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 침공 (4) >
1940년 6월 21일 저녁,
볼차노는 독일군에게 함락되었다.
독일군이 볼차노로 진군 중이라는 보고를 받은 메세는 볼차노 사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도시에 있는 물자에 불을 지르고 참모들과 함께 트렌토로 도주했다.
그가 트렌토에 도착했을 때, 정작 그라치아니는 트렌토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령부 소속 참모들은 중요 문서들을 파기하느라 바빴고 병사들은 물자를 트럭에 실느라 분주히 돌아다녔다.
“베로나 말입니까?”
“그래, 베로나. 거기라면 독일 놈들도 금방 못 오겠지.”
그라치아니는 트렌토도 얼마 못 가 독일군에게 함락될 것이라 예측하고 그보다 더 아래인 베로나로 향하기로 했다.
휘하 병력들에게 한 치도 물러서지 말고 전선을 사수하라고 지시를 내린 뒤, 그라치아니와 메세는 베로나로 떠났다.
6월 21일에서 22일로 넘어가는 사이에 우디네도 독일군에게 함락되었다.
우디네의 함락은 볼차노의 함락보다 이탈리아에게 더욱 치명적이었다.
산악지대에 위치한 볼차노와 반대로 우디네는 평야지대.
이미 우디네까지 함락됐다는 것은 독일군이 자신들의 주특기인 기동전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평야지대까지 진출했다는 소리였다.
***
1940년 6월 22일
이탈리아 북부 라티쟈나
“핫하, 이거지! 바로 이거야!”
호쾌하게 진격 중인 4호 전차들과 Sd.Kfz 251 장갑차들의 행렬을 바라보며 롬멜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의 목에는 프랑스전에서 세운 전공으로 총통이 직접 수여한 기사십자장이 걸려 있었다.
프랑스전이 끝나기 무섭게 롬멜의 제7기갑사단은 이탈리아전 투입을 위해 오스트리아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제 좀 쉬는가 했더니 다시 전선에 투입된다는 말에 참모들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지만, 롬멜은 뛸 듯이 기뻐했다. 과거 자신의 영광을 재현할 좋은 기회가 왔다면서.
“바로 이 맛에 장군하지. 안 그렇나들?”
“하하하, 맞습니다······.”
영관급 장교들인 참모들인 롬멜의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따금식 이탈리아군 포병이 쏘아올린 포탄이 착탄해 파편을 뿌려댔지만 롬멜은 아랑곳하지 않고 꼿꼿하게 상체를 내밀고 있었다.
“각하, 위험하니 조금은 자세를 숙이시는게-”
“위험하기는. 이런 어린애 소꿉장난 같은 포격에 겁을 집어먹어서야 되겠나. 나 롬멜이야, 롬멜. 나는 자네들보다 더 젊었을 적에, 이탈리아 놈들과 백병전을 벌였다고.”
롬멜이 카포레토 전투에서 대활약해 그때부터 명성을 알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모르는 참모들은 없었다.
그래도 일개 장교가 아닌, 자그마치 대장이 몸을 사리지 않는 것은 너무 위험한 행동이 아닌가 걱정스러웠지만 롬멜은 자신의 안전 따위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정면에 대전차포!”
이탈리아군이 조작하는 블레르 47mm 대전차포가 연달아 발포했지만, 독일군의 피해는 4호 전차 한 대가 궤도가 끊어진 게 전부였다.
대전차포가 나타나자 전차들이 일제히 전진을 멈추고 포탑을 돌려 포탄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포화를 퍼부었다.
비용절감을 위해 포방패를 생략하는 바람에, 블레르 대전차포는 총탄이나 유탄 파편으로부터 대전차포병들을 보호할 수단이 전무했다.
유탄이 대전차포 근처에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이탈리아 대전차포병들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저런 등신 같은 놈들. 위장도 제대로 안하고선 무슨 깡으로 공격한 건지 원.”
적군의 한심한 행태에 롬멜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시대가 변했는데도 저놈들은 여전히 1917년에 머물러 있는 것 같군. 아니, 오히려 더 퇴보한 느낌이야. 저놈들의 조상이 로마 제국을 세운 로마인들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일세.”
“창과 활로 무장한 고대 로마인들이 저놈들보다 더 잘 싸웠을 겁니다.”
롬멜이 가장 신뢰하는 부하, 한스 폰 루크 대위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만약 고대 로마인과 현대 이탈리아군에게 똑같은 무기를 쥐어주고 서로 싸우게 시킨다면, 로마인이 이길 것 같았다.
최후의 대전차포 진지가 75mm 유탄 세례를 받고 날아가자 이제 이탈리아군에게 남은 건 소총과 수류탄, 기관총뿐이었다.
참호에는 2개 중대에 달하는 이탈리아군이 남아있지만, 그들의 사기는 바닥이었다.
대전차포들이 전차포 한 방에 날아가는 것을 본 병사들은 겁에 질려 벌벌 떨기만 했다.
소총과 수류탄 따위로 어떻게 전차란 싸운단 말인가? 대놓고 죽으라는 거지.
“적들이 가만히 있군요. 아무래도 단체로 겁먹은 것 같은데요.”
“당연히 그렇겠지. 이쪽은 전차가 있는데.”
롬멜은 사격조차 하지 않는 이탈리아군을 한껏 비웃으면서도 가능하면 피를 흘리는 일을 자제하고자 했다. 그는 휘하 전차들에게 지시해 이탈리아군에게 항복을 종용하라고 지시했다.
-이탈리아군은 들어라. 너희들 나라는 이미 전쟁에서 졌다. 헛된 죽음보다는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는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해라. 항복하는 자는 쏘지 않겠다.
각 소대당 한 대꼴로 부착된 대형 확성기를 통해 독일군은 항복을 권유했다.
독일군의 방송을 들은 이탈리아군 병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참호 밖으로 기어나왔다.
“애들 내리게 해서 저놈들 무장해제시켜. 갈 길이 바쁘니 서두르자고.”
“예, 각하.”
***
1940년 6월 23일
이탈리아 트렌토
“자, 모두 나가자!”
“뛰어!”
감색 하늘 위로 하얀색 낙하산 꽃들이 피어났다.
Ju52 수송기에서 뛰어내린 독일 공수부대원들이 일제히 낙하산을 펼치자, 공습이 끝나 안도하고 있던 이탈리아 대공포병들은 다시 비상이 걸렸다.
“비상! 비사앙!”
“적 강하 중! 독일 놈들의 공수부대다!”
“사격 개시해!”
열을 식히던 대공포와 대공기관총이 다시 불을 뿜기 시작했고 장교들의 호통에 병사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기관총에 맞거나 낙하산에 구멍이 뚫려 추락사하는 공수부대원들이 늘기 시작했다.
세계 모든 군대에서도 정예군 취급을 받는 공수부대가 가장 취약해지는 시점은 다름 아닌 공수부대만의 특징이자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강하 시점이었다.
인간은 날개가 달려 있지 않기에, 낙하산을 타고 내려올 수밖에 없다.
낙하산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오는 동안 공수부대원이 할 수 있는 건 하늘에 기도하는 게 거의 유일했다.
아무리 뛰어난 베테랑 군인이라고 해도, 강하하는 중에는 무방비해질 수밖에 없었다.
‘빨리, 빨리!’
공수부대원들은 1초라도 더 빨리 지상에 닿기를 간절히 바랬다.
적의 대공사격을 받고 벌집이 되거나 낙하산에 구멍이 뚫려 추락하는 동료들의 비명을 들을 때마다 병사들은 더욱 간절히 기도했다.
마침내 그토록 고대하던 지상에 닿자 공수부대원들은 버튼을 눌러 낙하장비를 풀고 곧바로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이제까지 독일군이 사용하는 1점식 낙하산에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지적한 히틀러의 지시로, 1점식보다 강하속도는 느리지만 조종이 어느정도 가능하며 더 많은 하중을 견딜 수 있는 2점식 낙하산이 새로 개발되어 지급되었다.
그 덕분에 독일 공수부대는 주무기를 따로 실은 컨테이너를 찾아다닐 필요 없이 바로 전투가 가능했다.
곧 이탈리아군과 독일 공수부대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전개되었다.
“크아악!”
볼트액션 소총인 카르카노로 무장한 이탈리아군은 MP38과 StG39 같은 자동화기를 보유한 독일 공수부대원들에게 화력에서 밀렸다.
숫자가 적다고 적을 만만하게 보고 있던 이탈리아 병사들은 예상 못 한 적의 강력한 화력에 당황했다.
앞서 지상에 착륙한 전우들의 활약으로 그보다 늦게 수송기에서 뛰어내린 공수부대원들이 살 확률이 가파르게 올라갔다.
전투 초반 이탈리아군이 우세한 듯 보였던 전투는 어느새 독일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팔슈름예거들에게 고전 중인 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L3 탱켓들이 지원에 나섰지만 싸움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차가 나타난 줄 알고 당황했던 공수부대원들은 승용차 크기의 L3를 보자 이를 비웃으며 적의 시야가 닿지 않는 방향에서 다가가 기관총 아래에 수류탄을 놓고 도망쳤다.
수류탄이 폭발하자, 기관총의 총열이 구부러지면서 L3는 전투불능에 빠졌다.
이어 이탈리아군 대공포병들을 사살하고 브레다 20/65 대공포를 노획한 공수부대원들이 핸들을 돌려 이탈리아군 L3들을 겨냥했다.
대공포가 불을 뿜자, L3의 장갑은 종잇장처럼 뚫렸다.
반격에 나섰던 L3 5대가 순식간에 격파당하자 이탈리아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그들은 전사자들과 부상당한 아군을 내버려 둔 채 도주했다.
“제기랄, 탄약은 대체 언제 오는 건가?!”
후방에 강하한 공수부대가 날뛰자 최전선에서 안간힘을 써가며 독일군을 막고 있던 이탈리아군은 혼란에 빠졌다.
“이대로 가면 뚫린다고! 대체 언제쯤 그 빌어먹을 탄약을 보내줄 수 있는 건데?”
-후방에 적 공수부대가 강하하는 바람에 당장 지원이 불가능하다.
“뭐? 적군이 후방에 강하했다고? 아니, 그럼 우린 어떡하란 말이야?”
-현재 적군 소탕 중이다. 조금만 더 버티면······.
“이봐? 어이!”
이탈리아군 대대장은 교신이 끊어진 무전기를 멍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다가 자신을 찾는 부대대장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대대장님! 2중대 방어선이 돌파당했습니다! 1중대와 3중대도 돌파당하기 직전이고요! 탄약은 대체 언제 오는 겁니까?”
“······탄약은 오지 않을 걸세.”
“예?”
대대장의 말에 부대대장은 당황을 넘어 황당함을 느꼈다. 탄약이 오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방금 연대본부와 교신했는데, 후방에 적 공수부대가 강하해서 난리라는군. 후방이 정리될 즈음, 독일군은 트렌토에 도달할 걸세.”
부대대장은 육체에서 힘이 쭈욱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대대장은 이미 제대로 서 있을 힘조차 없는지 바닥에 주저앉은 뒤였다.
“빌어먹을, 이 꼴을 보려고 군인이 된 게 아닌데-”
허탈하게 웃으며 담배에 불을 붙이려던 대대장은 부대대장과 함께 새하얀 섬광에 휩싸여 사라졌다.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분화구가 생겨났다.
“씨발, 괴물이다!”
“도망쳐!”
유탄 한방에 적 지휘소를 통째로 날려버린 브룸베어의 위용 앞에 이탈리아군은 도망치기 바빴다. 또는 얌전히 백기를 들거나.
전 유럽을 호령한 로마제국의 후예들은 과거 그들의 선조가 하찮게 여기던 야만족의 후손들에게 쫓겨 도망치기 바빴다.
무솔리니가 재창한 신 로마 제국의 군대는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
1940년 6월 24일
독일 베르히테스가덴 베르그호프
한니발 작전은 본래 계획보다 훨씬 큰 성공을 거뒀다.
아군은 벌써 트렌토까지 손에 넣었으며, 롬멜은 베네치아 코앞까지 진격했다.
이탈리아 해군은 베네치아를 포기했고 소수의 해군 육전대만이 도시에 남아 육군 및 공군 잔여인원들과 함께 가까스로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다.
예상을 뛰어넘는 대승에 장군들은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론 불안해했다.
진격이 너무 빨라서, 오히려 이탈리아군의 계략이 아닐까 의심스럽다는 게 브라우히치의 말이었다.
“그럴 가능성은 낮소.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허나 미래의 지식 덕분에 이탈리아군이 어떤 군대인지 아는 나는 장군들의 불안을 일축했다.
“이탈리아군이 그 정도로 머리를 굴릴 줄 아는 군대였다면, 우리가 노르웨이나 프랑스에서 싸우고 있을 때 빈까지 진격했을 거요. 그리고, 우리 군을 깊숙이 끌어들여 포위섬멸을 계획 중이라면 지금도 줄줄이 투항 중인 이탈리아 병사들은 뭐요? 미끼치곤 지나치게 많은 숫자가 아닌가?”
“흐음, 그것도 그렇군요.”
적을 우습게 여기다가 큰코다친 사례는 수없이 많지만, 상대가 이탈리아군이라면 그런 걱정은 안해도 된다.
추축국이 한창 우세를 점하던 1940~1942년에도 온갖 추태를 보이며 동맹국 독일의 혈압을 올리는 데 크게 일조한 이탈리아군인데, 동맹국 하나 없이 홀로 전쟁 중인 지금은 오죽할까?
다만 모든 이탈리아군이 다 같은 것은 아니여서, 아리에테 기갑사단의 경우 그들의 항복을 받아내기까지 아군은 4호 전차 16대를 완전손실하고 800명의 병력을 잃어야 했다.
그 대가로 아리에테가 보유한 모든 전차가 격파되고 병력이 본래 인원의 20%까지 줄긴 했지만 이탈리아군치곤 상당히 잘 싸운 축에 속했다.
이외에도 동맹군인 독일군과 적군인 영국군으로부터 극찬을 받은 폴고레 공수사단과 인간어뢰를 사용해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두 척을 대파시키는 활약을 펼친 이탈리아 왕립해군 산하 특수부대 '데치마 플로틸리아 MAS(X-MAS)'가 있지만 이놈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폴고레는 아직 창설되지도 않았고, 전쟁이 철저히 지상전 위주인 탓에 X-MAS가 활약할 기회 자체가 없으니까.
싸울 적이 있어야 싸우던가 하지, 독일이 지중해에 접해있지 않은데 어떻게 싸워?
“이탈리아 내부 소식은 아직인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총통 각하. 로마에 잠입해있는 SD 요원으로부터 이탈리아 내부의 중요 정보를 얻어냈으니 말입니다.”
한동안 활약할 기회가 뜸했던 하이드리히는 간만에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국왕은 물론이고, 국가 파시스트당조차 무솔리니에게 등을 돌린 지 오래라고 합니다. 심지어 무솔리니의 사위인 치아노조차 말입니다. 오직 무솔리니만 이 사실을 모른 채 술과 여자놀음에 빠져있습니다. 이탈리아인들도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있으며 군의 징집을 피해 도주하는 남성들이 늘고 있는 추세입니다.”
“즉, 언제 쿠데타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군.”
“맞습니다.”
입에서 절로 휘파람이 나왔다. 무솔리니의 실각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고 무솔리니가 실각하는 즉시 이탈리아는 협상을 구걸해올 것이다.
즉, 전쟁이 끝난단 말씀. 그토록 고대하고 고대했던 승리가 찾아오는 것이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면, 남은 건 태평양뿐. 늦던 빠르던 간에 일본은 결국 미국과 한판 붙게 될 것이고, 우린 가만히 앉아서 팝콘이나 먹으면 된다.
아니면 우리도 적당한 건수를 잡아서 참전해볼까? 기갑사단을 보내 중원에서 일본군을 몰아내는데 일조하면 태평양에서 먹을 게 좀 생길지 모른다. 예를 들어 키아우초우라던가.
참. 한반도도 빠뜨릴 수 없지.
다른 건 몰라도 내가 태어난 나라가 빨갱이들에게 넘어가거나 분단되는 일은 피해야 하지 않겠나.
언젠가 다가올 조국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카이텔이 뜻밖의 소식이 전해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예상치 못한, 완전히 새로운 소식.
“총통 각하. 베오그라드 주재 무관으로부터 도착한 전문입니다.”
“베오그라드?”
베오그라드는 유고슬라비아의 수도 아닌가. 지금 상황에서 그게 왜 튀어나오지?
카이텔이 건넨 전문을 읽자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유고슬라비아군 병력이 자다르와 이스트리아 반도 방면에 집결 중.
....이건 또 뭔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