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아침 해가 뜨기 전에 (9) > (67/150)

< 아침 해가 뜨기 전에 (9) >

해가 떠올라 하늘의 어둠을 걷어내기 시작할 무렵 포격이 끝났다.

간신히 고개를 든 리처드는 먼지와 미세한 콘크리트 가루가 잔뜩 섞인 공기를 마시고 캑캑거렸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적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비상! 적습이다! 비상!”

“모두 위치로!”

“서둘러, 새끼들아!”

88mm 대공포의 포격이 끝나자 이번에는 전차들이 달려왔다.

독일제 2호 전차와 4호 전차에 올라탄 노르웨이군 병사들을 본 영국 해병대원들은 즉시 비상이 걸렸다.

“저것 좀 봐, 리처드! 전차야!”

“나도 알아, 젠장!”

리처드는 적군이 전차를 앞세워 공격해왔다는 사실보다 아침식사로 베이컨을 먹지 못하게 된 일이 더 충격으로 다가왔다.

망할 자식들. 지금까지 잠잠하다가 왜 오늘 공격해오는 건지.

“저놈들도 베이컨 냄새를 맡았나 보군. 이거 성가시게 됐다.”

게일 상사는 가볍게 혀를 찬 뒤 소대원들을 지휘하러 달려갔다.

게일 상사가 떠나고 동기와 단둘이 남은 리처드는 유사시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수류탄을 미리 꺼내 옆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영국 해병대에겐 매우 낭패인 것이 노르웨이군에겐 전차가 없다고 전해들은 탓에 대전차포를 가져오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대전차포 대신 대전차소총이라면 있었다. 신형 킹스 대전차소총이 그것이었다.

대전차포보다는 못해도 없는 것보다 나았다. 중대당 한 정 밖에 없는 귀중한 몸이라 여태까지 잘 쓰이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대전차사수는 장갑이 두꺼운 4호 전차 대신 상대적으로 얇은 2호 전차를 노렸다.

소총의 발사광치곤 많이 거대한 화염이 총구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14×120mm 철갑탄이 차체 하단에 명중함과 동시에 2호 전차는 정지했다. 변속기가 망가진 것이다.

전차에 충격이 전해지자, 노르웨이 병사들은 일제히 지면으로 뛰어내렸다.

전차에서 뛰어내려 좌우로 산개하는 노르웨이군의 머리 위로 총탄을 빗발쳤다.

노르웨이군을 지원하기 위해 2호 전차가 기관포에 불을 당겼다.

기관포탄을 맞은 벽돌벽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벽 뒤에 숨은 병사의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었다.

전우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반토막나는 광경을 본 리처드는 충격으로 방아쇠 당기는 것도 잊었다.

자신도 저렇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손발이 파르르 떨렸다. 의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야, 뭐해! 얼른 안 쏘고!”

“아, 어!”

동기의 외침에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긴 리처드는 2호 전차의 포탑이 회전하는 것을 봤다.

전차의 기관포가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포탑에서 불꽃이 튀었다.

“좋았어!”

킹스 대전차소총이 전차 포탑에 구멍을 뚫자, 전차는 침묵했다. 조금 전의 공격으로 전차병이 죽거나 부상을 입은 게 확실해 보였다.

그러나 이제 겨우 2호 전차 한 대를 잡았을 뿐 적은 여전히 기세등등했다.

4호 전차가 달려오면서 주포를 쏘자 영국군 서너 명이 폭발에 휩쓸렸다.

리처드는 4호 전차 뒤에 숨어 소총을 쏘고 있던 노르웨이군을 저격했다.

허벅지에 총탄을 맞은 노르웨이 병사는 뒤로 쓰러져 고통스러워했다.

마침 전차가 뒤로 후진하면서 노르웨이군은 달아날 틈도 없이 무한궤도에 깔리고 말았다.

“멍청한 놈들, 같은 편끼리 죽이더니.”

리처드의 조소는 전차의 포성에 파묻혔다.

75mm 24구경장 주포의 포구에서 화염이 뿜어져 나올 때마다 귀청을 찢을듯한 폭음이 울려퍼졌다.

무장이 시원찮은 보병들에게 전차는 사신이나 다름없었다.

벌써 단 한 대의 4호 전차에게 12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당했다. 킹스 대전차소총이 연이어 불을 뿜었지만, 총탄은 번번이 도탄되었다.

측면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킹스 대전차소총은 4호 전차에게 무력했다.

사수는 약점인 전면 기관총좌나 조종수 관측창을 노려서 쐈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누가 저 새끼 좀 어떻게 해봐! 이러다가 다 죽겠다고!”

“씨발, 그걸 누가 몰라?”

4호 전차를 처리하지 못하면 전멸은 시간문제였다.

누군가 나서서 저 강철 괴물을 무찔러주기만을 희망하고 있을 때, 게일 상사가 나섰다.

“리처드, 엄호해라.”

“예? 잠깐, 상사님!?”

게일 상사는 대전차지뢰를 들고 4호 전차를 향해 뛰어갔다. 4호 전차의 시야에 게일 상사는 잡히지 않았다.

그는 대전차지뢰를 무한궤도와 차체 사이에 밀어넣은 뒤, 잽싸게 도망쳤다.

무한궤도가 굴러가면서 지뢰가 땅에 떨어졌고, 땅에 떨어진 지뢰를 밟은 궤도가 산산조각났다.

움직임이 봉쇄되자, 대전차사수가 적의 약점을 조준할 수 있게 되었다.

움직이는 목표물의 약점을 쏘는 것보다 움직이지 않는 표적의 약점을 쏘는 것이 훨씬 쉬운 법. 사수는 즉시 전차의 기관총좌를 향해 총탄을 날렸다.

-콰작!

기관총을 쏘던 무전수가 장갑을 뚫고 들어온 총탄에 맞아서 죽고, 파편이 튀어 옆에 있던 조종수의 관자놀이에 명중했다.

무전수와 조종수는 죽음에도 포탑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포탑이 회전하면서 주포를 쏘고, 기관총을 발사해 노르웨이군을 엄호했다.

게일 상사는 수류탄을 꺼내 전차를 잡고 올라갔다.

뒤늦게 게일 상사를 발견한 전차장이 해치를 열고 나와 권총을 쏘려고 했지만, 리처드가 한 발 더 빨랐다.

“커헉!”

리처드가 쏜 총탄은 전차장의 목을 관통했다. 급히 두 손으로 목에 난 구멍을 막았지만 피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거나 먹어라, 제리 놈들아!”

게일 상사는 수류탄을 해치 안에 까넣었다. 전차 내부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폭음과 함께 끊겼다.

사신이나 다름없던 전차를 멋지게 격파해낸 게일 상사였지만, 그의 운은 거기까지였다. 그가 전차에서 뛰어내릴 때, 전차 뒤에서 노르웨이군이 튀어나와 그의 등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이야아아아-!”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온 노르웨이 병사는 게일 상사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등에 총검을 꽂아 넣었다.

“상사님!”

리처드가 서둘러 총을 쏴 노르웨이군을 고꾸라뜨렸지만, 게일 상사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쓰러진 게일 상사를 구하기 위해 달려 나간 병사 두 명이 노르웨이군의 기관총 사격을 받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리처드, 저것 좀 봐!”

이제는 미동도 않는 게일 상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리처드는 동기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새로운 4호 전차가 궤도를 구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후퇴! 모두 후퇴!”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중대장은 퇴각 명령을 내렸다.

상부가 그에게 내린 명령은 추가 지시가 있을 때까지 현 위치를 사수하라는 것이었지만, 중대장은 전멸 대신 상부의 지시를 거스르는 것을 택했다.

“예비 방어선으로 퇴각한다! 모두 움직여!”

평소 중대원들과 거리가 멀었던 그였어도 이번만큼은 전 중대원이 그의 명령을 환영했다. 이대로 있다간 전멸당할 게 분명했다.

“1소대는 현 위치에서 엄호 사격! 2소대와 3소대는 즉각 후퇴한다!”

1소대 인원들이 엄호사격으로 시간을 버는 사이, 2소대와 3소대는 철수 준비를 서둘렀다.

기관총과 탄약통을 짊어진 병사들이 부리나케 뛰는 동안 독일 전차의 지원을 받는 노르웨이군이 방어선 가까이 접근했다.

“하나, 둘, 셋!”

리처드는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은 뒤 그것을 힘껏 던졌다.

수류탄이 터지자, 가까이 있던 노르웨이군 2명이 공중제비를 돌았다. 다른 병사들이 바닥에 엎드려서 대응사격을 했다.

“이제 우리 차례야. 얼른 가자고.”

리처드도 무기와 탄약을 챙겨 자리를 떴다. 등 뒤로 총성이 이어졌다. 노르웨이군이 사용하는 마드센 경기관총 소리였다.

앞서 퇴각한 2소대와 3소대 인원들이 1소대 인원들의 퇴각을 엄호하기 위해 엄호사격을 실시했다.

엎드려서 기관총을 쏘던 노르웨이 병사들이 벌집이 되어 고개를 푹 숙였다.

총탄이 왔다 갔다 하는 아비규환의 현장 속에서 리처드는 발바닥에 불이 붙을 정도로 죽어라 뛰었다. 지금 그의 목숨을 구할 유일한 수단은 자신의 두 다리뿐이었다.

“야! 여기야, 여기!”

이름을 모르는 소대원이 리처드를 향해 손짓했다.

일고여덟 명이 족히 들어갈 수 있는 진지에 달랑 병사 3명만 자리잡고 있었다. 리처드는 지체없이 진지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시야가 환해지면서 거친 폭압이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리처드는 허공으로 2m가량 붕 떠올랐다가 땅에 거꾸로 처박혔다.

대체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리처드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간신히 눈을 뜨자, 조금 전까지 그를 향해 손짓하던 병사가 있던 진지에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전차 포탄에 맞은 것이었다.

무한궤도 구르는 소리를 들은 리처드는 다시 일어서서 달리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이유인지 하체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

조금 전의 충격으로 리처드의 하체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다리와 고간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분홍색 내장이 대신 자리잡고 있었다.

바닥에 즐비한 자신의 내장을 보는 순간 리처드의 시야가 하얗게 변하면서 이내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되었다.

총성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

1940년 5월 3일

북해

독일-노르웨이 연합군이 베르겐과 트론헤임, 나르비크에서 영프군과 싸울 때, 북해에서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영국 함대와의 첫 교전 후, 스타방에르에 정박해 수리를 받은 비스마르크는 이번에도 영국 함대와의 전투를 위해 출격했다.

FM대로라면 못해도 한 달, 넉넉하게 석 달가량은 수리를 받아야 했지만, 급박한 전황은 상처 입은 거인을 다시 전장으로 내몰았다.

이번에는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뤼초와 그라프 슈페, 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블뤼허, 구축함 3척이 추가로 합류하였다.

거기에 노르웨이 해군 소속 기뢰부설함 3척과 포경선 1척도 독일 함대를 따라 영국 해군과의 전투에 나섰다.

독일 함대가 접근해오는 동안, 베르겐의 영국 함대는 지상군을 지원하느라 꼼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독일 함대와 싸우러 자리를 떴다간, 베르겐에 남겨진 아군 병력은 꼼짝없이 독일군에게 몰살당할 터였다.

영국 해군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유보트 한 척이 모습을 숨긴 채 은밀히 영국 함대에 접근했다.

“병신 새끼들. 적이 코앞까지 왔는데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21형 유보트 U-47의 함장 귄터 프린 소령은 아무것도 모른 채 바다 위를 떠다니는 영국 함선들을 보며 악마처럼 웃었다.

그의 목에 걸려있는 기사십자장이 전등 불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천하의 로열 네이비도 이젠 어중이떠중이들만 모인 것 같군요.”

기관장인 중위가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세계 최강이라 자부하던 영국 해군의 콧대를 스캐퍼플로 기습으로 납작하게 눌러준 전쟁 베테랑들다운 여유였다.

“자, 그럼 저놈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해줘야겠지.”

조준은 진작에 끝냈고, 버튼만 누르면 된다.

입맛을 다시며 손바닥을 비비던 프린의 입에서 죽음의 명령이 떨어졌다.

“1~4번관 발사!”

기젤라 어뢰 4발이 차디찬 북해를 가르며 표적을 향해 나아갔다.

프린이 목표로 삼은 영국 군함은 커레이저스급 항공모함 커레이저스.

4발 모두 커레이저스에 명중했고, 그 즉시 커레이저스는 우측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체스판의 말들처럼 항공모함의 갑판에 가지런히 도열한 글래디에이터 수십 대가 바다속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조종사들과 정비병들도 함재기와 함께 어두컴컴한 바다에 빠졌다.

바다에 빠진 사람들은 새끼 새가 첫 비행을 위해 날개를 펼치는 것처럼 두 팔을 벌려 허우적거렸다.

“명중입니다!”

충격과 공포에 빠진 영국 수병들과 달리, U-47의 승조원들은 일제히 환성을 외쳤다.

이로써 그들은 항공모함 격침이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업적을 세웠다.

수병들은 너 나 할 거 없이 만세를 외쳤고, 충성심이 강한 몇몇은 ‘하일 히틀러’를 외치기도 했다.

커레이저스의 갑판이 수면과 완전한 수직을 이뤘을 때, U-47과 함께 작전에 나선 U-51도 잇달아 어뢰를 발사했다.

녀석의 목표는 항공모함 퓨리어스였다.

결과는 명중.

퓨리어스도 커레이저스처럼 급속도로 기울어 바다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커레이저스와의 차이가 있다면 우측이 아니라 좌측으로 기울었다는 것인데, 바다에 빠졌거나 곧 빠질 운명인 승조원들에게 기우는 방향 따윈 별로 대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항공모함을 두 척이나 상실하여 패닉에 빠진 영국 함대에 독일 함재기들이 공격을 가해왔다.

“여기는 편대장. 지금부터 토미 사냥에 돌입한다. 마음껏 날뛰도록.”

“가즈아!”

먹기 좋게 부패한 짐승의 사체를 발견한 파리떼처럼 몰려드는 불청객들을 향해 영국 군함의 모든 대공포가 황급히 불을 뿜었다.

적 함재기들을 상대할 함재기들은 유보트에 의해 북해에 빠졌다.

때문에 영국 해군은 오직 대공포만으로 독일 함재기들과 싸워야 하는 잔혹한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다.

예광탄 줄기가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는 가운데, 슈투카 한 대가 대공포에 맞아 추락했다.

“명중이다!”

“해냈-어어?!”

연기를 내뿜으며 추락하던 슈투카는 어드미럴급 순양전함 후드의 간판에 추락했다.

함 자체는 별 타격이 없었지만, 문제는 슈투카와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 화재였다.

“함에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나도 알아! 소화반은 뭐하나? 얼른 출동하지 않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배에 발생한 화재는 이빨 사이에 낀 고춧가루만큼이나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 사실을 아는 수병들은 서둘러 갑판에 발생한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했다.

하지만 아직 전투가 한창이라, 화재를 진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투타타타타!

“아아악!”

Bf109 한 대가 지나가면서 기총소사를 퍼붓자 화재 진압을 위해 출동한 수병들이 고꾸라졌다.

벌집이 된 수병들의 몸에서 선혈이 흘러나와 간판 위로 퍼져나갔다.

대공포병들은 함선 사이로 날아디는 적기를 맞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핸들을 돌렸다.

간혹 적기의 격추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아군 함선에 대공포를 쏘는 경우도 생겼다.

“6번 대공포가 당했습니다!”

“저 등신 새끼들! 어딜 향해 쏘는 거야? 피아식별도 제대로 못하나!”

영국 함대가 독일 함재기들과 싸우는 사이, 두 척의 유보트도 어뢰를 발사해 구축함 1척을 추가로 격침시키고 후드에 손상을 입혔다.

뒤늦게 구축함들이 추격에 나섰지만, 유보트들은 재빨리 도망쳤다.

항공모함 2척, 구축함 1척을 격침시키고 적 전함에 타격을 입힌 것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밥값을 달성한 셈이었다.

나머지는 아군 함대에게 맡기면 될 일이었다.

유보트에게 얻어터지고 함재기들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영국 함대에게 재앙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수평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독일 함대가 영국 함대를 포착한 것이었다.

임무를 완수한 함재기들은 기수를 돌려 모함으로 돌아갔다.

낮보다 유리한 야간에 벌어진 교전임에도 불구하고 출동한 함재기의 4분의 1이 격추되는 등 손실이 의외로 컸다.

그 대가로 구축함 2척을 격침시키고, 3척에게 중파라는 피해를 입혔지만, 전함과 순양함에는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영국 함대를 혼란케 하고 적 수병들을 지치게 만들었으니 나름대로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우현 견시 보고! 적 전함 함영! 거리 25,000!”

함재기들의 차례가 끝났으니 전함들이 나설 차례였다.

“전 포문 방열! 서둘······.”

뤼첸스의 말은 영국 함대의 선공으로 끊겼다.

자신들을 향해 접근해오는 독일 함대를 발견한 영국 함대는 서둘러 포문을 방열한 뒤, 발포했다.

조준을 가다듬지 않고 바로 쏜 수준이라 명중률은 형편없었다.

대다수의 포탄이 독일 함선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북해에 빠지고 말았다.

“토미들이 어지간히 급했던 모양입니다. 제대로 조준도 안하고 쏘다니.”

린데만의 말에 뤼첸스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 함대의 발사광을 보는 순간 실수로 혀를 깨무는 바람에 말을 할 수 없었다.

겨우 통증이 가시고 나서야 뤼첸스는 하려던 말을 마무리지었다.

“목표 적 전함, 발사!”

거대한 충격파가 북해를 갈랐다.

사람 몸뚱아리보다 큰 굵고 거대한 포탄이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포탄 자체의 위력과 운동에너지까지 더해지자, 두께 수십 cm짜리 강철판도 종잇장처럼 꿰뚫렸다.

군함보다 거대한 불의 공이 어둠 속에서 하나둘씩 피어났다.

중순양함 엑서터가 대폭발을 일으키며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가장 두꺼운 부분의 장갑마저 비스마르크의 380mm 철갑탄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거기다 샤른호르스트와 그라프 슈페의 포탄이 각각 탄약고와 연료탱크를 직격했다.

폭발로 선체가 반으로 쪼개진 엑서터는 어마어마한 양의 기름을 바다에 뿌리며 침몰했다.

조국을 지키겠다는 신념 하나로 입대한 수많은 영국 청년들은 자신들의 배와 운명을 함께했다. 그들이 지르는 단말마의 비명은 함내에 밀려든 차가운 해수에 막혔다.

하지만 후드는 맞지 않았다.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퀸 엘리자베스와 밸리언트도 경미한 손상만 입었을 뿐, 여전히 북해 위에 떠 있었다.

다시 영국 해군의 차례였다. 후드를 필두로 모든 함선이 불을 내뿜었다.

주포에서 섬광이 뿜어져 나올 때마다 주변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적 전함 발포! 총원 충격에 대비!”

뤼첸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의자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배가 흔들거렸다.

다행히도 포탄은 비스마르크의 견고한 장갑을 뚫지 못했다.

포탄이 적중한 장갑의 표면에 보기 흉한 탄흔이 생겼지만, 배가 격침당하는 것보다야 나았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처럼 두터운 장갑이 없는 다른 함선들의 운명은 달랐다.

“그라프 슈페 피격!”

“뤼초도 피격! 피해 확인 중!”

“젠장맞을!”

후드와 퀸 엘리자베스, 밸리언트의 포탄을 거의 동시에 얻어맞은 그라프 슈페는 순식간에 고철더미가 되어 불과 연기에 휩싸였다.

용케도 수면 위에 떠 있었지만, 조만간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것이 확실해 보였다.

불에 휩싸인 그라프 슈페에서 마찬가지로 몸이 불길에 휩싸인 수병들 몇 명이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사방에서 도움을 청하는 목소리와 절망에 빠진 이의 비탄이 오갔다.

뤼초는 그라프 슈페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주포탑 모두 사용 불가에 함수 대파, 방향타 고장, 선내 화재로 전투 자체가 불가능했다.

순식간에 주력함 두 척이 전력에서 이탈했다.

군함 한 척 한 척이 귀중한 크릭스마리네에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손실이었다. 뤼첸스는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놈들!”

“재장전 서둘러라! 전우들의 복수는 하고 죽어야 하지 않겠나!”

린데만이 전성관에 대고 소리치자 독일 수병들은 더욱 바삐 움직였다.

포격전에서 조준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속도다.

빨리 장전해야 한 발이라도 더 많이 쏠 수 있고, 한 발이라도 더 많이 쏴야 살 수 있는 확률이 올라간다.

“장전 완료!”

영국 함대가 재장전하는 동안, 독일 함대가 주포를 발사했다.

“발사!”

비스마르크의 380mm 철갑탄이 영국 전함 후드를 향해 날아갔다.

비스마르크의 주포가 불을 뿜는 순간, 후드의 함교에선 관측창교가 목청이 터지도록 소리를 질렀다.

“적함 발포! 탄착 대비!”

“어디 갈 때까지 가보-”

이를 악물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이던 함장은 적탄이 시야에 잡히자, 반사적으로 말을 멈췄다.

새하얀 섬광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완전한 백색의 섬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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