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가 떠오르다 >
1940년 5월 4일
독일 베를린 신 총통관저
나는 햇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진저에일을 홀짝이며 해군의 보고서를 읽었다.
전함 1척, 중순양함 1척, 항공모함 2척, 구축함 3척 격침이라.
이번에 격침당한 커레이저스 항공모함은 역사대로라면 개전 16일만인 9월 17일에 유보트의 어뢰를 맞고 용궁으로 갔다.
근데 여기선 역사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래봤자 결과는 같지만.
퓨리어스는 노후화된 구식 함선임에도 불구하고 1944년까지 전선 각지에서 활약하다가 1948년에 유지비 문제로 해체당했다. 이놈도 자매함처럼 어뢰를 맞고 용궁으로 가버렸다.
비스마크르 추격전으로 유명한 후드 역시 격침당했다.
후드가 격침되자, 영국 함대는 전투를 중단하고 도주했다.
하지만 이내 후드가 격침당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대서양 방면에 배치된 모든 영국 함선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역사에서도 후드가 비스마르크에게 격침당한 뒤, 분노로 눈이 뒤집힌 영국 해군은 사실상 모든 전력을 투입해 비스마르크를 추격했고 끝내 격침시킴으로써 복수에 성공했다.
전함 한 척의 복수를 위해 전 해군을 소집하는 게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아무리 전함이 중요하다지만, 그게 전 해군을 투입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하지만 후드가 가진 상징성을 생각하면 영국인들의 반응은 이상한 게 아니었다.
아름답고 웅장한 외형으로 대영제국의 자존심이라 불렸고 후드를 보고 해군 입대를 신청한 지원자들이 한무더기일 정도로 후드는 영국 해군의 상징 그 자체였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배가 격침당했으니 당연히 눈이 뒤집힐 수밖에.
아군의 손실도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그라프 슈페가 전투 중 격침당했고 뤼초는 전투가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지만, 함의 피해가 너무 커서 결국 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함재기들의 희생도 생각보다 많았고 구축함도 3척이나 격침당했다. 2척은 침몰은 피했지만 대파당해 장기간 수리가 필요한 상태.
노르웨이군의 피해는 기뢰부설함 1척, 무장 포경선 1척 격침.
그래도 피해가 이 정도에서 그친 게 어딘가.
가장 귀중한 항공모함과 전함을 한 척도 잃지 않았고, 영국 해군에게 제대로 빅엿을 먹이는 데 성공했으니 충분히 감내할만한 피해였다.
문제가 있다면 커도 너무 큰 빅엿이어서 적들의 눈이 완전히 돌아갔다는 것이다.
“레더에게 전하게. 지금쯤 영국인들 눈이 뒤집혔을 테니, 절대로 나대지 말고 그대로 해안 깊숙한 곳 구석에 처박혀 있으라고. 적들이 어떤 도발을 해와도 절대로 반응하지 말라고 해. 지금부터는 교전을 피하고, 전력을 유지하는 데 집중해야 하네.”
“즉시 전달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요행으로 두 번 연속 승리할 수 있었지만, 이후에도 같은 행운이 반복될 리가 없다.
가뜩이나 이탈리아의 참전으로 지중해 방면에 배치된 영국과 프랑스 함선들이 북대서양으로 몰리기 시작했는데, 후드 격침으로 영국 해군이 복수귀로 돌변했다.
또 전투가 벌어진다면 영국 해군은 보유한 모든 함선을 총동원해서라도 크릭스마리네를 전멸시키려 들 것이다.
크릭스마리네가 전멸하면 독일 서해안 일대가 연합군 해군에 의해 봉쇄당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따라서 추가 전과보단 현재의 전력을 무사히 보존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
두 번째 보고서의 내용은 영국군에게 투항하여 앞잡이 노릇을 하다가 생포된 독일 출신의 노르웨이인에 대한 것이었다.
이 자의 노르웨이 이름은 군나르 가슬란드.
독일식 이름은 헤르베르트 프람,
또는 빌리 브란트다.
빌리 브란트.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지? 폴란드 바르샤바 유대인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으로 유명한 전 독일 총리 맞다.
청소년 시절부터 당원으로 활동할 만큼 열렬한 사민당원이었던 빌리 브란트는 나치가 집권하자 자신이 일하던 선박 회사의 배를 훔쳐 노르웨이로 도주했다.
노르웨이에 도착한 브란트는 1940년에 노르웨이 국적을 취득했고 이후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오가며 연합군의 스파이 노릇을 했다.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역사 속의 브란트의 행적이지만, 이 세계에서 브란트의 행적은 많이 달라졌다.
영국이 노르웨이를 공격하면서 얼떨결에 노르웨이는 독일과 동맹이 되었다.
그러자 브란트는 노르웨이를 배신하고 영국에게 붙기로 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브란트는 영국군에게 투항하여 자신이 독일 사민당원임을 밝힌 뒤, 영국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단다.
하지만 영국군은 브란트를 미치광이, 또는 허접한 스파이라고 판단하여 그를 구금했다가 통역으로 활용했다.
통역으로 활동하던 브란트는 그가 속한 영국군 부대가 노르웨이군에게 포위되어 항복했을 때 함께 포로가 되었다.
브란트는 처음엔 영국 군인인 척을 했지만, 포로가 된 영국군 병사들이 브란트의 정체를 실토하면서 정체가 탄로 나고 말았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매국노는 분노와 혐오의 대상이기 마련.
독일인지만, 노르웨이인이기도 했던 브란트는 분노한 노르웨이군에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터졌다.
그런 다음 노르웨이군은 브란트가 독일 출신임을 감안하여 독일군에게 브란트를 인계했다.
브란트는 차라리 노르웨이에서 재판받게 해달라고 울부짖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역사대로라면 전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정치인으로 남았을지 몰라도 지금의 그는 두 나라를 배신한 역겨운 매국노일 뿐이다.
브란트 개인에게 악감정은 없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자명했다.
“괴벨스, 자네라면 이놈을 어떻게 하겠나?”
“당연히 죽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신, 바로 죽이진 않고 일단은 살려둬야죠. 재판장에 세워서, 국민들에게 매국노의 말로가 무엇인지 보여줄 필요가 있으니까요.”
“음, 과연. 이 일은 자네에게 맡기겠네.”
“총통 각하의 기대에 반드시 부응하겠습니다.”
자신의 주특기를 마음껏 발휘할 기회가 생긴 괴벨스는 호쾌하게 웃었다.
총통이 허가하고 선전장관이 직접 기획한 매국노의 대국민공개재판쇼.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의 시선이 확 끌리지 않겠나?
“아, 대신에 프라이슬러는 쓰지 말게. 그 친구, 충성스럽긴 한데 평이 영 좋지 않아서 말이지. 다른 친구를 세우도록 하게나.”
“그렇습니까?”
예상대로 괴벨스는 프라이슬러를 염두에 뒀는지 무척 아쉬워했다.
어째 생각하는 게 한치도 범주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냐?
나치 독일의 법무부 차관이자 국민재판소장이었던 롤란트 프라이슬러는 히틀러와 나치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했지만, 재판 중에 피고에게 온갖 욕설과 저주를 퍼붓고 사형을 남발하는 막장 판사로 악명이 자자했다.
독일 국민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같은 나치당원들마저 프라이슬러를 꺼릴 정도였는데, 공습으로 프라이슬러가 죽자 그의 유해를 본 병원 직원들이 천벌을 받은 거라며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 괴링이 프라이슬러의 재판을 녹화한 영상을 보고 홀로코스트 기록영상보다 더 불쾌하다는 평을 남기기까지 했고.
그 정도로 프라이슬러는 반나치와 나치 모두에게 미친놈 취급을 받는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을 뉴스영화 메인으로 내세운다? 국민들 사기가 올라가기는커녕 수직으로 곤두박질치겠지.
2차 장검의 밤 재판 때도 프라이슬러가 재판을 맡았지만, 이번 재판은 영상으로 녹화해서 국민들에게 공개할 예정이기에 프라이슬러 말고 다른 이를 세워야 했다.
“어차피 판결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누굴 세워도 상관은 없지 않나. 적당히 말빨 좀 되는 친구로 세우게.”
“총통께서 그러신다면야 뭐······.”
괴벨스는 못내 아쉬운지 연신 입맛을 다셨지만, 암만 생각해도 프라이슬러는 안 된다. 독일 국민들이 다 너같은 줄 아냐?
세 번째 보고서는 Fw190의 신형기 소식이었다.
기존의 Fw190(A-1형)의 주익 안쪽에 장착된 MG17 기관총을 MG151 기관포로 교체하여 화력을 강화하고, BMW 801 C-1 엔진보다 강력한 BMW 801 D-2 엔진을 장착하여 출력이 1560마력에서 1700마력으로 증가했다. 실제 역사의 A-3형이 가진 특징이다.
기존의 A-1형만으로도 영국과 프랑스가 보유한 모든 전투기들을 압도하는데, 그보다 더 강력한 A-3형이 튀어나왔으니 연합군 조종사들은 아주 죽을 맛이겠지.
이 시기 영국 공군이 보유한 전투기 중 가장 우수한 전투기가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Mk.I로, Bf109 F형과 Fw190 A-1형보다 성능이 아래다.
이들보다 우수한 Mk.IX형은 1942년 7월에나 등장하는데, 그때가 되면 루프트바페는 훨씬 더 강한 신형 전투기로 무장하고 있을 터.
이대로만 간다면 베를린이 폭격으로 불바다가 되는 일은 피할 수 있겠지.
남부전선 상황도 여전히 순조롭다.
이탈리아군이 날마다 공세를 시도하고 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아군 산악사단에게 격퇴당하기 일쑤였다.
분노한 적들은 수백 대의 폭격기들을 동원해 국경 인근의 도시들을 공습했지만, 우다 레이더를 필두로 한 아군 방공망 때문에 별 재미는 보지 못했다.
오히려 공습으로 죽은 오스트리아인 수보다 격추되어 죽은 이탈리아군 조종사들의 수가 더 많을 정도다.
전차의 통행이 가능한 길목에는 미리 지뢰를 묻고 대전차포를 설치하여 이탈리아군 전차가 나타나는 족족 쏴버리고 있다.
아예 다리나 터널을 폭파시키면 더 편하겠지만, 나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다리와 터널을 최대한 온전히 보존하라는 명령을 내려뒀다.
훗날 이탈리아로 밀고 들어갈 때 다리나 터널을 새로 만들려면 비용도 들고 시간도 드는데 아깝지 않은가.
설령 방어선이 뚫린다고 해도 후방에 있는 예비대를 투입하면 될 일이니 괜히 아까운 다리와 터널을 날릴 필요가 없다.
일이 생각대로 잘 안 풀리자 초조해진 무솔리니는 급기야 유고슬라비아에게 자국 군대가 영토를 통과할 수 있게끔 허용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정면공격은 무리이니 상대적으로 방어가 취약할 것으로 예상되는 유고슬라비아 국경을 치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당연하게도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무솔리니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독일과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탈리아와도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기에 유고슬라비아 입장에선 무솔리니의 요구를 들어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무솔리니, 이 바보병신새끼. 딱 봐도 영프 편에 서서 우리 땅을 좀 뜯어보겠다는 생각으로 참전한 것 같은데, 머리를 잘못 굴렀어. 그렇게 땅이 욕심났으면 승패가 갈리기 전까지 중립을 지켰어야지.”
지난 회귀에서 파스타 놈들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던가. 이제 그 복수를 할 차례가 왔다.
다시는 전쟁의 전도 꺼내지 못하게끔 철저하게 밟아주지.
***
1940년 5월 8일
독일 쾰른
영국과 프랑스 공군은 독일 쾰른을 공습했다. 이전에도 쾰른 상공에 영국군이나 프랑스군의 폭격기가 나타나 폭탄을 떨구고 도망친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대규모 공습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번 공습은 영국 정부의 강력한 요구로 이루어진 것인데, 며칠 전 북해에서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에게 격침된 후드의 보복 차원에서 진행되었다.
후드가 격침당하자 분노로 이성을 잃은 처칠은 즉시 특명을 내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비스마르크를 격침시켜라.
대서양 방면의 모든 영국 해군이 총동원되어 독일 함대 사냥에 나섰다.
하지만 독일 함대는 전투가 끝나기 무섭게 본국의 명령을 받고 베르겐 인근의, 내륙으로 이어지는 해안 구석에 처박혀 몸을 사렸다.
복잡하기로 유명한 노르웨이 해안에서 그것도 내륙으로 통하는 깊숙한 구석에 처박힌 독일 함대를 영국 해군은 도저히 건드릴 수 없었다.
구석에 은둔한 독일 함대를 잡으려면 노르웨이 해안선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좁디좁은 입구에 대함대가 몰릴 경우 노르웨이군 해안포와 요새의 밥이 되기 십상이었다.
독일 유보트가 스캐퍼플로에서 그랬던 것처럼 잠수함을 잠입시켜 적함을 격침시켜보려고 했지만, 정찰 중이던 Ar196에게 사전에 발각당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발각당한 S급 잠수함은 Ar196이 투하한 폭뢰를 맞고 항행불능 상태가 되어 노르웨이군에게 포획되었고 노르웨이군은 이를 열심히 선전하며 영국군을 비웃었다.
어디 그것뿐인가? 이미 노르웨이에 전개된 독일 공군도 영국 함대에겐 골칫덩이였다.
벌써 비스마르크의 위치 파악을 위해 노르웨이 해안을 기웃거리던 구축함과 순양함 여럿이 독일군의 Ju88, Do217에게 격침당했다.
내륙에 숨은 독일 함대를 잡자니 노르웨이군 해안포와 요새에 몰살당할 테고,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있자니 상부와 여론의 닦달이 장난 아니었다.
적 함대를 유인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봤지만 적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적 함대 탐색 및 유인을 위해 파견한 배들은 유보트와 항공기에 걸려 격침당하거나 포획되었다.
영국군 입장에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에 영국은 독일의 도시를 공습하는 것으로 후드의 복수를 대신하고자 했다.
비스마르크 사냥을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당장은 할 수 있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다.
우다 레이더에 영국과 프랑스 폭격기들이 포착되기 무섭게 도시에는 공습 경보가 울렸다.
경찰들이 고함을 치며 사람들을 방공호로 유도하는 동안, 수백 개의 서치라이트가 어두운 밤하늘을 조각내어 도시를 향해 날아오는 폭격기들의 행렬을 찾아냈다.
“사격 개시!”
서치라이트의 불빛이 적 폭격기를 찾아내자 대공포들이 불을 뿜었다.
쾰른 상공을 비행하는 빅커스 웰링턴 폭격기 조종사들은 격렬한 대공사격에 겁을 집어먹었지만, 침착하게 본연의 임무를 수행했다.
살아서 기지로 돌아가려면 가지고 온 폭탄을 모두 떨궈 기체를 가볍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폭탄창이 열리고 폭탄들이 쾰른 시가지를 향해 하나씩 낙하하기 시작했을 무렵, 몇 대의 전투기들이 은밀히 편대의 뒤로 접근해왔다.
독일 공군의 Bf110 중전투기였다.
튼튼한 내구력과 쌍발 엔진 장착으로 얻게 된 긴 항속거리, 강력한 무장으로 개발 초기부터 많은 이들의 기대를 받았던 Bf110였지만, 기동성과 최대속도가 다소 떨어진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히틀러는 Bf110을 폭격기 호위 대신 요격기로 배치할 것을 지시했다.
요격기로 배치된 Bf110은 레이더 안테나와 슈레게무지크(Schräge musik)라는 신형 기관포를 장착하는 개조를 거친 뒤 요격 임무에 투입되어 그 진가를 발휘했다.
요격 임무에 투입된 Bf110들은 동체를 어두운 회색으로 칠해 자세히 보지 않고선 존재를 알 수 없었다.
웰링턴 폭격기의 후방 터렛에 발각되지 않고 무사히 접근하는 데 성공한 Bf110의 조종사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표적이 된 폭격기 조종사들에게 짤막한 작별인사를 건넸다.
“잘가라, 토미.”
슈레게무지크가 불을 뿜자 웰링턴의 동체 밑부분이 순식간에 벌집이 되었다.
연료탱크가 폭발하면서 균형을 잃은 웰링턴은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임무를 완수한 Bf110은 쏜살같이 달아났다.
-잭슨이 당했다!
-여기는 윈스턴! 기체가 말을 듣지 않는다! 추락한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Bf110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폭격기 편대는 금방 대혼란에 빠졌다.
어디를 둘러봐도 적기는 보이지 않았기에, 조종사들은 대공포에 맞아서 추락했다고 생각했다.
“2시 방향에 적기다!”
뒤늦게 Bf110을 발견한 후방 터렛 사수가 황급히 기관총을 발사했지만, Bf110은 기관총의 사각 안으로 들어갔다.
기관총이 조준할 수 없는 폭격기 아래에 자리잡은 Bf110이 슈레게무지크를 발사하자, 또 한 대의 웰링턴이 연기를 내뿜으며 추락했다.
***
연합군의 쾰른 공습은 영국군 폭격기 38대 격추, 프랑스군 폭격기 26대 격추라는 무지막지한 피해만 입은 채 끝났다.
공습을 받은 쾰른도 도시 곳곳이 불타고, 건물이 무너져 사람들이 숨지는 등 피해를 입었지만 영프군은 적에게 입힌 손실보다 자국군이 입은 피해가 더 크다고 판단했다.
양군 수뇌부는 너무 먼 쾰른까지 비행한 것이 손실의 원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다음에는 쾰른보다 가까운 슈투트가르트를 공습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연합군의 다음 계획이 실행에 옮겨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쾰른 공습으로부터 이틀 뒤,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