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바르샤바로 가는 길 (3) (48/150)

바르샤바로 가는 길 (3)

1939년 9월 17일

독일 베를린 신 총통관저

브주라 전투는 역사에서처럼 독일군의 승리로 끝났다.

전투에 동원된 폴란드군 22만 5천 명 중에 3만 명이 전사하고, 18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포위망을 탈출해 바르샤바로 합류한 인원은 1만 명 남짓.

아군의 피해도 제법 커서 4천 명이 전사하고 6천 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마지막 남은 정예 병력을 잃은 폴란드는 더 이상 반격을 시도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가뜩이나 방어만 해도 모자랄 판에 성급히 반격을 시도하다 애꿎은 병력과 장비만 날려 먹었으니 폴란드의 멸망은 확정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적들은 용감하지만 너무 무모했소. 내가 폴란드군 지휘관이었다면 병력은 루마니아 교두보로 퇴각시켜 온전하게 보존하는 방법을 택했을 거요. 하지만 적들은 그렇지 않았지.”

나는 짐짓 노련한 전문가 코스프레를 하며 인터넷에서 주워 들었던 정보를 장군들에게 설파했다.

폴란드군이 조금만 더 전략에 밝았더라면, 그들은 반격을 시도할 게 아니라 폴란드어로 비스와(Wisła)강이라고 부르는 바익셀(Weichsel)강 너머로 병력을 물려 방어선을 형성하거나 루마니아 국경지대로 이동시켜야 했다.

국토 대부분 지역이 독일군에게 넘어가는 일은 피할 수 없지만, 동남부의 험준한 지형지물을 이용해 버티기를 시도한다면 독일군도 제법 골치가 아팠을 터.

뭐, 뒤에 있을 사건을 생각하면 이조차 의미없는 가정이긴 하다.

애시당초 프랑스가 독일 본토 공세를 취소했을 때부터 폴란드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멸망을 피할 수 없었다.

“총통 각하의 혜안이 적에게 없는 것이 참으로 다행입니다.”

내 설명을 들은 카이텔은 알랑방귀를 뀌었고 브라우히치도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듣고 보니 그렇군요. 폴란드군의 지능이 조금만 더 높았다면 곤란할 뻔했습니다.”

“이 사람들아, 아부는 작작하게. 부끄러우니까.”

농담은 여기까지 하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서 바르샤바 공략에 대해 논의했다.

철옹성 같았던 바르샤바의 방어선도 아군의 맹공 앞에 결국 구멍이 뚫렸다.

바르샤바 시내로 진입한 아군은 폴란드군과 시가전을 치루며 조금씩 전진 중이다.

아군이 선전 중이긴 하나, 시가전 특성상 피해가 많이 나오는 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느 보병연대는 이틀 사이에 연대 내의 장교 절반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브라우히치의 보고를 받은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브룸베어(Brummbär, 회색곰)는 어찌 되었소? 이럴 때를 대비해서 만들어둔 물건인데.”

“그렇잖아도 오늘 구데리안으로부터 브룸베어를 실전에 투입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4호 돌격전차(Sturmpanzer IV)는 브룸베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이는 연합군 정보부에서 멋대로 붙인 이름으로 정작 독일군은 슈투름판처(Sturmpanzer)의 줄임말인 슈투파(Stupa)라고 불렀다.

국군에서 돼지고기김치볶음을 ‘돼김볶’이라 부르고 고등어순살조림을 ‘고순조’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하지만 내가 정식으로 브룸베어라는 이름을 붙여줬으니 슈투파라고 불릴 일은 없을 듯하다(아마도).

훔멜처럼 4호 전차를 개조해서 만들어진 브룸베어는 15cm 12구경장 곡사포를 탑재하여 화력이 끝내주는 데다, 전투실 정면의 100mm 경사장갑은 130mm 수직장갑과 맞먹을 만큼 방어력도 출중하다.

그 대가로 중량이 28톤으로 증가해 신뢰성이 대폭 줄어들었지만, 성능을 생각하면 이 정도 대가는 감안할 만하다고 본다.

만든 지 얼마 안 된 놈이라 달랑 6대 밖에 없었지만, 1호와 2호 전차를 상대로도 쩔쩔맸던 폴란드군이니 그 충격은 어마어마하겠지.

시가전은 물론이고 전차전에서도 브룸베어를 당해낼 전차는 내가 알기로 몇 대 없다.

전쟁 후반에 나온 소련군 최강의 전차 IS-2조차도 브룸베어의 15cm 포탄 한 발이면 격파 확정인데, 탱켓 같은 전차호소인들은 오죽할까? 구데리안이 고작 탱켓 하나 잡자고 브룸베어를 전차전에 투입하진 않겠지만.

“후기가 기대되는군. 참, 오늘이 9월 17일 아니오?”

“예.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

“그냥 물어본 거요. 슬슬 소련이 참전할 때가 됐는데······.”

순간, 누군가가 문을 열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국방장관 카이텔이 신뢰하는 부하이자 국방부 작전부장인 알프레드 요들 대장-원래는 소장인데, 내가 진급시켰다-이었다.

“총통 각하, 급보입니다. 소련이 폴란드에 선전포고했습니다.”

역시.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부하들의 시선을 즐기며, 나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우리의 빨갱이 친구들이 드디어 움직일 마음이 생겼나 보구만.”

***

본래 소련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는 즉시 폴란드 동부지역을 공격하기로 협의했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누군가.

남 뒤통수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통수의 달인이 아니던가.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이 소련에 참전을 재촉하는 공문을 보내도 스탈린은 할힌골 전투 핑계를 대며 폴란드 침공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군의 진격은 스탈린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침공 일주일 만에 수도 바르샤바 코앞까지 도달한 독일군은 브주라에서 있었던 폴란드군의 반격까지 깔끔하게 박살 내며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폴란드의 안전을 보장했던 영프는 이번에도 뒷짐 진 채 구경만 했다.

패망이 확정된 폴란드와 구경만 하는 영프, 거기에 폴란드군 주력을 섬멸한 독일의 하드캐리까지.

이걸 누가 참을 수 있을까?

“보로실로프 동무, 시작하시오.”

“알겠습니다, 서기장 동지!”

1939년 9월 17일.

붉은 군대는 폴란드 국경을 넘었다.

침공 당일, 몰로토프는 주소련 폴란드 대사와 만나 “독일의 침공으로 자국민을 보호할 능력을 잃은 폴란드를 대신해 소비에트 연방이 폴란드 동부지역에 살고 있는 우크라이나인들과 벨라루스인들을 보호하겠다”고 전했다.

“이를 위해, 소비에트 연방은 폴란드와 맺은 모든 조약을 부득이하게 파기하는 바요.”

“무, 무슨······!”

몰로토프의 선전포고문이 대사에게 전달되는 즉시, 61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이 폴란드 동부로 쏟아졌다.

이를 상대하는 폴란드 국경방위군단(KOP)의 숫자는 2만 명 남짓.

상대가 될 리 없는 싸움이었다.

“정면에 적 전차 출현! 거리 300, 철갑탄!”

“장전 완료!”

붉은 군대의 T-26을 가로막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T-26의 조상에 해당하는 영국제 빅커스 전차였다.

하지만 장갑 관통력이 형편없는 47mm 단포신 전차포와 달리 소련제 45mm 전차포는 1km 거리에서도 빅커스 전차의 장갑을 관통하는 게 가능했다.

45mm 전차포가 불을 뿜자 빅커스 전차의 전면에 구멍이 뚫리면서 폭발이 일어났다.

소련 공군의 I-16 전투기도 육군의 진격을 지원했다. 폴란드 공군은 독일군을 막기 위해 대거 서부로 이동한 탓에 하늘은 소련 공군의 독무대였다.

“여기는 늑대 3, 적 수송대열을 발견함. 공격하겠다.”

I-16이 저공으로 비행하며 기총소사를 퍼붓자 마차로 이루어진 폴란드군의 수송대열은 혼란에 빠졌다.

총탄에 맞은 말들과 병사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마차에 한가득 실린 탄약상자가 폭발하면서 수십 명의 병사들이 화염에 삼켜졌다.

뒤늦게 대공사격을 가해 적을 쫓아냈지만, 이미 수송대열은 엉망이 되고 말았다.

마차에 실은 짐이 멀쩡해도 마차를 끌 말이 죽은 탓에 짐은 그대로 버려졌다.

공황상태에 빠진 병사들은 짐이고 무기고 다 내팽개친 채 도망쳤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계 병사들은 탈영하여 소련군에게 향했다.

폴란드 치하에서 온갖 차별과 박해를 받아온 이들에게 폴란드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쏘지 마시오! 우린 우크라이나인입니다! 동포란 말이오!”

“나, 나는 벨라루스인입니다! 쏘지 마시오, 동무들!”

“스탈린 만세! 소비에트 연방 만세!”

폴란드 군복을 입은 병사들을 발견하고 총을 겨눴던 소련군들은 상대가 흔드는 깃발을 보고 총을 내렸다.

폴란드 국기를 반으로 찢어서 급조한 적기(赤旗)였다.

“아, 이런이런. 우리 동포들이었군. 하마터면 큰일이 날뻔했어.”

“환영하오, 동무들. 붉은 군대에 잘 오셨소.”

스탈린의 명령으로 포로로 잡은 폴란드군 중에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출신은 즉시 석방되었다.

석방된 병사들은 붉은 군대의 군복을 입고 옛 전우들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소련까지 참전하자, 폴란드는 멸망이 확정되었다.

독립을 쟁취한 지 겨우 21년 만에, 다시 나라가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이다.

***

1939년 9월 19일

폴란드 바르샤바

소련의 참전 소식이 들린 지 이틀이 지났다.

그러잖아도 절망적이었던 바르샤바의 분위기는 더더욱 무거워졌다.

언젠가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루마니아를 통해 폴란드로 올 것이니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주장하던 장교들조차 소련의 참전 소식에 입을 다물었다.

소팽의 음악을 연주하며 부상병들과 시민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던 무명의 피아니스트는 소련이 참전하던 날 저녁, 공습으로 무너진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곤죽이 된 시체는 공습으로 죽은 시민들의 주검에 섞여 화장되었다.

“슈투카다!”

슈투카가 나타날 때마다 바르샤바 시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제리코의 나팔’이라고 불리는 슈투카의 풍압식 사이렌은 슈투카가 급강하에 돌입할 시 고음의 굉음을 내며 듣는 이로 하여금 충격과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다.

슈투카가 나타나는 곳마다 사이렌 소리가 들렸고, 사이렌 소리가 들릴 때마다 폭음이 이어졌다.

도시에 몇 대 남지 않은 대공포가 슈투카를 노리고 불을 뿜었지만, 슈투카는 아랑곳하지 않고 폭탄을 투하했다.

콘도르 군단 소속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적이 있는 베테랑 조종사는 능숙한 솜씨로 목표물에 폭탄을 투하했다.

목표였던 건물이 무너져내리자 그는 기수를 돌려 기지로 돌아갔다.

얀은 묵묵히 지급받은 한 조각의 빵과 물을 목구멍 뒤로 넘겼다.

그나마 그는 군인이었기에 하루에 두 번 빵과 물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일반 시민들은 하루에 한 번 밖에 빵을 받지 못했다.

식량창고가 독일군의 공습으로 파괴되는 바람에 가뜩이나 부족한 배급량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굶주림에 못이긴 사람들은 도둑질을 하거나,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앗았다.

약탈 행위는 엄중하게 처벌하겠다는 포고에도 불구하고 도둑질과 강도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본보기로 몇 명을 공개 처형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일부 병사들과 시민들은 야음을 틈타 독일군 진영으로 넘어갔다. 포로가 될지언정, 적어도 굶주림은 면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바르샤바 시민들이여! 이미 폴란드는 명을 다했습니다! 무의미한 저항을 멈추고 항복하십시오. 독일군은 결코 여러분을 해치지 않습니다.

독일군은 제네바 조약의 의거한 정당한 대우를 약속하며 항복하는 자에게는 따뜻한 음식과 안락한 잠자리가 제공될 것이라고 선전했다.

“놈들의 말이 사실일까요?”

구석에 처박혀 조용히 빵을 씹던 얀에게 앳된 얼굴을 한 병사가 물었다.

군복도 없이 머리에 철모만 달랑 쓴 소년병이었다.

“항복한 녀석들은 알겠지. 저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아빠가 독일인은 순 거짓말쟁이들뿐이라던데.”

소년병이 중얼거렸다.

“원래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야.”

전쟁이 터지기 전, 중대장이 했던 말을 얀은 아직도 잊지 못했다.

독일군은 겉만 번지르르한, ‘퍼레이드 전용 군대’라 우리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도 있으니, 전쟁이 터져도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얀은 헛웃음을 흘렸다.

퍼레이드용 군대라고? 그럼 우리는 그 퍼레이드용 군대에게 당해 수도까지 밀린 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폴란드를 돕겠다던 영국과 프랑스는 지금 뭘하고 있지?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과 프랑스 육군은 어디에 있는 건가?

필시 파리에서 스테이크나 썰고 있겠지. 옆구리에 창녀를 끼고서.

폴란드 소식을 뉴스로 들으면서 우아하게 칼질을 하고 있을 영국인과 프랑스인들을 생각하니 속이 뒤틀렸다.

영프의 정치인들이 폴란드를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돕겠다고 말한 건지, 얀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그들이 솔직하게 대답했더라면, 지금의 폴란드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전쟁이 터져도 영프가 구경만 할 것이란 사실을 정부가 알았더라면, 독일의 요구를 거절했을까? 얀은 그것이 궁금했다.

“독일군이다! 모두 위치로!”

생각에 빠져있던 얀을 현실로 건져올린 것은 독일군이었다. 적이 나타났다는 말에 폴란드 병사들은 각자의 위치로 뛰어갔다.

총안구를 차지한 얀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전차 바퀴가 달린, 거대한 상자처럼 생긴 것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저게 뭐죠?”

소년병의 물음에 얀은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 나도 오늘 처음 보는 놈이야.”

“전차···라고 불러도 되겠죠?”

“아마도?”

포탑이 없지만, 무한궤도가 달려 있으니 전차라고 불러도 이상하진 않으리라.

가만, 포탑이 없는 기갑차량을 돌격포라고 불러야 한다고 전에 들은 것 같은데, 맞나? 잘 모르겠군.

생전 처음 보는 기묘한 전차의 등장에 폴란드군은 넋을 놓고 그것을 구경했다. 젊은 대위가 사격 명령을 내리자 뒤늦게 발포가 시작되었다.

상자를 닮은 기묘한 전차는 무수히 쏟아지는 총탄에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정면에 보포스 대전차포가 독일군의 신형 전차를 향해 불을 뿜었지만, 포탄은 도탄되어 도리어 옆 건물의 아군을 폭살시켰다.

이윽고 움직임을 멈춘 전차는 정면에 거대한 주포를 위로 들어 올렸다.

육중한 15cm 주포가 불을 뿜자, 병사들은 귀를 틀어막았다. 고막이 찢겨나가는 듯한 굉음이었다.

굉음도 굉음이지만, 포탄의 위력도 가히 충격적이었다. 15cm 유탄이 명중하자, 6층짜리 건물이 발에 걷어차인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건물 안에 틀어박혀 소총과 기관총을 쏘아대던 병사들은 건물이 무너지자 그대로 짓이겨졌다. 건물이 무너지면서 생긴 자욱한 먼지구름 때문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맙소사, 무슨 저런 괴물이······!”

독일군의 신병기 브룸베어의 위력은 가공할 수준이었다. 브룸베어의 15cm 주포가 불을 뿜을 때마다 건물이 무너지고, 독일군은 전진을 거듭했다.

대전차소총과 대전차포를 마구 갈겨도, 저 괴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괴물을 격파하기 위해 악을 쓰던 병사들도, 자신들의 무기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곤 전의를 잃고 도망쳤다.

어느새 독일군은 얀이 있는 건물 코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후퇴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얀은 소총과 얼마 남지 않은 탄약을 챙겨 계단으로 향했다.

“어, 어디 가는 거예요?”

소년병은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움직이지 않으려고 했다. 얀이 혀를 차며 말했다.

“죽고 싶으면 거기에 그대로 있던가!”

얀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가자, 소년병도 결국 무기를 챙겨 그 뒤를 따랐다.

계단을 반쯤 내려왔을 때, 아래층으로 위로 올라가던 아군과 마주쳤다. 하필이면 장교도 섞여 있었다.

“지금 어디 가는 건가? 위치를 벗어나라는 명령은 듣지 못했는데?”

얀과 동년배로 보이는 소위가 얀의 앞을 막아섰다. 그는 얀이 탈영을 하다 걸린 것처럼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여기도 곧 뚫릴 겁니다! 개죽음 당하기 싫으면 다른 곳으로 튀어야죠!”

“입 닥쳐! 얼른 제자리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탈영으로 간주하고 총살하겠어!”

소위는 자신의 말이 단순 협박이 아님을 입증하듯, 권총을 꺼내 얀을 겨냥했다.

얀을 따라 계단을 내려오던 소년병도 얀을 겨눈 총구를 보곤 걸음을 멈췄다.

빌어먹을.

겁대가리 상실한 쏘가리 때문에 꼼짝없이 죽게 생겼네. 얀이 머뭇거리자 소위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때, 건물이 흔들리면서 천장에서 회색 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브룸베어가 다른 건물을 향해 발포한 것이다.

그 충격으로 소위는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얀은 잽싸게 몸을 날렸다.

“뭐야!?”

다른 병사들이 제지할 틈도 없이 얀은 개머리판으로 소위의 면상을 내리찍었다.

개머리판에 의해 코뼈가 부러지고 뇌에 충격이 가해지면서 소위는 그대로 기절했다.

“이봐! 이게 무슨 짓이야?”

“닥쳐! 저 쏘가리한테 목숨을 맡길 거면 네놈들이나 맡겨! 난 살고 싶으니까!”

병사들이 어버버거리는 동안 얀은 1층으로 내려왔다. 불과 60m 떨어진 곳에 브룸베어가 있었다.

“이, 이제 어떡하죠······?”

어느새 얀의 뒤까지 따라온 소년병이 물었다. 건너편으로 가려면 저 괴물 앞을 지나가야 했다.

“자세 최대한 낮춰. 그리고 전속력으로 뛰어라. 알겠지?”

얀은 자세를 한껏 낮춘 채 건너편의 공터를 향해 달렸다.

브룸베어의 MG34가 얀을 향해 총탄을 날려댔다. 총탄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귀에 닿을 때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아아악!!!”

허벅지에 총탄을 맞은 소년병이 쓰러져 괴성을 질렀다.

얀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소년병을 바라보았다.

“젠장, 이 바보가!”

목적지가 코앞이건만 얀은 소년병을 구하기 위해 다시 몸을 돌려 뛰어갔다.

살고 싶은 욕망이 굴뚝 같았지만, 도움을 청하는 누군가의 간절한 외침을 외면할 자신이 그에겐 없었다.

소년은 얀이 자신을 구하러 오자 고통 속에서도 미소를 지었다.

얀이 소년의 손을 잡고 그를 일으키는 순간, 총탄이 날아들었다.

무수히 많은 총탄이었다.

온몸에 바람구멍이 뚫린 두 병사는 햇볕이 작열하는 바르샤바의 길거리에 쓰러졌다.

잠시 후 브룸베어의 무한궤도가 덜그덕 소리를 내며 그들의 육신을 밟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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