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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환장의 시대 (1) (30/150)

대환장의 시대 (1)

1937년 4월 13일.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 합병을 선언했다.

셀라시에가 이끄는 에티오피아 정부는 외국으로 망명했고 주에티오피아 군사고문단 또한 독일로 귀환했다.

5월 12일에는 장제스가 제6차 초공작전의 완료를 선언했다.

대장정이라는 이름 한번 거창한 똥꼬쇼로 겨우 목숨을 보전했던 중국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박멸’되었다.

공산군은 국민혁명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지만, 결과를 바꾸지 못했다.

공산당 우두머리인 마오쩌둥과 그의 수하들의 행방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전투 도중 마오쩌둥과 공산당 수뇌부가 있는 건물이 국민혁명군의 포격으로 날아가는 바람에 그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하는데, 장제스는 그들이 죽었다고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인류를 위해선 반드시 그래야 하는데.

같은 날 영국에서는 퇴위한 형을 대신해 영국 국왕이 된 조지 6세의 대관식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다.

나는 독일 총통의 이름으로 조지 6세에게 축하 전보를 보냈고, 열흘 뒤에 답장을 받았다.

축하인사를 보내서 고맙다는 말을 최대한 길게 써놓은 수준이지만, 불만은 없었다.

내가 보낸 축하전보도 똑같거든.

열흘 뒤, 소련에서는 대숙청이 시작되었다.

대숙청.

듣기만 해도 담배 파이프를 물고 데스노트에 희생자들 이름을 끄적거리는 스탈린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

대숙청으로 인해 소련에 남아있던 트로츠키 추종 세력과 스탈린에 반대한 공산주의자들은 완전히 몰살당하고, 진정한 스탈린 1인 독재체제가 완성된다.

대숙청은 스탈린의 대표적인 악행 중 하나로 알려져 있지만, 시간이 흐르자 새로운 시각도 나타났다.

스탈린의 무분별한 숙청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도 그 덕분에 소련 일대에서 부정부패와 관료주의가 근절되고 구식 전술, 전략만 고집하던 군부 고위층도 제거되어 결과적으론 소련군이 발전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이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

대숙청 이전까지 소련 내 당원들의 부정부패와 근무 태만은 스탈린이 몇 번이나 우려와 분노를 표출할 정도였고 군부의 상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를 단속해야 할 경찰과 헌병들조차 짝짜꿍이 맞아 함께 비리를 저지르고 다녔을 만큼 소련의 비리 문제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대숙청으로 비리를 저지르던 부패 관료들과 군 고위층이 단번에 날아가면서 부정부패가 줄어들고 행정체계 또한 재정비되었으며 소련군 수뇌부의 전술과 전략 또한 변화하는 계기가 된 것은 맞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스탈린의 악행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스탈린 추종자들이 미는 주장이란 점을 간과하면 안 된다.

홀로코스트는 히틀러의 정권 장악 및 국민 단결을 위해서 필요악이었다는 네오나치들의 정신 나간 주장처럼 말이다.

대숙청으로 비리를 저지르던 부패 관료들이 대거 숙청된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그에 못지않게 일반적인 당원들과 관료들도 많이 처형당해서 그렇지.

머리가 굳은,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월급만 받아먹으면서 자리만 지키기 급급한 무능한 똥별들이 제거되어 소련군이 질적으로 성장했다는 말도 잘만 살펴보면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련군의 현대화를 5년은 늦췄다고 평가받는 똥별 중의 똥별이었던 그리고리 쿨리크가 승승장구한 반면, 소련군에서도 손꼽히는 명장이었던 미하일 투하체프스키가 고문을 받은 뒤 처형당하고 훗날 독소전쟁에서 대활약한 명장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도 무자비한 고문 끝에 반병신이 되어 굴라그로 보내진 일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스탈린의 무분별한 대숙청은 소련군의 질적 향상은커녕 엄청난 재앙을 초래했다.

장교진이 갈려 나간 소련군은 겨울전쟁에서 어마어마한 추태를 보이며 졸전을 거듭했고, 1년 뒤 벌여진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도 독일군에게 참패를 당했다.

그리고 숙청 대상자의 가족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안면이 있었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무고한 사람들은?

소련 고위층과는 거리가 먼,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중앙아시아인, 카프카스인, 고려인 등 소련 내 소수민족들은 또 어떻고?

일개 노동자, 회사원, 농부, 학생에 불과했던 이들은 대체 무슨 잘못이 있어서 죽었단 말인가?

따라서 대숙청은 소련의 현대화를 위해선 반드시 필요했던, 결과적으론 소련 사회에 이득이었던 과정이라는 주장은 헛소리라고 보면 된다.

나도 모르게 말이 길어졌군.

아무튼 군부 숙청의 이유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독일의 공작에 스탈린이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라는 설과 군부를 숙청하여 권한 강화를 노린 NKVD가 스탈린을 부추겨서 그랬다는 설, 마지막으로 독일의 공작임을 눈치챘는데도 이를 빌미로 숙청을 자행하려던 스탈린의 계략이란 설이 있다.

무엇이 대숙청의 직접적인 이유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확실한 것은 독일이 대숙청에 어느 정도 관여했다는 것은 사실이라는 점이다.

어째서 그걸 아냐고?

내가 직접 봤거든.

***

“어떻습니까, 총통 각하?”

“으음.”

하이드리히와 카나리스는 부동자세로 서서 내 판단을 기다렸다.

계획서 두께가 두께인지라 다 읽는 데 시간이 다소 걸렸다.

계획서를 내려놓은 나는 둘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SD 국장 하이드리히와 그의 전직 상관이었던 아프베어 국장 카나리스와 서로 경쟁하는 사이였지만, 정작 사석에서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고 들었다.

경쟁만 한 게 아니라 협력해야 할 때는 협력하기도 했고.

어디까지나 카나리스가 친나치파였을 때까지의 일이지만.

1938년부터 반나치로 전향한 카나리스는 영국에 독일의 각종 비밀정보들을 넘기기 시작했고, 눈치 백단이었던 하이드리히는 카나리스를 은밀히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은 1937년. 카나리스가 여전히 나치를 지지하던 시기다(내가 알기론).

그렇기에 둘이 서로 협력해서 계획서도 함께 낼 수 있는 것이겠지.

내 대답은 OK였다.

“좋소, 허가하지.”

“감사합니다.”

빨갱이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게 만드는 것보다 즐겁고 보람찬 일도 없지. 그렇고말고.

내 허가가 떨어지자 아프베어와 SD는 즉시 공작에 착수했다.

일부러 소련에 정보를 흘려 NKVD가 이를 넙죽 주워 먹게 만들고 NKVD의 보고서가 스탈린의 책상에 오르게 만든다.

보고서를 받아든 스탈린이 도장을 쾅 찍으면 끝!

어때요, 참 쉽죠?

대숙청은 내가 알던 과정대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대숙청 첫날에 투하체프스키가 나치 독일의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고 로코소프스키가 뒤를 따랐다.

조금 나중의 일이긴 하지만, 소련군 원수이자 스탈린과도 절친한 사이였던 알렉산드르 예고로프도 NKVD에 체포되어 모든 직위를 박탈당했다.

1939년에는 투하체프스키 처형에 관여했던 바실리 블류헤르조차 숙청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소련에서 숙청의 피바람이 부는 동안, 7월 7일 극동에서는 루거우차오 사건이 일어났다.

어둠의 독립운동가 무타구치 렌야가 본인의 출세를 위해 일으킨 자작극.

세간의 인식과 달리 루거우차오 사건은 중국 침략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일본 정부와 군부의 계략이 아닌, 일개 대좌가 독단적으로 일으킨 사소한 교전이었지만 이는 곧 중일 양국의 대립으로 이어졌고 끝내 일본은 중국을 전면적으로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태평양 전쟁의 시발점이자 참혹함과 야만성으로 따지자면 독소전쟁에 버금가는 중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

“일본군이 베이징(베이핑)과 텐진을 점령했습니다.”

“만주에 주둔 중이던 관동군도 일제히 국경을 넘어 남진 중이라고 합니다.”

“중국 해군은 사실상 전멸한 상태입니다. 장제스 정부는 아예 해군을 포기했는지 남은 병력을 모두 육군에 통합시켰답니다.”

일본군은 국민혁명군을 마구 밀어붙이며 전선 곳곳에서 연승을 이어나갔다.

초공작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민혁명군은 일본군을 상대할 여력이 없었다.

초공작전 자체는 국민당의 승리로 끝나긴 했지만, 병력과 물자의 소모가 만만치 않아 회복에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예상되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일본군이 쳐들어왔으니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었다.

제6차 초공작전이 진행되지 않은 본래 역사에서도 일본군에게 밀렸는데 오죽할까.

중국은 국제연맹에 일본을 제소하고 영국에 중재를 요청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국제연맹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터라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고 영국은 중재 자체에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먼 극동에서 일어난 분쟁보다 코앞에서 터진 스페인 내전에 더 관심이 있었는 데다, 중국에서 자신들의 이권이 침해당하지 않는 한 일본과 쓸데없는 마찰은 피하고 싶었다.

영국이 별 도움이 안 되자 장제스는 미국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도 영국의 그것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미국의 재산과 이권이 침해당하지 않는 한, 분쟁에 개입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것.

영국과 미국의 연이은 거절에 기고만장해진 일본은 더더욱 날뛰었다.

9월 20일에는 수도 난징이 일본군의 공습을 받았다.

영국과 프랑스, 미국이 일본에게 항의했지만 일본은 무시로 일관했다.

그제야 영국이 다시 중재에 나섰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절박해진 중국은 독일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중일 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 중인 독일이라면, 일본도 협상에 응하지 않겠냐는 판단에서였다.

중일 간의 분쟁에 독일 내부도 의견이 서로 갈린 상태였다.

중국에 있는 팔켄하우젠과 크리벨은 중국을 도와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대다수의 의견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힘러 이 새끼는 이참에 중국과 손절하고 일본과 더욱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의견을 내 나를 빡치게 만들었다.

하여간 이놈은 툭하면 사람 속을 뒤집어놓는다니까. 며칠 전에는 고대 아리아인 역사를 연구한답시고 예산이 필요하다면서 징징거리더니.

한 대 쥐어팰 수도 없고 진짜.

이미 심정적으로는 중국을 응원하는 중이지만, 그렇다고 일본과 척을 지는 일도 피하고 싶은 게 내 본심이었다.

언젠가 일본을 손절할지언정 지금은 아니었다.

독일에는 아직도 일본 해군 관계자들이 군함 건조 작업을 돕고 있었다.

어뢰는 또 어떻고. 일본과 사이가 틀어지면 일본은 기술자들을 당장 철수시킬 것이고, 크릭스마리네의 재건 또한 늦춰질 터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레더 등 해군 장성들도 힘러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었다. 사람 속도 모르고 말이지.

“중국과 일본 둘 다 독일에 중요한 교역국들이오. 그러니 어느 한쪽의 편만 드는 것은 다소 성급한 판단이라 생각되오만.”

놀랍게도 괴링이 한 말이다.

모르핀 중독에 빠지지 않아 지능이 퇴화하지 않은 덕분인지, 여태껏 괴링은 매우 상식적인 언행을 보여주고 있었다.

일본을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힘러와 레더는 그런 괴링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쳐다봤지만.

“괴링 말이 맞아. 중일 모두 우리 독일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지. 중국을 편들었다간 크릭스마리네 재건에 차질이 생길 테고, 그렇다고 일본을 편들었다간 중국으로부터 들여오는 광물이 끊기겠지.”

내 말에 힘러와 레더는 입을 다물었다. 이 중요한 것을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으휴.

“리벤트로프, 자네 생각은 어떤가?”

리벤트로프는 진작에 내 의중을 눈치챈 것인지 여태껏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발언의 기회가 주어지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저 역시 총통 각하와 같은 의견입니다. 언젠가 두 나라 중 하나를 택해야 할 때가 오겠지만, 당장은 현재의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독일에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역시 외무장관이야. 내 생각을 정확하게 읽었군.”

그냥 칭찬 한마디 건넸을 뿐인데 다들 리벤트로프를 바라보는 시선이 질시로 바뀌었다.

심지어 괴링까지. 하여간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들이라니까. 좀 친하게 지내면 안 되냐?

“그렇다고 중국의 중재 요청을 마냥 거절할 수 없으니, 일단은 중재에 나서는 게 합리적일 듯합니다. 일본에겐 우리가 중국 편을 든다고 생각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말입니다.”

“좋아, 아주 좋아. 자네가 도고 대사와 만나 얘기를 나눠보도록 하게. 이 안건은 믿고 맡기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총통 각하! 반드시 각하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칭찬 몇 마디 해준 것뿐인데 리벤트로프의 광대는 하늘로 승천할 기세였다.

나머지 인간들을 그를 더더욱 죽일 듯이 노려봤고.

니들은 질리지도 않냐? 인생 참 피곤하게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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