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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전쟁 (4) (58/150)

겨울전쟁 (4)

총사령관이 된 티모셴코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소련군의 패배원인을 찾아내 이를 철저히 분석하는 것이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맞춰 포격과 폭격을 실시하니까 당연히 효과가 없을 수밖에. 적들이 뻔히 예측할 수 있지 않겠나.”

“공격에 앞서 정찰은 중요 요소인데, 이를 무시하고 무작정 공격만 해서야 되겠나?”

“공세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바로 ‘집중’일세, 집중. 공세에 중심점이 있어야 한단 말이야.”

티모셴코는 공업지대가 위치한 핀란드 남부 일대에 대규모 공습을 가하는 한편, 만신창이가 된 부대를 개편하고 90만 명의 증원군을 추가투입해 공세를 준비했다.

설상가상으로 날씨마저 핀란드의 편이 아니었다.

소련군에겐 악몽 같았던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면서 기온이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재정비를 끝낸 소련군은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다.

이번에도 핀란드군은 용맹하게 맞서 싸웠다. 하지만 적들은 과거의 오합지졸들이 아니었다.

전차와 장갑차, 항공기를 앞세우고 포병의 지원을 받는 소련군은 핀란드군을 강하게 압박해오며 교착 상태에 빠져있던 전선에 균열을 일으켰다.

***

1940년 2월 11일

핀란드 남부 카렐리야

“쏴아!!!”

“쏴부려라!”

크고 아름다운 152mm ML-20 곡사포가 불을 뿜을 때마다 천지가 진동하며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소련군 포병들은 고막이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귀마개를 하고, 부됸노브카의 귀덮개 부분까지 내려서 귀를 감쌌지만 포성이 워낙 컸던지라 귀가 얼얼했다.

병사들은 일개미처럼 묵묵히 일하며 탄약상자를 나르고 포탄을 약실로 밀어 넣었다.

포대장이 구령을 외칠 때마다 방아끈이 당겨지면서 포가 격발되었다.

비단 152mm 곡사포뿐 아니라 그보다 작은 107mm, 122mm 곡사포들도 일제히 불을 내뿜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포탄들은 핀란드군의 진지를 강하게 타격했다.

“중대, 전진!”

1시간에 걸친 포격이 끝나자 소련군은 공격을 개시했다.

“위생병!”

“누가 좀 도와줘! 키미가 깔렸는데 혼자선 무리야!”

“카를이 죽었다! 카를이 죽었어······.”

1시간 동안 포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핀란드군은 소련군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포격에서 겨우 살아남은 병사들이 무너진 참호와 대피호에 깔린 전우들을 끄집어내는 사이 소련군이 나타났다.

“소련군이다! 전투 준비!”

핀란드군은 서둘러 전투 태세에 돌입했지만, 포격으로 많은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당한 탓에 방어선은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였다.

소련군은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워 돌격해왔다.

소련군이 자랑하는 T-26과 BT-7 전차들이 일제히 주포에 불을 당겨 핀란드군의 진지를 공격했다.

45mm 유탄의 위력은 강력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살과 뼈로 이루어진 인간의 육신 정도는 충분히 찢어발길 수 있었다.

포탄의 파편에 맞은 병사들의 몸이 반으로 찢어지면서 창자가 쏟아졌다.

“우왓!”

마르쿠스 카이넨 중위는 파편이 철모를 때리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 파편은 철모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개새끼들, 존나게 쏴재끼는군.”

말하기 무섭게 중대에 한 문밖에 없는 보포스 37mm 대전차포가 물밀듯이 몰려오는 소련 전차들을 향해 발포했다.

포탄에 정면 관측창을 직격당한 BT-7이 폭발하며 해치 밖으로 불길을 토해냈다.

“재장전!”

적과의 거리가 아직 멀 때 최대한 적을 줄여야 했다. 그래야 살아남을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높아질 것이다.

“발사!”

이번에는 BA-6 장갑차가 맞았다. 부상을 입은 기갑병들이 장갑차 포탑의 해치를 열고 나왔다.

탄약수가 세 번째 포탄을 장전하려는 순간, 눈먼 포탄 하나가 날아와 대전차포에 명중했다.

대전차포병들은 팔다리가 날아가고 온몸에 구멍이 숭숭 뚫려 바닥에 널브러졌다.

“젠장, 저게 유일한 희망인데 지금 죽으면 어떡해!?”

카이넨은 눈물이 왈칵 나올 것 같았다.

중대에서 유일하게 적 전차를 잡을 수 없는 병기가 방금 격파당한 것이다.

이제 카이넨의 중대는 화염병과 수류탄만으로 소련 전차들을 상대해야 했다.

적과의 거리는 이제 200m 안까지 좁혀졌다. 소련군은 이번에도 우라를 외치며 달려왔다.

“사격 개시!”

소련군에 비하여 한 줌밖에 되지 않는 병력의 핀란드군이 사격을 개시하자 소련군은 픽픽 쓰러졌다. 

하지만 수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금방 한 명을 쏴죽이면 다음 병사가 나타나 빈자리를 메웠다. 아무리 쏴도, 소련군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독일에서 수입한 Kar98k로 적군을 쏘던 카이넨은 좌측 참호로 다가온 T-26을 발견했다. T-26은 호기롭게 참호 돌파를 시도했지만, 참호의 폭은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무한궤도가 건너편 지면에 닿기도 전에 T-26은 중심을 잃고 참호에 처박혔다. 주포가 진흙에 처박혀 포를 쏠 수도, 포탑을 돌릴 수도 없게 되었다.

카이넨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집속수류탄을 들고 뛰어갔다. T-26의 엔진룸 위에 집속수류탄을 올린 뒤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수류탄이 폭발하자, T-26의 해치가 열리면서 전차병이 밖으로 나왔다.

“커흡!”

카이넨이 쏜 총알에 턱을 관통당한 전차병이 해치 안으로 도로 굴러떨어졌다.

카이넨은 마지막으로 수류탄을 해치 안으로 집어넣었다. 러시아어로 된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폭음이 터졌다.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병사들도 화염병과 집속수류탄을 던져 참호 가까이에 온 소련군 전차들을 격파했다.

그러나 전차를 격파하기 무섭게 전차를 따라 참호 코앞까지 온 소련군 병사들이 쏘는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카이넨은 참호로 뛰어든 소련군의 등에 총탄을 박아넣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적병의 목에 총검을 박아넣자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다 덤벼, 개새끼들아! 덤비라고!”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였던 카이넨은 겨우 12살 때 동네에서 불량아로 소문이 난 16살 소년과 싸워 이긴 적이 있었다.

그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와 싸워서 진 적이 없었다.

총알이 바닥나자 카이넨은 소총을 거꾸로 잡고 야구방망이처럼 휘두르며 소련군과 싸웠다.

그가 온힘을 담아 휘두르는 개머리판에 맞은 소련군 장교는 안면이 함몰되어 참호 바닥에 처박혔다.

그러나, 아무리 힘이 세도 쪽수 앞에 장사 없는 법.

아수라처럼 싸우던 카이넨도 시간이 흐르자 슬슬 체력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버터나이프처럼 가뿐하게 들고 다니던 소총도 이제는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땀이 비오듯이 흐르고 정신이 흐트려지면서 시야가 흐려졌다.

온 세상이 노란색으로 보였다.

“이런, 빌어먹을······.”

체력이 바닥나 헉헉거리던 카이넨은 문득 이상하리만큼 고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변을 둘러봤다.

참호에 남은 핀란드군은 카이넨 한 명뿐.

나머지는 모두 적군이 쏜 총알에 맞거나 전차 포탄에 맞아 쓰러진 지 오래였다.

“이야아아아-!!!”

어느 용감한 병사가 카이넨에게 달려들었다.

모신나강 소총에 달린 스파이크식 총검이 허벅지를 꿰뚫자, 카이넨은 이를 악물었다. 불에 달군 꼬챙이로 살을 지지는 듯했다.

“이 새끼가!”

카이넨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맞은 소련군은 현장에 즉사했다.

하지만 카이넨의 운명도 거기까지였다.

참호를 둘러싼 소련군이 카이넨을 향해 PPD-38 기관단총을 난사하자, 카이넨은 벌집이 되어 쓰러졌다.

핀란드군의 저항을 분쇄한 소련군은 전사자들을 뒤로한 채 전진했다. 소련군의 행렬은 서쪽으로 끝없이 이어졌다.

***

같은 시각, 소련 공군은 헬싱키를 폭격했다.

“폭탄 투하!”

폭탄창이 열리자 죽음이 쏟아졌다.

북유럽의 유서깊은 도시 헬싱키는 불과 연기에 휩싸였다.

아름다운 건물들은 발에 걷어차인 모래성마냥 우수수 무너져내렸고 헬싱키 시민들이 산책하던 가로수길은 쓰레기더미가 되었으며 강에는 재와 시체가 떠다녔다.

대공포들이 침략자들을 내쫓기 위해 열심히 불을 뿜었지만 공습은 계속되었다.

TB-3 폭격기의 조종사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연기에 휩싸인 헬싱키 전경을 응시했다.

도시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기둥들이 그의 눈에는 마치 하늘과 지상을 잇는 거대한 기둥처럼 보였다.

산 자들의 땅을, 망자들의 땅과 이어주는 통로.

그는 조국이 자신에게 부여한 임무가 아무 죄 없는 민간인들의 머리 위로 폭탄을 투하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았다.

자신이 투하한 폭탄에 일면식도 없는 애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하지만 그는 조종사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비록 위험하고, 빈말로도 자랑스럽다고 할 수 없는 임무였지만, 제국주의 국가들의 첨병인 핀란드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레닌그라드-그가 태어났을 때는 페트로그라드라는 이름이었지만-를 지키기 위해선 불가피한 일이라고 믿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

1940년 2월 24일

독일 베를린 신 총통관저

스탈린에게 모가지당한 보로실로프를 대신해 티모셴코가 총사령관을 맡게 되자 핀란드군은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이 핀란드를 돕기 위해 물자를 지원하고 수많은 국가에서 의용병이 핀란드로 쇄도하고 핀란드 국민들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지만, 소련군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이전까지 압도적인 교환비를 내며 선전하던 핀란드군은 소련군이 1940년에 걸맞는 전술을 사용하며 압박해오자 누적된 피해를 감당하지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소련군은 퇴각하는 핀란드군의 머리 위로 폭탄을 쏟아부으며 내륙으로 전진했다.

다급해진 핀란드는 멀리 떨어진 독일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심적으론 핀란드를 응원하고 있지만, 소련과 맺은 불가침조약 때문에 독일은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핀란드도 독일과 소련의 관계를 모르지 않을 터.

그걸 알면서도 도움을 청해왔다는 것은, 그만큼 핀란드가 다급한 상황이라는 뜻이리라.

“총통 각하를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엘자스 에르코라고 합니다.”

핀란드 전 외무장관이자, 핀란드 정부의 밀사로 독일에 온 엘자스 에르코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필시 존망의 기로에 선 조국에 대한 걱정 때문이리라. 지금의 핀란드는 언제 망할지 모르는,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신세니까.

“어서 오시오, 대사. 나도 만나서 반갑소.”

에르코를 만나기 전날, 리벤트로프는 내게 찾아와 에르코와의 만남을 거절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언했다.

내가 그 이유를 묻자 리벤트로프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저 또한 핀란드가 처한 상황에는 인간적인 동정심을 느낍니다만, 핀란드 특사와의 만남은 소련과의 관계를 해칠 우려가 있습니다. 독일이 우선시해야 할 나라는 핀란드가 아니라 소련입니다.”

리벤트로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러잖아도 스탈린은 한 달 전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관을 통해 우리가 핀란드에 식량을 수출하는 것에 대한 불편한 심정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전쟁 전부터 계획되어 있던 일이고 이미 대금까지 다 받은 뒤라 어쩔 수 없다고 설명하니 그냥 넘어갔지만, 소련과의 관계 악화는 독일 입장에서도 피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직 프랑스 침공 전인데다 소련에서 수입하는 광물과 식량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 말도 맞네. 하지만 날 만나겠다고 이 먼 곳까지 온 사람을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지 않은가. 나 역시 소련과의 관계가 우선이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네.”

나는 에르코를 귀빈실로 안내했다.

차가 나오기도 전에 에르코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정중하게 물었다.

급해도 정말 급한가 보구나.

“상관없소. 어차피 그러려고 이 먼곳까지 온 거 아니었소?”

“감사합니다. 총통께서 모르실 리 없겠지만, 보다시피 지금 핀란드는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핀란드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핀란드군 전체 전력의 20%에 해당하는 7만 명에 가까운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당했고, 탄약은 바닥을 드러내기 일보 직전이었다.

또한 이제까지 물심양면으로 핀란드를 돕던 스웨덴도 소련의 항의와 협박에 굴복해 핀란드의 참전 요청을 공식적으로 거부했다.

미국은 핀란드를 위해 자국 군대에도 10대밖에 배치되지 않은 신형 전투기 F2A 버팔로를 무려 44대나 보내주기로 약속했지만, 거리가 거리인지라 운송에 시간이 걸렸다.

영국과 프랑스가 핀란드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노르웨이와 스웨덴에게 영토 통과를 요구하자, 두 나라도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핀란드에게 소련과의 협상을 종용했다.

결국 핀란드에 남은 것은 독일뿐이었다.

“하지만 우리 독일은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었소. 그건 잘 알고 있을 텐데?”

“제가 어찌 그걸 모르겠습니까? 염치없는 부탁이긴 하나, 핀란드를 도와주십시오. 독일의 지원마저 없다면 핀란드는 끝입니다.”

“으음, 구체적으로 무엇을 원하오? 일단 들어나 봅시다.”

“독일의 우수한 무기들이 필요합니다. 독일군이 보유한 4호 전차와 Bf109 전투기가 핀란드군에게도 있다면 충분히 소련군과 맞설 수 있을 겁니다.”

허어, 이거 참.

섣불리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였다.

실제 역사에서도 독일은 대놓고 핀란드를 도와주다가 끝내 소련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지원을 중단했다.

지금와서 핀란드를 지원한다고 해도 전쟁의 결과를 바꾸긴 힘들다.

소련의 도움이 없어도 올해 5월로 예정된 프랑스 침공이 실패할 리는 없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영국과의 전쟁에 전력을 집중해도 간당간당한 마당에 소련까지 적으로 돌렸다간 정말로 곤란해진다.

핀란드에겐 다소 미안하지만, 감정을 배제하고 냉정하게 생각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소. 당장 우리도 영프와의 본격적인 전쟁에 대비하여 소련으로부터 식량과 광물을 수입하는 입장이오. 안 그래도 한 달 전에 스탈린이 핀란드에 식량을 수출하는 것에 대하여 항의해왔소. 미안하외다.”

“그렇습니까······.”

에르코는 고개를 푹 숙였다.

영프와의 전쟁만 아니었더라면, 핀란드를 위해 4호 전차와 Bf109뿐만 아니라 StG39에 판처파우스트까지 지원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은 전쟁 중이고, 국방군에게도 이제 갓 지급이 시작된 귀중한 신형 무기를 외국에 마구 퍼줄 수 없는 노릇.

“헛걸음하게 해서 미안하오. 허나 너무 절망하진 마시오. 소련도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으니.”

나는 에르코를 위로해주려고, 그에게 SD가 소련으로부터 수집한 극비정보들을 알려줬다.

소련 내부에서도 길어진 전쟁과 지나치게 많은 사상자들로 인해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으며, 이로 인해 스탈린이 휴전을 서두르고 있다는 것.

그렇다고 먼저 휴전을 제안하기엔 체면이 서지 않으니 핀란드가 먼저 휴전을 제안해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에르코의 표정이 조금은 나아졌지만, 여전히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이번 달 12일에 소련이 화평을 제안해왔습니다만, 받아들이기 곤란한 조건들뿐이라 망설이는 중입니다.”

“하지만 평화협상 외에 방법이 없는데 어떡하겠소? 이 이상 전쟁을 계속하다간, 소련은 전쟁에서 입은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핀란드 전역을 합병하려고 들 것이오. 안타깝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도 필요한 법이오.”

툭 까놓고 말해 핀란드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소련과 강화하는 것뿐이다.

희생은 희생대로 치르고도 영토만 잃게 되겠지만, 나라가 통째로 망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영프와의 전쟁이 끝나면 핀란드군의 재건에 독일이 지원하겠소.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끔 말이오.”

“정말이십니까?”

에르코는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당장의 굴욕적인 강화는 피할 수 없지만, 독일의 지원을 받는다면 핀란드군의 재건이 빨라질 터.

특히 우수한 독일제 무기로 핀란드군이 무장한다면 소련군이 다시 쳐들어와도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으리라.

“그렇소. 내 약속하리다.”

***

에르코는 결국 빈손으로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나마 위안거리는 전후 독일이 핀란드군의 재건을 지원한다는 히틀러의 약속을 받아냈다는 것이었다.

이마저도 영국, 프랑스와의 전쟁이 끝난 후라는 조건이 붙었지만.

2월 29일, 핀란드 정부는 소련과 협상하기로 결정했다.

최후의 방어선인 만네르하임선마저 소련군에게 돌파당한 이상 핀란드에겐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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