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만의 끝 (1) >
1940년 6월 29일
이탈리아 로마
베네치아와 베로나를 비롯한 북동부 도시들이 대거 독일군에게 함락당하고, 이탈리아 경제 중심지인 밀라노를 포함하여 수많은 북서부 도시들이 독일 공군의 공습으로 잿더미가 된 것도 모자라 독일군이 로마를 향해 남진 중이라는 소식은 이탈리아 국민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고 갔다.
전쟁으로 물가는 폭등하여 사람들은 매 끼니를 빵이나 죽 같은 간소한 음식으로 해결해야 했고, 공습과 물자난을 피해 시골로 이주하는 도시 거주민들의 숫자가 급격히 불었다.
발보가 10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육성한 이탈리아 공군은 괴멸 직전의 위기에 놓였고 육군은 연전연패하여 일패도지, 유일하게 해군만이 별 피해가 없었지만 싸울 전장이 없기에 그들의 존재는 있으나 마나였다.
징집되어 전선으로 간 가족이나 연인의 전사통지서와, 친척의 집이 폭격으로 무너졌다는 소식을 접한 이탈리아인들의 분노는 무능한 정부에게로 향했다.
신체 일부를 잃고, 간신히 목숨만 건져 고향으로 돌아온 상이군인들의 가족들도 분노에 휩싸여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전쟁을 일으킨 두체는 사퇴해라!”
“전쟁은 지겹다! 당장 전쟁을 끝내라!”
“무솔리니는 죽은 내 아들을 살려내라!”
신 로마 제국 건설이라는 무솔리니의 달콤한 속삭임에 빠져 그에게 열광하며 무제한의 지지를 보내던 이탈리아인들은 이제 없었다.
국민들은 두 달 전까지 자신들이 지지했던 무솔리니를 향해 저주와 비난을 쏟아냈고, 그간 이탈리아 정부의 탄압에 숨죽이고 있던 이탈리아 공산당도 활개치기 시작했다.
군 병력이 죄다 북부 전선으로 향한 탓에 치안은 악화되었고 대낮에 강도와 살인사건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하지만 경찰은 사건을 수사하고 범죄자들을 잡는 것보다 반전을 부르짖는 사람들의 시위를 막는 데 열중했다.
정권의 개로 전락한 경찰의 모습은 국민의 성난 민심에 더욱 불을 질렀다.
“두체도 문제지만 여태까지 가만히 앉아서 나라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드는 것을 방치한 국왕도 문제가 있다!”
“무능한 국왕은 물러나라! 이탈리아는 국민들의 나라지 너희들의 나라가 아니다!”
급기야 여론이 반전을 넘어 군주정에 대한 혐오와 성토로까지 이어지자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결단을 내렸다.
“두체를 부르게. 지금 당장.”
***
“방금 뭐라고 했나?”
무솔리니의 집무실 바닥에는 텅 빈 술병들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녔고 담배 냄새에 오염된 공기가 허공을 떠다녔다.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보좌관은 악취에 흠칫 놀라면서도 인상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폐하께서 나를 찾으신다고?”
“그렇습니다, 각하. 지금 바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국왕이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모르핀에 취해 소파에 누워있던 무솔리니는 번개처럼 일어났다.
그는 어젯밤에 열린 대파시스트평의회에서 찬성 19, 반대 7로 자신의 해임안이 결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가, 분을 이기기 위해 평소보다 많은 양의 모르핀을 투여했다.
아직도 모르핀의 영향 탓에 정신이 몽롱했다.
술과 약물에 절여지다시피 하며 시간을 보내던 무솔리니였지만, 국왕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지금의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것쯤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향수로 몸에 남아있는 술과 약 냄새를 없애고, 냉수로 입안을 헹궜다. 그리고 비서가 가져다준 자신의 전용 제복을 착용했다.
모르핀과 술기운이 남아 흐릿해진 눈동자와 전보다 느려진 걸음걸이만 빼면, 무솔리니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얼른 가지.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시네.”
***
무솔리니는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자신의 해임안을 거부하고 자신에게 새로운 지시를 내리기 위해 자신을 부른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확신은 얼마 못 가 산산조각나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이보게, 두체.”
“예, 폐하.”
“자네는 이탈리아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아는가?”
“아, 알고 있습니다.”
싸늘하기 짝이 없는 국왕의 말투에 무솔리니는 직감적으로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 이 나라는 위기에 처해 있네. 군대도 경제도 모든 것이 완전히 박살났네. 전 국민이 자네를 미워하고 있어. 짐의 신하들도, 자네를 믿고 지지했던 군인들도, 심지어 자네의 사위마저도.
모두가 자네에게 실망하고 등을 돌렸단 말이네.”
“······.”
비토리오는 무솔리니를 경멸과 동정의 시선으로 내려다봤다. 무솔리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비토리오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할 즈음, 무솔리니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는 사시나무처럼 가늘게 떨렸다.
“······중요한 결정이라도 내리셨습니까, 폐하······?”
혈색 없는 얼굴로 중얼거리듯이 묻는 무솔리니에게서 고개를 돌린 비토리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는 이미 지도자로서 완전히 실격이야. 자네에게 실망이 커. 그러니··· 이제 그만두는 게 어떤가?”
비토리오는 무솔리니가 큰소리로 항의할 것에 대비하여 근위병을 좌우에 배치했다. 하지만 무솔리니의 태도와 말소리로 판단하건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폐하.”
쇠라도 씹어먹을 것만 같은 각진 사각형의 턱을 가진 무솔리니는 젊어서부터 험악해보이는 인상으로 유명했다.
그는 파도가 치고 번개가 내리치듯이 강력한 어조로 연설했고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초라한 중년이 되어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두툼한 뺨에선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후임자의 행운을 빕니다, 폐하. 정말··· 정말로······ 죄송합니다.”
무솔리니는 더 이상 이탈리아의 두체가 아니었다.
***
1940년 6월 30일
독일 오스트마르크 리엔츠
무솔리니를 해임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의 후임으로 육군 원수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임명했다.
총리직에서 해임된 무솔리니는 국왕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자택에 연금되었다. 총리직에 취임한 바돌리오는 즉시 휴전을 타전해왔다.
이탈리아가 보낸 휴전제안이 도착했을 무렵,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부인.”
“고맙습니다.”
나는 앞치마를 두른 채 국자를 들고 있었다.
국자로 아인토프(Eintopf, 말린 콩과 채소, 고기를 솥에 넣고 끓인 스튜)를 퍼서 반합에 떠주자 노파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 총총걸음으로 떠나갔다.
1시간 넘게 수프를 푸고 있으니 허리가 끊어질 것 같군. 이제 20명만 더 배식하면 끝나니까 조금만 참자. 고지가 코앞이다.
이곳은 이탈리아군의 공습으로 집을 잃은 주민들의 임시 피난처. 군용으로 사용되는 24인용 텐트 수백 개에서 집을 잃은 피난민들이 기거하고 있는 곳이다.
아인토프존탁(Eintopfsonntag)이라고, 나치 독일 시기 빈민 및 저소득층 구호대책으로 일요일마다 무료 급식소에서 아인토프를 배급하던 행사인데 실제 히틀러도 자주 행사에 참여했을 정도로 나치 독일에서 중요시되던 행사다.
마침 전시이기도 하고, 국민들에게 모범을 보일 필요도 있었기에 리엔츠의 피난민 구호소에서 일하기로 결정했다.
세금으로 월드컵 경기 보러 해외여행 가던 국회의원들이 선거철이 다가올 때마다 요양원이나 초등학교에서 국자 들고 배식하는 일이 흔한 21세기 한국에선 특별한 일도 아니지만, 잊지 말자. 지금 이곳이 1940년 독일이라는 것을.
정치인들의 봉사활동 자체가 드문 세상에서 자그마치 총통이 직접 앞치마를 두르고 수프를 배식한다면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거기다 사람들이 보여주기식이 아닌, 진짜 봉사활동이라고 생각하게끔 일부러 현장에 기자들을 동석시키지 않았다. 어차피 피난처에 사진을 찍으러 온 기자가 한두 명쯤은 있기 마련이거든.
가면 알아서 찍어줄 텐데, 굳이 대놓고 데리고 다닐 필요가 있을까?
마지막 한 명의 배식이 끝나자 드디어 손에서 국자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기지개를 켜자 화석처럼 굳었던 허리가 비명을 질렀다.
나이를 먹을수록 몸이 말이 아니군. 파릇파릇했던 20대의 신체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몸은 힘들지만, 그래도 간만에 좋은 일을 해서 뿌듯하구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총통 각하.”
“총통 각하와 함께하니, 힘든 줄도 몰랐습니다. 하하하.”
그래도 혼자서 하기엔 뭔가 좀 뻘쭘해서 측근들을 현장에 동행시켰다. 괴링은 어제 아침에 인스부르크 인근 공군기지의 장병들을 격려하러 떠났고, 힘러는 슈투트가르트의 게슈타포 간부들과의 회의에 참석하러 갔다.
남겨진 건 괴벨스와 헤스뿐이었는데, 국 통 300개를 나르고 1시간 30분 동안 집게로 식판에 빵과 소시지를 담아주느라 둘은 탈진 직전의 상태가 되었다.
표정을 보니 둘 다 튀고 싶은데, 내 앞이라서 죽는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둘 다 오늘 고생했네. 책상 앞에만 앉아있다가, 난데없이 일하려니 더럽게 힘들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총통 각하!”
“저는 아직도 펄펄합니다! 어떤 일이든 맡겨만 주십시오!”
아직 허세부릴 체력은 남았다 이거냐. 방금 전까지 얼굴에 죽겠다고 쓰여있던 놈들이.
“그으래~? 그럼 잘됐군. 저기 밀가루 포대가 많이 남았던데 마저 옮기자고.”
내가 구석에 쌓인 밀가루 포대들을 가리키자 둘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0.1초 만에 얼굴에서 혈색이 사라지는 마법이라니, 이건 좀 특이하군.
“왜들 그러나? 아직 체력 남았다면서. ‘겨우’ 60포대 밖에 없으니 한 명당 20포대씩만 옮기세.”
“······.”
“······.”
“농담이야. 이만 안에 들어가서 커피나 마시자고.”
너희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총통인데 정색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
그제야 혈색이 돌아온 둘과 카푸치노를 음미하는데 리벤트로프가 이탈리아의 평화협상 제안서를 들고 돌아왔다. 리벤트로프로부터 대강의 소식을 전해들은 나는 이탈리아의 제안서를 받아서 천천히 읽었다.
“트렌티노알토아디제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즉시 휴전이라, 흠.”
그런데,
왜 뒤가 없지?
“설마······ 이게 전부인가?”
“예, 총통 각하. 제가 확인한 바로는, 그게 저들이 내민 조건의 전부입니다.”
“허! 이 무슨······.”
요놈들 좀 봐라. 덜 처맞아서 그런지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만?
이탈리아가 제시한 보상안은 터무니없을 정도였다. 없던 일로 하자던 무솔리니의 제안보다 발전했지만, 이 역시 우리 입장에서는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배상금이 한 푼도 없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리비아와 알바니아, 동아프리카 식민지는 그대로 유지하게 해달라고? 참나.
“라틴계 놈들이라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가 봅니다. 고작 트렌티노알토아디제를 내놓는 조건으로 휴전이라니. 그 두 배의 땅을 내놓아도 모자랄 판에!”
헤스가 혀를 차며 내 말에 격한 공감을 보였다. 괴벨스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리히트호펜 장군의 말대로 로마를 불바다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저놈들도 주제를 알 겁니다. 전쟁이 소꿉장난이 아니라는 사실도요.”
“흐으음.”
파리를 공습하지 못한 것이 두고 두고 한에 남았는지 리히트호펜은 로마를 공습하게 해달라고 날마다 요청해왔다.
로마를 불바다로 만들어야 이탈리아인들이 항복을 구걸해올 것이라며 로마 공습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리히트호펜에게 나는 굳이 로마를 폭격해서 이탈리아인들의 반독 감정을 자극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반려했다.
하지만 저놈들이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밖에.
“한 대 쥐어패기 전에 마지막으로 대화 정도는 나눠보는 게 좋겠지. 리벤트로프, 자네가 나서서 놈들과 대화를 좀 나눠보게.”
“맡겨만 주십시오.”
***
“이게 당최 말이 되는 소리요?”
이탈리아의 강화 조건을 듣고 실소한 것은 히틀러만이 아니었다.
같은 이탈리아인들조차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내민 강화 조건안은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트렌티노알토아디제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휴전이라고? 배상금이나 다른 보상도 없이?”
“하! 히틀러가 잘도 받아들이겠군!”
“말조심하시오. 이건 폐하께서 직접 말씀하신 조건이란 말이오.”
“제아무리 폐하께서 하신 말씀이라고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국가파시스트당도, 바돌리오도 국왕이 제시한 휴전안을 듣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배상금은커녕 영토 일부만 떼어주고 퉁치자니. 히틀러가 이 정도 선에서 만족하려 들까?
절대 아니지.
바돌리오는 히틀러에 대해 그렇게 잘 안다고 자신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가 이 정도 조건에서 냉큼 휴전에 동의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거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바돌리오는 사력을 다해 국왕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비토리오의 고집은 바돌리오조차 쉽게 꺾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짐이 사랑하는 나라의 영토를 떼어주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픈데, 그 이상을 내놔야 한다니. 그게 신하된 자로서 할 소리란 말인가?”
자신이 직접 총리로 임명한 무솔리니를 자신이 직접 총리직에서 내쫓은 비토리오였지만, 무솔리니가 획득한 영토-에티오피아와 알바니아-와 지위만큼은 포기하기 싫다는 게 비토리오의 속마음이었다.
“폐하, 외람되오나 독일이 위 조건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특히 배상금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는 것은 더더욱-”
“듣기 싫네! 바돌리오, 자네는 이탈리아의 총리지 독일인이 아니네! 이탈리아의 총리라면 이탈리아의 총리답게 행동하길 바라네!”
실제 역사에서도 최대한 빨리 항복해야 한다는 군부의 권고를 무시하고 자신의 왕위 및 왕정 유지와 개전 이전의 이탈리아 영토 및 식민지 유지, 이탈리아가 합병한 유고슬라비아 영토를 이탈리아 영토로 인정하고 발칸반도에 상륙해 독일로 진격하라는 무리한 요구로 시간을 끌다가 독일군이 처들어오자 수도와 국민을 버리고 안전한 남부로 튄 비토리오는 여기서도 같은 말만 반복하며 바돌리오의 속을 썩이고 있었다.
바돌리오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국왕의 면전이라 애써 표정을 숨겨야만 했다.
지금 그가 항복 조건을 두고 국왕의 설교를 듣는 동안에도 전선에서는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을 터였다.
비단 병사들뿐인가. 후방의 도시들도 독일군이 투하하는 폭탄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이미 밀라노와 볼로냐가 독일군의 공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틀 전에는 제노바가 공습을 당해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이탈리아가 입는 피해가 늘어날 텐데 어째서 국왕 폐하는 그것을 모르신단 말인가!
바돌리오는 터져나오려는 한숨을 참으며 겨우 미소를 지어보였다.
“알겠습니다, 폐하. 폐하의 뜻을 저들에게 잘 전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