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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전쟁 (3) (57/150)

겨울전쟁 (3)

그다음에 그가 뭐라고 말했더라······.

그래, 독일이 무기와 병력을 조금 지원해준다면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했었지.

다른 사람이 했다면 그냥 헛소리하고 자빠졌네 하고 흘려 넘겼겠지만, 이놈이라면 진짜 일을 저지르고도 남을 놈이라서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바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너무 무모한 발상이오. 애초에 성공 가능성도 희박할뿐더러, 영국과 프랑스가 쿠데타를 빌미로 노르웨이에 개입할 수도 있소.”

실제로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이 굉장히 아슬아슬하게 전개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크비슬링의 쿠데타 지원은 득보단 실이 더 많은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역사대로 노르웨이를 적으로 돌리고 역사와는 달리 영프군이 노르웨이에 진주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노르웨이의 나르비크 항구를 통해 독일로 들여오는 철광석은 전쟁 수행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최중요 물자인데, 이걸 손에 넣을 수 없게 되면 모든 전략이 흐트러지고 만다. 철이 없으면 무기를 만들 수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프가 개입을 시도한다면 노르웨이인들은 일치단결하여 침략자들과 맞서 싸울 것입니다.”

“쿠데타가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국민들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그대를 지지할 것 같소? 그랬다면 진작에 국민연합당이 노르웨이의 여당으로 등극했겠지.”

사람이 아니라 벽을 보며 대화하는 기분이군.

쿠데타가 성공하면 국민들이 알아서 지지할 거라니, 상식적으로 이게 말이 되냐? 시위나 안 일으키면 다행이지!

무기와 군대가 없으면 전 세계가 평화로워질 것이다, 자본주의가 빈부격차와 부정부패의 원인이니 없애야 한다 등의 개소리가 생각나는군.

그딴 개소리를 하는 작자들처럼 정신이 나갔다는 것도 똑같고.

아무리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지만, 머리가 꽃밭으로 가득한 인간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제발 생각을 좀 하며 사시오. 누구처럼 혼자만의 망상 속에 빠져서 현실을 외면하며 살지 말고.”

짜증이 난 내가 팩트로 후려갈기자 크비슬링은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동석한 로젠베르크도 당황하여 내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당신이 독일을 돕고 싶어하는 것에 대해선 고맙게 생각하지만, 당신이 세운 계획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소. 어린애조차 하지 않을 유치하기 짝이 없는 발상이란 말이지. 내 말이 틀렸소?”

“아, 아닙니다, 총통 각하······.”

너 같은 놈들을 내가 전생에 얼마나 많이 봤는 줄 알기나 하냐?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바로 근거는 쥐뿔도 없으면서 아무튼 자기가 하는 말이 무조건 옳다고 떼쓰는 놈들이거든?

TV만 틀면 웬 병신 같은 놈들이 나와서 개소리를 지껄여댔는데, 여기서도 똑같은 걸 봐야겠냐, 내가?

“크흠흠. 총통 각하? 그래도 크비슬링 전 장관은 노르웨이와 독일의 우호 관계를 위해-”

어색해진 분위기를 타파하고자 로젠베르크가 대화에 끼어들었지만, 내 화만 돋울 뿐이었다.

“안 그래도 전직 국방부 장관이라면서? 그런데도 그렇게 현실파악이 안 되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전쟁과 정치가 무슨 어린애 소꿉장난인 줄 아는 건가? 어디 대답 좀 해보게!”

이날 크비슬링은 지원은커녕 내게 욕만 푸짐하게 얻어먹고 돌아갔다.

하지만 나흘 뒤, 우리는 다시 만났다.

나는 그와 다시 만날 생각이 없었지만, 로젠베르크의 간청으로 어쩔 수 없이 그와 만나 얘기를 나눴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총통 각하.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총통 각하의 말씀이 맞는 것 같습니다.”

크비슬링은 나흘 전에 만났던 인간과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구상이 현실성이라곤 전혀 없는, 말 그대로 허상이었다는 점을 인정하며 내게 용서를 구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개소리를 할까 싶었는데 180도 달라진 그의 모습에 이번에는 내가 당황했다.

날 속이기 위해 연기···하는 것 같진 않고 드디어 정신 차린 건가?

“이해가 빨라서 다행이오. 나 역시 흥분해서 그대에게 소리친 점, 양해해주길 바라오.”

놀랍게도 이후의 대화는 매우 상식적이고 평온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하마터면 이미지만 구기고 내 눈 밖에 날뻔했던 로젠베르크는 눈에 띄게 안도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쿠데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되오. 시도해서도 안 되고, 시도할 생각도 하지 마시오. 당원들이 허튼짓 못하게 관리 잘하고.”

“명심하겠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예측이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조만간 독일을 압박하기 위해 노르웨이에 압력을 넣을 것이오. 독일에 광물을 수출하는 것을 중단하라던가, 또는 자국 군대의 노르웨이 진주를 허용해달라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오.

노르웨이가 어떤 선택을 할지 나로서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하오. 노르웨이 정부가 자신들의 뜻을 거스른다고 판단하면, 영프는 반드시 군사행동에 나설 거요.

그렇게 된다면 자연스레 노르웨이는 영프라는 공동의 적을 둔 독일과 가까워질 것이고, 그대의 위상을 올라갈 것이오. 내 말 명심하시구려.”

크비슬링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독일의 요청 없이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노르웨이-독일 동맹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렇게 노르웨이로 돌아간 그가 로젠베르크에게 극비소식을 전해왔다.

“총통 각하의 예측대로, 영국과 프랑스가 노르웨이 정부에게 핀란드를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할 터이니 영토 통과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동시에 독일로의 철광석 수출을 멈추어 달라는 요구까지 했답니다.”

“노르웨이 정부의 답은?”

“노르웨이 정부는 두 요구를 거절했습니다만, 영프의 요구가 워낙 끈질겨서 내각 내부에서도 말이 많다고 합니다.”

“그렇군. 잘 알겠네.”

이것까지 역사와 동일해서 다행이군.

행여 다른 변수가 생기면 어쩌나 살짝 불안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이대로만 가면 된다. 이대로만.

***

1940년 1월 1일

핀란드 남부 라도가 호수 인근

1939년이 끝나고 1940년 새해가 밝았다.

모두가 설레하는 새해 첫날이었지만 전선에서는 여전히 총성이 끊이질 않았다.

가족, 연인과 함께 하는 새해 첫 식사는 고사하고 소련 병사들은 오늘도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적진을 향해 돌격해야 했다.

“돌격, 앞으로!”

“동무들, 전진하라! 전진!”

허공에 권총을 쏘며 연신 돌격을 외쳐대는 정치장교를 따라 병사들은 참호에서 나와 설원 위를 내달렸다.

밤새도록 내린 눈이 땅에 수북하게 쌓여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았다.

허벅지까지 쌓인 눈 위에서 뛰기 위해 소련군들이 안간힘을 쓰는 사이, 시모 하이하 상병은 조용히 사격 자세를 취했다.

멍청한 소련군은 이번에도 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이미 표적을 향해 조준까지 끝낸 뒤라 방아쇠를 당기기만 하면 끝이었다.

그는 평소 버릇대로 심호흡을 두어 번 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퍽!

“저, 정치지도원 동지!”

병사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던 정치장교는 미간에 구멍이 뚫려 즉사했다.

돌격을 명령하던 정치장교가 쓰러졌지만, 소련군은 멈추지 않고 계속 전진했다.

하이하의 핀란드제 모신나강 M28 소총이 메마른 총성을 내뱉을 때마다 소련군 한 명이 쓰러졌다.

1분도 채 되지 않는 사이에 4명의 소련군이 쓰러졌다. 그들은 모두 목이나 이마, 가슴팍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저격수다!”

“모두 엎드려라!”

“엎드리시오, 동무들! 엎드려!”

전우들이 손 쓸 틈도 없이 픽픽 쓰러지자 그제야 소련군은 공포에 빠져 땅에 배를 깔고 누웠다.

지면에서 올라오는 냉기로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지만 저격수의 표적이 되어 즉사하는 것보다 나았다.

눈의 물기를 머금어 차갑고 축축해진 코트를 입은 채 뱀처럼 기어다니는 소련군을 보니 측은한 마음도 들었지만, 하이하는 저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사사로운 연민에 빠져 조국을 침략한 적들을 그냥 놔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원망할 거라면 자신들을 이곳으로 내몬 스탈린과 그 똘마니들을 원망해야지.

전쟁이 터지지 않았다면, 내가 너희를 죽일 일도 없었을 테니까.

재장전을 끝낸 하이하는 재빨리 방아쇠를 당겨 적 장교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부됸노브카의 정중앙에 달린 붉은 별에 명중한 총알은 두개골을 뚫고 뇌를 헤집어놨다. 소련군 장교는 입과 코에서 피를 뿜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제기랄, 적은 어디에 있는 거야?”

시모 하이하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는 소련군으로선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적은 보이지 않지, 총알은 계속 날아오지, 이대로 계속 누워있다간 꼼짝없이 얼어죽을 판이지. 미치지 않고서야 버틸 수가 없었다.

“쏴! 일단 쏴라! 적의 조준을 방해해야 한다!”

“사격 개시!”

소련군은 시모 하이하의 조준을 방해하기 위해 무작정 총을 쐈다.

적 저격수로 하여금 겁을 집어먹게 만들어 사격을 위축시키는 효과가 있으니 잘못된 대응이라 할 수 없지만, 하이하는 이미 소련군의 전술에 도가 큰 남자였다.

그는 적의 사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방아쇠를 당겼다.

또 한 명의 적군이 숨을 거뒀다. 맥심 기관총의 포방패 뒤에 숨어 기관총을 쏘던 병사였다.

하이하는 포방패 중앙에 난 관측용 틈 사이로 총알을 발사해 적 기관총 사수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사수가 죽고 부사수가 기관총을 잡았지만, 그 역시도 똑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사수와 부사수가 연달아 죽자 누구도 기관총을 잡지 못했다.

아무나 기관총을 잡고 쏘라는 장교의 외침에도 병사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슬슬 시간이 됐는데.

하이하가 손목에 찬 시계를 흘끔거리는 순간, 소련군의 머리 위로 포탄이 떨어졌다.

핀란드군의 박격포 공격이었다.

하이하의 저격을 피해 지면에 엎드렸던 소련군은 박격포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놀란 병사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즉시 하이하는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누워있자니 박격포탄에 맞아 죽고, 일어서자니 저격수에게 당할 운명이었지만, 소련군은 가만히 앉아서 죽는 것보다 발버둥이라도 쳐보고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인지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뛰어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행동이 굼뜬 병사는 박격포탄의 제물이 되거나 하이하의 총에 맞아 죽었다.

소련군이 참호로 되돌아가자 하이하도 조용히 현장을 벗어났다.

오늘도 그는 10명이 넘는 소련군을 저세상으로 보냈다.

전선은 사수되었고, 소련군의 공세는 실패했다.

복귀하면 한숨 푹 자야겠군.

이틀 동안 겨우 4시간밖에 자지 못했으니, 모자란 잠을 보충해야 했다.

오후가 되어 다시 내리기 시작한 눈은 들판에 널린 시체와 포탄구덩이를 뒤덮었다.

눈밭에 흩뿌려진 핏방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순백색의 눈송이가 세상을 하얗게 표백했다.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을 정처없이 돌아다니던 영혼들은 자신들의 육체가 눈에 파묻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이승을 떠났다.

세상이 크림색으로 물든 후에도 총성은 계속 이어졌다.

***

추가지원까지 받았음에도 소련군은 끝내 핀란드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실패했다.

전선은 교착되었고, 한 달은커녕 두 달이 지나도 핀란드를 꺾을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

세계는 소련군의 무능을 비웃으며 핀란드군의 투혼에 찬사를 보냈고 미국의 저명한 시사 주간지 타임지는 1939년 올해의 인물로 스탈린을 선정하며 그를 조롱했다.

자국 군대의 무능과 추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스탈린조차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보도관제에도 불구하고 인민들에게 전선의 소식이 차츰 전해지기 시작하면서 병사들은 물론이고 인민들까지 이번 전쟁의 당위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스탈린과 공산당의 권위까지 흔들릴 수 있었다.

핀란드와의 전쟁은 이제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니라 소련의 명운이 걸린 중대사항이 되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에게 소환 명령을 내렸다.

보로실로프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손발을 떨며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예상대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소련 최고권력자가 된 절친의 호통과 욕설, 비아냥이었다.

“이 무능하기 짝이 없는 놈. 네놈이 할 줄 아는 게 뭐야? 아예 우리 병사들의 시체로 산을 쌓지 그러냐?”

“송구합니다, 서기장 동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암! 당연히 그래야지! 입이 열 개, 백 개가 있어도 할 말이 없어야지!”

각종 산해진미를 눈앞에 두고도 스탈린의 분노는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트로츠키에게 혹독한 비판을 담아 당에서 추방당할 뻔했던 순간에도, 자신이 서기장이 되어선 결코 안 된다는 레닌의 유언장이 공개되었을 때도 침묵을 지켰던 스탈린이었지만, 이번 일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자네를 믿었건만, 내게 이런 수치를 주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인민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어? 부하 관리도 못하는, 무능한 병신이라고 욕하겠지!

지금의 원수 직위가 순전히 네 실력으로 얻은 자리가 생각하나? 틀렸어! 바로 내가, 지금의 너를 만들었단 말이야, 이 무능한 놈아!”

스탈린이 쏟아내는 분노와 멸시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보로실로프도 슬슬 한계에 도달했다.

물론 자신이 붉은 군대를 졸전으로 이끌었다는 것은 보로실로프 자신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막대한 지분을 차지하는 스탈린이 자신의 잘못은 하나도 없는 것마냥 모르쇠로 일간하는 것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게 다 네놈이 자초한 일이잖아!”

보로실로프가 일어서서 고함을 치자 스탈린은 말을 멈추고 그를 응시했다.

불안한 얼굴로 서 있던 경비병들도 보로실로프의 돌발행동에 놀라 얼어붙고 말았다.

“붉은 군대의 베테랑들을 죽인 게 네놈이잖냐? 니가 유능한 장군들을 모조리 다 죽여 버렸잖아!”

보로실로프의 일갈에 스탈린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한 스탈린의 태도에 더 화가 난 보로실로프는 새끼 돼지 통구이가 든 접시를 집어 내동댕이쳤다.

다른 이였다면 상상도 못할 불경을 저지르고도 보로실로프는 숙청당하지 않았다.

이유는 그가 스탈린의 몇 안 되는 절친인 것과 더불어 붉은 군대를 통제하려면, 보로실로프의 도움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아무 처벌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스탈린은 보로실로프를 총사령관직에서 해임하고 새로운 이를 자리에 앉혔다.

“티모셴코 동무, 동무만 믿겠소이다.”

“맡겨주십시오, 서기장 동지.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붉은 군대의 인재, 세묜 티모셴코가 새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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