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만의 끝 (2) >
1940년 7월 1일
이탈리아 트레비소
“트레비소에 어서오시지요, 치아노 장관.”
“······오랜만에 뵙습니다.”
SM.79 수송기에서 내린 자신에게 능청스레 인사를 건네는 리벤트로프를 치아노 백작은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그러나 리벤트로프는 치아노의 시선이 오히려 재밌다는 듯이 입가의 미소를 한껏 키울 뿐이었다.
트레비소는 이탈리아의 도시였지만, 지금은 독일군의 수중에 있었다.
리벤트로프는 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치아노에게 트레비소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인사말을 건넸고 자신을 깔보던 치아노의 기분을 한껏 구기는데 성공했다.
이탈리아는 휴전회담 장소로 스위스를 원했지만 독일의 거부로 회담 장소는 트레비소로 정해졌다. 독일이 회담 장소로 트레비소를 고집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회담의 주도권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을 이탈리아에게 인식시키기 위함과 이탈리아 협상단에게 파괴된 자신들의 도시를 보여줌으로써 절망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다.
격렬한 시가전과 포격, 공습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바르샤바에 비하면 양반이지만, 트레비소도 적잖은 손상을 입었다.
화재로 벽이 시꺼멓게 그을린 건물들이 즐비한 광경에 이탈리아 협상단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리벤트로프는 충격에 빠져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이탈리아 협상단에게 조소의 시선을 보내며 그들을 회담장으로 안내했다.
회담장은 트레비소의 국가 파시스트당 당사 건물로 사용되던 으리으리한 고급 저택이었다.
공습과 이어진 전투에서도 우연히 파시스트 당사는 손상을 거의 입지 않았고, 독일군에게 접수된 뒤 회담장으로 사용되었다.
회담은 지체없이 진행되었다.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독일 측은 협상을 구걸하러 온 이탈리아 외교관들의 사정 따윈 봐주지 않고 그들을 몰아붙였다.
“휴전 조건으로 트렌티노알토아디제의 할양을 거셨던데······ 그게 전부입니까?”
리벤트로프의 말에 치아노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비웃음이 섞인 탄식이 날아왔다.
“아니, 귀국은 겨우 이 정도로 우리가 만족하리라고 생각하셨소?”
그럴 리가.
리벤트로프보다 먼저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치아노는 독일이 결코 이 정도 선에서 만족하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았다.
국왕을 제외한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지만, 국왕의 명령을 절대적이었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봐도 터무니없는 조건의 휴전 제안을 독일에게 보냈다.
그 결과 돌아오는 것은 상대의 조소와 비아냥이었다.
“총통께서 얼마나 분노하셨는지 아시련지 모르겠소. 전쟁을 멈추자는 게 아니라 계속 하자는 것으로 받아들이셨다, 이 말입니다.”
치아노는 손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을 원합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해보시오.”
리벤트로프는 비릿한 웃음을 날리며 다소 거만한 목소리로 독일 측 요구사항들을 나열했다.
“이탈리아가 강탈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를 모두 할양하고, 알바니아와 에티오피아를 즉각 독립시키며 독일에 배상금으로 40억 마르크를 지불할 것.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해군이 보유한 함선 일부를 독일 해군에게 인도할 것. 이상이오.”
리벤트로프의 말이 끝나자 치아노는 할 말을 잃었다는 듯이 눈만 깜빡거렸다.
동석한 이탈리아 협상단 인원들도 독일의 요구를 듣고 일제히 경악했다.
그들을 지켜보는 독일 측 인원들이 은은한 웃음을 띤 것과 대조적이었다.
“아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요!? 우리 이탈리아더러 그냥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지 않소!”
“전쟁은 당신들이 일으켰고, 전쟁에서 졌으니 당연한 거 아니오? 그리고 총통의 아량으로 리비아와 에리트레아, 소말릴란드는 남겨두기로 하셨소, 재군비 역시 막지 않겠다고 하셨고. 이 정도면 충분히 관대한 조건 같소만?”
당황한 나머지 말이 차마 나오지 않는 치아노에게 리벤트로프는 속사포처럼 말을 이어갔다.
“협상을 하든, 안 하든 그건 당신들의 자유요. 대신 그만한 책임도 따르는 법이지. 전쟁이 계속되면 우리의 요구는 더 커지지 결코 더 줄어들지 않을 것이오. 그 사실 하나는 명심하시길 바라오.”
“무, 무슨 말을······.”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군. 당신은 이탈리아 북부가 독일의 영토가 되거나, 통일한 지 100년도 채 되지 않아 나라가 다시 남북으로 나뉘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거요? 그 꼴을 보고 싶지 않거든, 알아서 잘 판단하시오.”
***
회담은 시작한 지 30여 분 만에 종료되었다. 양측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제시한 조건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회담이 파토나자, 리벤트로프는 즉각 베를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총통에게 협상 결렬 소식을 알렸다.
-기회를 줘도 끝까지 제 무덤을 파는군. 미련한 족속들 같으니라고.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알면서 뭘 묻나. 자기들이 살기 싫다는데, 살려둘 필요가 없지.
총통의 말을 들은 리벤트로프는 자동으로 리히트호펜을 떠올렸다. 총통 앞에서 로마 폭격의 필요성과 정당함에 대해서 역설하던 그의 모습을.
간만에 로마가 따뜻해지겠군. 따뜻해서 죽고 싶을 정도로 말이야.
***
1940년 7월 3일
이탈리아 로마
공습경보가 울렸을 때, 마리사 페르드로는 머리를 감고 있었다. 그녀는 항상 잠을 자기 전에 머리를 감는 습관이 있었다.
처음에는 공습 대비훈련인 줄 알았다.
전쟁이 격화되면서 로마 시민들은 자주 훈련을 접하게 되었다. 마리사 외에도 수많은 로마 시민들이 그녀처럼 훈련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확성기에서 실제상황임을 알리는 다급한 목소리가 나오자 사람들은 일제히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공습경보가 울린 시각은 새벽 2시.
대다수의 사람들이 침대에 누워있을 시간대였다. 독일군은 바로 그때를 노려 로마를 공습했다.
마리사는 황급히 옷을 걸친 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항상 소지하고 다니는 귀중품을 든 손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가로세로 25cm 크기의 가방 안에는 그녀가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금반지와 목걸이, 자잘한 장신구가 들어있었다.
방공호로 쓰이는 주택가 지하실에 도착한 마리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세 아이의 손을 잡은 부부가 도착했고,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앞에서 노점상을 하는 스페인 남성이 지하실에 들어왔다.
레스토랑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마리사는 스페인 남성이 파는 보카디요(Bocadillo, 스페인식 샌드위치)와 가스파초(Gazpacho, 스페인식 차가운 수프)를 자주 사먹었기에 그 남자를 알고 있었다.
정작 스페인 남자는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이외에도 자물쇠 수리공으로 일하는 중년의 배불뚝이 남성과 남편만큼이나 뚱뚱한 그의 아내, 대학생이라는 이유로 징집이 면제된 22살의 젊은 남자, 꽃집에서 일하는 17살 소녀와 그녀의 두 여동생, 마지막으로 에티오피아 전장에서 오른팔을 잃은 전직 하사관이 지하실에 들어왔다.
좁은 지하실은 금방 사람들로 가득 찼다.
“문 닫아!”
이미 지하실이 가득 찼기에 사람들은 문을 걸어잠궜다. 문을 닫고 얼마 뒤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문을 열어달라는 다급한 외침도 함께 들렸다.
마리사는 심장이 옥죄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그녀도 사람들 때문에 갑갑하다고 느낄 정도로 지하실 내부가 좁았기에 차마 문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남자는 문을 열어달라고 사정하다가 이내 거친 욕을 내뱉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직후, 첫 폭음이 들렸다.
“폭격이 시작됐군.”
마리사의 옆에 선 자물쇠 수리공이 중얼거렸다. 폭음은 끊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훌쩍거리자 부부가 아이들을 어르고 달랬다. 언니의 손을 잡은 5살 꼬마아이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니, 우리 지금 뭐하는 거야?”
“나쁜 사람들을 피해서 숨어있는 거야.”
“나쁜 사람들?”
“응.”
“그 사람들이 누군데?”
“당연히 독일 놈들이지.”
이번에는 오른팔이 없는 상이용사가 대신 말을 받았다.
“독일 놈들이 폭탄을 떨어뜨리고 있어서 이렇게 숨어있는 거란다, 애야.”
“독일? 그 사람들이 왜 폭탄을 떨어뜨리는데요?”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 아이는 독일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전직 하사관이 이를 갈며 이야기했다.
“그야 우릴 죽이고 싶어하기 때문이지.”
“왜 우릴 죽이고 싶어하는 거죠?”
“독일 놈들은 야만인들이니까. 피부만 하얗지, 실상은 깜둥이 놈들과 다를 바 없는 놈들이야. 개새끼들.”
“아이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수리공의 아내가 하사관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하사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못할 말 했수? 지금 우리가 여기서 이 고생을 하는 게 다 누구 때문인데. 전부 다 망할 독일 놈들 때문 아니오.”
하사관이 소매를 걷어 오른팔의 절단면을 보여주었다.
“그놈들이 깜둥이들에게 무기를 지원하는 바람에 나는 오른팔을 잃었지. 아직도 그 일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고.”
“그만들 합시다. 애들이 무서워하겠소.”
수리공이 나서서 사람들을 말리자, 하사관은 소매를 내렸다.
그때 이전보다 훨씬 큰 폭음이 들렸다.
방공호가 흔들거릴 정도의 거대한 진동도 함께 느껴졌다.
겨우 달랬던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하사관이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제법 가까운 곳에 떨어졌나보군.”
스페인 남성은 눈을 감고 무어라 중얼거렸다. 마리사는 남자가 기도문을 읊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폭음은 끊이질 않았다. 이따금씩 들려오던 대공포 소리는 어느샌가 들리지 않게 되었지만, 폭음은 끊길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리사는 슬슬 다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되는 거야?”
담배라도 피울 수 있었다면 한결 나았을 텐데.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담배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주위를 슬쩍 둘러보니 자신 말고도 담배를 피우고 싶어하는 듯한 사람들이 몇 명인가 보였다.
훌쩍이는 아이를 겨우 달래고 있는 남자가 그랬고, 독일군을 욕하던 하사관이 그랬다.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하사관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런데 담배를 문 뒤에도 주머니를 한참 뒤지더니, 이내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성냥개비를 깜빡한 모양이었다.
“아가씨, 불 있수?”
“안타깝게도 없어요.”
마리사는 고개를 저었다. 성냥을 가지고 있었다면 자신도 피우게 해달라고 말했을 테지만, 그녀도 가진 게 없었다.
“환장할 노릇이군. 위에선 독일 놈들이 폭탄 떨어뜨리는 중이고, 여기선 담배도 못 피우고······ 꼬여도 아주 제대로 꼬인 날이야. 젠장할.”
“무솔리니, 그 광대 놈이 하는 말만 믿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죠.”
이제까지 조용히 구석에 서 있던 대학생이 뇌까렸다. 그러자 하사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기 샌님? 방금 뭐라고 지껄인 거야?”
“무솔리니만 아니었어도 이 꼴이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이 빨갱이 새끼, 감히 존엄하신 그분께 무슨 말이야!!!”
하사관은 자신의 부모가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소리를 질렀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폭음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여동생들은 언니의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하사관이 주먹을 치켜들자, 수리공 부부가 하사관의 앞을 가로막았다.
“왜들 이래요!”
“비키쇼! 저 좆같은 빨갱이의 면상을 묵사발로 만들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으니까!”
대학생은 왜소한 체격에 팔도 나무 막대기마냥 가늘었지만, 하사관을 상대로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좀 하세요! 당신 팔이 날아간 건, 독일인들이 에티오피아에 무기를 팔아서가 아니라 무솔리니가 당신을 전장으로 보내서입니다! 아직도 그걸 모르겠어요? 언제까지 스스로를 속이면서 살 겁니까?”
“이 씹새끼가 보자보자하니까 진짜!”
“그만들 하세요!”
보다못한 마리사도 나서서 둘을 중재했다.
수리공 부부를 뿌리치고 앞으로 달려나간 하사관이 주먹을 휘두르려는 순간, 어마어마한 진동이 지하실을 덮쳤다.
지하실에 있는 모두가 넘어질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꺄아악!”
“으헉!”
순식간에 서로 뒤엉킨 사람들의 입에서 비명과 신음이 흘러나왔다.
넘어질 때 팔꿈치를 바닥에 부딪힌 마리사는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물이 쏟아졌다.
폭탄의 충격으로 지하실 벽이 무너졌고, 무너진 벽을 통해 망가진 수도관에서 뿜어져나온 물이 쏟아진 것이다. 물은 30초도 채 되지 않아 허벅지 높이까지 차올랐다.
마리사는 서둘러 출입구로 향했다. 밖에선 아직 폭음이 한창이었지만, 지하실에 그대로 있다간 꼼짝없이 물귀신이 될 판이었다.
“어···? 어!?”
문손잡이를 돌렸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다시 손잡이를 돌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 사이 물은 허벅지를 넘어 가슴팍까지 차올랐다.
기도문을 읊던 스페인 남자가 달려와 손잡이와 씨름하고 있는 마리사를 밀치고 손잡이를 돌렸다.
역시나 열리지 않았다.
“뭐해! 문 안 열고!?”
“무, 문이 안 열려요!”
“뭐라고?!”
사람들이 몰려와 손잡이를 돌렸지만 문은 벽과 완전히 하나로 이어진 것마냥 열리지 않았다. 당황한 하사관이 문을 발로 걷어찼지만, 흠집조차 생기지 않았다.
벽이 무너질 때, 문틀도 충격을 받아 찌그러지면서 문이 완전히 압착되고 만 것이었다.
물은 어느새 목젖까지 차올랐다. 문은 여전히 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엄마아아!!!”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주먹으로 문을 두들겼다. 강철로 된 문은 끄떡도 않았다.
물이 천장에까지 차오르자, 사람들은 이제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마리사는 폐가 타오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죽음의 위기를 직감한 몸이 필사적으로 산소를 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문이 열린 것은 마리사의 몸부림이 멈추고 꼬박 하루가 지난 시점이었다.
***
1940년 7월 4일
독일 베를린 신 총통관저
‘로마는 불타고 있다.’
리히트호펜이 내게 보낸 보고서의 내용은 간결명료했다. Fw 200, He 177 중폭격기 120대를 동원해 로마를 폭격한 결과, 로마는 밤새도록 불타올랐다.
이번 공습에서 격추당한 폭격기는 단 3대. 대공포화와 적기에 의해 손상을 입은 폭격기는 14대로, 수리만 끝나면 다시 실전투입이 가능한 것들뿐이다.
“이탈리아의 피해는?”
“아직 확인 중입니다만 적어도 6천 명 이상은 사망했으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6천 명이라. 어마어마한 수로군.”
그러게 쓸데없는 자존심 세우지 말고 프랑스처럼 진작 항복했어야지. 되도 않는 허세나 부리면서 시간 질질 끄니까 이런 꼴을 당하는 거다.
나는 이탈리아에게 항복을 거부할 경우 다시 로마를 폭격하겠다고 협박문을 보냈다.
이 다음번에는 더 많은 폭격기들을 동원해서!
이탈리아로부터의 답장은 없었지만, 놈들이 바지에 오줌을 지렸을 것은 확실했다.
지금쯤이면 놈들도 존나게 고민하고 있겠지. 항복해서 개털이 되느냐, 국토 전체가 불바다가 되느냐.
로마 말고 플로렌스, 라벤나, 볼로냐 같은 도시들도 열심히 폭격을 해대느라 독일과 점령지 전역에 있는 폭탄공장들은 밤낮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토트와 슈페어의 노력 덕에 폭탄 생산량은 순조로웠지만, 토트는 폭탄 소모량이 너무 많다며 소도시들에 대한 폭격은 당분간 중단하고 대도시들만 집중적으로 폭격하는 것이 어떻느냐는 의견을 냈다.
꽤 합리적인 의견이라 생각되어 괴링과 베버, 밀히, 케셀링, 리히트호펜을 불러모아서 말했더니 즉각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다.
“절대 안됩니다, 총통 각하! 이제 막 이탈리아 놈들의 콧대를 꺾어놓았는데, 그랬다간 적들이 피해를 회복할 시간을 주게 될 겁니다!”
리히트호펜이 먼저 반대를 표명했고, 베버와 밀히가 리히트호펜을 지지했다. 괴링과 케셀링은 토트의 의견을 지지했다.
“굳이 그럴 필요 있나? 듣자하니 카르피, 피덴차, 크레모나 같은 소도시들은 워낙 피해가 커서 더 이상 폭격할 목표물이 남아있지 않다고 하는데. 이미 박살이 난 곳을 계속 때려봤자 폭탄만 낭비하는 꼴이네. 폭탄을 아껴서 제노바 같은 주요 도시들을 추가적으로 타격하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네만.”
괴링의 지적을 리히트호펜은 좀처럼 반박하지 못했고, 결국 토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한 달 동안은 대도시들만 폭격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공군 문제는 일단락되었으니 다음은 육군 차례.
라이헤나우가 설명하길, 아군은 포 강 유역에 도달했으며 이탈리아군은 방어선을 형성하여 저항 중.
“포강을 도하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소?”
“이틀. 늦어도 닷새 안으로 포강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길까.
이탈리아군은 나름 혼신의 힘을 다해 방어 중이지만, 이 정도론 천하의 독일군을 막을 수 없다.
유럽 최강이라 자부하던 그 프랑스 놈들도 깨졌는데, 이탈리아 놈들이 어떻게 막겠어?
마지막으로 라이헤나우는 이스트리아 반도를 사수하던 이탈리아군이 오늘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했다고 알렸다.
“이탈리아군의 항복 소식을 들은 유고군이 진격을 시도하다가, 이탈리아군에게 격퇴되었습니다. 유고군과 교전을 마친 이탈리아군 병력들은 아군이 오자 곧바로 투항했답니다.”
“하하, 이탈리아 녀석들. 꼴에 자존심은 지켰구만.”
이번 일로도 배운 게 없는지, 아니면 오기가 생겼는지 유고슬라비아는 우리에게 이스트리아 반도를 공동으로 관리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해왔다.
비록 정식으로 동맹을 맺은 관계는 아니지만, 이탈리아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있으니 사실상 동맹이 아니냐면서 말이다.
나는 제안을 가장한 유고슬라비아의 구걸을 단칼에 거절했다.
아군에게 처맞아서 반병신이 된 군대를 상대로도 졸전이나 벌이던 것들이 어떻게든 숟가락 올려보겠다고 나대는 꼴이라니. 같잖아서 말이 안 나온다.
“이스트리아 반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소. 즉, 게르만 민족의 고유의 영토란 말이지. 그런 귀중한 땅을 유고슬라비아 떨거지들에게 꽁으로 넘길 수 없지. 내 말이 틀렸소?”
“매우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게르만족의 땅은 게르만인이 가져야지요.”
현 유고슬라비아의 실질적인 통치자 파블레 왕자는 독일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 모양이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실제 역사에서도 히틀러가 먼저 친하게 지내려고 했지만, 폭동까지 일으키며 독일과의 동맹을 결사반대했던 게 유고 국민들이다(정확히는 세르비아인들).
애초에 저 나라 국민들이 우릴 싫어하는데, 내가 뭣하러 친하게 지내야 해? 그렇다고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독일과 유고의 관계는 지금이 가장 적당했다. 동맹도, 적국도 아닌 아무것도 없는 사이.
그게 서로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더 옳은 선택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