 진 화풀이로 주민들을 학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독일, 일본군에 비해선 그나마 신사적이라는 평을 받던 이탈리아군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도 틀린 말이다.

영국군이나 미군을 상대로 저지른 악행이 거의 드물어서 전후 연합국에선 관대한 처분을 받아서 그렇지, 리비아와 에티오피아, 발칸반도에서 이탈리아군은 숱한 학살을 저질렀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놈들이 무슨 빌미로 깽판을 칠지 모르니 잘 감시해야지.

독일과 강화한 이탈리아는 곧이어 유고슬라비아와도 강화조약을 맺었다. 즉시 전쟁을 멈추고 포로를 교환하며 경제교류를 재개하는 대신 자다르는 유고슬라비아 영토가 되었다.

유고 정부는 자다르 획득 소식을 대대적으로 선전했지만 짧은 전쟁 기간 동안 유고군에서 7천 명이 넘는 사상자가 나온 것을 감안하면 상처뿐인 승리였다.

포로가 된 이탈리아군 16만 명 중 부상자들은 즉시 석방시키라고 카이텔에게 지시했지만, 그외 포로들은 한동안 붙잡아두기로 했다.

역사에서 소련이 자국 도시들을 재건하는데 독일군 포로들을 적극적으로 투입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탈리아군 포로들을 공습으로 파괴된 오스트리아 도시들을 재건하는데 투입할 계획이다.

자기들이 때려 부쉈으니, 자기들이 책임지고 만들어야지.

이탈리아에게 나라를 빼앗긴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와 알바니아 국왕 조구 1세는 공교롭게도 둘 다 영국으로 망명했는데, 정작 이탈리아가 영국과 동맹 관계가 되면서 이들의 입장은 매우 난처해지고 말았다.

영국 정부는 이들을 추방하거나 이탈리아로 송환하는 짓을 하지 않았지만, 반이탈리아 선전활동을 금지하고 감시를 붙이는 등 망명정부의 행동에 대해 일일이 제동을 걸었다.

나라를 빼앗긴 것도 서러운데, 망명생활을 하는 곳에서조차 노골적으로 푸대접을 받기 시작하자 절망한 둘은 미국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도 고려했다.

그러던 와중에 전쟁이 독일의 승리로 끝나게 되면서 이들은 다시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둘은 조국으로 돌아가기 전 독일에 들러, 내게 조국을 해방시켜준 것에 대한 감사인사를 전했다.

특히, 이탈리아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에티오피아의 셀라시에는 내게 특히나 고마워했다.

“고맙습니다, 총통! 덕분에 내 조국과 우리 국민들은 노예에서 해방되어 다시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고통받는 에티오피아 국민들을 위해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6.25 전쟁에 자신의 친위대를 보내 멸망 직전의 우리나라를 구한 것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고.

셀라시에는 내 손을 잡고 연신 흔들며, 조국에 돌아가는 즉시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내 이름을 딴 광장과 거리를 만들겠노라고 약속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나는 부담스럽다며 사양했지만, 셀라시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감사 인사는 여기까지였고, 그 뒤부터는 진지하고 은밀한 대화가 이어졌다.

사람들은 보통 에티오피아를 세계 최빈국 중 하나 정도로 알고 있지만, 사실 에티오피아는 금, 철광석, 천연가스, 탄탈룸 등 수많은 자원이 파묻혀 있는 나라다.

단지 나라에 돈이 없어서 광물들을 활용하지 못할 뿐.

나는 에티오피아군의 현대화를 돕는 조건으로 독일 기업들이 에티오피아에 진출해 광물을 채굴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고, 황제는 내 요구를 흔쾌히 수락했다.

전쟁을 일으킨 무솔리니는 여전히 연금 상태이며, 선봉장으로서 독일 공격을 지휘한 발보, 그라치아니는 무솔리니처럼 자택에 연금되었다.

이탈리아 정부에게 요구하여 그들의 신병을 인도받아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이 일부 장성들에게서 나왔지만, 나는 거절했다.

비록 전쟁에서 졌다지만 여전히 이탈리아에는 무솔리니의 신봉자들이 적지 않은 데다 이탈리아 정부 역시 패전한 자국 장군들을 독일로 인도하는 것에 긍정적일 리 없었다.

역으로 신병 인도를 대가로 배상금 할양을 요구하면 뭐라고 답하게. 쥐도 궁지에 몰리면 사람을 무는 법인데, 이탈리아를 너무 몰아붙였다간 괜히 귀찮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따라서 기각.

이탈리아 문제는 이쯤 끝내고, 그 다음 문제로 넘어갈 차례다.

‘한낱’ 이탈리아 따위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로.

***

1940년 7월 25일

독일 베를린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내가 연구소에 들어섰을 때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과학자 동료들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모두 ‘우란프로옉트’에 참가한 과학자들 중 핵심 멤버들이었다.

우란프로옉트(Uranprojekt).

나치 독일의 핵무기 개발 계획.

핵물리학을 열등한 유대인들의 학문이라며 경멸하던 나치였지만, 모순적이게도 핵분열로 발생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에너지를 무기로 활용하기 위해 핵개발을 시작했다.

제아무리 ‘유대인의 학문’이라지만, 그 결과물만 놓고 보면 이보다 더 끌리는 것도 없거든.

기존의 재래식 무기들이 새총과 돌멩이로 보여질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가진 폭탄이라니, 얼마나 뽕차냐? 특히나 늘 크고 강력한 무기에 환장했던 나치라면 더더욱 끌릴 수밖에.

그러나 연합국의 지속적인 방해공작과 핵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의 능력 부족, 자원 고갈로 개발은 지지부진했고, 결국 나치는 핵무기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패망을 맞이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비록 히틀러의 몸뚱이에 갇힌 신세지만, 정신은 대한민국 국민 이규태가 아닌가.

나는 홀로코스트를 저지하기 위해 독일 전역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를 적극적으로 배척하고 이를 박멸하기 위해 노력했고, 덕분에 역사대로라면 독일을 미국과 영국에 정착하여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했을 과학자들이 자발적으로 독일에 남게 되었다.

그 결과, 우란프로옉트는 1937년 겨울부터 가동될 수 있었다.

내가 회의실에 들어서자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과학자들은 일제히 기립했다.

회녹색 군복을 입은 장군들의 기립에는 익숙하지만, 흰 가운을 입은 과학자들의 기립에는 익숙하지 않았기에 살짝 당황스러웠다.

“굳이 기립할 필요까지야. 다들 편하게 있어요.”

내가 손을 내저어 착석하란 신호를 보내자, 학자들은 엉거주춤하며 의자에 앉았다.

하얀 가운 차림의 학자들과 대비되는 흑색 제복을 차려입은 건장한 SS 병사 5명이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나는 학자들의 호위를 위해 그들을 배치했지만, 정작 학자들은 SS 병사들의 존재에 불편함을 느끼는 눈치였다.

누군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들을 감시하는 존재들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사실 그게 아주 틀린 것도 아니었고.

“자네들은 나가 있어도 좋네. 수고했어.”

퇴실 명령이 떨어지자 SS 호위대는 즉각 자리를 떴다.

나는 크라우제와 귄셰에게 지시해,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어느 누구도 안으로 들여보내지 말라고 지시했다.

경호병력을 모두 내보내자 회의실에는 나와 과학자들만 남게 되었다. 나는 가장 먼저, 두터운 콧수염을 기른 학자에게로 다가갔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인슈타인 박사.”

“영광입니다, 총통 각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옅게 웃으며 나와 악수했다.

그는 내게 자신의 사연을 담은 절절한 편지를 보냈었고, 나는 그에게 우란프로옉트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내 확답을 받은 뒤였지만, 이렇게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이젤베르크 박사도 오랜만이오. 3년 만에 만나는군.”

“맞습니다, 총통 각하. 기억하고 계셨군요.”

아인슈타인 옆자리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는 우란프로옉트가 갓 시동을 걸었을 때 회의를 위해 한 번 만난 적 있었다.

나머지 과학자들 모두 아인슈타인처럼 오늘 처음 만나는 이들이었다.

나는 회의에 참석한 학자들 한 명 한 명의 얼굴들을 눈여겨보았다.

오토 한, 막스 플랑크, 발터 보데, 요한 폰 노이만(미국으로 이민가지 않아서 이름을 ‘존’으로 개명하지 않았다), 클라우스 클루시우스, 막스 보른 등등.....

모두가 현대 과학사에 큰 획을 그은 거물들이다.

개중에는 독일인이 아닌 이들도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에드워드 텔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텔레르 에데와 레오 질라드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실라르드 레오, 폰 노이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에 태어난 헝가리인이었고, 닐스 보어는 덴마크인이었다.

학자들 중에는 여자도 있었다. 원래 역사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스웨덴으로 망명한 리제 마이트너가 그 주인공이었다.

그녀는 폰 노이만과 조카인 오토 프리슈 사이에 다소곳하게 앉아있었다.

오늘 그들과 만난 것은 우란프로옉트가 어디까지 진척되었느냐에 대한 현황 보고와 연구 중에 생긴 고충 및 건의사항을 경청하기 위해서였다.

아인슈타인이 우란프로옉트에 참가한 학자들을 대표해서 내게 연구 진척 사항에 관해 설명했다.

“전에 총통께서 말씀하셨던 플루토늄이 우라늄 235보다 효율적이라는 것과 중수 외에 감속재로 흑연을 사용하는 방안에 대해선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현재 흑연 원자로를 제작 중이며 곧 제작이 마무리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흠.”

우란프로옉트에 참가했던 독일 과학자들은 잘못된 실험으로 흑연은 감속재로 사용할 수 없으니 오직 중수만 사용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이들의 실수를 지적했고,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학자들도 실험 결과를 알게 된 뒤엔 나를 대하는 눈빛이 달라졌다.

“총통께선 어떻게 저희도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어떻게 알고 계셨습니까?”

“영국에 잠입한 SD 요원들이 얻어낸 정보요. 어떻게 얻어 냈는지에 대해선 말할 수 없으니 이해해주시오.”

“그렇습니까?”

아인슈타인은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정보의 출처가 어디인지에 대해서 캐묻지 않았다.

이들에게 핵개발에 필요한 대표적인 지식 몇 가지를 전달한 것은 나지만, 어디까지나 나는 과학자가 아닌 평범한 일반인이었기에 지식의 출처가 어디인지 캐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미래에서 왔고, 책과 인터넷에서 본 내용을 알려준 것이라고 대답할 수 없잖아.

따라서 나는 내 지식의 원천이 드러나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비슷한 질문이 들어오면 다음과 같은 말로 원천 차단하곤 했다.

아인슈타인은 지난달에 제작한 1.5m 크기의 사이클로트론(Cyclotron, 고주파의 전극과 자기장을 사용해 이온을 가속시키는 입자가속기)을 이용한 실험 결과에 대해 보고했고, 어디서 애를 먹었고, 어디에서 해법을 찾았으며 어느 부분을 중점적으로 연구해야 하는지 장장 3시간 동안 설명했다.

3시간 동안 그는 힘든 구석 하나 없이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는데, 확실히 천재는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문과가 아니라 이과였다면, 지금의 설명을 보다 더 잘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

길고 복잡하면서도 장엄했던 보고가 끝나자 나는 진심을 담아 박수를 쳤다. 아인슈타인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훌륭한 설명이었소. 그런데 질문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말씀하시지요.”

“박사가 생각하기에, 우란프로옉트가 그 결실을 맺으려면 앞으로 몇 년이 더 소요된다고 봅니까?”

과학적 원리니 발견이니 하는 것들은 솔직히 말해 전혀 관심없다. 내 관심사는 오직 핵폭탄이 언제 완성되냐, 그뿐이다.

내 질문에 아인슈타인의 두꺼운 콧수염이 꿈틀거렸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하이젠베르크와 시선을 교환했다.

“냉정하게 말씀드리자면, 현재 진행속도로는 최소 5년은 더 소요될 겁니다. 그보다 더 늦어질수도 있고요.”

“5년.”

최소 5년이라....

그나마 벨기에에서 확보한 천연우라늄 4천 톤 덕에 개발 기간이 단축된 게 이 정도다.

전차나 전투기를 개발하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는 게 바로 핵개발이다.

돈지랄로 유명한 미국조차도, 맨해튼 프로젝트가 결실을 맺기까지 6년의 개발 기간과 13만 명에 달하는 인력, 20억 달러-21세기 가치로 환산하면 330억 달러, 우리나라 돈 39조 9600억원-라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서 겨우 핵무기를 만들었다.

천하의 미국조차 부담이 될 정도의 엄청난 비용과 인력을 들여 간신히 개발한 것이 바로 핵무기였다.

그에 비해 미국보다 경제 규모가 더 작은 독일이라면 그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이 당연했다.

토트와 슈페어는 우란프로옉트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핵개발에 드는 비용이 너무 많다며 우려를 드러냈고, 샤흐트는 아예 게거품을 물기까지 했다. 전쟁도 끝난 마당에 이 무슨 낭비냐면서.

경제회복에 전념해도 모자랄 판에, 언제 결과물이 나올지 모르는 불확실한 실험에 막대한 예산을 퍼붓고 있으니 경제학자인 샤흐트가 보기엔 어처구니없는 뻘짓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어도, 내겐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다.

언제 다시 전쟁이 터질지도 모르는 불안감.

프랑스, 이탈리아는 리타이어했지만 영국은 여전히 숨통이 붙어있으며 소련도 마찬가지. 그리고 가장 큰 위험대상인 미국 역시 건재하다.

전쟁 끝났으니 이제 느긋하게 살자며 마음 놓고 있다가, 저 세 나라가 갑자기 공격해오면? 셋 중 어느 한 나라와 싸우는 것도 고역인데, 3개국을 동시에 상대하게 된다면 독일이 버틸 수나 있을까?

그렇기에 나는 유사시 최후의 대비책으로 핵무기를 손에 넣고자 했다.

뉴욕이건 런던이건 모스크바건 어느 도시도 한 방에 날려버리는 게 가능한 초강력 폭탄이 있다면, 어느 나라도 감히 전쟁을 걸어오려는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할 것이다.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해라(Si vis pacem, para bellum). 로마의 병법가 푸블리우스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가 남긴 말이다.

오래오래 살고 싶으면, 미리미리 대비를 해둬야지.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환상 하나만 가지곤 오래 못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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