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가는 길 (3)
“히틀러, 그놈이 기어코!”
“역시 그놈을 믿는 게 아니었어! 빌어먹을.”
독일이 체코를 합병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비상이 걸렸다.
영독 정상회담에서 히틀러가 약속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안전 보장은 유명무실해졌고 영국과 독일 정상들의 친필서명이 들어간 서약서는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이제 없다.
한때 체코였던 곳은 이제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이라는 새 직함을 달고 독일의 일개 지방으로 편입되었으며, 슬로바키아는 살아남았지만 독일의 괴뢰국 신세다.
체코 합병으로 거하게 뒤통수를 맞은 영국은 독일의 배신에 분노했다.
독일과의 친선을 주장하며 지지자들을 끌어모으던 BUF(British Union of Fascists, 영국 파시스트 연합)의 위세가 한풀 꺾이고 독일을 응징해야 한다는 여론이 급속도로 상승했다.
“예상컨데, 곧 독일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을 거요. 지금이라도 대비를 해야 합니다.”
“맞는 말이오. 군비를 더 늘리고, 사단도 확충해야 하오.”
“그러자면 예산이······.”
“지금 예산이 중요한가? 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데!”
사실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완전히 믿지 않아 영독 정상회담이 끝나기 무섭게 군비를 증강시켰다.
그럴 돈으로 복지에 더 투자하라는 비아냥이 있었지만, 체코 합병으로 독일의 가면이 벗겨지자 군비 증강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쏙 들어갔다.
설상가상으로 4월 1일,
3년을 끌어왔던 스페인 내전이 독일이 지원하는 국민파의 승리로 끝나자 영프의 위기감은 더욱 커졌다.
1차대전의 기억 탓에 전쟁에 극도로 부정적이었던 프랑스 여론도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강경론으로 바뀌었다.
5월.
독일은 폴란드가 차지하고 있는 단치히 회랑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그림자는 모두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유럽에 드리우는 중이었다.
***
예상대로 폴란드는 단치히를 반환하라는 내 요구를 단칼에 거절했다.
나는 폴란드에게 단치히를 양보하면 단치히 회랑의 철로를 30년 동안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권리와 폴란드군의 현대화를 지원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자존심 강한 우리의 폴란드 친구들은 이조차 거절했다.
폴란드군 총사령관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는 내 제안에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쾨니히스베르크를 넘긴다면 그단스크(단치히)를 넘기는 안을 고려해보겠다’라······ 배짱 한번 두둑한 발언이군.
1차대전 패배로 폴란드에게 넘어갔던 단치히를 비롯한 옛 동부 영토들을 되찾아와야 한다는 것은 독일인이라면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이었다.
융커들과 나치당은 물론, 사민당과 공산당조차도 이 문제에선 의견이 일치했다.
체코 합병 전부터 폴란드와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나는 겉으로는 폴란드와의 협상을 지속하는 척을 하며 뒤로는 폴란드 침공 계획 수립을 명령했다.
카이텔과 브라우히치, 라이헤나우는 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밤을 새워가며 침공 계획 수립에 몰두했고, 한 달 뒤 두툼한 보고서로 만들어 내 앞에 대령했다.
백색 작전.
폴란드 침공 계획의 작전명이었다.
백색 작전의 세부 계획은 내가 알던 역사 속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아직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지 않아 폴란드 동부지역 점령 계획까지 잡혀있다는 것만 빼고.
“폴란드를 완전히 굴복시키는데 며칠이 걸릴 것 같소?”
“계획대로라면 한 달 반, 폴란드군이 우리의 생각보다 더 강력하다면 두 달 정도 소요될 것입니다.”
카이텔이 대답했다.
실제 독일군처럼 침공 막바지에 탄약이 바닥나 심장이 쫄깃해지는 사태는 바라지 않았으므로 나는 탄약을 최대한 비축해두라고 군에 지시했다.
토트와 슈페어의 노력 덕분에 탄약 생산은 순조롭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법이다. 늘 대비하는 습관을 가져야지.
“문제는 영국과 프랑스, 소련인데······.”
카이텔은 말꼬리를 흐렸다.
폴란드 따윈 문제 될 거 없다는 듯 자신만만하던 브라우히치와 라이헤나우도 영프소가 언급되자 표정이 굳어졌다.
폴란드 침공 직전 독일군이 가장 우려했던 것이 바로 영프소 3국의 개입 여부였다(이탈리아는 그 누구도 고려의 대상으로 넣지 않았다).
독일이 폴란드를 치는 사이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서부를 친다면 독일군은 이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소련이야 폴란드와 사이가 나쁘니 개입 가능성이 다소 떨어진다고 해도, 영국과 프랑스는 무조건 개입할 게 뻔했다. 실제로도 그랬었고.
영국, 프랑스의 최후통첩이 전해지자 독일 장군들은 물론 히틀러조차 절규했다고 하지.
그만큼 영프의 개입은 독일에게 무조건 피해야 할 문제였다.
그러나 문제는 피해야 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체코슬로바키아 건으로 체면을 구긴 터라 폴란드 문제에서도 물러섰다간 자존심이 바닥을 뚫고 맨틀까지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오, 그간 영프와 동맹을 맺어왔던 국가들 전체가 등을 돌리고 독일과 손을 잡게 만드는 최악의 사태를 야기할 수 있었기에 영프는 폴란드 문제에 대해서 무척 단호하게 나왔다.
지난 주데텐란트에서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던 그 영프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영프의 개입은 피할 수가 없다. 하지만 소련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영국과 프랑스는 나도 어떻게 할 수 없소. 대신 소련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요.”
“소련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니, 그건 무슨 뜻입니까?”
브라우히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이텔과 라이헤나우도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해 눈만 깜빡거렸다.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요.”
***
비록 실제 역사보다 조금 늦어졌지만, 독일이 폴란드를 상대로 단치히를 요구하기 시작하자 소련도 비상이 걸렸다.
반공을 내세운 독일과 공산주의 국가인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관계.
폴란드와의 사이도 끝내주게 좋지 않은 소련이지만, 스탈린은 독일이 폴란드를 거쳐 소련을 침공하지는 않을까 크게 우려했다.
비록 폴란드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폴란드보다 훨씬 위협적인 독일의 침공을 막으려면 폴란드의 안보가 중요하다고 여긴 소련은 영프에게 접촉을 시도했다.
영국, 프랑스, 폴란드, 소련 4개국이 독일에 대항하여 동맹을 체결하자고.
정작 누구보다 절박해야 할 입장인 영프와 폴란드는 소련의 예상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소련이 동맹을 제안해왔다고?”
“그 빨갱이 놈들이?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군.”
독일만큼은 아니지만, 영국과 프랑스도 공산주의라면 학을 떼는 국가들.
세계의 절반가량을 식민지로 삼은 두 식민제국과 혁명을 부르짖으며 제국주의, 자본주의 박멸을 주장하는 소련은 독일의 부상 전까지 서로를 적으로 인식해왔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탈린도 제국주의자들과 손을 잡는 것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소련 단독으로 독일과 전쟁을 벌이기는 승산이 낮다고 판단했기에 어쩔 수 없이 영프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아무리 돈에 환장하는 제국주의자들이라도 공공의 적, 독일 앞에서는 서로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쯤은 알 것이다.
영프가 서쪽에서, 소련이 폴란드를 도와 동쪽에서 압박한다면 천하의 히틀러조차 함부로 날뛰지 못하리라.
그래야 했는데······.
***
“서기장 동지, 영국으로부터 답장이 도착했습니다.”
“이제사?”
스탈린은 어이가 없는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독일에 대항하여 군사동맹을 맺자고 제안을 한 지 6주가 지나서야 답장을 보내오다니. 늦어도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심지어 답장도 가관이었다.
군사동맹은 모르겠고, 일단 예비회담을 열어서 의논해보자니. 스탈린은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태평한 놈들.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데 느긋하게 회의나 하자고? 제국주의자 놈들은 죄다 이 모양인가?”
“크흠, 그래도 서기장 동지, 일단은 답장이 왔으니 아주 나쁘게만은 보시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주미 소련대사로 좌천된 막심 리트비노프를 대신해 외무인민위원이 된 바쳬슬라프 몰로토프가 말했다.
그는 스탈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단어 선택에 각별한 주의를 쓰며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후, 좋아. 저 거만한 놈들을 우리가 이해해야지. 별 수 있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서기장 동지. 제국주의자들은 탐욕에 눈이 멀어 예의라곤 모르는 놈들입죠.”
자신의 마음에 들기 위해 열심히 딸랑거리는 몰로토프를 반쯤 혐오스러운 눈으로 흘겨보던 스탈린은 고개를 저으며 책상에서 일어났다.
스트레스가 너무 쌓여서 보드카와 꼬냑으로 기분을 좀 풀어야 될 듯싶었다.
“영국에게 전해. 대신 회담장소는 우리가 정하겠다고.”
“알겠습니다.”
스탈린은 영프소 3국의 정상회담 장소로 자국의 수도 모스크바를 골랐다. 의외로 영국과 프랑스도 회담 장소가 모스크바라는 사항에 대해선 동의했다.
소련은 영프가 생각을 아예 안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며 조금은 안도했지만, 안도는 곧 분노로 바뀌었다.
“뭐야, 이놈들? 지금 장난하는 건가?”
“허! 이거 참······.”
모스크바에서 회담을 열자는 소련의 제안을 수락하고 한 달이 지난 뒤 소련에 도착한 영프 협상단은 곧바로 모스크바로 가는 대신 하루종일 레닌그라드에 머물렀다.
“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겨울궁전이군요.”
“듣던 대로 으리으리합니다, 그려.”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했는데, 과연 장관이군.”
하루를 꼬박 관광으로 보낸 영프 협상단은 8월 12일이 되어서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스탈린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지만, 끝까지 분노를 삼켰다.
그는 협상단장에 자신의 절친이자 소련 국방장관을 맡고 있는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를 임명하고 그외 협상단원으로 소련 육군참모총장 보리스 샤포시니코프 원수 등 쟁쟁한 인물들을 임명했다.
그만큼 소련은 이번 협상에 매우 진지하게 임하고 있었다.
허나, 이번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의 기대를 처참하게 무너뜨렸다.
“독일과의 전쟁이 발발할 시, 소비에트 연방은 육군 120개 사단과 화포 5천 문, 전차 9천 대, 항공기 5천 대를 투입할 수 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어느 정도의 병력을 투입할 수 있습니까?”
소련 협상단장 보로실로프의 말에 프랑스 협상단장 조제프 두망 육군 대장이 대답했다.
“프랑스는 110개 사단과 전차 4천 대를 투입할 수 있습니다.”
“흐음.”
붉은 군대보다 적은 수지만, 이 또한 상당한 숫자.
특히 세계 최강 육군이라 자부하는 프랑스군이니 질적인 면까지 고려하면 능히 독일군과 호각을 다툴 수 있으리라.
“그럼 영국은?”
“그게······.”
자신있게 대답한 두망과 달리, 영국 협상단장 레지널드 드락스 해군 소장은 무언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말꼬리를 흐렸다.
“대영제국은 16개 사단을 파병할 수 있습니다.”
“······토, 통역이 잘못된 거 아닌가?”
보로실로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처음 드락스의 말을 들었을 때는 통역이 잘못된 줄 알았다.
하지만 통역관인 드락스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통역해서 보로실로프에게 들려주었다.
그 영국이니 160개 사단 정도는 나올 줄 알았는데 고작 16개 사단이라고? 상식적으로 16개 사단이 말이 되나? 세계 최강대국인 대영제국이?
대전쟁 당시 영국은 80개 사단을 유럽에 파병했다. 그런데 수가 더 늘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줄어들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아니, 그 대영제국이 고작 16개 사단밖에 파병할 수 없다고요? 지금 저랑 장난하자는 겁니까?”
“보로실로프 원수, 민망한 일이지만 장난이 아닙니다. 정말로 대영제국은 16개 사단밖에 파병할 수 없습니다. 대공황으로 경제가 나빠지면서 군비가 대폭 삭감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육군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죠.
해군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아직 육군은 재편성이 한창이라 그나마 쥐어짠 게 16개입니다. 이마저도 당장 투입이 가능한 사단은 4개뿐이고요.”
갈수록 가관이었다.
16개 사단이라는 말도 황당한데, 당장 투입할 수 있는 사단이 그중에서 겨우 4개라니.
보로실로프는 물론 통역관조차 어처구니없는 영국 협상단의 말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보로실로프는 옆자리에 앉은 샤포시니코프와 눈을 마주쳤다. 보로실로프의 눈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거 계속해야 하나?’
‘그래도 아쉬운 것은 우리니 일단 계속하죠.’
‘그럴까?’
“아, 깜빡 잊고 말하지 않은 게 하나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두망 장군.”
차를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키던 보로실로프에게 또다시 묵직한 한방이 가해졌다.
“프랑스는 병력을 마지노선 밖으로 내보낼 계획이 없습니다. 이 점은 유의해주십시오.”
“······.”
프랑스가 독일과의 국경지대에 건설한 마지노선 안에서만 놀겠다는 말은 사실상 독일 본토를 공격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즉, 자기들은 편하게 앉아서 방어만 할 테니 소련이 독일과 먼저 싸우고 있으라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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