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틀러가 되었다-83화 (83/150)

< 프랑스의 몰락 (3) >

1940년 6월 4일

프랑스 파리 에투알 광장

프랑스인들은 파리를 ‘빛의 도시’라고 불렀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린 밤에도 대낮처럼 아름답게 빛이 난다고 하여 붙여진 별명이었다.

전쟁이 터진 후에도 파리의 별명은 한동안 유지되었다.

맑고 청명한 하늘에 독일 폭격기의 공습을 방해하기 위한 용도로 설치된 방공기구들이 떠다니고 이따금씩 공습 대비 훈련으로 도시 전체에 등화관제가 실시된 적이 여러 번 있긴 했지만 파리가 가진 아름다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빛의 도시의 불빛이 거대한 폭풍우 앞에 서서히 꺼지고 있었다.

독일군의 전함이 단치히의 폴란드 요새를 향해 불을 내뿜자 프랑스는 결코 독일의 침략행위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위풍당당하게 선언했던 프랑스 정부는 파리에 없었다.

독일군이 오기도 전에 그들은 일찌감치 짐을 꾸려 파리를 떠났다.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투르가 프랑스의 새 수도로 선포되었다.

어디까지나 ‘임시’이긴 하지만, 파리가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정부와 군대가 떠나고 피난을 포기한 시민들만 덩그러니 남겨진 파리의 시장은 파리를 무방비도시로 선언했다.

무방비도시란 군사시설 및 주둔 부대가 없는 도시로 선언된 도시를 의미하는데, 함락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무의미한 전투로 도시가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사실상 항복 선언이었다.

다른 도시도 아니고 수도를 무방비도시로 선언한다는 것은 이미 전쟁에서 패했음을 의미했다.

독일군은 파리의 무방비도시 선언을 받아들였다.

파리가 무방비도시로 선언되자 그때까지 파리 외곽에서 버티던 프랑스군 병력들은 미련없이 항복했다.

마침내,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했다.

파리에 입성한 독일군 군악대는 바덴바일러 행진곡을 연주하며 행진했다.

1차대전 초기, 프랑스 바동빌레르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작곡된 곡으로 바동빌레르 행진곡으로 부르다가 히틀러 집권 후에는 바덴바일러 행진곡으로 개명되었다.

프랑스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의 기념용으로 만든 곡을 프랑스의 수도에 입성하면서 연주한다.

이보다 완벽한 복수는 찾기 힘들 것이다.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하자 세계 언론사들은 앞다퉈 이를 호외로 내보냈다.

라디오마다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이고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일제히 경악했다.

‘속보, 파리가 함락되다!’

‘빛의 도시의 함락!’

‘히틀러, 그는 전쟁에 미친 악마인가, 세기의 천재인가!?’

뉴욕에서 도쿄까지, 모스크바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전 세계가 파리 함락이라는 초대형 뉴스에 충격을 금치 못하는 가운데 정작 당사자들인 파리 시민들의 반응은 덤덤했다.

정부가 파리를 떠나 투르를 임시수도로 선포하던 날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 아니었던가.

호들갑을 떨 사람들은 진작에 파리를 떠났거나 애초에 파리에 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파리에 남은 사람들은 회사원과 청소부, 식당 종업원, 주부, 학생, 아이들, 노인들처럼 힘없는 소시민들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시에 입성하는 적국 병사들의 행렬을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눈으로 조용히 구경했다.

독일군의 행렬을 구경하는 이들 중 몇 명이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조용히 승리자들의 행군을 바라볼 뿐이었다.

에펠탑 꼭대기에는 독일 하켄크로이츠기가 계양되었고 독일군은 에펠탑과 더불어 파리 하면 떠오르는 파리의 명물 에투알 개선문 앞을 지나 행진했다.

에투알 개선문이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이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역사의 지독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파리가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지던 날, C 집단군은 프랑스-스위스 국경지대에 위치한 퐁타를리에를 점령했다.

이로써 마지노선의 프랑스군 40개 사단은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다.

이 역시 매우 주목할만한 성과였지만, 파리 점령이라는 어마어마한 빅뉴스에 묻혀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사열식을 끝낸 독일군은 파리의 주요 정부 기관들에 들이닥쳐 각종 중요문서들을 확보했다.

프랑스의 스파이들과 프랑스로 망명한 독일인들의 명단, 그리고 독일에게 치욕을 안겨 준 베르사유 조약의 원본은 즉시 독일로 보내졌다.

***

1940년 6월 6일

프랑스 투르 드 빌 호텔

앙리 필리프 페탱.

올해로 84세의 노인인 페탱은 1차대전 당시 프랑스를 승리로 이끈 명장으로 프랑스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전쟁영웅이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인생에 굴곡이 많았다.

아버지와 삼촌으로부터 나폴레옹 전쟁에 종군한 큰할아버지의 경험담을 들으며 자란 페탱은 조국 프랑스가 프로이센에게 패배하자 군대로 진로를 잡았다.

1876년,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모두의 인정을 받아 1년 뒤 프랑스 최고 엘리트 교육기관인 그랑제콜에 진학하여 장교가 되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진급하려면 인맥이 많거나, 빽이 튼튼해야 하는 법.

능력은 뛰어났지만 인맥도 빽도 없었던 페탱은 진급이 극도로 느렸다.

그래도 능력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페탱도 열심히 노력하여 어찌어찌 대령까지는 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로의 진급은 감감무소식.

나이도 찼기에 슬슬 퇴역하여 노후를 준비하려는 찰나, 1차대전이 터지면서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말만 그럴듯하지 뻘짓 중의 뻘짓이었던 프랑스군의 군사교리 ‘엘랑 비탈’이 얼마나 무식하고 위험한지 알고 있던 페탱은 무의미한 공격을 거부하고 효율적인 지휘로 독일군의 공격을 번번이 격퇴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아군 병력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적군의 공세를 격퇴한 공로를 인정받아 페탱은 소장으로 진급했고, 얼마 뒤엔 중장으로 진급, 1916년에는 대장까지 진급했다.

불과 3년 만에 대령에서 대장까지 진급하는 기적을 이뤄낸 것이다.

베르됭 전투를 연합군의 승리로 이끌면서 전국적인 영웅이 된 페탱은 조제프 조프르, 페르디낭 포슈와 함께 프랑스군에서 3명뿐인 원수로 진급하였다.

1차대전이 끝난 후 페탱은 전차 및 항공기의 전력 증강과 마지노선 건설에 관여하였고 모로코에서 리프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을 이끌고 모로코인들이 세운 리프 공화국을 멸망시켰다.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페탱은 주스페인 프랑스 대사로 스페인에 있었다.

전황이 악화되자 폴 레노 총리는 페탱을 프랑스로 소환했다.

프랑스로 돌아오라는 레노의 소환장을 받고 돌아갈 채비를 하는 페탱의 앞을 가로막은 이는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이었다.

“가지 마세요, 장군님. 그놈들은 자신들의 실책을 모두 당신께 떠넘길 작정입니다. 여기에 계세요. 귀국하시면 안 됩니다.”

오만한 성격으로 지독한 나르시즘으로 유명한 프랑코였지만, 스승이자 자신이 존경하는 롤모델이었던 페탱 앞에서는 예의를 차렸다.

진심으로 페탱을 걱정한 프랑코는 그에게 스페인에 계속 머물 것을 권유하여 프랑스행을 만류했다.

패전 직전에 스페인에 있던 페탱에게 갑자기 소환장을 보낸 것만으로도 프랑스 정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였다.

틀림없이 늙은 페탱에게 모든 실책을 다 떠넘기고 자신들은 도망치려는 생각이겠지.

무엇보다 1차대전의 영웅인 페탱을 독일이 가만히 놔둘 것 같지가 않았다. 이전의 복수를 위해 그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지 누가 알겠는가?

페탱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프랑스로 돌아가면 자신이 정부가 저지른 실책들과 뒷정리를 모두 떠안게 된다는 것.

그리고 독일이 자신을 그다지 좋게 보고 있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소, 장군. 하지만 이것이 내가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오.”

그러나 노원수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조국이 위기에 처한 지금, 페탱은 안전한 스페인에서 제자의 호의에 기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건 간에, 그는 무조건 조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프랑코의 진심어린 만류를 뿌리치고 프랑스로 귀국한 페탱은 임시수도 투르에서 레노로부터 총리직을 넘겨받았다.

졸지에 프랑스 총리가 된 페탱은 현실을 직시했다.

프랑스군의 주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파리는 함락되었으며 그나마 남은 병력의 사기는 바닥을 기는 중이다.

일각에선 보르도로 수도를 옮겨 최후의 일인까지 항전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비록 사기가 바닥이라지만, 여전히 프랑스는 수십만 대군을 보유 중이며 해군도 건재하다.

독일과 소련에 의해 포위되어 앞뒤로 침략당해 사라진 폴란드와 달리, 프랑스는 포위되어 있지도 않다.

독일과 사이가 좋은 스페인이 조금 신경쓰이긴 한다만, 진심으로 스승의 안전을 걱정했던 프랑코가 이제와서 독일과 손잡고 프랑스를 침공할 것 같지 않았다.

프랑스가 결사항전을 택한다면, 독일의 피해도 막심할 터.

하지만 페탱은 그 대가가 프랑스 국토 전역의 황폐화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 국토가 파괴되는 것을 무릅쓰고 저항한다고 해도 이길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게 가장 문제였다.

영국은 이미 독일과 휴전했고 영국이 가만히 있는데 미국이 나서서 프랑스를 지원할 리 없다.

이탈리아? 제 앞가림도 못하는 작자들이 프랑스를 돕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페탱은 국민과 나라의 명운을 걸고 희망이 없는 도박에 뛰어들 정도로 무모한 인물이 아니었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이 전쟁은 졌어. 아주 완벽하게.”

“······.”

노원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부관이 내온 커피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

“프랑스를 멸망의 길에서 구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네. 독일에게 항복하는 것, 이 방법 외엔 없어.”

***

다음날 오후, 베르됭 전투의 영웅이자 프랑스군 그 자체였던, 그리고 지금은 프랑스의 총리가 된 노인은 대국민방송을 통해 독일과 협상하겠노라고 밝혔다.

-친애하는 프랑스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모든 적대행위를 중단하라고 적에게 요청했습니다. 군인으로서 이런 가슴 아픈 결정을 한 건 군의 상황이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페탱은 무적으로 알려진 프랑스군이 어떻게 적에게 패배했는지, 그리고 왜 패배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노원수가 사전에 준비한 연설문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프랑스인들은 안방과 거리, 광장, 학교와 시청에 모여 페탱의 연설을 숨죽인 채 경청했다.

연설이 끝나자 페탱은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그의 말은 지극히 담담했다.

-······마지막으로 국민 여러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영광의 순간에, 저는 여러분과 함께였습니다. 절망의 순간에도, 저는 여러분과 함께할 것입니다.

***

1940년 6월 10일

프랑스 콩피에뉴

내가 아는 역사대로 프랑스는 결사항전 대신 항복을 선택했다.

6월 6일 저녁, 페탱이 타진한 휴전 요청이 총통관저에 도착하자 장군, 부관, 비서들 모두가 너 나 할 거 없이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천하의 프랑스를 무너뜨린 것이다.

“해냈습니다, 총통 각하!”

“경축드립니다!”

“이게 다 총통 각하의 뛰어난 지도력 덕분입니다!”

“또, 또 아부하기는.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다 자네들이 잘한 덕분이지.”

무수히 쏟아지는 찬양과 아부의 말들에 나는 손사래를 치며 짐짓 겸손한 척을 했다.

아군이 스당 돌파에 성공했을 때부터 승리를 확신했기 때문인지 그렇게까지 기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영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했을 때가 더 기뻤다.

프랑스와 달리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영국은 도저히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그런 걱정도 끝!

영국과는 강화했고 프랑스는 항복했다.

이탈리아가 남아있지만, 상대가 상대다 보니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

나는 피크닉을 가는 기분으로 프랑스로 향했다.

프랑스 협상단과 만나 휴전회담을 열 장소로 나는 콩피에뉴 숲을 골랐다.

1차대전의 종지부를 찍은 휴전회담이 열린 곳이자 실제 역사에서도 나치 독일과 프랑스의 휴전협정이 체결된 곳이기도 했다.

콩피에뉴 숲에는 국방군 의장대가 도열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차에서 내린 나는 의장대의 사열을 받은 뒤, 회담 장소로 향했다.

회담 장소에는 1차대전의 휴전회담을 위해 독일 사절단이 타고 온 열차의 객차가 놓여 있었다.

휴전회담이 끝나고 프랑스가 보관하던 것을 아군이 접수해 회담장소로 끌고 온 것이었다.

객차 바로 뒤에는 전 프랑스 육군 원수 페르디낭 포슈의 동상이 회담 장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1차대전 독일의 항복을 받아낸 프랑스 원수의 동상이 있는 곳에서, 2차대전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낸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히틀러는 이런 면에선 머리가 정말 잘 돌아간 것 같다.

연설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스스로 개발한 본인만의 제스처도 그렇고 현대적인 퍼포먼스가 뭔지 제대로 알고 있었다니까.

객차 안에는 크라우제와 더불어 내 전속부관직을 수행하고 있는 오토 귄셰 SS 대위가 차렷 자세로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객차에 도착하고 몇 분이 흐르자 프랑스 협상단도 도착해 객차 안에 들어왔다. 쭈뼛거리며 객차에 오르는 프랑스 협상단을 나는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만나서 반갑구려.”

“아······ 감사합니다. 샤를 욍치제라고 합니다, 총통 각하.”

독일과 프랑스 협상단은 어색한 경례를 주고받은 뒤 자리에 착석했다. 회담은 바로 시작되었다.

리벤트로프가 일어서서 독일의 요구사항을 프랑스 협상단에게 전달했다.

프랑스 협상단 대표 샤를 욍치제 대장은 리벤트로프의 말이 끝날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리벤트로프의 말이 끝나자 욍치제는 손을 들어 발언권을 요청했다.

“말씀해보시오.”

내가 허락하자 욍치제는 고개를 살짝 숙인 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총통 각하, 저는 프랑스를 대표해 이곳에 왔습니다.”

“알고 있소.”

“독일의 요구사항들에 대해선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몇몇 사항들에 대해 협상을 요청-”

“거절하겠소.”

내가 딱 잘라 거절의사를 밝히자 욍치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1919년에 당신들 프랑스가 독일에 어떤 짓을 했는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요? 우리는 승리했고, 이제 그 원한을 갚아야겠소.”

그나마 뻗댈 구석이라도 있었던 영국과 달리 프랑스는 이미 수도까지 털리고 군의 주력이 붕괴하여 독일에 맞서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걸 알기에 프랑스는 아직 남부가 점령당하지 않았음에도 백기를 들었다.

프랑스는 우선 전쟁의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자국으로 망명한 독일인들을 모두 독일로 송환하고 하루 1억 달러에 해당하는 독일의 점령비용은 프랑스의 몫이 되었다.

프랑스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무기와 피복, 식량은 고스란히 독일군의 전리품이 되었고 프랑스 전역의 공장과 항구 역시 독일에게 넘어갔다.

알자스-로렌은 다시 독일의 영토가 되었다.

룩셈부르크는 합병되었고 벨기에도 프랑스처럼 베르사유 조약으로 획득한 오이펜-말메디를 도로 토해내야 했지만 이건 프랑스 문제가 아니므로 생략.

여기까지는 역사에서 독일이 프랑스에 요구한 조건들과 거의 동일하다.

거기에 나는 프랑스 해군이 보유한 함정들의 독일 인도까지 요구했다.

유보트 전력 확보를 위해 희생된 구축함과 순양함 등 부족한 함정들을 확보해 크릭스마리네를 전성기 시절의 독일 해군으로 되돌리려는 레더의 강력한 요청으로 추가한 사항이었다.

“해군 함정들을 넘기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욍치제는 식은땀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했다.

앞의 요구사항들조차 프랑스 입장에선 어질어질한데 거기다 해군 함정들까지 넘기라니, 눈앞이 캄캄하겠지.

당황해하는 프랑스 협상단을 보며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물론 프랑스 해군이 보유한 모든 함정을 넘기라곤 하지 않겠소. 나도 양심이 있거든. 그리고 프랑스가 우리에게 협력하는만큼 우리도 프랑스에게 줄 게 있소이다.”

“그게 무엇입니까, 총통 각하?”

채찍은 쓸 만큼 썼으니, 이젠 당근을 내밀 차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