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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가는 길 (4) (40/150)

전쟁으로 가는 길 (4)

영국과 프랑스의 무성의한 태도도 문제였지만, 폴란드는 더더욱 답이 없었다.

“저 좆같은 빨갱이들을 신성한 우리 영토 안으로 들여보내라고? 좆이나 까라고 해.”

“차라리 개돼지랑 같은 사는 게 낫지!”

영국과 프랑스, 심지어 독일보다도 반소감정이 높았던 폴란드는 소련이 제안한 군사동맹을 단호히 거절했다.

폴란드가 어떤 나라인가?

수백 년간 러시아의 통치 하에 있다가 20여 년 전에 겨우 독립을 쟁취한 국가가 아니던가.

특히 소련은 이제 막 독립한 폴란드를 다시 자신들의 괴뢰국으로 만들기 위해 침공까지 감행했다.

그러나 전쟁은 폴란드의 승리로 끝났고, 패전한 소련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서부를 폴란드에게 떼주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

때문에 양국은 서로를 향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스탈린 역시 과거 자신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겨줬던 폴란드가 가증스러웠지만, 독일을 막기 위해서라면 폴란드와도 동맹을 체결할 생각이 있었다. 당장은 급한 불부터 꺼야 하니까.

그러나 폴란드는 그럴 생각조차 없었다.

“독일과 손을 잡으면 폴란드는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 걸세. 하지만 소련에 붙으면 영혼을 잃게 되겠지.”

폴란드군 총사령관이자 폴란드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의 말이었다. 폴란드 국민들의 생각도 리츠시미그위와 다르지 않았다.

불과 십몇 년 전에 전쟁을 일으켜 놓고선 이제와서 뻔뻔하게 동맹을 맺자고? 웃기는 소리!

소련은 폴란드에게 영토 통과만이라도 허용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조차 폴란드는 불허했다.

“독일을 친다는 핑계로 들어와서 무슨 짓을 할지 누가 알고?”

“저놈들, 우리를 무슨 바보로 아나?”

영프도 폴란드를 말리지는 못할망정 은근슬쩍 폴란드를 편들면서 소련의 신경을 건드렸다.

사실 영프가 소련과의 협상에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인 이유도 바로 폴란드 때문이었다.

소련과 동맹을 맺었다간 이에 반발한 폴란드가 역으로 독일에 붙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그들은 폴란드가 가진 능력을 과신하고 있기도 했다

비록 땅덩어리는 소련보다 훨씬 작아도 군사력으론 동유럽에서 1, 2위를 다투는 강국이 아니던가.

심지어 소련-폴란드 전쟁에서는 수도 바르샤바 코앞까지 밀리고서도 끝내 승리를 쟁취하여 체급이 몇 배나 큰 소련으로부터 영토까지 뜯어냈고.

소련의 도움이 없어도 폴란드는 충분히 독일의 발을 묶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고말고.

마지막으로 이탈리아까지 영프를 따라 폴란드를 지지함으로써 소련은 혼자 설레발치다가 망신만 당한 꼴이 되었다.

스탈린이 극도로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빌어먹을 제국주의자 놈들. 역시 그놈들은 우리를 가지고 놀기만 할 뿐 애초에 대화를 할 생각 자체가 없었어.”

“소, 송구합니다, 서기장 동지······.”

몰로토프는 자신의 잘못인 양 연신 고개를 숙이며 벌벌 떨었다.

스탈린은 그런 몰로토프를 동정 반 경멸 반의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 돼지 같은 놈들과 손을 잡느니, 차라리 우리끼리 독일과 싸우는 게 낫겠네. 안 그런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이 나라에는 공산주의의 가치를 열렬하게 따르는 인민들이 있습니다!”

스탈린의 심복이자 소련 비밀경찰 조직 NKVD의 우두머리 라브렌티 베리야는 스탈린의 말에 열심히 맞장구를 치며 언젠가 영국과 프랑스도 제대로 손을 봐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의 또 다른 심복들인 보로실로프와 니키타 흐루쇼프는 그러 베리야를 못마땅한 눈으로 흘겨봤지만, 스탈린 앞에서는 베리야의 말에 동의하는 척을 했다.

지금은 스탈린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 게 중요하니까.

하지만 서방과의 협상 파토로 눈이 뒤집힌 스탈린에게 먼저 접근해온 나라는 다름 아닌 독일이었다.

***

1939년 8월 2일

독일 베를린 신 총통관저

“빨갱이 놈들과 협상하자니, 외무장관은 그게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는 거요?”

스탈린과 만나 협상하자고 제안한 리벤트로프에게 괴링이 비꼬는 말투로 비아냥거렸다.

힘러와 괴벨스도 가당찮은 말을 들은 듯 어이없어했다.

러시아를 동맹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예로부터 괜찮은 선택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프로이센이 그랬고, 비스마르크도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러시아에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차르가 사라지고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지금의 러시아라면 얘기가 다르다.

나치당과 오랫동안 격렬하게 싸워왔고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후 제일 먼저 박살 낸 대상이 바로 공산당인데, 소련이 과연 독일의 제안을 듣기나 할까? 침이나 뱉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그러나 리벤트로프는 괴링의 비아냥쯤은 예상했다는 듯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했다.

“안 될 거 뭐 있소? 폴란드와의 협상이 불가능하다고 판명된 지금, 우리가 협상할 대상이 소련 말고 더 있소?”

나치당 내 경쟁자들과 군부로부터 술장사꾼이라 비웃음 받던 리벤트로프는 나르시즘과 허세 가득한 언행 때문에 역사가들로부터도 저평가되는 면이 없지 않았다.

나 역시 역사가들의 평에 일부분은 동의한다.

눈치도 빠르고 업무능력도 뛰어난데다 담력도 크지만, 남들 앞에서 적당히 연기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단 말이지. 그놈의 허세랑 자만심만 좀 숨겨도 적이 반으로 줄어들 텐데.

그러나 리벤트로프에겐 남들에게 없는 능력이 하나 있었다.

다른 이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사항에서도 일말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능력.

모두가 불가능하리라고 여겼던 소련과의 협상도 리벤트로프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걸 또 성사시켰고.

이런 걸 보면 리벤트로프는 결코 머리가 나쁜 친구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지.

“나도 리벤트로프의 말에 찬성하네.”

“역시 총통 각······ 예에?”

당연히 내가 자신을 지지할 것이라 생각했던 괴링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왜들 그러나? 내가 못할 말이라도 한 것처럼.”

“아, 아니 총통 각하, 빨갱이들이 우리가 하는 말을 귓등으로나마 듣겠습니까?”

“물론 옛날이었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닐세. 영프와의 협상이 어떤 꼴이 났는지 자네도 들어서 알지 않나.”

역사대로 소련과 영프의 협상은 아무 결론도 내지 못한 채 허무하게 종결되었다.

스탈린은 협상에 대충 임했던 영프가 자신에게 모욕감을 줬다고 생각해서 분노했고 그 틈을 파고든 게 나치 독일이었다.

“지금 우리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폴란드야. 눈앞의 적들과 싸우기 위해선, 빨갱이들과도 힘을 합쳐야 해. 러시아인들도 폴란드라면 이를 벅벅 갈고 있으니, 우리가 하는 말을 무시하지는 않을 걸세.

자네들은 설마 빨갱이들과 협상하기 싫다고 이들 세 국가를 동시에 상대하자는 헛소리 따윈 하지 않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단지 가능성이 낫다고 볼 뿐······.”

어쭙잖게 변명하는 괴링을 뒤로 하고 나는 리벤트로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리벤트로프.”

“예.”

“소련에 전하게. 우리 독일은 귀국과 협상할 생각이 있다고 말이야. 이 안건에 관해서는 철저히 자네의 판단에 맡기겠네.”

“감사합니다, 총통 각하.”

***

리벤트로프의 제안을 소련은 즉시 수락했다.

8월 19일.

독소 양국은 무역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모스크바에서 정상회담을 가지자는 사안에 합의했다.

8월 23일.

히틀러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리벤트로프가 독일 사절단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모스크바 공항은 소련에서 볼 수 없으리라 여겨졌던 하켄크로이츠 깃발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몰로토프가 직접 마중을 나와 리벤트로프를 영접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리벤트로프 장관.”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몰로토프 장관.”

둘은 공항에서 점심을 먹은 뒤 크렘린으로 향했다.

크렘린 궁에 들어서자, 스탈린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걸어 나와 사절단을 환대했다.

좌우로 배치된 소련 군악대는 나치당 공식 당가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를 연주했다. 이 역시 소련에서는 들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노래였다.

“환영하오, 리벤트로프 장관. 내가 스탈린이오.”

“서기장 각하를 직접 만나 뵙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우린 지금까지 서로를 향해 잘도 욕을 퍼부어댔지요. 그렇지 않소?”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말에는 뼈가 있었다. 그러나 리벤트로프도 이 방면에서 도가 튼 인물.

스탈린의 농담 아닌 농담에 그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안심하십시오. 이제부터는 아닐 겁니다.”

“하하하하하!!!”

스탈린은 리벤트로프의 말이 마음에 든 듯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곤 그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회담장으로 안내했다.

“과연, 그 히틀러 총통이 신뢰하는 사람답구려. 자, 얼른 안으로 들어갑시다!”

환영식이 끝나기 무섭게 독소 양국은 협상에 돌입했다. 협상 자리에는 스탈린이 직접 동석했다.

“먼저 한 가지 묻겠소. 독일은 우리 소비에트를 위해 어디까지 포기할 수 있소?”

“서기장 각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제게 말씀해주셔야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 그렇지. 솔직하게 말하겠소. 우리는 발트 3국과 핀란드 전체, 그리고 폴란드 동부와 베사라비아(몰도바)를 원하오.”

스탈린의 말을 들은 리벤트로프는 놀란 기색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얼굴에 힘을 줘야 했다.

스탈린의 요구가 생각 이상으로 많아서 놀란 게 아니라, 스탈린이 다음과 같이 요구해올 것이라고 예측한 히틀러의 판단 때문에 놀란 것이었다.

‘스탈린은 틀림없이 폴란드 동부와 베사라비아, 발트 3국, 핀란드를 요구해올 걸세. 어쩌면 발칸반도까지도. 자네는 발칸반도를 제외한 스탈린의 요구를 전부 승낙하게. 그 이상의 사항들에 대해 요구하면 내게 알리고.’

총통의 예상이 맞았군.

리벤트로프는 잠시 고민하는 척 연기를 했다. 섣불리 요구를 승낙했다간 추가로 무언가를 요구해올지 모른다는 판단에서였다.

“음······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지요.”

“호오?”

“대신, 저희 독일도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오.”

“독일이 필요로 하는 물자들을 소련이 지원해주길 원합니다. 여기 독일이 소련에 원하는 물품들의 목록이 있습니다.”

리벤트로프는 자신의 비서 리하르트 슐체로부터 문서를 건네받아 이를 스탈린에게 건넸다.

밀, 보리 등 식량부터 철광석, 니켈, 구리, 텅스텐 등 광물과 석유, 목재까지 다양한 물품들의 목록이 문서에 적혀 있었다.

“좋소. 수락하지.”

스탈린도 독일의 요구를 수락했다.

협상은 오후부터 저녁 늦게까지 이어졌다.

협상 내내 회담장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이따금씩 농담이 오갔다.

8월 24일.

협상이 종료되었다.

앞서 영프와의 협상을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웃으세요, 웃어!”

“하하하하!”

협상이 마무리되고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조약 문서에 서명했다. 서명이 완료된 후, 스탈린은 활짝 웃으며 리벤트로프와 악수했다.

“오늘부터 나도 반공주의자요.”

“저도 공산당에 가입하겠습니다.”

“자, 양국의 영원한 우정을 위해 한 잔 합시다!”

아직 술을 입에 대지 않았는데도 스탈린은 벌써 취한 사람처럼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보로실로프와 샤포시니코프, 몰로토프 등 스탈린의 측근들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독일 대표단과 나란히 섰다.

“평화를 위하여!”

“위하여!”

샴페인을 담은 잔이 허공에서 부딪히고, 이에 맞춰 군악대가 음악을 연주했다.

“히틀러 총통에게 전해주시오. 나는 이 협약을 끝까지 지킬 것이라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잘 전하겠습니다.”

***

“거보게. 내 말이 맞지 않나?”

베르히테스가덴의 별장에서 독소 불가침조약이 성공적으로 체결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나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했다.

“괴링, 이번에는 자네가 틀렸구만. 인정하나?”

“예······.”

괴링은 뚱한 얼굴로 티라미수를 조각내는 데 집중했다.

자신이 하수로 여겼던 리벤트로프가 뜻밖의 성과를 낸 것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살은 빠졌어도 속 좁은 건 여전하구만.

“리벤트로프, 그 친구 성격이 괴팍한 건 알지만 그래도 좀 친하게 지내게. 자네는 훗날 내 뒤를 이어 이 나라를 다스려야 할 사람 아닌가. 그런 사람이 이렇게 속이 좁아서야 원.”

“노력해보겠습니다.”

“괴벨스, 자네도 말일세. 자네도 리벤트로프를 싫어하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 친구 능력만큼은 인정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총통 각하, 이번 일은 그자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우연의 일치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만.”

평소 내 말에 절대복종하던 괴벨스조차 이번에는 좀처럼 내 말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나마 괴링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 리벤트로프와 대화도 여러 번 나누는 등 죽을 때까지 적대적으로 지냈던 것은 아니지만, 히틀러를 따라 자살했던 괴벨스는 그런 것도 없었다. 괴벨스는 업무상의 일로 리벤트로프와 만나는 것조차 최대한 피할 정도로 그를 싫어했다.

“여기 계셨군요, 총통 각하.”

“아, 힘러. 어서 오게.”

사복 차림의 괴링, 괴벨스와 달리 힘러는 여전히 검은 SS 제복 차림이었다.

“총통 각하께 전할 소식이 있습니다.”

“그래? 중요한 소식인가보구만?”

“딱히 중요한 소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중요한 건 아닌데 알고 있어야 한다고? 무슨 소식이길래 그러지?

“레마르크라는 소설가 녀석에 관한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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