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짜 전쟁 (4) (54/150)

가짜 전쟁 (4)

1939년 11월 26일

소련-핀란드 국경 지대 마이닐라

“준비 완료입니다, 대장 동지!”

의자에 앉아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그리고리 쿨리크 대장은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참모의 보고에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으래? 확실한 거겠지?”

“물론입니다.”

“그럼, 시작하지.”

쿨리크가 스탈린으로부터 지시받은 임무는 ‘명분 만들기’였다.

핀란드를 그냥 침략했다간 국제사회의 반발이 거셀 테니 핀란드가 먼저 도발을 감행했다는 증거를 만들어야 했다.

쿨리크의 신호가 떨어지자 152mm ML-20 곡사포가 우렁찬 폭음을 내뱉으며 포구에서 화염을 토했다.

포탄은 정확히 소련군의 경비 초소에 명중했다. 152mm 포탄의 직격을 받은 경비 초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폭음에 놀란 새들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새 지저귀는 소리로 가득했던 자작나무 숲에는 무거운 적막만이 감돌았다.

***

1939년 11월 30일

스탈린은 나흘 전 마이닐라 지역에 있었던 ‘핀란드군의 도발’에 대한 응징을 이유로 핀란드를 침공했다.

42만 명의 소련군이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를 향해 진군했다.

겨울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소련군이 핀란드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은 즉각 내게도 전해졌다.

이미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소련이 핀란드를 차지하는 것을 묵인하기로 했기에 내가 할 일이라곤 가만히 앉아서 사태를 관망하는 게 다였다.

“핀란드가 과연 얼마나 오래 버틸까?”

“아무리 핀란드가 열심히 버틴다고 해도, 내년 1월이 한계겠지요.”

괴링과 힘러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들 핀란드가 곧 소련에 합병되리라고 예상했다.

괴링은 핀란드 정복까지 대략 3주가 걸릴 것이라 말했고 힘러는 4주라고 예측했다.

카이텔과 브라우히치는 5, 6주 정도로 예상했고.

“총통 각하께서는 며칠이 걸릴 것이라고 보십니까?”

“나 말인가? 나는 핀란드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본다만.”

“예에?”

내 대답을 들은 측근들의 얼굴에서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야 그렇겠지.

곰이 살쾡이와 싸우면 누구나 곰이 이기리라고 생각하지, 설마 살쾡이한테 질 것이라고 생각하겠어?

물론 전쟁이 소련의 승리로 끝나긴 했으나 목표였던 핀란드 전 지역을 합병은커녕 땅 일부만 겨우 뜯어내는 수준에서 그치고 말았다.

핀란드 입장에선 전체 영토의 11%에 달하는 영역인지라 결코 적은 피해가 아니었지만, 소련 입장에선 코딱지만도 못한 땅이었다.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내 비록 불가침조약을 맺을 때 소련이 핀란드를 차지하는 것을 묵인하긴 했으나, 저들이 핀란드를 집어삼킬 정도로 강력하다곤 생각하지 않네. 그렇다고 소련을 만만하게 보는 것도 아니지만, 아직은 일러.”

폴란드전에서 소련군은 병력, 장비, 보급 등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데도 불구하고 이미 망해가고 있던 폴란드군을 상대로 졸전을 치렀다.

폴란드군이 용맹하게 싸운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원인은 뭐니 뭐니 해도 대숙청이었다.

무능과 유능을 떠나서 수많은 장교들이 처형당하고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자질이 부족한 이들을 대거 진급시킨 결과 이 당시의 소련군은 덩치만 더럽게 큰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샤츠크 전투에서 소련군은 3배나 되는 병력을 가지고도 폴란드군에 패배하는 추태를 보였고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폴란드군 포로들을 모두 처형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나마 대숙청의 피해를 어느 정도 회복해가던 1941년에도 독일군이 쳐들어오자 영혼까지 털렸는데, 1939년에는 오죽할까.

“그렇다면 총통 각하께서는 핀란드군이 승리하리라고 보십니까?”

“아니. 핀란드인들이 싸우는 방법을 아는 민족이긴 하나, 그래도 체급 차이를 이기긴 힘들 걸세. 결국 전쟁은 소련의 승리로 끝나겠지만, 핀란드를 완전히 합병하진 못할 거야. 겨우 땅만 조금 뺏고 배상금을 받는 것에서 만족하겠지.”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했으면 농담이겠거니 하고 생각하겠는데, 총통 각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정말로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괴링이 말했다.

이번에는 아부하려고 한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한 말 같았다.

나의 투쟁 때부터 내가 하는 예언이 100이면 100 다 들어맞았기 때문에, 내가 농담 삼아 한 말이라도 부하들은 전혀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이번에 한 말은 농담이 아니지만).

방금 전까지 소련이 핀란드를 정복하는 데 며칠이 걸릴까를 주제로 얘기를 나누던 녀석들이 내 한마디에 바로 핀란드가 어떻게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인가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

너희들, 귀가 얇아도 너무 얇은 거 아니냐.

이러다 내가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하면 정말로 유서라도 쓰겠는데?

뭐, 그만큼 내가 하는 말을 신뢰한다는 뜻이기도 하니 나쁘게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솔직히 이때가 아니면 언제 예언자 코스프레 해보겠어.

“자자, 핀란드 얘기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카이텔 장군, 우리가 어디까지 얘기했는지 기억하시오?”

“보호령 내의 폴란드 지식인들의 처분에 관해서 토의 중이었습니다.”

“아아. 그랬지, 참.”

폴란드 지식인 계층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첨예하게 갈렸다.

힘러와 하이드리히는 폴란드인들의 저항의지를 완전히 말살하려면 지식인 계층을 모조리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괴링은 절반만 처형하고 나머지 절반은 회유할 것을 제안했다.

카이텔은 양쪽 의견 모두 진지하게 고려해볼 가치가 있다며 중립을 지켰고 브라우히치는 지나친 학살은 되려 폴란드인들의 저항의지만 키울 수 있으니 시간을 두고 진행하자는 입장이었다.

어쨌든 죄다 학살로 귀결되는군.

이들이 원하는 것은 독일인과 폴란드인의 공존이 아닌, 폴란드인의 완전한 노예화이니 학살이 당연한 결론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사람을 무는 법인데, 그랬다간 폴란드인들은 죽을 때까지 우리에게 저항할 거요. 학살 말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지.”

나치는 폴란드인들의 노예화를 위해선 지식인 계층이 사라져야 한다고 판단하여 폴란드의 대학들을 폐쇄하고 교수들은 죄다 체포해서 총살하거나 수용소로 보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에 의해 폴란드 의사의 45%, 법조인의 57%, 교사의 15%, 대학 교수의 40%, 기술자의 40%, 성직자의 18%가 학살당했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일인가.

독일에 저항한다면 가차없이 싹을 잘라야겠지만,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폴란드 지식인 계층 중에 포섭할 수 있는 자들은 포섭하고 거부하는 이들은 그대로 놔두되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자들은 체포할 것을 제안했다.

예상대로 힘러는 즉각 반대를 표했다.

“지나치게 인도적이십니다, 총통 각하! 그랬다간 폴란드 놈들은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를 겁니다!”

“SS 제국지도자 말이 맞습니다. 포섭을 거부하는 자들도 모두 체포해야 합니다.”

하이드리히의 말에 힘러가 딴지를 걸었다.

“포섭할 필요도 없네. 그놈들은 언제 우리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놈들이야! 포섭할 것도 없이 모조리 다 죽이던가 그래야지!”

참 예쁜 말만 골라서 한다.

나중에 패전하고 좆 될 것 같으니까 혼자 살겠다고 통수친 놈이 지금은 물 만난 고기가 따로 없구만.

“아까 내가 하는 말을 뭘로 들은 건가, 힘러? 학살 말고 다른 방법을 생각하자니까 왜 자꾸 딴소리를 하나? 내가 하는 말에 집중 안 하나?”

“엇······ 죄송합니다, 총통 각하.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바로 꼬리를 내린다. 하여간 겁은 많아 가지고.

“우리가 때리면 때릴수록 놈들의 결속만 단단해지는 법이네. 그래선 안 돼! 자기들끼리 서로 싸우다가 제풀에 지쳐 쓰러지도록 유도해야지! 그러기 위해선 폴란드인들의 민심부터 달랠 필요가 있네.”

전쟁으로 문을 닫았던 학교들은 총독부의 허가 아래 다시 문을 열었다.

나는 독일의 관대함을 보여주기 위해 학교와 교사들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뒀다.

폴란드의 모든 학교들은 앞으로 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독일어를 가르쳐야 하지만, 제국령과 달리 독일어를 못한다고 불이익을 당하는 일은 없다.

시험 점수가 개판이면 혼이 날 뿐. 그 정도 문제는 각자 알아서 해야지.

버스와 기차, 지하철 등 대중교통도 폴란드인은 독일인과 동등하게 이용할 수 있고 카페에서 쇼팽의 음악을 트는 것도 허용했다.

오히려 총독부 건물 내에 쇼팽의 음악을 틀도록 권장했다.

본래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 하는 종족.

쇼팽의 음악을 금지하면, 역으로 쇼팽의 위대함만 선전하는 꼴이 된다.

반대로 총독부 건물에서 하루종일 쇼팽의 음악이 나온다면? 폴란드인들이 쇼팽의 음악을 들으며 항전의지를 고취하는 일은 없겠지.

힘러, 하이드리히 같은 골수 인종주의 신봉자들은 물론이고 국방군에서조차 폴란드인들을 너무 관대하게 대하는 게 아니냐고 우려를 표할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소리는 쏙 들어갔다.

내 예상보다 훨씬 빨리, 그것도 많은 폴란드인들이 친독파를 자처하기 시작한 것이다.

***

“카메라 보시고~ 자아, 찍습니다.”

이튿날, 폴란드 보호령 각지에서 발간되는 모든 신문의 일면에 동일한 사진이 실렸다.

안톤 드렉슬러 총독과 보호령 주둔 독일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가 폴란드 보호령의 대통령 스타니스와프 클리메츠키, 그리고 국민급진기지 당수이자 보호령의 신임 총리로 임명된 얀 모스도르프와 함께 총독부 건물 앞에 서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네 남자는 정면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서로 알고 지낸 친구들처럼 말이다.

폴란드의 극우정당 국민급진기지(Obóz Narodowo Radykalny)는 처음에는 독일군에 맞서 저항을 벌였다.

하지만 독일이 예상외로 훨씬 관대한 정책을 펼치자, 당수 모스도르프는 생각을 바꿨다.

이미 폴란드는 망했다.

영프는 폴란드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고 독일의 통치가 얼마나 오래갈지 아무도 모른다.

비록 침략자이긴 하나 그래도 말이 통하는 상대인 독일과 무작정 싸우는 것보다 차라리 그들에게 협력해 양보를 이끌어 내는 것이 폴란드를 위해서도 더 나은 선택이 아닐까?

가망 없어 보이는 무장투쟁보다 독일과의 협력을 통해 그들의 양보를 받아내는 것이 훨씬 현실성 있다고 판단한 모스도르프는 독일과 접촉해 협력을 제안했다.

독일의 통치를 도울 테니 자신들을 보호령 정부의 내각에 포함시켜 달라. 이것이 모스도르프가 내건 협력 조건이었다.

말이 협력이지 사실상 꼬붕으로 받아들여 달라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것이었으나 독일은 모스도르프의 제안에 응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오, 총리.”

“걱정 마십시오, 총독 각하. 폴란드인도 독일의 우방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드렉슬러는 히틀러의 ‘조언’에 따라 국민급진기지와 손을 잡기로 결정했다.

드넓은 폴란드를 수월하게 통치하려면 쓸모있는 사냥개 한두 마리가 있는 편이 더 편할 테니까.

드렉슬러에 의해 보호령 총리로 임명된 모스도르프는 즉시 업무를 시작했다. 그의 첫 업무는 폴란드인들을 상대로 한 대국민연설이었다.

“친애하는 폴란드 국민 여러분! 본인은 오늘부터 폴란드 보호령 정부의 총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같은 폴란드인으로서 여러분께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알던 폴란드는 망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그 폴란드는 이제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매우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 모두에겐 내일이, 미래가 남아있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전하고자 하는 말은 하나입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지금 같은 시기일수록 우리는 함께 뭉쳐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할 일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독일인들은 신화 속에 나오는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결국에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히틀러 총통은 제게 독일이 주도하는 새로운 유럽을 만들기 위해선 폴란드인들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폴란드인들이 독일에게 힘을 보탤 수 있다면, 폴란드인들도 독일의 우방으로 받아들이겠다고도 하셨습니다.

우리 폴란드인들은 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평화를 바라고, 우리의 진심을 독일인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독일인들은 우리를 더 이상 점령지 주민들이 아닌 신질서(Neuordnung)의 동반자로 맞이해줄 것입니다.

보다 새로운 폴란드, 보다 강력한 폴란드, 보다 찬란한 폴란드를 위해 우리 모두 하나가 됩시다!”

***

시체만 남은 폴란드가 내부로부터 썩어 문드러지고 있을 때,

핀란드에선 날마다 격전이 일어났다.

“전진! 돌격!”

중대장이 권총을 들고 돌격을 외치자 참호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외치며 참호 밖으로 뛰쳐나왔다.

“우라(Ура, 만세)!”

소련군은 늘 만세를 외치며 돌격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른바 ‘우라 돌격’이었다.

우라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소련군이 공격해오고 있다는 뜻이었기에, 핀란드 병사들은 소리가 들리면 자연스레 긴장했다.

지평선을 까맣게 메우며 달려오는 소련군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전원 전투 준비!”

그러나 핀란드군은 공포로 이를 부딪히면서도 위치를 지켰다.

죽음이 두려웠지만, 간신히 지켜낸 조국이 다시 압제자들의 손아귀에 넘어가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핀란드군에게 무기를 들고 적과 싸울 수 있도록 용기를 준 것은 조국과 가족을 향한 굳은 의지였다.

“거리 350!”

거리 측정을 맡은 병사의 목소리가 긴장으로 딱딱해졌다.

“거리 300!”

중대장의 입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적이 내지르는 함성 소리가 전보다 더 커졌다.

“거리 250!”

좀처럼 발포 명령이 떨어지지 않자 병사들은 초조해했다.

혹시 중대장이 공포로 얼어붙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거리 200!”

“아직도입니까?!”

어느새 적과의 거리는 처음의 3분의 1로 줄어 있었다.

“거리 150!”

“사격 개시!”

마침내 발포 명령이 떨어지자, 총구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윽고 날카로운 총성과 인간이 내지르는 비명이 전속력으로 충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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