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틀러가 되었다-75화 (75/150)

< 대서양을 향한 질주 (2) >

독일군의 진격을 막기는커녕 잘못된 작전과 대응으로 전선에 대혼란을 초래한 가믈랭에게 질린 프랑스 정부는 가믈랭을 프랑스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74세의 노장 막심 베이강을 앉혔다.

그러나 베이강도 가믈랭만큼이나 답이 없었다.

베이강은 자신이 직접 전황을 파악한 후에 작전을 세우겠다며 가믈랭이 세운 역습 계획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그런 다음 벨기에로 가 벨기에 국왕과 벨기에군 사령관과 만났다.

베이강이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독일군은 솜강 하구에 위치한 아브빌을 함락시켰다.

역사보다 이틀 빠르게 벌어진 일이었다.

동맹군의 답답한 행태에 질릴 대로 질린 영국 대륙원정군(British Expeditionary Force, BEF) 총사령관 고트 자작 존 베레커 대장과 참모총장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 장군은 독일군에 대한 기습 공세를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정부에서 독일과 협상에 나섰다는 소식이 전해지긴 했지만, 평생을 군대에 몸담아 온 그들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전황을 아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야 휴전 협상에서 잃을 게 적어지지 않겠는가.

“공세라니, 너무 무모한 짓이오. 베이강 장군께서도 전황 파악이 먼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소이까.”

마지막까지 투지를 불태우는 두 영국인과 달리, 프랑스 제1집단군 사령관 앙리 가스통 비요트 대장은 여전히 공세에 소극적이었다.

그런 비요트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던 아이언사이드가 말했다.

“그럼 언제까지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시간만 허비할 거요? 적의 진군을 조금이라도 늦추려면, 보다 적극적인 공세가 필요하단 말이오.”

“섣불리 공격을 감행했다가는 되려 적의 함정에 빠질 우려가 있소. 그러잖아도 지금까지 잃은 병력과 장비만 해도 어마어마한데, 여기서 더 잃었다간 프랑스는 끝이오. 따라서 당분간은 방어에 전념하는 것이-”

“이 인간이 진짜!”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아이언사이드는 비요트의 멱살을 쥐어잡았다.

“계속 겁쟁이처럼 구니까 이렇게 된 거란 말이다! 너희가 태어난 나라인데, 너희가 지킬 생각을 해야지, 지금 이게 뭐 하자는 거야! 우리는 여기에 놀러 온 줄 아나?!”

“왜들 이러십니까?!”

“진정하십시오!”

돌발상황에 당황한 참모들이 달려들어 아이언사이드를 뜯어말렸다.

겨우 아이언사이드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비요트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럼 이렇게 합시다. 휘하 5군단에게 명령해 공세에 합류시키겠소. 이러면 되겠소?”

“······좋소. 그렇게 합시다.”

프랑스 1집단군 전체도 공세에 참가하길 원했던 베레커와 아이언사이드에겐 다소 아쉬운 규모였지만, 병사 한 명, 전차 한 대라도 더 필요했던 둘은 여기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상 뭐라고 해도 프랑스군이 병력을 선뜻 내어줄지 의문이 들기도 했고.

그러나,

공세를 시작하기로 계획된 5월 19일에 프랑스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명령서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착오로 인해 프랑스 제5군단은 5월 20일에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는 줄 알고 있었다.

“이제 어떡하죠?”

“프랑스군이 합류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러면 너무 늦어. 우리끼리라도 공세를 진행하는 수밖에.”

영국군은 프랑스군의 지원 없이 단독으로 공세에 나섰다.

공세의 첫 번째 목표는 독일군의 수중에 있는 아라스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

1940년 5월 19일

프랑스 아라스

파릇파릇한 19살의 나이로 1차대전에 참전하여 이프르, 솜, 아미앵 등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법한 격전지에서 싸운 적 있는 그레이엄 애플린 중사는 전쟁이 터지기 전에는 리버풀 외곽에 있는 양고기 냉육 통조림 생산공장의 관리책임자로 일했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고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하자 그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재입대를 신청했다.

조국이 위기에 처했는데, 자기 혼자만 안전한 후방에 있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군은 그레이엄의 과거 경력을 감안하여 그를 하사에서 중사로 진급시켰다.

후드가 비스마르크에게 격침당하던 날, 그레이엄의 중대는 영국 본토를 떠나 프랑스 북부로 배치되었다.

프랑스로 가는 수송선에 오르면서 그레이엄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조국 땅을 지켜봤다.

항구에는 프랑스로 떠나는 가족과 연인을 배웅나온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출발에 앞서 그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병사들을 둘러봤다.

모두 18살에서 20살 언저리의 어린 병사들로 과거의 자신처럼 조국을 지키겠다는 신념 하나로 입대한 이들이었다.

꼭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군.

첫 전투를 앞두고 나도 저렇게 벌벌 떨었지.

옛날 생각이 난 그레이엄은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가까이 있는 이병에게 말을 걸었다.

“무섭냐?”

“예? 아, 그게······.”

“솔직하게 말해. 이런 걸로 혼내는 인간은 없으니까.”

“무섭습니다.”

“어느 정도로?”

“바지에 오줌 싸기 직전입니다.”

“그렇군. 25년 전의 나도 그랬지. 처음 포성을 들었을 땐 어찌나 놀랐는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을 정도라니까. 그 때문에 바지가 젖어서 오줌 싼 걸로 오해받아서 해명하느라 고생했지.”

“하하하하······.”

“그레이엄 중사!”

소대장 토니 무어 소위가 다가오자 그레이엄은 일어서서 경례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소대장님.”

“출발 5분 전이네. 소대원들과 잡담은 그만하고, 인원파악이나 하게.”

“알겠습니다.”

그레이엄이 경례했지만 무어 소위는 쳐다보지도 않고 훌렁 가버렸다.

조용히 앉아서 담배를 피우던 앤드류 홉킨스 상병이 무어 소위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저 어린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아직 뭘 몰라서 그러는 거겠지.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거야.”

사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프랑스로 배치된 무어 소위는 오만한 태도와 융통성 없는 성격으로 중대에서 악명이 높은 장교였다.

오래전 일이긴 하나 전장에서 3년 넘게 구르며 수십 번의 전투를 경험한 바 있는 그레이엄 눈에는 햇병아리나 다름없었지만, 계급이 깡패라고 무어 소위가 상급자였기에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곧 실전인데 하필이면 쏘가리가 저딴 애새끼라니. 정작 실전에선 바지에 오줌 싸는 거 아닙니까?”

“까탈스럽게 굴어도 의외로 실전에선 다를지도 모르지.”

출발을 앞두고 조종수들이 일제히 전차에 시동을 걸었다. 보병들은 전차에 올라타거나 전차 좌우로 정렬했다.

“전차 전진!”

“자, 드가자.”

마틸다 I, II 전차들을 선두로 70대가 넘는 전차들이 일제히 전진하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지만, 병사들은 느긋하게 경치를 구경할 상황이 못 되었다.

언제, 어디서 독일군의 총알이 날아들지 모른다는 생각에 병사들은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날씨는 무척 좋았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고 선선한 산들바람이 불어와 기분 좋게 얼굴을 어루만졌다.

피크닉 가기에 좋을지 몰라도 전쟁이라는 상황에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는 날씨였다.

“자식들, 존나게 부럽네.”

전차에 타서 편하게 가는 타 중대 병사들을 홉킨스가 부러운 눈으로 흘겨봤다.

기관총 무게 때문에 벌써부터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우리도 저렇게 전차 타고 가면 안 됩니까?”

“어차피 전투가 시작되면 내려야 하는데 굳이 탈 필요 있냐? 그러게 내가 평소 하체 힘을 길러놓으라고 말하지 않았냐.”

“제 하체가 부실한 게 아니라 이놈이 더럽게 무거운 것이라니까요.”

홉킨스가 짊어진 브렌 경기관총은 중량이 10.3kg으로 기관총치곤 가벼운 축에 속했지만, 예비 탄창까지 다 합치면 무게가 제법 나갔다.

홉킨스의 투정 아닌 투정을 받아주며 발걸음을 옮기던 그레이엄은 전방의 숲에서 움직이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갑자기 왜 멈추십니까?”

“저기 숲에서 뭔가를 본 것 같-”

숲에서 섬광이 일고 1초 후 마틸다 한 대가 굉음을 울리며 폭발했다. 그레이엄은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췄다.

“적습이다! 모두 엎드려!”

홉킨스도 그레이엄을 따라 잽싸게 바닥에 엎드렸다.

어리버리한 신병 몇 명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모습을 본 그레이엄의 입에서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야 이 병신새끼들아! 안 엎드리고 뭐하냐?! 빨리 엎드리라고!”

뒤늦게 3명이 엎드렸지만, 행동이 느린 한 명은 엎드리기 전에 총탄을 맞아 쓰러졌다. 독일군의 기관총 사격이었다.

훈련에서의 실수는 호통만 듣고 넘어갈 수 있지만, 실전에서의 실수는 그렇지 못했다.

행동이나 판단이 느린 병사들은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그것이 그레이엄이 전쟁에서 배운 사실이었다.

“사, 사격 개시! 응사해라!”

가까스로 총탄을 피한 무어 소위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가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이미 그레이엄은 총알이 날아오는 방향을 향해 리-엔필드 소총을 쏘고 있었다.

전차들도 주포를 쏘며 돌격했다. 아라스 전차전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

“찾았다! 2시 방향에 발사광, 포탑 돌려!”

전차장 콜린 브레너 중위의 지시에 포수 랜돌프 해리우드 하사는 황급히 포탑을 회전시켰다.

“조금만 더 오른쪽으로······ 됐어, 그만.”

랜돌프는 조준경을 눈을 갖다대고 적 전차-혹은 대전차포-를 탐색했다. 그런데 암만 둘러봐도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찾았냐?”

“못 찾았습니다.”

“그걸 왜 못 찾아? 눈 똑바로 뜨고 찾은 거 맞아?”

브레너 중위의 지적에 랜돌프는 짜증이 확 치밀었지만, 입을 꾹 닫고 탐색에 집중했다.

남들보다 작고 가는 눈을 가진 랜돌프는 눈이 작다는 이유로 ‘중국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자주 놀림을 받았다.

그 때문에 그는 눈과 관련된 말을 그 어떤 말보다 가장 싫어했다.

랜돌프가 보이지 않는 적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이 이번에는 다른 곳에서 발사광이 일었다.

발사광이 일 때마다 전차 한 대가 격파되어 불길을 토했다.

“아, 찾았습니다!”

“그럼 빨리 쏴!”

발사 페달을 밟자 주포가 격발되면서 뒤로 후퇴했다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갔다.

“맞았어?”

“아직 확인 중입니다!”

마틸다 II에 탑재된 2파운더 주포는 40mm라는 소구경치고 관통력이 무척 높은 편이었지만, 탄종이 철갑탄밖에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전차가 적 전차뿐만이 아니라 보병, 대전차포 등 다양한 적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그냥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역시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대전차포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놈이 발포하자, 랜돌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윽고 전차에 충격이 전해졌다.

“괜찮아, 튕겨냈어!”

운 좋게도 대전차포가 쏜 포탄은 마틸다 II의 장갑을 뚫지 못하고 도탄되었다.

PaK 38과 마틸다 II 사이의 거리는 대략 400m. 정면을 제대로 맞춘다면 충분히 관통할 수 있는 거리다.

랜돌프는 운이 억세게 좋았다.

“장전 완료!”

탄약수가 약실에 포탄을 장전하자 랜돌프는 사격 보고도 하지 않고 즉시 페달을 밟았다.

대전차포의 포방패에 구멍이 뚫리면서 포수의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랜돌프는 적을 확실하게 끝장내기 위해 공축 기관총을 발사했다.

유탄 한 발만 있었어도 이런 수고는 덜었을 테지만, 유탄이 없기에 마틸다 II의 전차병들은 공축 기관총에 자주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만, 그만. 대전차포 하나에 총탄을 얼마나 퍼붓는 거야? 나중에 총알 다 떨어지면 그땐 어떡하게?”

“높으신 분들 중 한 명이라도 전차에 유탄을 보급할 생각을 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겁니다.”

간신히 대전차포 한 대를 처리했을 뿐, 상황은 여전히 영국군에게 불리했다.

독일군은 영국군이 기습을 가해오리라고 미리 알고 있었는지 대전차포를 곳곳에 배치하여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 사실을 모르고 무작정 전진하던 영국군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독일군의 대전차포는 영국 전차들의 주포보다 사거리가 더 길었기 때문에 보다 먼 거리에서 영국군을 사냥할 수 있었다.

반면 영국군은 전차의 주포도 짧고 유탄이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 때문에 적 대전차포를 격파하기 위해선 피해를 무릅쓰고 전진하는 수밖에 없었다.

-쾅!

“으아아아아!!!”

피격되어 화염을 내뿜는 마틸다 I에서 탈출한 전차장이 몸의 불을 끄기 위해 발버둥 쳤다.

움직이는 토치카 개념으로 만들어진 마틸다 I은 주포가 없고 빅커스 기관총 1정만 달려 있었다. 당연히 적 전차는커녕 대전차포 하나 상대할 수 없어 사실상 움직이는 과녁 신세였다.

온몸이 불에 타들어 가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군을 본 랜돌프는 몸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도 저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식은땀이 나면서 손발이 덜덜 떨렸다.

그런 랜돌프의 심정을 모르는 브레너 중위는 그에게 새로운 목표물을 할당했다.

“11시 방향이다! 포탑 돌려! 야, 듣고 있냐?”

“예? 아, 알겠습니다!”

“정신 똑바로 차려!”

랜돌프에게 호통을 친 브레너 중위는 다시 관측창으로 눈을 가져갔다.

그가 발견한 표적은 움직이고 있었다.

“적은 대전차포가 아냐. 전차다. 확인했나?”

“확인했습니다.”

차라리 전차가 대전차포보다 상대하기 수월했다.

관통으로 발생한 파편으로 전차 내부와 승무원들에게 손상을 입혀 전투불능 상태에 빠뜨리기 쉬우니 말이다. 탄약고에 명중한다면 완파도 기대할 수 있고.

적이 움직임을 멈췄을 때 랜돌프도 조준을 마쳤다.

“조준 완료!”

“쏴!”

마틸다 II의 주포가 힘차게 불꽃을 토했지만, 적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전차의 장갑에 부딪힌 철갑탄이 노란 불똥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튕겨 나가는 모습에 랜돌프는 허망함을 느꼈다.

“빌어먹을, 도탄! 재장전해!”

탄약수가 가대에서 포탄을 빼내는 사이, 랜돌프는 조준경에 비친 적의 모습을 응시했다.

포탑이 없고 경사진 차체에 달린 주포.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독일군의 신형 전차였다.

“장전 끝!”

“다시 발사!”

랜돌프는 재차 주포를 격발시켰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도탄. 적도 랜돌프를 발견하고 차체를 살짝 옆으로 틀었다.

랜돌프는 이틀 전 동기한테서 들은 소식을 기억해냈다.

저 작은 전차에게 프랑스군이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었다.

트럭보다 작은 크기의 전차가 정면에서 날아오는 모든 포탄을 모조리 튕겨내며 역으로 프랑스군의 전차들을 모두 격파해버렸다는 말을 들었을 땐 허풍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보니 그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단 한 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진실이었다.

적의 검은 포구에서 노란 화염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 거대한 충격이 랜돌프를 흔들었다.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뜨거운 화염이 전신을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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